173화. 장난질
9월에 진입하며 순위에 대한 미련이 아직까지 남은 팀들은 발에 불똥이 떨어진 느낌을 받기 시작했다.
아슬아슬하게 위에 있는 팀은 아, 여기서 삐끗하면 떨어질 수도 있겠는데?
간당간당하게 아래에 있는 팀은 아, 여기서 잘못하면 못 올라갈 수도 있겠는데?
이런 상황에서 순위에 대해 크게 파고들지 않는 팀은 매우 큰 이점을 보게 된다.
다행인 건지, 아니면 정말 노력의 산물이라 치부해도 되는지는 모르겠다만 일단 원하 챌린저스는 팀 순위에 대해 큰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는 팀이 됐다.
“어…이렇게요?”
“그건 너무 꺾었다. 꺾는 게 틀린 건 아닌데 과해. 그러면 체인지업이 아니라 싱커 계열이 돼버리잖아. 체인지업을 던지는 의미가 없어진다고.”
“어, 네. 한 번 해볼게요. 체인지업!”
“헤이! 첸쟙!”
펑!
“나쁘…진 않은데. 이걸 변화구라 생각하지 말고, 그냥 여기, 중지랑 약지로 직구 던진다고 생각하고 던져봐.”
“아…네. 하나 더!”
“오케, 첸쟙!”
펑!
“괜찮네. 거기서 좀 더, 공을 때리는 게 아니라 아예 밀어 던지는 느낌으로 던져버리면 더 괜찮을 거야.”
“올….”
2위 상수 타이거즈와의 맞대결을 스윕해버리며 벌어들인 게임차를 무려 다섯 게임차. 그 기조는 이후로도 계속되고 있다.
승승승승승, 어쩌다 한 번 졌다가 다시 승승승…….
그 과정에서 상수가 한 걸음 삐끗하며 게임차는 더욱 벌어져,
“오늘 써먹어보려고?”
“한 번 써봐야죠. 이럴 때 써봐야지, 언제 써봐.”
“하긴…코시 가서 바로 투입할 수도 없으니.”
혁준이가 손에 잘 맞지도 않는 체인지업을 바로 인게임에서 써먹을 여유까지 생겼다.
구종의 다양성?
투수를 평가함에 있어 확인할 수 있는 여러 요소들 중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는 세 가지 요소 중 한 가지다.
언급하지 않은 두 가지로는 공이 얼마나 빠른가, 제구가 얼마나 좋은가, 이 녀석들이 아직 남아있다.
근데 ‘투수’는 제구 좋은 빠른 직구만 있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거든.
극단적인 비유로, 직구 일변도인 투수는 0-2 카운트에 몰려도 직구‘만’ 보면 된다. 하지만 변화구가 많은 투수는 모든 변화구를 생각해야한다.
아니지, 좋은 직구에 고등학교 레벨인 커브 하나만 갖고 있다 해도 그 커브 또한 생각을 안 할 수가 없다.
혹시 이번에 들어오면 어떡하지? 혹시 이번에 제대로 때리면 어떡하지? 혹시 이번에 타이밍 어긋나면 어떡하지?
혁준이는 직구와 슬라이더 외에 ‘커브’라는 완급조절용 구질 하나를 나름대로 잘 써먹으며 투피치라는 오명을 어느 정도 벗어던진 상태다.
하지만 정말 어지간한 수싸움 능력, 혹은 제구력이 동반되지 않는 선발투수라면 쓰리피치도 아직까진 불안하다.
그래서 혁준이가 노력하는 게,
“실전이 가장 좋은 연습이라고, 일단 최대한 빨리 써봐야죠.”
체인지업.
“틀린 말은 아닌데…그렇다고 맞지는 마라.”
“그래도 맞아봐야 뭐가 잘못됐는지 알 수 있는 거 아니에요?”
“그건 이류야.”
“…그럼 일류는 뭔데요.”
“안 맞고 뭐가 좋은지 아는 거. 참고로 맞고도 모르는 게 삼류. 잡아놓고도 어떻게 잡았는지 모르는 건 그냥 폐급.”
“반대 아니에요? 어떻게 잡았는지는 몰라도 잡는 게 못 잡은 거보단 낫지.”
“보통 그런 녀석들이 좋-다고 던져대다가 중요한 순간에 뻥뻥 처맞거든. 반면에 왜 맞았는지도 모르는 녀석들은 조심성이라는 게 생겨서 알아서 사리게 돼.”
“아….”
“생각 잘하고 던져라. 괜히 뚜까뚜까 처맞다가 나중에 아씨, 이거 괜히 연습했네 싶어서 포기하지 말고.”
“그럼요. 내가 체인지업 배우는 이유가 뭔데, 잘던지고 싶어서 연습하는 거잖아요?”
잘던지는 놈이 ‘더’ 잘던지고 싶어서 연습을 한다.
혁준이는 이 어마무시한 논제를 충분히 잘 지키는 녀석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잘 지켜왔고.
말은 이렇게 해도, 내가 아는 혁준이라면…….
퍼엉-!
“스윙, 아웃!”
이렇게 잘만 써먹을 거라 생각했다.
수비의 시작인 1번타자 조홍규를 공 세 개로 깔끔하게 잡아낸 혁준이는 해맑게 웃으며 라운딩하는 내야수들을 지켜봤다.
방긋, 웃는 혁준이의 얼굴에서 벗어나 전광판에 뜬 구속을 확인하면 131km.
앞서 던진 두 개의 공이 각각 154km, 155km였으니,
“잘 던지네.”
몸쪽 직구, 몸쪽 직구, 바깥쪽에서 멀어지는 체인지업으로 대단히 클래식한 볼배합이 아니었나 싶다.
조홍규 이후로 혁준이가 만난 타자는 김성주와 최재원.
연속으로 좌타자가 등장하다보니 아무래도 체인지업은 써먹기 어려웠지만,
퍼엉-!
“스트라잌, 아웃!”
김성주를 투수 앞 땅볼, 그리고 최재원으로부터 또 한 번 삼진을 뺏어내며 1회 말 수비를 끝냈다.
잘하네.
“어때요? 괜찮죠?”
“잘하네. 이제 다음부터 쭉 우타자 나오지 않냐?”
“그쵸.”
이원웅, 배준호, 홍성민, 양진우.
2회 말 시작하자마자 만나는 4번타자부터 무려 네 타자 연속 우타자다.
아마 혁준이는 여기서부터 또 좋다고 체인지업을 던지네 마네로 들떠있겠지.
“조홍규한테는 잘 들어갔냐?”
“괜찮게 들어간 거 같아요. 요렇게, 요러어엏게.”
본인이 투구하는 왼손으로 체인지업의 궤적을 설명했다.
너무 과한 변동을 일으키지도 않고 너무 소심하게 움직이지도 않는 게 아주 좋은 체인지업의 모습을 하고 있다.
괜찮네.
단,
“잘들어가는 건 좋은데, 그렇다고 그것만 주구장창 던지다 힘 들어가진 말고.
“그럼요. 그 정도는 조절하죠.”
“아니. 그게 니가 하고 싶대서 되는 게 아니라니까?”
“에이….”
꾸준히 제 모습을 유지한다는 가정하에.
“말했지, 체인지업은 삼진 잡는 공 아니다.”
아니, 애초에 모든 구종은 삼진 잡으려고 던지는 구종이 아니다.
던져서 아웃을 뺏어내고, 아웃을 세 개 뺏어서 이닝을 종료시키고, 그 이닝을 아홉 개 모아서 경기를 종료시키는 것, 그게 모든 구종들의 존재 가치다.
그 과정의 부산물에 지나지 않는 삼진 따위에 목을 매는 순간,
퍼엉-!
“로볼-.”
원하는 목적은 그 아무것도 달성시킬 수가 없다.
떨렁―
볼넷을 얻어낸 배준호가 배트를 그 자리에 떨어뜨렸다. 그 외 타격장비들도 조신하게 제자리에 내려둔 뒤 털레털레 1루로 뛰어갔다.
자동적으로 1루를 미리 밟고 있던 이원웅도 2루로 안전 진루권을 얻게 되며 노아웃에 주자 1, 2루.
“타임-!”
이닝 시작하자마자 볼넷 두 개를 연속으로 허용해버리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고 판단한 코치님이 이르게 타이밍을 끊었다.
“그러게 좀 적당히 하라니까.”
혁준이랑 부대끼면서 살아온 지가 어언 몇 년.
글러브로 얼굴을 감춘다고 감췄지만 저 당황이 한가득 담긴 눈만큼은 아주 잘 보인다.
“당황했네….”
힘이 들어간 건지, 아니면 갑작스럽게 감각을 까먹은 건지.
코치님이 올라가서 무슨 말을 하실지는 모르겠다만 위기상황이니만큼 이상한 건 나중에 하고 일단 여기선 하던 거 하자, 이런 말이 나오지 않았을까.
아니나 다를까,
퍼엉-!
“스윙, 아웃-.”
다음으로 등장한 6, 7, 8번 세 타자를 모두 삼진으로 처리하며 평화를 되찾아 돌아왔다.
터덜터덜, 덕아웃으로 돌아오는 표정에 착잡함이 가득한 걸 보니 체인지업을 제대로 못 써먹었다는 실망이 크구만.
짝짝짝―
“야야, 신경쓰지 말고. 다음에 또 쓰면 되니까. 아직 이닝 많잖아.”
하여, 혁준이가 돌아오자마자 박수를 치며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다른 투수도 아니고, 혁준이 정도나 되는 투수가 체인지업까지 장착했을 때 발휘할 위력이 너무나도 궁금했거든.
150km 후반대를 때리는 좌완 선발투수가 체인지업까지 장착해서 4구종 투수가 되었을 때, 과연 어떤 모습을 보일…….
“아니, 그게 아니라요.”
“왜?”
“체인지업은 잘 들어갔어요.”
엉?
…지에 대한 궁금함은 잠시 접어두고.
“근데.”
“…안 잡아주던데요?”
“뭘.”
“스트라이크요.”
“무슨 공을.”
“다요.”
사건의 본질을 빠르게 다른 곳으로 옮겼다.
“뭘 어떻게 안 잡아줘?”
“아니, 여기…들어갔는데. 아니아니, 아깐 잡아줬는데. 근데…이번엔 안 잡아주고. 그래서 다음에 어쩌다가 거기 던지면 아, 볼이구나 싶을 때 그건 또 잡아주고 그….”
다소 두서가 없는 말을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이렇다.
처음엔 잡아줬다가도 다음엔 안 잡아주고, 그래놓고 다음엔 또 잡아주고.
“그러면 배준호까지 볼넷 보내고 계속 직구랑 슬라이더 던졌던 건 그래서?”
“네. 로케이션으로 가면 애매하니까 그냥 힘으로 일단 승부보려고 했죠.”
한 마디로 개판이라는 소리다.
“허허….”
또 다른 당사자인 규학이한테도 한 번 이야기를 들어볼까 싶었지만 3회 초, 선두타자로 예정되어있는지라 벌써 저만치 멀어져있다.
“이러면 체인지업이고 자시고, 뭐 하나 제대로 안 될 거 같은데요.”
“그치….”
체인지업은 수싸움에 있어 아주 좋은 수다.
수싸움이란 걸 하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는 바로 제구력이다.
근데 다른 누구도 아니고 투수 본인이 본인의 제구를 믿을 수 없는 상황이 된다.
“오늘 심판이…아.”
다른 누구도 아닌, 판정을 관장하는 타인에 의해서.
“…그분이네.”
“약간 감안은 하고 들어갔는데 오늘은 좀 심하던데요?”
“얼마나 심한데?”
“…이원웅은 볼넷 받고도 그냥 가만히 서 있더라고요.”
“들어온 줄 알고?”
“네.”
차라리 본인이 못해서, 상대가 잘해서 지는 건 정말 어찌할 바가 없는 영역이다.
속성으로 내 실력을 키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갑작스럽게 상대방한테 무슨 디버프 같은 걸 걸어버릴 수도 없는 거니까.
하지만 나도 아니고 상대도 아닌, 우리 사이를 중재해야 하는 누군가가 깽판을 쳐버린다면?
“아, X나 겜 하기 싫게 만드네.”
그 순둥순둥한 혁준이가 이렇게 상욕을 뱉어버리게 만드는 거지.
장난질치는 것 같잖아. 남의 손에 놀아나는 것 같고.
“규학이도 볼넷이다.”
“…저랑 같은 경우인 거 같은데요?”
규학이에게 볼넷을 허용한 윤석호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걸 보니 혁준이가 한 말처럼 상황이 매우 비슷한 것 같다.
들어갔는데 왜 안 잡아주지?
“장난질이 좀 심한데.”
심판은 양 팀에 동등한 판정을 내려야 한다, 라는 건 아주 기본적인 전제사항이다.
어느 팀은 잡아줬는데 어느 팀은 안 잡아줬다? 그건 정말 승부조작급의 장난질이 아니고선 설명이 되질 않으니까.
그렇다면 이 논리는 이렇게 적용할 수도 있지.
우리도 잡아줬다 안 잡아줬다 하고, 상대편도 잡아줬다 안 잡아줬다 하니 동등한 거 아닌가?
“이건 장난질이 아니라 그냥 자질 부족인데요?”
아니. 논리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동등하다는 말은 ‘기본’을 지킨 이후에 쏟아낼 수 있는 말이다.
스트라잌, 아웃!
“엥? 저걸 잡아준다고?”
저렇게 오락가락하는 사람에겐 기본 따위를 논할 자격은 없다.
“진짜로 어디 팀에 건 거 아니야?”
“아냐, 저건 그냥 모지리인 거야.”
거의 발목 높이를 지나가는 공을 방만했다는 죄로 삼진이라는 형벌을 받은 훈이는 어이가 없는지 그냥 ‘허!’ 하고 웃더니 순순히 덕아웃으로 돌아왔다.
덕아웃으로 돌아오는 내내 뭐라뭐라 중얼거리지만 거리가 있는 탓에 들을 순 없지만 숫자 18을 열심히 세고 있는 것만큼은 확신할 수 있다.
“훈이 빡쳤다.”
“아이고.”
“야, 빨리 가서 어린애들 나와 있으라 그래.”
사실 우리 팀에서 제일 무서운 애가 바로 훈이다.
키도 크고, 잘생기고, 성격도 좋고 다 좋은데 약간 빡칠 때마다 애가 회까닥하는 게 있거든.
쾅!
“X발, 눈깔을 안약에 빠뜨리고 왔냐!”
바로 이렇게.
“…난리 났네.”
“제가 훈이형이었어도 저랬을 걸요.”
“훈이였어도, 가 아니라 이미 너도 당했잖아.”
“아, 맞네.”
이후 게임 트랙도 여전히 개판에 가까웠다.
훈이가 한 말처럼 정말로 눈깔을 안약에 빠뜨리고 오신 건지, 명진이는 그냥 가만히 서서 공 네 개를 지켜보곤 고개를 갸웃거리며 1루로 걸어 나갔다.
그리고,
“스트라잌, 아웃!”
“아이! 이게 어떻게 들어와요!”
문제는 다음 타자인 성현이 타석에서 발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