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간질간질
타자의 성향은 기본적으로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능동적으로 공격에 임하는 타자.
수동적으로 투구를 맞이하는 타자.
스윙이 레벨이니 다운이니, 당겨치니 밀어치니, 땅볼이니 뜬공이니, 그런 건 모두 이 다음 얘기다.
그렇다면 투수들의 성향을 크게 두 부류로 나눠본다면 어떨까.
능동적으로 본인의 강점을 어필하는 투수.
수동적으로 타자의 약점을 공략하는 투수.
공이 느리니 빠르니, 오버핸드니 언더핸드니, 왼손이니 오른손이니, 이 또한 모두 이 다음 얘기다.
2번타자, 김!! 성!! 주!!
내가 지금 서있는 곳이 마운드기로서니, 투수의 입장에서 가장 좋은 궁합은 각각 전자와 후자다.
약점이 뻔하면서 생각없이 휘두르는 타자를 상대하는데, 그 약점을 집중적으로 공략할 줄 아는 투수.
이 논리에서 설명되는 ‘약점’이라는 건 여러가지 방면에서 설명될 수 있다.
특정 구종이 될 수도 있고 특정 코스가 될 수도 있으며 특정 구속이 될 수도 있다.
“플레이!”
오늘 노려야 할 약점은 구종. 정확하게는 무브먼트.
로케이션에 대한 불안감이 산재하는 이상 제구에 대한 신뢰는 무너진 상태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
구속 또한 마찬가지, 타자가 빠른 공에 대해 두려움을 갖는 근본적인 이유는 ‘저 빠른 공이 내가 반응하기 어려운 곳에 올까봐’다.
때문에,
펑-!
일단 가볍게 바깥쪽 직구부터 시작해보자.
“볼-.”
강력한 직구로 스트라이크를 잡고 시작하겠다, 그런 의도보단 대체 스트라이크 존이 얼마나 개판일까, 거리재기를 위한 초구.
볼이 될 걸 각오하고 던지긴 했는데, 막상 볼 판정을 받으니 좀 의아함이 느껴지긴 했다.
스치지 않았나?
애써 태연하게 규학이의 반구를 받긴 했는데 표정에서 티가 좀 나긴 했는지,
형, 무슨 문제 있는 건 아니죠?
규학이의 표정이 그리 말하고 있었다.
문제라…….
규학이가 이야기하는 문제라는 건 과연 이 판정에 대한 문제일까, 아니면 151km짜리 직구에 대한 문제일까.
151km?
빠르지. 겁나 빠른 구속인 거 맞지.
근데 150km 후반대를 평범하게 때리던 투수가 초장부터 151km짜리 직구를 던지면 받는 입장에서, 치는 입장에서, 보는 입장에서 의아함을 느끼기도 한다.
쟤 어디 아픈가?
아뇨,
띡-!
겁나 멀쩡한데요.
“파울, 파울-!”
이번에 들어간 공은 147km짜리 싱커. 로케이션으로만 따지면 방금 전 직구보다 조금 더 안쪽에서 흘러나가는 코스.
존에 대한 확신, 혹은 신뢰가 없다는 건 배터리 입장에서만 골치가 아픈 게 아니다.
존이 좀 오락가락하던데, 전에는 안 잡아줬지만 이번엔 잡아주면 어떡하지? 더구나 방금보다 더 안쪽으로 들어왔는데?
방금 거 들어왔어요?
들어왔지.
때문에 타자는 타격에 임하기 전, 심판에게 방금 투구에 대한 좌표 설정을 부탁할 수밖에 없다.
근데 그걸로 좌표 설정이 되겠니.
펑-!
“스트라잌-!”
좌표가 뭔지도 모르는 아저씨인데.
이번에 던진 공은 초구와 같은 직구. 로케이션 또한 초구에 던진 직구와 같다.
초구에 던진 직구와 같다?
“가지가지하네, 진짜.”
초구, 바깥쪽 스치고 들어간 걸로 보이는 직구는 볼 판정을 받았다.
이번 공, 아까랑 똑같은 지점으로 똑같은 직구가 들어가더니 스트라이크 판정을 받았다.
뭐하자는 건지.
이 생각은 타자 또한 다르지 않아,
좀 멀지 않아요?
스쳤어, 스쳤어.
나와 같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겨우 공 세 개로 사람 몇 명을 웃고 울리게 만들 수 있다니, 저 심판도 참 대단한 사람이다.
그리고 타자에겐 미안하지만,
“읍!”
띡―
웃는 건 내가 될 거다.
“피쳐 들어가!”
몸쪽에서 짧게 파고드는 커터성의 슬라이더가 배트 목젖을 때린 뒤 빠르게 1루 라인을 타고 흘러나갔다.
공이 내 왼쪽으로 굴러가는 걸 보자마자 수천, 수만번은 연습했을 1루 커버를 위해 몸이 움직였다.
투구를 끝낸 오른발이 여유부릴 새 없이 땅에 박히고, 있는 힘껏 땅을 밀어내고, 그대로 왼발을 내딛고, 다시 오른발을 내딛고.
이 작업을 몇 번인가 반복하다보니,
“헤이!”
1루 베이스가 눈앞에 들어왔고,
빡!
살짝 먼 거리에서 기성이가 던져준 송구가 내 글러브에 찰진 소리와 함께 박혀들었다.
검정색 글러브 안에 박힌 하얀색 야구공을 1루심에게 보여주자,
“아웃!”
1루심이 주먹을 말아쥐며 아웃을 선언했다.
“후우!”
안도의 한숨과 함께 공을 기성이에게 휙 토스하며 천천히 마운드로 돌아갔다.
베이스 커버가 진짜 힘들거든. 아니, 어렵거든.
어떤 타구가 나오든 투수도 그에 따라 움직임을 보여야 하는 게 상식이긴 하지만 던지고 나서 순간 드는 탈력감에 멍 때려버리는 게 대부분이거든.
이거 때문에 엘리트 시절 놓친 아웃 카운트가 몇 개고, 그 때문에 혼난 게 몇 번인지.
괜히 베이스 커버만 죽어라 시키는 게 아니다.
“후!”
터덜터덜, 짧게 차오른 숨을 뱉어내며 마운드에 도착하자,
3번타자, 최!! 재!! 원!!
다음 타자가 직전 타자와 같은 좌타석에 등장했다.
“후우….”
맞춰잡는 투구.
이번 퀘스트는 경제성을 따지는 투구를 요구하고 있다.
경제성?
경제성 좋지. 좋은데,
띡―
“숏, 숏!”
“마이, 마아아악!!”
경제적인 투구라는 건 이럴 때나 들이밀 수 있는 단어다.
공 하나, 혹은 두 개만으로 잡아냈을 때.
“아웃-.”
뜬공을 잡아낸 뒤 비하인드 토스로 성문이에게 라운딩을 시도하는 명진이를 보며 로진을 만지작거렸다.
아, 답답해.
제구 하나 저당 잡혔다고 이렇게 답답한 투구를 이어가야 하는 게 대단히 답답하게 느껴졌다.
맞춰잡는 투구라는 게 보기엔 참 좋다. 하지만 모든 타자를 공 하나, 혹은 두 개로 잡아낼 게 아니라면 빛 좋은 개살구와 같다.
모든 타자를 그렇게 잡아낼 거란 보장은 어디에 있지? 당장 2번타자 김성주만 해도 맞춰잡았을 때 공 네 개를 던졌는데?
“아, 행님 볼 좋습니다.”
라운딩의 시작과 끝을 겸비한 명진이가 오랜만에 직접 다가와 공을 건네줬다.
따봉을 선사하는 녀석에게 따봉으로 맞받아주자 녀석은 쌍따봉으로 다시 대답한 뒤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몸을 다시 마운드로 옮기니,
4번타자, 이!! 원!! 웅!!
4번타자의 등장을 맞이했다.
“후우…이번엔 좀 편하려나, 아님 어려우려나.”
연속적으로 좌타자 둘을 상대한 뒤 우타자를 맞이하니 이번 퀘스트의 난이도가 상승한 건지 하락한 건지 감이 잡히질 않는다.
알고 싶은 걸 알 수 없을 때, 감히 잡힐만한 게 잡히지 않을 때.
그럴 때 찾아오는 짜증이 한쪽 입꼬리를 무겁게 끌어올렸다.
엄지, 검지.
규학이는 이럴 때 몸쪽 싱커를 던져보면 기분이 나아질 거라 이야기했다.
규학이 말에 수긍하며 던진 싱커는,
띡―
“파울-.”
이원웅이 내민 배트의 안쪽을 때린 뒤 휭 도망가버렸다. 울림방지 고무링까지 끼고 있음에도 오른손 엄지가 꽤나 아픈지,
“타임!”
심판에게 타임까지 부르며 통증을 호소했다.
규학이 말이 맞네. 저런 거 보니까 기분이 참 좋아져. 나도 참 성격 더럽다, 그치?
빠르게 엄지 손가락 부근에 에어 스프레이를 뿌린 뒤 타석에 들어오는 이원웅을 보니 옛날 투수코치님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몸쪽엔 스트라이크 필요없어.
퍼엉-!
“볼!”
이번엔 몸쪽 깊숙하게 직구 하나를 찔러넣었다.
볼이 될 걸 알고 있었다, 라기보단 애초에 마음가짐부터 볼을 던지려 했다.
어느 정도나 빠졌어요?
한 개 정도.
타자의 이런 반응을 위해서.
초구에 몸쪽 싱커에 한 번 큰 통증을 느껴버리니 저도 모르게 소극적인 표정을 짓고 있는 타자가 보였다.
아마 이번 공이 정가운데에 대놓고 꽂히는 공이 아니었다면 존에 들어온다는 걸 알아도 배트를 내지 않았을 것 같다.
타자도 사람이니까. 사람은 통상적으로 아픈 걸 싫어하니까.
그리고 보통 한 번 아파본 사람은 최대한 아프지 않은 방법을 찾기 마련이지.
한가운데에 몰리는 공을 노린다거나, 아니면 치기 만만한 느린 공을 노린다거나.
그렇다면 원하는대로 맞춰줘야겠지. 그리고 거기서 조금 더 비틀어줘야겠지.
검지 손가락으로 모자챙을 한 번 톡 친 뒤 왼쪽 어깨부터 글러브까지 주욱 훑어내렸다.
체인지업을 던지겠다는 신호.
“읍!”
기합까지 넣어서 던진 직구, 처럼 보이는 체인지업은 먼저 스트라이크 존의 정중앙에서 약간 높은 몸쪽으로 치우친 곳으로 날아갔다.
수식하는 단어가 많긴 했지만 딱 잘라서 말하기로,
딱-!
실투와 같은 구역.
“페어!”
탁―
“타자 안 뛴다!”
“형, 여유 많아요! 천천히 해도 돼!”
가운데에서 살짝 높고, 가운데에서 살짝 안쪽 지역부터 출발한 체인지업은 이내 푸욱 꺼져선 결국 또 한 번 몸쪽의 볼이 되었다.
빠른 공에 강한 이원웅이 이번엔 왔구나, 싶어서 휘둘렀지만 라인을 아슬아슬하게 타고 흐르는 타구를 보며 대충대충 1루로 향했다.
빡―
“아웃!”
그럼 뭐, 아웃이지.
띠링-!
[간지럽게]
- 탈삼진을 기록하지 않고 1이닝 무실점하세요. (1/1)
- 보상 - 변화구 +2
제구 - 최상
구위 - 최상
체력 - 중
포심 - 100
커브 – 95+2=97
슬라 - 94+2=96
스플 - 96+2=98
체인 - 95+2=97
싱커 - 94+2=96
특성
해탈 - 어떤 타구, 상황에도 그러려니 합니다.
불편 - 상대하는 타자가 타석에서 투수를 보면 어딘가 불편하게 만듭니다.
편안 - 본인을 보는 이들이 편안함을 느낍니다.
집중 – 집중할 수 있는 대상의 수가 늘어납니다.
승부 - 이기고 싶을 때 포심이 +5 됩니다.
전염 - 본인의 감정이 전염됩니다.
“후우!”
개인적인 기준으로 판단했을 때, 역대급으로 어려웠던 퀘스트를 끝내놓자 마음이 후련해졌다.
아까 잠깐이나마 느꼈던 그 거지 같은 기분이 거짓말인 것처럼,
“예에!”
얼른 덕아웃으로 뛰어가 돌아오는 야수들을 맞아주었다.
찰칵!
셀카 세리머니를 마치고서야 마음이 완전히 풀어져선 히히덕거리며 덕아웃 안으로 들어갔다.
“여어, 방울이.”
“여어, 술주.”
“정신이 나간 거야?”
“미친놈이잖아, 넌.”
“그건 맞지.”
“정신 나갈 것 같네, 진짜.”
자리에 앉은 지 얼마나 됐다고, 승주가 시시덕거리며 옆자리에 앉았다.
“새애끼, 쫌 던지더라?”
그러더니 내 쪽으로 지 오른손을 내민다.
“내가 쫌 던지지.”
짝!
그럼 받아줘야지.
“이야, 우리 빵울이가 찡찡대면서 아 X발, 야구 못 해먹겠어요, 하고 찡찡댔던 게 엊그제 같은데.”
“야이 새끼야, 비겁하게 팩트로 승부하냐?”
“왜, 정정당당하게 선동과 날조로 승부해줄까?”
“당연하지.”
“아이고, 우리 위대하신 김한울 투수님, 드디어 10년만에 우리 원하 챌린저스를 구원해주러 오셨군요!”
“미안하다. 그만해라.”
X발.
“…근데 옛날 얘긴 왜 해, 갑자기.”
“그냥. 신기해서.”
“뭐가.”
“진짜로 너 그렇게 찡찡댔던 게 엊그제 같은데. 새애끼, 언제 이렇게 발랑 까져갖곤 혼자 이렇게 잘나가는 아저씨가 됐는지 몰라.”
이 녀석이랑 같이 부대끼며 산 게 어언 10년 넘게.
그 외 대부분의 팀원들과도 부대끼며 산 게 거의 10년 가까이.
기타 코칭스태프 분들이나 프런트 직원분들과도 부대끼며 산 게 최소 몇 년.
승주 말처럼 나도 모르게 시간이 빠르게 흐르긴 했다.
“우리 승주, 나이 처먹더니 쓸데없이 감정적이 됐네.”
“지는 나이 안 처먹는 것처럼 얘기하네.”
“뭐래, 너보다 더 처먹었거든, 빠른 90 새끼야. 앞으로 형이라 불러라.”
“밥 사주냐?”
“미친놈이.”
“뭐래, 미친놈이.”
영양가라곤 하나도 찾아볼 수가 없는 대화를 나누는 사이, 그게 친구 사이 아닐까.
“시즌 거의 끝나가는데 아직도 평자 0점이네. 니가 사람 새끼냐?”
“사람이지.”
“타자들은 뭐 먹고 살라고 그러냐, 양심없는 새끼.”
“내 덕에 니가 먹고 사는 거야, 이 양심없는 새끼야.”
“맞네.”
“형이라 불러라.”
“밥 사주냐.”
미친놈이.
따악-!
성문이가 우중간에 큼지막한 타구를 보는 중,
“…야.”
승주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왜.”
“올해는 진짜 우승할 수 있을 거 같다.”
“뭔 소리야, 뜬금없이.”
“그냥. 너 보니까 그런 생각이 들어서.”
“…….”
오글거려서?
“…알아, 새끼야.”
아니, 승주의 애잔한 감정이 그대로 느껴져서.
“하자고, 빵울이. 올해가 진짜 기회다.”
승주는 올해가 끝나고 FA가 된다.
지 말로는 수비가 전혀 안 되는, 그렇다고 클래식 스탯이 그렇게 높지도 않은 지 같은 타자를 다른 팀에서 데려갈 리가 있겠냐, 그렇게 얘기한다.
근데 그건 지 생각이고.
영진 씨한테 들은 바로, 올해 트레이드 문의가 가장 많았던 선수 중 한 명이 바로 승주다.
그만큼 눈에 밟히는 선수라는 거지, 이 술쟁이가.
“두 달만 참아봐.”
“웬 두 달.”
“두 달 뒤면 대충…한국시리즈 끝나있지 않겠나.”
“아, 날짜상으론 그렇게 되겠네.”
벌써 9월 중순 근처.
앞으로 몇 경기 뛰고, 좀 기다렸다가 맞이하는 한국시리즈가 그렇게 말 많은 ‘3년째’ 시즌의 마무리가 된다.
“두 달 뒤면 트로피 들어 올리고 아주 그냥 난리 부르스를 추고 있을 테니까.”
“두 달…길구만.”
따악-!
“참아봐, 얼마 안 남았응게.”
“오케.”
규학이가 때린 타구가 담장을 넘어가는 모습을 보며 승주의 등을 툭 치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규학이 나이쓰 배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