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평화로운 불펜생활-177화 (177/190)

177화. 벌렸죠?

지호의 질문은 간단했다.

좀 더 직구와 비슷한 모양새로, 자세로, 폼으로 던지고 싶은데 던지는 손가락이 다르다보니 그 감각이 아무래도 어렵다는 것.

“음….”

근데 이건,

“많이 던져보는 거 밖엔 답이 없는데.”

연습 부족이다. 단언할 수 있다.

“그렇습니까?”

직구야 던지기 제일 쉬운 손가락 모양이고, 또 제일 많이 던져봤을 테니까 넘겨두고.

“너 커브랑 슬라이더 던지는 건 편하냐?”

“불편하진 않습니다.”

“왜? 커브든 슬라이더든, 손가락이며 손목 각도며 막 이 지랄해가면서 던지는데 그게 편해? 직구 던지는 게 제일 편할텐데.”

커브고 슬라이더고 나발이고, 애초에 공을 던진다는 것 자체부터가 불편한 동작이다.

왜?

피칭이라는 동작은 절대 편한 동작이 아니다.

있는 힘껏 다리를 차올리고, 있는 힘껏 다리를 뻗고, 있는 힘껏 등을 쪼이고, 있는 힘껏 허리를 돌리고, 있는 힘껏 팔을 내뻗는 것.

이는 매우 격렬하고 불편하며 아픈 동작이다.

근데 어떻게 투수는 이런 동작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반복할 수 있을까. 그것도 매우 정확하게, 강하게, 빠르게, 꾸준히.

이유는 단순하다.

“직구가 제일 편한 건 맞지만 커브랑 슬라이더도 꽤나 많이 던져봤…아.”

“이제 알겠냐?”

그만큼 많이 던져봤으니까.

내가 굳이 이렇게 해야지, 저렇게 해야지, 그런 계산을 넣지 않고도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할 만큼의 감각을 알고 있는 거다.

“체인지업도 똑같어. 계속 던져보고 연습해보고 하면서 너만의 체인지업을 만들어가는 거지.”

빙 돌아오긴 했지만,

“그러니까 더 연습하도록 하거라. 그 연습 가이드를 제시해 줄 선배들은 많다네, 꼬꼬마 친구.”

결국 연습 더 하란 얘기다.

“예, 감사합니다.”

“흥! 딱히 그런 말 들으려고 알려준 건 아니거든?”

“그….”

“나도 8회에 올라갈 듯하니까, 나 던지는 거 보고 싶으면 옆에서 보든지.”

“…….”

음…….

“…미안하다.”

“괜찮습니다.”

새삼, 지호가 참 표정이 다양하구나.

“건영아.”

“예에!”

내가 등판하는 조건은 8회 초 공격이 끝났을 때 세 점차 이내로 우리 팀이 이기고 있을 것.

지호가 6회 말을 깔끔하게 막아낸 현재의 점수차는 내 등판 조건과 부합한다.

그러나 내 등판 예정 시점까지 남은 우리 팀 공격은 두 번. 그리고 상대 팀의 공격은 한 번.

“건영아, 일단 캐치볼만.”

“예에에!”

단순히, 정말 단순 계산으로 우리 팀의 공격 기회가 더 많으니 세 점차의 리드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크지 않을까, 생각했다.

“한울이, 올라가자.”

근데 진짜 생각일 뿐이었고.

“예이.”

두 번의 공격 기회, 한 번의 수비 상황 동안 원하 챌린저스는 점수를 내지도 못했고 허용하지도 않았다.

딱 세 점, 점수차를 그대로 유지하니 ‘등판 예정’이라는 네 글자에서 뒤쪽 두 글자가 사라졌다.

“보자….”

내가 상대할 한성 위너스의 타순은 3, 4, 5 클린업 트리오. 순서대로 좌타, 좌타, 우타.

“이번엔….”

띠링-!

[체인지업]

- 체인지업을 5구 이상 투구하며 1이닝 3삼진 무실점하세요 (0/1)

- 보상 - 변화구 +2

“…체인지업인가.”

지호랑 이야기를 나눴던 구종이 체인지업이라 그런지 이번 등판의 컨셉은 체인지업으로 잡힌 것 같다.

근데…….

“아씨, 지호는 그냥 무실점만 하라면서 난 왜 삼진 세 개나 잡으라냐.”

왜 난이도가 상승했을까.

“그만큼 내가 잘 던진다는 거지.”

괜한 불만이 생기긴 했지만 이게 바로 클라쓰 차이라 생각하며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뻥-!

“어우, 좋다!”

연습 투구를 진행했다.

포심 그립을 잡은 상태에서 검지 손가락과 약지 손가락을 반시계방향으로 돌려주면 간단하게 체인지업 그립 완성.

뻥-!

괜찮네.

조금 전 불펜 피칭도 그렇지만, 경기 전 체인지업으로 캐치볼을 좀 해서 그런지 오늘따라 체인지업에 대한 감이 꽤나 괜찮다.

이렇게 던져도,

뻥-!

저렇게 던져도,

뻐엉-!

딱딱 내가 원하는 방향과 각도를 그리며 떨어진다.

“좌타가 둘….”

우완은 좌타에게 약하다. 혹은 좌완은 우타에게 약하다.

소싯적엔 그런 이야기들이 마치 정설처럼 받아들여졌다.

근데 딱히 틀린 말은 아니다. 다들 아는 것처럼 뭐 팔의 각도가 반대손에겐 더 잘 보이네 어쩌네, 그런 설명들은 사실이니까.

“플레이!”

하지만 그 이론은 체인지업, 그중에서도 써클 체인지업의 등장과 함께,

부웅-!

“스윙-.”

사장된 지 오래다.

3번타자 정성훈은 초구부터 바깥쪽 직구를 보곤 화끈하게 배트를 돌렸다.

바깥쪽 직구?

퍼엉-!

“샤이, 잌!”

아까 건 체인지업이고, 이게 직구입니다 선생님.

초구부터 화끈한 헛스윙을 만회해보고자 이번 공은 지켜봐야겠다, 뭐 그런 생각을 했는진 몰라도 덕분에 2스트라이크를 아주 간단하게 만들어버렸다.

몸쪽에 매우 강한 타자. 동시에 바깥쪽에 매우 약한 타자. 배터리는 물론이고 타자 본인이 가장 뼈저리게 알고 있을 정보.

그런 타자에게 두 번 연속으로 바깥쪽 공으로 카운트를 잡아버리니 타자가 생각하는 범위는 자연스럽게 바깥쪽으로 몰려버리게 된다.

“읍!”

퍼엉-!

“샤잌, 아앜!”

선생님, 몸쪽은 안 보세요?

곧장 승부를 들어갈 거라 생각은 못 했는지, 그것도 역으로 몸쪽으로 들어갈 거란 생각은 못 했는지 정성훈은 갓 잡아올린 물고기처럼 한 번 팔딱거린 뒤 덕아웃으로 돌아갔다.

“스읍….”

삼진을 잡아낸 건 좋은데, 문득 결정구에서 아쉬운 감이 있었다.

이번 퀘스트의 조건은 삼진 세 개를 뺏는 것뿐 아니라, 그 과정에서 체인지업을 5구 이상 던질 것.

“그냥 체인지업을 던지는 게 나았으려나….”

아무래도 체인지업은 같은 손 타자보단 반대 손 타자에게 던지는 게 더 편하기도 하고 효과도 더 큰 게 사실이다.

원래 계획은 좌타자들에게 두 개씩, 우타자에게 한 개를 던져 5개를 메꾸는 거였는데 나도 모르게 분위기를 타버리니 내 손으로 계획서를 우그러뜨린 셈이 됐다.

“음….”

4번타자, 조!! 태!! 풍!!

새로 받은 공에 로진을 묻히며 잠시 이번 타석에 대한 계획서를 다시 짰다.

목표는 조태풍에게 체인지업 세 개를 던지는 것. 이 목표를 위한 초구는,

“읍!”

딱!

“파울-.”

몸쪽 높은 직구.

그리고 이에 이어서 바깥쪽에서 멀어지는 체인지업을 던지긴 할 건데,

“읏!”

속아주려나.

뻥-!

“볼-.”

에이.

초구를 간단하게 파훼했던 것처럼, 조태풍은 비교적 간단하게 체인지업을 골라내며 동률의 카운트를 만들었다.

국대급 타자는 다르단 건가.

체인지업을 5구 이상 던지랬지, 체인지업으로 5개 이상의 카운트를 뺏으란 말은 없었다.

덕분에 스윙을 이끌어내지 못 했다고 해서 아쉬움 같은 건 느껴지진 않았지만,

“스읍, 괜찮게 들어간 거 같은데.”

그것보단 보다 본질적인 부분, 퀘스트고 나발이고 꽤 잘 들어간 공의 결과가 아쉬웠다.

어딘가 삐끗했나.

1-1의 카운트, 이번엔 좀 더 제대로 된 체인지업을 던져주리, 그렇게 마음먹곤 조심스럽게 그립을 고쳐잡았다.

아무래도 너무 깊게 잡은 탓에 좀 일찍 떨어지기라도 한 걸까, 싶은 마음에.

이번엔 제대로 손가락에 걸쳤겠다, 손바닥에서 적당히 띄워 잡았겠다,

뻥―

“볼!”

정말 이번에야말로 스윙 하나를 이끌어낼 수 있지 않을까 싶었지만 어림도 없었다.

아 왜.

공의 궤적이라든지, 아니면 변화하는 시점이라든지, 정말 이번 공은 어디 나무랄 곳이라곤 단 한 군데도 없는 완벽한 체인지업이었는데.

조태풍은 쉽게 체인지업을 한 번 더 골라내곤 배팅장갑의 벨크로를 다시 재정비하고 있었다.

“이러면 좀 애매해지는데….”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다음 사인을 골라내기 시작했다.

퀘스트도 퀘스트긴 한데, 아무래도 게임에서 이기는 게 우선이잖아.

볼이 두 개, 스트라이크가 하나.

우선 스트라이크 하나를 더 잡아오자라는 마음으로 규학이가 직구를 요구했다.

“으읍!”

고개를 끄덕이고 바깥쪽에 직구를 던지니,

딱-!

“파울, 파울!”

힘에 살짝 밀린 타구가 3루측 관중석으로 들어갔다.

“흐음….”

파울 타구를 받고 꽤나 즐거워하는 관중을 보며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공의 궤적, 공의 원리, 공의 회전, 공을 던지는 폼까지.

직구와 체인지업은 대부분의 요점이 일치한다. 유일한 차이점이라고 한다면 바로 구속 차이.

이것이야말로 체인지업이 체인지업으로 있을 수 있는 이유이며 체인지업이 가장 강력한 구종이라는 반증이다.

근데 직구엔 배트가 나오는데 체인지업은 쉽게 골라낸다?

“…보이나?”

폼이 됐든, 손목의 각도가 됐든, 릴리스 포인트가 됐든, 회전축이 됐든.

조태풍은 어느 특정 부분에서 ‘나 체인지업 던져요!’라는 광고를 놓치지 않는 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선생님.

“끄윽!”

직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선생님.

부웅-!

“스윙, 아웃!”

뭐, 그럴 수 있지.

내가 아무리 직구랑 체인지업이랑 똑같아요, 다른 타자들 다 속아요, 그렇게 열을 낸들 지금 이 타자가 골라낸다면 아무 의미가 없다.

때문에 꺼내든 카드가 직체.

“좋아요!”

“어이-!”

직체라는 이름이 낯설 순 있지만 이 단어의 원문을 주욱 나열해 ‘직구 체인지업’이라는 단어로 변환하면 이해하기가 아주 쉽다.

말 그대로다. 직구 잡는 그립으로 체인지업을 던지는 것.

애초에 체인지업의 존재 의의가 뭔데? 체인지 오브 페이스, 속도 차이 아니던가?

“직체도 좀 연습해볼까. 괜찮네.”

그런 의미에서 직체야말로 진정한 체인지업일 수도 있겠다.

“행님, 투아웃이요!”

“어이, 투아웃.”

성훈이형 대신 3루에 들어가있는 헌희가 검지와 소지를 펴며 숫자 2를 나타냈다. 고개를 끄덕거리고 공을 받아내니,

5번타자, 채!! 지!! 훈!!

앞선 두 타자와는 다르게 우타석에서 타자가 나타났다.

“그럼…하나만 던지면 되는 건가.”

정성훈한테 하나. 조태풍에게 셋. 퀘스트는 5구 이상을 던지라고 했으니 마지노선을 맞추기 위해선 체인지업을 한 번 더 던져야 한다.

“보자보자보자아아….”

즉석에서 작사작곡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사인을 골라냈다.

체인지업, 같은 손 타자에게 던지긴 아무래도 좀 부담스럽긴 하나 이번 승부 안에선 딱 한 번만 던져내면 된다는 점이 재밌다.

“끅!”

뻥!

오늘은 직구랑 체인지업만 던져댔으니, 이번엔 그 이외의 공을 던져봤다.

“샤이, 잌!”

바로 커브.

살짝 낮지 않았나…싶긴 했지만 규학이가 절제된 동작으로 공 반 개 정도 올려주니 좋은 판정을 받아낼 수 있었다.

간단하게 루킹으로 첫 카운트를 만들어냈으니,

“끄흡!”

하나쯤 빼 볼 여유가 생겼다.

뻥-!

“볼-.”

바깥쪽으로 도망가도록 허용한 슬라이더가 은혜를 갚기 위해 열심히 몸을 비틀어댔지만 다른 척살자인 배트를 이끌어내진 못 했다.

좀 움찔거리던데 아쉽네. 그대로 그냥 훙 돌려버리지.

“흐음….”

어딘가 계속 아쉬움이 남아 손 안에서 공만 이리저리 돌려대며 다음 공을 구상했다.

가능하면 체인지업은 결정구로 쓰고 싶은데.

커브는 한 번 썼으니 아웃. 슬라이더는 나름 잘 보는 것 같으니 아웃. 스플리터는 체인지업 계통이니 아웃. 싱커 또한 이미지와 맞지 않으니 아웃.

“에이씨.”

결국 돌고 돌아 직구.

그럼 위치는?

아주 짧게, 정말 짧게 위치에 대한 레이어까지 추가하니 그다음 작업은 착착 진행됐다.

먼저,

“으윽!”

부웅-!

“스윙-!”

높은 데다가 직구 하나 던져서 1-2 카운트 만들고.

그리고,

“이번에 갈 건데….”

결정구 타이밍.

체인지업을 던질 생각이긴 하나 막상 같은 손 타자에게 체인지업을 던지려니 살짝 부담이 됐다.

대충 그런 격언 비슷한 게 있거든.

몸쪽으로 들어오는 공은 카운트를 잡을 것이요, 바깥쪽으로 도망가는 공은 헛스윙을 만들 것이다.

지금 나한테 필요한 건 카운트가 아니다. 헛스윙이다.

“…오케.”

그럼 같은 손 타자에게 쉬이 헛스윙을 뺏어낼 수 있는 체인지업이 필요하겠지.

직구 그립은 잡은 상태에서 공 옆면에 닿아있던 약지를 아래로 쭈욱 내렸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후우….”

중지와 약지 사이에 힘을 주고 반시계방향으로 휙 돌려버린다. 이렇게 하면 중지와 약지 사이에 공이 끼게 되는 그립이 완성된다.

바로 벌컨 체인지업.

사실 벌컨 체인지업이라는 게 이름만 어색할 뿐이지,

“끄읏!”

손가락과 손가락 사이에 끼워 던진다는 걸 생각하면 거기서 연상되는 단어가 하나 있을 거다.

부웅-!

벌렸죠?

“스윙, 아웃!”

사실상 거의 스플리터와 비슷한 움직임을 보인 벌컨 체인지업이 채지훈의 배트를 이끌어내곤 규학이의 미트로 들어갔다.

“예쓰!”

띠링-!

[체인지업]

- 체인지업을 5구 이상 투구하며 1이닝 3삼진 무실점하세요 (1/1)

- 보상 - 변화구 +2

제구 - 최상

구위 - 최상

체력 - 중

포심 - 100

커브 – 99+2=100

슬라 - 98+2=100

스플 - 100

체인 - 99+2=100

싱커 - 98+2=100

특성

해탈 - 어떤 타구, 상황에도 그러려니 합니다.

불편 - 상대하는 타자가 타석에서 투수를 보면 어딘가 불편하게 만듭니다.

편안 - 본인을 보는 이들이 편안함을 느낍니다.

집중 – 집중할 수 있는 대상의 수가 늘어납니다.

승부 - 이기고 싶을 때 포심이 +5 됩니다.

전염 - 본인의 감정이 전염됩니다.

딱히 생각하진 않고 있었는데, 이번 퀘스트를 완료하고 뜬 스탯창을 보니 어느덧 모든 구종들이 스탯 100을 찍었다.

“와우….”

내가 내 퍼포먼스에 놀라 입을 헤- 벌린 채 덕아웃으로 들어갔다.

“뭐해?”

“…아니, 나 개쩌는 거 같애, 진짜.”

“미친놈인가.”

“…….”

미친놈 소릴 들어도 별 감흥이 없다.

100, 100, 100, 100, 100, 100.

그것보단 세 자리 숫자가 여섯 개나 보인다는 점만 눈에 들어올 뿐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