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평화로운 불펜생활-181화 (181/190)

181화. 스포일러

와아아악-!!

승주야아악!!

윤승주! 윤승주! 윤승주!

모든 베이스를 찍고 홈까지 돌아온 승주를 향해 모든 이가 환호했다.

박수치는 팀원.

사진 찍는 기자들.

소리지르는 팬들.

복합적인 소리를 들으며 기뻐하는 승주는 날 보더니,

어? 너가 왜 여깄냐?

그런 소릴 했다.

내가 왜 여깄긴, 원하 팀원이니까 여기 있지.

그렇게 대답하니 승주가 이야기했다.

무슨 소리야? 너 어제 상수로 트레이드 됐잖아.

뜬금없는 소리에 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왜 상수로 가?

그에 승주가 다시 대답했다.

너 입고 있는 유니폼 봐봐. 상수 유니폼이잖아.

그 말을 듣곤 고개를 내려 내가 입고 있는 유니폼을 보니 ‘SANGSU’라는 알파벳이 적혀있었다.

어? 내가 왜 상수에 있지?

그런 생각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야! 이 새끼 스파이다, 잡아아!!

갑자기 우리 팀원들이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음허!”

…라는 장면에서 꿈이 끊겼다.

“…….”

아 X발 꿈.

우승에 대한 열망이 너무 커서 이런 꿈까지 꿔버린 건가.

아니, 그럼 애초에 우승한 게 맞긴 하던가.

그렇다면 지금은 언제고 몇 년 몇 월 며칠인가.

“…아.”

얼른 핸드폰을 들어 날짜를 확인하니 9월 26일.

“아이고…놀라래. 아니, 뭔 소리야. 놀라서 말도 제대로 안 나오네.”

일찌감치 페넌트레이스 우승을 점찍어놨던 게 나름 충격적이긴 했나봐. 뭐 꿈을 꿔도 이딴 식으로 꿈을 꾸는지.

“어으….”

원래 아침에 일어나서 몽롱한 가운데 정신을 차리려면 시간이 좀 들지만, 워낙 이상한 꿈을 꿔서 그런지 정신 자체는 바로 맑아졌다.

다만 그 부작용으로,

“…어흑.”

몽롱함과 맑음의 순서가 잠시 변경되었다.

“후우….”

잠의 기운을 떨쳐내보기 위해 침대 옆에서 하룻밤을 같이 지낸 책상 위로 손을 올…….

“…아.”

…리려다가 멈칫거렸다.

“아, 안 돼, 안 돼. 어떻게 참았는데.”

금연 6일차.

습관을 다른 갈래로 비틀어버린 후유증이 생각보다 큼직하게 느껴진다.

“후우….”

손바닥으로 얼굴을 한 번 쓸어내리며 침대에서 벗어났다.

하나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싶어 집안 구석에서 담배 한 개비를 찾아나섰지만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음….”

잘했다, 과거의 나.

멍청한 과거의 나 새기야.

“…에휴.”

잠이나 좀 깰 겸, 의자에 걸터앉아 원하 챌린저스의 정규시즌 우승 확정의 순간을 다시 한 번 구경했다.

따악-!

- 어어어어어! 이 타구가!! 우중간 담장을 향해!! 넘어가며, 원하 챌린저스가, 2년 연속!! 정규시즌 우승을 확정 짓습니다, 그 주인공은 그 누구도 예상치 못 했던 윤승주입니다!!

“…술주 새끼.”

X바아아아아알!!

중계화면에 욕지거리가 잡힐 정도면 대체 얼마나 크게 소릴 질러댄 건지.

실제로 이 장면은 꽤나 화제가 됐다. 처음엔 쟤 왜 저래? 같은 반응이 먼저였지만 승주의 뒷 이야기가 점점 유명세를 타며 와, X나 멋있다, 같은 반응이 모든 의견을 뒤덮었다.

그 다음 장면은 뭐, 다 같이 승주를 죽여버릴 듯이 패며 승리를 자축하고, 1루측 관중석 앞에 서서 팬들에게 인사하고, 주요 선수들과 인터뷰를 나누고.

정규시즌 우승에 가장 고마운 선수를 꼽자면 어떤 선수가 있을까요?

감독 입장에서 모든 선수가 다 고맙죠, 당연히. 그래도 굳이 한 명 꼽길 원하시는 것 같으니까 얘길 해보자면 뭐…….

“한울이가 가장 고맙네요.”

한울이가 가장 고맙네요.

“다들 잘해줬지만, 한울이의 임팩트가 워낙 크잖아요?”

다들 잘해줬지만, 한울이의 임팩트가 워낙 크잖아요?

“분명 한국시리즈 가서도 한울이를 중심축으로 계획이 세워질 거예요.”

분명 한국시리즈 가서도 한울이를 중심축으로 계획이 세워질…….

“후!”

심심하면 승주의 끝내기 홈런 이후 장면들을 챙겨보다보니 이젠 아예 이후 대사들까지 외워버렸다.

감독님의 인터뷰를 중간에 끊은 뒤,

삑―

차 문을 열고 잠실구장으로 출근할 준비를 마쳤다.

“벌써 두 게임 밖에 안 남았네.”

이런 정상적인 시간, 정상적인 루트로 잠실구장으로 출근할 날이 앞으로 이틀 밖에 남지 않았다는 점은 새삼 기분을 묘하게 만든다.

물론 내년에도 잠실구장을 홈으로 쓴다.

당연히 내년도 원하 챌린저스 소속으로 경기를 뛴다.

다 필요없고 얼마 뒤 한국시리즈부터 잠실구장에서 치른다.

알아, 아는데.

“진짜 1년이 끝나가는구나….”

정규시즌이라는 건 선수 입장에서 묘한 감정선을 만들게 하거든.

벌써 1년의 끝이 다가온다, 라는 아쉬움.

이런 건 내가 잘했지, 라는 당당함.

이건 좀 아쉬웠는데, 라는 후회.

그리고 이 감정의 나열이 내년에도 이어질 거라 생각하면,

“하이!”

다시금 해맑은 표정으로 오른손을 머리 위로 들게 만든다.

* * *

스포일러 당했다, 라고 하지. 결말을 미리 들어버리는 거.

“형님.”

“…왜.”

“사실 전 어릴 적부터 미래를 보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

“올해 12월, 형님에게 일어날 일을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니, 괜찮….”

“냐아홋냐르암훈메허애너….”

“…….”

“하! 올해 12월 12일, 형님은 결혼하십니다!”

“…….”

이런 거 말고.

“미친놈인가.”

“감사합니다.”

“칭찬 아니야!”

“감사합니다!”

X발.

2020시즌 KBO리그는 결국 몇 경기를 남겨두고 모든 팀들의 순위가 정해졌다.

원하, 상수, 성운, 동성, 한성, KP, 가야, 비스코.

“내일 끝나고 술이나 한잔하시렵니까.”

“뭔 술이야, 또.”

“리그 1위 기념주요.”

때문에 아직 리그 게임이 남았음에도 벌써부터 리그 1위에 대한 축하와 찬사가 여기저기서 쏟아지고 있다.

“술은 딱히….”

“까비.”

그렇다면 남은 이 두 경기를 원하 챌린저스는 어떻게 임해야 하는가.

우릴 바라보는 팬들의 입장은 단순하면서도 오묘하다.

음…고작 두 경기 밖에 안 남았는데 웬만하면 다치지 말고 그냥 적당히 해. 근데…웬만하면 이겼으면 좋겠네?

“술은 웬만하면 코시 끝나고 먹지 그러냐. 오늘 경기가 뭐…까놓고 얘기해서 그렇게 중요한 게임도 아닌데.”

“그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슴다….”

“술쟁이도 아니면서 뭔 술을 못 기다려.”

그렇다면 그 팬들의 마음씨를 우리 선수들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에이, 그래도 작년보다 훨씬 빠르게 1위 확정인데 좀 좋아해도 되지 않습니까.”

“아직 갈 길 멀다, 명진아.”

우리도 팬들의 마음씨와 그리 멀지 않다.

웬만하면 이기는 게임을 하되, 져도 되니까 다치지만 말자. 시즌 마무리만 잘하자.

“그러니 가서 게임 준비나 하거라.”

“힝.”

“힝 같은 소리하지 말고.”

“힝힝힝.”

미친놈이.

명진이한테 이상한 기운이 옮을까봐 덕아웃에서 벗어나 그라운드로 향했다.

혁준이와 친근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헌철이.

성상진과 무언가를 심도 깊게 토론하는 기성이.

웬일로 성훈이형 얼굴에 웃음꽃을 피워낸 민종현.

“이게 곧 피 터지게 싸울 팀들인가.”

보고 있으면 정말 박 터지게 싸워왔고, 또 그렇게 박 터지게 싸울 예정인 팀들이 맞나 싶다.

오늘과 내일, 두 경기 뿐 아니라 사실상 가장 유력하게 한국시리즈에서 만날 두 팀이,

“안녕하십니까.”

“…아, 어.”

이렇게 친근하게 이야길 건네와도 되는가 싶기도 하고.

“오랜만에 뵙는 것 같습니다.”

“아…그렇게 되나?”

“이렇게 이야기 나누는 건 꽤 오랜만이지 않습니까?”

박해진은 정말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다가와 내 옆에 섰다.

무슨 얼굴로 이렇게 다가왔나, 싶어 흘끗 쳐다보니,

“왜 그러십니까?”

쓸데없이 잘생겼다.

“뭔 얘기하려고 왔냐?”

“그냥 안부차 왔습니다.”

“웬 안부.”

시즌 끄트머리에 다가선 지금,

“이번 시즌 선배님만큼 화제인 사람도 없지 않습니까.”

모두 구원 등판해서 약 60이닝 동안 평균자책점 ‘0점’을 기록하는 투수가 있다.

그리고 시즌 두 경기를 남겨둔 현재,

“너만 하겠냐.”

시즌 58홈런을 기록하고 있는 타자가 있다.

재밌게도 각 타자와 투수가 속한 팀은 리그 종료까지 두 경기씩을 남겨두고 있다. 또 재밌는 점은 그 남은 두 경기가 각 팀의 맞대결이라는 점.

사실상 리그 순위를 지켜보는 재미가 사라진 가운데, 팬들은 또 다른 부분에서 재미를 찾기 시작했다.

과연 김한울은 시즌 끝날 때까지 평균자책점 0점을 기록할 수 있을까?

박해진은 과연 시즌이 끝나기 전에 마의 60홈런을 넘길 수 있을까?

“아마…각자 원하는 기록을 만든다면 저보단 선배님께 더 많은 관심이 가지 않겠습니까.”

“왜?”

“언젠가 프로야구 팀이 늘어나면 아무래도 팀별 경기 수도 늘어날테고…그럼 60홈런이란 대단한 위치도 언젠간 깨지지 않겠습니까.”

“말이 쉽지.”

“이건 말이라도 쉽지, 시즌 내내 평균자책점 0점이라는 건 말로 꺼내는 것조차 어려운 기록 아닙니까.”

그건…그렇지?

“그래서 더 욕심이 납니다.”

“뭔 욕심.”

“선배님에 대한 욕심이 납…니다만, 왜 도망가십니까.”

“나 좀 있으면 결혼한다.”

“…….”

“…….”

크흠.

“나름 잘나가는 타자라는 입장에 있는데, 눈앞에 그런 상대가 있으면 당연히 욕심이란 게 생기지 않겠습니까.”

“그 대단한 기록을 내 손으로 부수고 싶다, 그런 욕심이냐.”

“맞습니다.”

얼씨구.

“오늘 홈런 하나 치겠습니다.”

“대단하셔, 그게 그렇게 하겠다고 되디?”

“예.”

“…….”

“사실 제가 미래를 좀 볼 줄 압니다.”

분명 아까 제정신 아니었던 애가 비슷한 소릴 했던 거 같은데.

“아마, 오늘 홈런 하나 치고 내일도 하나 치고, 그렇게 해서 60홈런 칠 것 같습….”

“그거 아까 명진이가 했다.”

“예?”

“미래 보는 어쩌고 그거 아까 명진이가 했어.”

“…….”

박해진의 고개가 움찔거리는 걸 보니 명진이를 바쁘게 찾아다니는 것 같다.

“…여튼, 그렇게 나름의 복수도 할 생각입니다.”

“영화 좀 그만 봐, 제발.”

“항상 리그 1위를 도맡아 하던 상수 타이거즈를 자리를 뺏어가다니, 전 원하 챌린저스를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저기, 미안한데.”

“그렇기 때문에 오늘과 내일, 제 심판으로 단죄를 내릴 생각입니다.”

“야.”

“결말은 정해져 있습니다.”

“야, 해진아.”

“정규시즌은 2위로 물러나지만, 그렇게 사기를 충전한 상수 타이거즈는 한국시리즈에서 원하 챌린저스를 물리쳐낼 겁니다.”

“제발, 제발 해진아.”

“각오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

따봉!

댕-한 얼굴 앞에 박해진의 엄지 손가락이 한 번 스쳐지나갔다.

“아, 내가 뭘 잘못했다고 나한테 이런 일이 생기는 걸까, 제발.”

* * *

비록 말뽄새는 정신 두 가닥 정도를 빼놓은 모양새였지만,

따악-!

그런 말을 할만한 자격 자체는 충분한 녀석이다.

2회 초, 경기 시작 전 뱉은 예언처럼 홈런은 아니었지만 홈런에 필적하는 타구를 만들어낸 박해진은 털털털 걷다시피 2루를 밟았다.

이어 본인과 같은 이름을 가진 하해진의 안타 때 홈을 밟아 오늘 경기의 양팀 첫 득점을 만들어낸 뒤 두 번째 타석,

따악-!

다시 한 번 배트를 돌려낸 박해진은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1루를 밟고 있었다.

본진보다 적진과 더 가까운 구역에서 암가드를 벗어낸 박해진은 상수의 1루 주루코치님과 짤막한 이야기를 나눈 뒤,

“세컨!”

빡―

“세잎!”

깜짝 도루까지 성공시키며 커리어 첫 30 - 30 클럽에 가입했다.

저게 사람인가.

그리고 6회 초, 세 번째 타석도 나름 볼만했다.

2 대 0, 나름 팽팽한 흐름 가운데 타석에 들어서더니,

따악-!

“쓰리!”

“라이트 바로 쓰리!”

“숏 빠지고, 노컷이야!!”

촤악―

“세이잎-!”

타구가 우중간을 가로질러 담장에까지 닿은 틈을 타 3루까지 당도했다.

“…야, 쎄한데.”

2루타, 단타, 3루타.

첫 세 타석 모두 안타를 쳐냈지만 세부적인 기록이 다르다는 점이 상대 팀 입장에서 꽤나 불편하다.

아니나 다를까,

따악-!

“…X발.”

8회 초 네 번째 타석에선 기어코 잠실구장의 좌측담장을 넘기며 사이클링 히트를 기록했다.

덤으로 시즌 59호 홈런까지.

자연스럽게 모든 이목이 박해진에게 집중됐다.

사이클링 히트를 기록한 소감이 어떻냐.

시즌 59호 홈런으로 신기록을 또 경신했는데 기분이 어떻냐.

내일 마지막 한 경기가 남았는데 시즌 60홈런이라는 대기록이 보이느냐.

그에 대한 소감문은 다소 진부한 내용이 가득했다.

당연히 기분이 좋다, 예상도 못 했다, 응원해주신 분들께 감사하다, 더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도록 노력하겠다, 뭐 그런 얘기들.

“그럼 마지막으로 한 가지 질문이 남았는데요!”

“네.”

심지어 리포터의 마지막 질문 또한 진부함과 그리 거리감이 느껴지진 않았다.

“어느덧 상수 타이거즈도 2020시즌, 단 한 경기만을 남겨두고 있는데요!”

“네네.”

“내일, 원하 챌린저스와의 마지막 경기에 임하는 각오! 각오 한 마디만 부탁드릴게요!”

하지만 그 마지막 질문에 대한 녀석의 대답.

“제가 오늘 홈런을 8회에 치지 않았습니까?”

“네, 맞습니다.”

“제가 오늘 8회에 타석에 들어갈 것까지 생각은 못 했지만, 막상 타석에 들어가서 8회라는 걸 알곤 좀 생각한 게 있습니다.”

“아! 어떤 생각인가요!”

이 대답만큼은 오늘보다 내일의 경기를 더욱 주목시키는 힘이 있었다.

“내일, 60호 홈런 또한 8회에 칠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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