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약속의
바로 어제와 다른 곳에서 다른 곳을 마주하는 기분. 근데 그 마주 보는 상대가 어제 봤던 상대일 때의 기분.
“…뭐.”
…이 어떨지 서술하시오. 5점.
“어제 보셨지 않습니까.”
“그니까, 뭘.”
차가운 도시에 살며 본인의 할 일에 항상 최선을 다하는 선수. 하지만 내 사람에겐 따뜻하겠지.
“어제 제 인터뷰 말입니다.”
“…….”
차도남 다 죽었냐.
그런 이미지는 다 갖다 버렸는지, 아니면 내 앞에 설 때만 잠시 다른 사람으로 변신을 하는 건진 모르겠다만,
“사실 그 말이 조금 와전된 것 같습니다.”
“뭐 어떻게.”
“굳이 8회가 아니어도 상관없습니다. 7회가 됐든, 9회도 괜찮습니다.”
“그러셔.”
“선배님이 등판하시는 이닝이라면 그 어느 때라도 상관없습니다.”
박해진은 오늘도 경기 전, 굳이 나에게 다가와 간단한 도발을 시전했다.
“시즌 60호 홈런은 다른 누구도 아닌 선배님에게 치고 싶습니다.”
훠이훠이―
“예, 수고하십셔.”
“아무런 생각 안 드십니까.”
“예에, 고생하십셔어.”
“역시, 선배님께 대적할만한 상대는 아직 저밖에 없는 것 같아 마음이 놓입니다.”
미친놈인가.
“왜 굳이 나한테 치려고 그러냐. 나 말고도 투수 많은데.”
“그야…대한민국 최고의 투수한테 쳐내는 게 더 멋있지 않습니까.”
“헛소리하지 말고.”
뭔 뜬금없는 소리야.
“그냥 선배님이랑 야구하면 참 재밌습니다.”
“요즘에 참 재미없게 사는구나.”
“맞습니다. 선배님과 통 만나지 못 해 꽤나 재미없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아, 제발.
“선배님도 절 만나지 못 해 꽤나 무료한 삶을 살지 않으셨습니까.”
“…저기. 저기, 해진아. 진짜 미안한데.”
“예.”
“그런 컨셉은 이미 현진이가 하고 있거든.”
“예?”
“좀 다른 거 해봐. 보는 사람 입장에서 좀 질린다.”
“흐음….”
아니, 진짜 고민하지 말고.
“딱히 선배님과의 대결이 기대되진 않지만, 이렇게 됐으니 어울려드리겠습니다. 각오하시는 게 좋습니다.”
X발.
* * *
어제와 선후공을 바꿔 맞이한 1회 말 상수 타이거즈의 공격.
완급조절인지, 혹은 예열인지,
딱-!
박해진은 2루에 주자를 두고 깔끔한 안타를 만들어내며 상수 타이거즈의 선취점을 만들어냈다.
1루를 밟고 딱히 좋아한다는 모습보단 그러려니 하는 모습이 보인다.
해탈?
아니, 안타라는 좋은 기록을 냈는데 해탈이고 자시고가 어딨어.
저건 정말로 그러려니 하는 거다. 본인이 안타를 치는 건 당연한 거고, 홈런을 치는 건 더더욱 당연하게 느끼는, 그런 그려러니 하는 모습.
첫 타석의 안타로 일단 시동을 걸어둔 박해진은 4회 말,
따악―
선두타자로 나와선 바깥쪽에 걸칠까 말까 하는 공을 그대로 톡 밀어붙여 기성이 뒤의 라인을 터치시켜버렸다.
성현이가 얼른 달려와 타구를 잡고 2루로 몸을 뒤틀어보지만,
촥―
“세이잎-.”
2루심은 무심하게 양팔을 어깨선과 동일시하며 박해진의 안전을 보장했다.
“뭐 저런 애가 다 있지.”
파정주수송, 이 다섯 가지로 대표되는 야구의 스탯.
박해진이 이 다섯 가지 스탯을 모두 극한까지 찍은 희대의 사기캐라는 점은 진작에 알고 있었다.
지금 시즌 60홈런을 치네 마네 관심이 일 정도로 보장된 파워.
.351로 사실상 리그 타격왕을 확정지어놓을 정도로 뛰어난 정확성.
무리하지 않기 위해 뛰지 않을뿐이지, 맘먹고 뛴다면 40도루까지 충분히 가능할 주루.
수비 스탯이 중요하지 않아보이는 1루에 있지만, 내야에서 날아오는 별 지랄 같은 모든 공을 받아내는 수비.
마찬가지로 1루에 박혀있어서 그렇지 145km까지 충분히, 그리고 정확히 때리는 송구.
근데 그런 뻔한 얘기 말고.
“…야구를 저렇게 해야되는 건데.”
멋있는 거 있잖아. 좀 고급진 표현으로 간지난다, 그런 거.
박해진이 야구하는 모습을 보면 딱 그런 느낌을 받는다.
딱―
지금도 그래.
“쟤는 뭔….”
6회 말, 이용호가 삼진 처먹은 뒤 타석에 들어선 박해진은 빗맞은 타구를 억지로 억지로 밀어내,
텅―
기어코 담장을 맞춰냈다.
외야수들이 타구의 반사각을 잘못 설정한 탓에 릴레이가 조금 늦어지는 틈을 타,
와아아악-!
박해진! 박해진! 박해진!
직전 타석 2루타와는 다르게 아주 여유로이 3루를 밟았다.
3루타?
“야, 설마 저 새끼….”
첫 번째 타석 안타 때는 흔한 장면 중 하나라 생각했다.
두 번째 타석 2루타는 별 생각없이 역시 잘치는구나, 생각했다.
세 번째 타석 3루타를 보니 뭔가 잘못돼도 단단히 잘못됐구나, 싶었다.
사이클링 히트.
또?
어제 사이클링 히트를 쳐놓고, 오늘 박해진은 ‘또’ 한 번 사이클링 히트를 제작할 레시피를 만들어놨다.
“한울아.”
“아, 예?”
7번타자의 삼진으로 6회 말 수비가 끝나고 투수코치님이 다가오더니,
“8회 준비 좀 하자.”
8회 등판을 부탁했다.
“어어….”
“왜? 오늘 그냥 쉴래?”
“아뇨, 그건 아닌데요….”
쟤 진짜 미래가 보이나.
“그럼 부탁 좀 할게.”
“예….”
6회 말이 7번타자에서 끝났으니 7회 말은 8번타자부터. 8, 9, 1번 세 명은 무조건 나간다 치고 2번과 3번 선에서 이닝이 끝난다면,
“…에이.”
정말로 8회에 박해진과 만나게 된다.
“저기, 건영아.”
“예! 준비하십니깟!”
“어어, 좀 부탁해.”
“예이!”
어째 박해진이 얘기한대로 흘러가는 상황이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게 딱히 없다.
그저,
7회 초 공격에서 한 점을 추가하며 원하가 리드를 두 점으로 늘리는 장면.
7회 말 수비에서 승진이가 세 타자를 모두 삼진으로 처리하며 리드를 굳히는 장면.
8회 초 공격에서 상수가 당했던 것처럼 우리 타자도 세 타자 삼진 세 개로 이닝이 끝나는 장면.
불펜에서 경기의 흐름을 지켜보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다.
가비지 게임 맞냐, 이거.
앞으로 뭔 짓을 해도 변하지 않을 순위표를 받아든 두 팀의 경기가 맞나, 싶을 정도로 치열한 흐름 속에서 불펜의 문이 열렸다.
어제, 내 등장곡과 함께 등판했다면 좋았을텐데. 아니면 오늘이 우리 팀의 홈 경기였다면 참 좋았을텐데.
마운드로 향하는 길목이 다소 심심하게 느껴지긴 했으나,
욜럽 이저 와아알 카앗! 뽈딩 이저 하아알 팟!!”
김한울! 김한울! 김한울!
3루측 관중석에서 육성으로 내 응원가를 불러주는 팬들을 보니 입가에 실실거리는 미소가 걸렸다.
흘끔, 뒤를 쳐다본 뒤 90도만 앞으로 돌려 전광판을 확인했다.
4 김한울 우투우타 188cm 107kg 1989-10-21
4승 0패 39홀드 9세이브
53경기 61이닝 평균자책점 0.00 탈삼진 89 볼넷 8 WHIP 0.393
“…잘했네, 올해.”
헛웃음이 나오는 이번 시즌 내 기록을 확인할 때쯤 마운드의 버석거리는 흙의 촉감이 느껴졌다.
플레이트 살짝 뒤에 서서 로진을 들어올려 퍼석거리는 식감을 맛본 뒤,
팩―
땅바닥에 적당히 내던지고 한 걸음 앞으로 나서 플레이트를 밟았다.
시즌 마지막 경기.
퍼엉-!
“어으, 좋아!”
난 오늘 경기까지 완벽하게 틀어막아 전설집에 내 이름을 한 줄 추가할 예정이고,
퍼엉-!
“좋네, 좋아요!!”
박해진은 내 이름에 커다란 상처를 내기 위해 벌써부터 타격장비를 모두 장착한 채 제 타순을 기다리고 있었다.
빵-!
이닝 시작에 앞서 모든 구종들을 한 번씩 점검했다.
직구는 언제나 그랬듯 괜찮고, 다른 구종들은 평범하게 잘들어가지만 커브가 살짝 손에서 빠지는 느낌.
“커브를 빼야되나….”
내 손감각에 자체적으로 의문을 한 번 품자 어느덧 연습 투구의 마지막이 다가왔다.
사람이라는 게 참,
빵―
안 되는 것에 집착을 하지.
“아, 됐다.”
또 어떻게든 맘에 들게 결과를 만들어내고.
2번타자, 강!! 대!! 현!!
어이고오오오, 호구 오셨소.
공에서 흘러나온 송진가루를 다시 재정비하는 동안 들린 장내 아나운서 목소리에 절로 씨익 미소가 지어졌다.
이 미소를 뭔 뜻으로 받아들였는진 모르겠다만,
“플레이!”
그 누구보다 강대현 본인이 제일 잘 알고 있겠지.
“읍!”
아, 좀만 더 하면 될 거 같은데.
딱-!
진짜, 진짜 조금만 더 어떻게 하면 칠 수 있을 것 같은데.
“파울!”
왜 안 되지?
정중앙에서 몸쪽으로 말려들어가는 싱커에 파울을 쳐내고서 이해가 영 되질 않는지, 강대현은 바로 타석을 벗어났다.
자기 딴엔 시간을 어떻게든 끌어보며 생각할 시간을 가지려는 합법적인 꼼수 같지만,
“…되겠니, 그게.”
얼른 게임 끝내고 집에 가자는 심판의 종용에 따라 강대현은 불편한 표정으로 다시 타석에 들어왔다.
특성 ‘불편’, 확실하구만.
다음 사인을 하나씩 골라내며 강대현의 자세를 흘끔흘끔 살폈다.
얼굴엔 불편함이 가득하고 움찔거리는 자세에선 목이 죄어지는 듯한 고통까지 느껴지는 것 같다.
“음….”
여기선 아무래도 치게 해주는 게 좋을 것 같은데. 헛스윙이나 루킹이 제일 안 좋고, 차라리 안타를 맞는 것도 괜찮다. 외야 플라이면 가장 좋고.
왜애, 그럴 때 있잖아. 답답하고 갑갑해서 그냥 내가 빠지는 게 서로한테 좋지 않을까, 생각하는 그런 때.
물론 그 ‘서로’라는 범위 안엔 나, 혹은 원하 챌린저스는 없다. 강대현 본인과 상수 타이거즈라는 팀만 있지.
“음…훈이 쪽이 좋으려나.”
만약 오늘 경기로 모든 게 끝난다고 하면 굳이 이런 것까지 신경쓸 필요는 없다.
그러나 나와 강대현은 한국시리즈에서도 만날 확률이 매우 크다.
따라서 오늘, 이런 가비지 게임에서 삼진 잡고 끝내는 것보다 한국시리즈에서 더더욱 큰 아웃카운트를 잡아내는 게 더 효율이 좋지 않을까?
그렇다면 어느 방향으로 치게해서 강대현의 자신감을 회복시켜주는 게 좋을까.
아무래도…….
따악-!
비록 아웃을 당한다 해도 제대로 끌어당겨 잘맞은 타구를 만들어냈다는 감정이 들 방향,
“레프트!”
“백! 좀만 더 뒤!!”
좌익수 살짝 깊은 플라이가 좋겠지.
가운데에서 몸쪽 높은곳으로, 살짝 대각선 구역에 박힌 직구는 일견 실투처럼 보이긴 했으나 애초에 그 점을 노렸다.
홈런 맞으면 어떡하냐고?
에이,
빡―
“아웃-.”
못 쳐.
완벽하게 조련된 타자 따위가 158km짜리 직구를 홈런으로 연결시킬 방법은 없다.
그럼에도 타자 본인은 ‘아쉽다’ 라는 감정을 느낀다. 잘 맞고, 잘 뻗어가던 타구를 보며 아마 당분간 그 환상에 갇힐 거다.
지금은 그 환상만 만들면 된다.
강대현은 아마 알아서 그 환상에 파고들 거고, 한 번 싹을 틔운 환상을 점점 본인을 잡아먹어,
“카운트 하나는 꽁으로 가져가겠네.”
아마 한국시리즈 때 강대현을 다시 만난다면, 지금의 이 자비는 커다란 은혜로 돌아올 거다.
3번타자, 이!! 용!! 호!!
아, 근데 넌 안 돼.
다음 타자의 등장 콜을 듣자마자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쯤되면 거의 자동반사 수준이 아닐까, 의심이 될 정도.
“후우….”
사실 어느덧 15년 가까이 지난 옛날 일이기도 하고, 사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나도 이용호에 대한 악감정은 아주 많이 옅어진 게 사실이다.
그 배경엔 ‘내가 너보다 훨씬 잘나간다’라는 선민사상 비슷한 게 깔려있긴 하지만, 팩트인 걸 어떡하나.
“끅!”
부웅―
“스윙-!”
초구부터 발목 높이로 떨어뜨린 스플리터에 어설픈 헛스윙으로 초장을 장식하는 꼴을 보라.
이거봐, 맞잖아.
하지만 아무리 악감정이 옅어졌다고 한들, 덕분에 다른 감정이 더욱 선명하게 대비되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게 어떤 감정들이냐,
“으윽!”
퍼엉-!
“스트라이크, 투!”
다른 사람들이면 모르겠는데, 너만큼은 내가 박살낸다. 물리적으로 박살내진 못 하더라도 야구선수 대 야구선수로선 절대적으로 박살낸다.
“끄악!”
부웅-!
“스윙, 아웃-!”
그것이 복수니까. 끄덕.
덕아웃으로 돌아가는 이용호의 옆을 스쳐지나오는 박해진에게서 고개를 떼어내고 내야수들끼리 라운딩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4번타자, 박!! 해!! 진!!
와아아악-!!
하지만 웅장하게 그의 목소리를 불러대는 장내 아나운서의 목소리라든가, 아니면 그를 열렬하게 추종하는 상수 타이거즈 팬들의 목소리는 영 집중도를 떨어뜨리는 방해물이었다.
어제 경기 전, 그리고 오늘 경기 전 나와 박해진이 나눈 이야기에 대해 아는 사람은 사실상 우리 둘 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야구 팬들, 혹은 야구에 관심있는 사람들이 알고 있는 대화문은 그저 오늘 8회에 홈런을 쳐서 60호 홈런을 달성하겠다, 그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과연 그 인터뷰를 들은 사람들이 ‘8회’라는 단어를 듣고 ‘김한울’ 이란 투수를 떠올렸을까…까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한 가지, 단 한 가지는 확실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게 있다.
“웃어?”
너, 못 하면 피똥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