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8회
각 선수들마다, 혹은 각 팀마다 딱 보면 떠오르는 키워드가 있다.
별명…이랑은 좀 거리가 있지.
동성의 현진이가 ‘국대 1선발’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지만 ‘김한울 바라기’라는 키워드를 가진 것처럼.
원하 챌린저스가 ‘최강원하’라는 별명을 갖고 있지만 ‘원어강’이라는 키워드를 가진 것처럼.
지금 눈앞의 박해진이 ‘리그 대마왕’이란 별명을 갖고 있지만 ‘완전체’라는 키워드를 가진 것처럼.
그럼 의미에서 ‘대한민국 국가대표 야구대표팀’과 ‘김한울’은 얼추 비슷한 키워드를 가지고 있다.
“후우….”
8회.
8회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그대들이 생각하는 모습, 혹은 그 이상을 보여준다는 키워드.
“윽!”
퍼엉-!
“보올-.”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한 초구는 몸쪽 깊숙한 직구.
아무리 몸쪽에 스트라이크는 필요없다기로서니, 반의반 개 정도 빠진 공을 저리 아무렇지도 않게 골라내는 모습을 보면 좀 배알이 꼴리긴 한다.
썩을 놈. 최소한 그 무슨 움찔거리는 그런 반응이라도 좀 해주지.
상대투수가 표정에 불만을 가득 담아 짝다리를 짚고 있음에도 박해진은 조금의 흔들림도 내보이지 않았다.
넌 너 할 거 해라, 난 나 할 거 한다. 딱 그 정도 자세.
좋게 말하면 아주 좋은 집중력의 발로이고, 나쁘게 말한다면 공감각이 결여되어있다는 반증이겠지.
“말고…말고…말고…오케.”
그 완벽하디 완벽한 박해진에게도 부족한 부분이 있구나, 그리고 그 부분을 메꿔주는 게 다른 누구도 아닌 나라면 과연 어떨까.
“끄윽!”
다른 무엇도 아닌,
빵―
아주아주아주 느린 커브라면 박해진의 어설픈 부분과 잘 어울리지 않을까.
“스트라이잌-!”
몇 km나 나왔으려나, 하고 확인하니 103km가 나왔다.
좋네.
이 정도 구속이나 되면 박해진의 감각을 끌어낼 수 있는 건지, 박해진은 잠시 심판에게 양해를 구한 뒤 타석에서 물러났다.
배트를 휘두른다는 느낌보단 타격 지점으로 배트를 받아준다는 느낌의 스윙.
박해진의 전매특허와 같은 연습 스윙이 끝난 뒤 다시 타석에 들어왔다.
저 스윙이 문제란 말이지 진짜…….
죽자살자 휘두르는 유형의 타자가 아니다. 그렇다고 어떻게든 맞춰보겠다고 아등바등거리는 유형도 아니다.
타고난 힘, 그리고 후천적인 노력으로 얻은 근력을 이용해 문자 그대로 ‘받아내는’ 스윙으로 지금까지 그런 악랄한 타격을 해온 거다.
그렇다고 스윙의 결만 이용해왔냐, 하면 또 그건 아니다.
“끄윽!”
뻐엉-!
몸쪽 낮은 곳, 그곳으로 향하던 싱커가 더 대각선 아래로 파고들자 두 손만 잠시 움찔거릴 뿐 결과적으론,
“…볼!”
심판조차도 고민이 많았던 판정을 먼저 끝내버린다.
“에라이.”
야구 조까치 하네, 그 감정의 결정체 같은 녀석.
검지와 중지 손가락. 모자, 글러브, 팔꿈치, 글러브.
예, 그럼 저도 좀 조까치 해보겠습니다.
“우윽!”
몸쪽에 직구가 하나 더 갈 건데요,
딱―
그냥 내가 넣고 만다, 이 새끼야.
텅―
“파울-!”
초구에 던졌던 직구보다 반의반 개 정도 더 집어넣은 직구에 나쁘지 않은 반응이었으나 오히려 너무 빨리 감아버린 탓에 타구가 3루측 덕아웃의 펜스를 맞고 튕겨나왔다.
그 와중에 저 선구안 보소.
초구보다 반의반 개 안쪽?
반의반 개 정도 빠졌던 초구를 아무렇지도 않게 골라내더니, 거기서 정확하게 반의반 개만 안으로 넣어주니 곧장 반응을 보이는 저 감응력이 이젠 그냥 놀라울 따름이다.
“카운트가….”
전광판을 흘끔 쳐다보니 노란불 두 개, 초록불 두 개, 빨간불 두 개, 모두 두 개씩 들어와있다.
“음….”
포수, 타자, 심판, 그쪽을 쳐다보지 않고 잠시 전광판을 노려봤다.
그러는 이유는 있었다.
159km.
방금 던진 직구의 구속을 보며 헛웃음이 나왔다.
특성 ‘승부’의 영향으로 구속 관련 능력치가 잠시 올라간 흔적이 보였다. 그리고 이 승부 특성이 발동하기 위해선,
“…허, 어지간히도 이기고 싶나봐, 나도.”
내가 이기고 싶은 상대와 상대할 것.
“이겨야지. 이겨야지…이겨야지.”
나 혼자 중얼중얼거리는 이 말의 의미는 어디서 퍼져나간 걸까.
5구째를 맞이하려는 박해진의 동작에서도 승부욕이 엿보인다.
너무 꽉 잡아 아예 우그러진 배팅장갑.
힘을 뺀다는 생각을 너무 의식해 살짝 내려가버린 고개.
강하게 치기 위해 살짝 포수쪽을 향하는 몸통.
타자의 승부욕을 확인했으니 이젠 투수의 승부욕을 보여줄 차례다.
두어 번 정도 고개를 저은 뒤 새끼 손가락으로 팔꿈치와 글러브, 그리고 모자챙과 다시 글러브를 찍었다.
미안한데,
“끄악!”
승부라는 게 참 웃긴 거라서 말이야.
빵―
굳이 힘 안 써도 될 때가 있더라고. 투수의 입장에서, 그냥 저 곳을 향한다는 마음만 가지…….
“…볼.”
엥?
낮은 보더라인에서 더 떨어지지 않도록 걸쳐잡은 규학이의 미트를 보고 덕아웃으로 돌아가려던 몸이 멈칫거렸다.
안 들어갔나?
순간 붕 떠오른 공에 제대로 반응조차 하지 못 한 박해진을 보고 아 이건 됐다, 그렇게 마음먹은 게 무색하게도,
걸치지 않았어요?
살짝. 살짝 낮았다.
아이고…….
109km짜리 커브는 아쉽게도 낮았다는 판정과 함께 볼 판정을 받고야 말았다.
“아놔….”
규학이에게 받은 반구를 이리저리 휙휙 손 안에서 돌렸다. 쩝, 하는 소리와 함께 이 공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하며 새 공으로 바꿔 달라는 뉘앙스를 표하자 심판이 새 공을 던져줬다.
헌 공을 볼보이가 있는 쪽으로 휙 굴린 뒤 심판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인 뒤 마운드 뒤로 빠져 로진을 새로 들어올렸다.
뽀득뽀득인지, 빠득빠득인지, 빡빡한 가죽의 감촉 위에 쫙쫙 달라붙는 송진가루의 감촉을 덧입힌 뒤 다시 플레이트를 밟곤,
“후우….”
규학이의 다음 사인을 기다린다.
바깥쪽 슬라이더 말고, 몸쪽 싱커 말고, 몸쪽에 커터 비슷한 그거 말고.
사인들이 다 왜 이래.
결국 하얀색으로 버무려진 오른손의 손가락을 모두 펴서 검은색 글러브 위에 올렸다.
검은색과 하얀색, 확실하게 대비되는 색 구성을 확인한 규학이가 검지 손가락 하나로 사인을 수정했고 이는,
“후…욱!”
내 검지 손가락, 그리고 중지 손가락 끝마디를 애태우게 만들었다.
순간 두 손가락에서 느껴진 통증에 이를 악물고, 고개가 홱 돌아가고, 눈을 질끈 감아버리고.
때문에 다음 상황 중 눈에 들어오는 건 그 어느 것도 없었지만,
퍼엉-!
부웅-!
내가 던진 직구가 규학이의 미트에 들어가는 소리, 그리고 반 박자 늦게 박해진의 배트가 돌아가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어….”
잠시 상황파악이 되지 않아 멍 때리고 있던 그 찰나가 억지로 늘여놓은 껌딱지마냥 가늘고 길게 느껴졌다.
포구한 뒤 일어나서 주먹을 불끈 쥐는 규학이.
헛스윙하고나서 포수를 확인하는 박해진.
루킹 삼진이 아니라 스윙 삼진인 탓에 다소 심심하게 오른손으로 주먹을 말아쥐는 심판.
“스윙, 아웃-.”
어…뭐지?
규학이가 해맑은 표정으로 달려든다. 무슨 한국시리즈 우승한 것도 아닌데, 양팔을 크게 벌리고 달려든다.
“혀엉, 잡았어요! 잡았다고!!”
“어….”
하지만 내 눈은 규학이가 아닌, 우타석에서 홈플레이트를 지나 1루 덕아웃으로 직진하는 박해진을 쫓고 있었다.
“형, X발, 대박! 이게 뭐예요! 형, 형 진짜 미쳤다니까, 형이 사람이야?! 사람이냐고!”
“김한울 나이쓰요오, 미친 형님아!”
“니가 사람이냐아악!!”
규학이는 답지 않게 욕설까지 섞어가며 흥분을 자랑하고, 뒤에서 쫓아오는 기성이는 내 등을 때리며 기뻐하고, 덕아웃에서 날 맞이하는 승주는 두 주먹을 머리 위로 올린 채 해맑게 웃고.
“…….”
아.
“…와.”
“뭐야, 반응이 뭔데 그것 밖에 안….”
“와아아악, 와아아, X바아아알!!! 와아아악!!!”
상황 파악 완료.
“와, 진짜. 이거 괜히 플래그 세우는 것 같아서 말은 안 하려고 했는데 이걸 진짜 하네.”
“규학이도 고생 많았다, 야!”
“아뇨, 한울이형이 잘 던진 거예요.”
팀 동료들이 날 칭찬하는 소리가 들린다.
“어떻게 평균자책점을 0점을 찍지?”
“사람 아니라니까?”
“이번에 몇 이닝 던졌냐?”
“한울이형 오늘 거 포함해서 62이닝이요!”
근데 핀트가 좀 어긋난 거 같은데.
“0점대도 아니고 0점짜리 평균자책점을 어떻게 찍냐, 진짜.”
“이번 시즌은 솔직히 빵울이 인정.”
“이 정도면 야, 시즌 MVP도 말도 안 되는 소리는 아니지 않냐.”
팀원들이 나를 보는 시선은 ‘한 시즌 평균자책점 0점’이라는 프레임을 씌워둔 시선이었다.
근데,
“아…그거.”
그건 딱히.
“그냥 운이 좋았던 거지, 뭐.”
그런 것보다, 혹은 그‘딴’ 것보다 나에게 더 중요한 걸 이뤄냈다는 감각이 더 무겁다.
아직까지 시끌벅적한 덕아웃 분위기를 뒤로하고 어느덧 1루 베이스를 밟은 채 본인 팀 내야수들의 라운딩을 도와주는 박해진이 보였다.
언젠가, 현진이와 대화를 나누며 무의식적으로 흘렸던 내 목표이자 꿈.
“…잡았다, 이 새끼야.”
박해진이랑 만나기만 하면 허구한 날 홈런이나 처맞던 쩌리 투수가 어느덧 그 타자에게 삼진을 잡아낼 정도의 투수가 됐다.
목표를 이뤘다는 지점에서 출발한 벅차오르는 감정은 그리 쉽게 꺼지지가 않는다.
탕탕탕탕-!
“야, 점수 더 내자, 더 내자!! 도망가자!!”
주체 못 한 감정을 덕아웃 난간을 때리는 것으로 분출시켰다.
주체 못 한 감정을 목에 핏줄이 솟아오르도록 소리치는 것으로 분출시켰다.
주제 못 한 감정을 양 손바닥이 벌게질 정도로 박수치는 것으로 분출시켰다.
때리고, 소리치고, 박수치고.
따악-!
때리고,
“들어와, 규학이 들어오고!!”
“훈이도 뛰어, 훈이도 홈 봐!!”
“야, 빠졌다, 그냥 다 들어와! 명진이도 뛰어봐!!”
소리치고,
“에에에이이!!”
“예에에에!!”
짜악-! 짝- 짜악- 짝!
박수치고.
세 가지 모션을 이행한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2아웃 주자 1루와 3루에서 명진이가 우중간으로 타구를 때려내고, 외야에서 잠시 중계 실수가 난 틈을 타 홈까지 파고든 명진이를 모두가 반겼다.
다섯 점.
제대로 승기를 잡아낸 원하 챌린저스가 9회 초 무려 다섯 점을 더 추가하며 리드를 까마득하게 벌려낸 뒤,
“경석 선배, 힘쇼오오어어!!”
“멋지게 드루와요!”
“멋지게 가자아악!”
오늘 경기, 그리고 이번 시즌의 마지막이 될 9회 말을 마무리 할 경석 선배가 마운드로 향했다.
점수차이가 꽤 벌어진 상황에서 굳이 마무리 투수를 올려야 하나, 라는 부담감이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꽤 좋은 그림이라 생각한다.
한 시즌 동안 마무리 자리에서 고생한 경석 선배가, 한 시즌의 마무리를 짓는 모습은 얼마나 멋질까.
경석 선배는 무참하게 상수의 타선을 짓밟았다.
5번타자 하해진을 초구부터 3루 땅볼로 잡아내고, 6번타자 헌철이는 삼구삼진으로 잡아내고, 7번타자 신태범을,
“떴다아!”
“콜, 콜 누구야!”
“마이, 마아아악!!”
팍―
유격수 뜬공으로 잡아내고.
“와아아아악!!”
“쌰아아악!!”
“야아악, 와아악!!”
명진이가 타구를 잡는 순간 덕아웃의 모든 이들이 뛰쳐나갔다.
한 시즌 동안 고생한 팀 동료에게.
한 시즌 동안 같이 웃었던 후배에게.
한 시즌 동안 너무 미안했던 코치진들에게.
그리고,
원하 챌린저스의 도전을 계속 이어집니다. 쭈우우우욱―
한 시즌 동안 우리의 성장을 빠짐없이 지켜봐준 팬들에게.
감사함을 전달할 수 있는 모든 이들에게 고개를 숙이고, 미소를 짓고, 또 끌어안았다.
나가자, 싸우자, 승리의- 챌린저스, 원하의, 승리를, 위하여!!
와아아악!!
분명 원정인데, 혹은 원정이기 때문에 원하 챌린저스의 팬들은 더더욱 목소리를 높여 육성으로 원하 챌린저스의 응원가를 불러제꼈다.
그리고 같은 홈구장을 쓰는 상수 측이 먼저 자기 팀 팬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한 뒤, 상수의 양해를 받아 3루측 관중석을 바라보며 한 시즌의 소감을 말할 기회가 생겼다.
“어….”
와아아악-!!
욜럽 이저 와아아알 칻! 폴딩 잊어 하아알 팓!
김한울! 김한울! 김한울!
마이크를 잡자마자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팬들 때문에 내가 할 말 중 단 한 마디도 꺼내지 못 했다.
“…….”
그리고 그게 너무 좋았다.
“아까 저거, 플래카드 보셔서 아시겠지만.”
아직까지 펼쳐진 시즌 종료 플래카드를 흘끔 쳐다봤다.
“…아직 남았습니다. 예, 아직 안 끝났습니다. 솔직히 올해 저도 그렇고, 우리 원하도 그렇고 좋은 모습 많이 보여드렸다고 생각합니다.”
맞아요!
원하아악!!
김한울! 김한울! 김한울!
“빠르게 시즌 1위 찍었고, 한국시리즈 직행했고, 저도 저 나름대로 레전드 하나 썼고. 꽤 괜찮은 한 해였다고 자부합니다. 근데. 근데.”
이번엔 내 뒤에서 나를 든든하게 받쳐주는 팀원들을 쳐다봤다.
“아직 더 좋은 거 보여드릴 시간이 남았습니다. 그때 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