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성장통?
둥, 둥, 둥, 둥―
묵직한 드럼의 킥 베이스.
탓! 탓!
그리고 날렵한 스네어.
뚱- 뚱―
거기에 리드미컬한 베이스까지.
따- 따다다단―
추가로 강렬한 기타 리프까지 얹어주면 배경음악 하나 완성.
강렬한 밴드 음악에 맞춰 선수들의 활약상이 짤막하게 스쳐지나갔다.
역사.
아웃타이밍이 분명한데도 홈에서 역사적인 슬라이딩으로 득점을 기록하는 상수 타이거즈의 1번타자 고동욱.
압도.
깡패처럼 공을 후두려 팬 뒤 무덤덤하게 베이스를 도는 원하 챌린저스의 2번타자 강성현.
열정.
펜스에 부딪혀가며 플라이 타구를 잡아낸 뒤, 1루에서 이미 출발했던 주자까지 잡아내는 상수 타이거즈의 우익수 박명기.
끈기.
바운드된 공을 잡아 어떻게든 2루에서 도루를 잡아내는 원하 챌린저스의 포수 문규학.
그리고,
따악-!
- 아, 아주 낮은 공을 퍼올렸는데, 이 타구가! 타구가 한 번 더, 다시 한 번 더 중앙 담장을 향해애애!! 넘어갑니다아아!! 박해진의 끝내기, 끝내기 홈러어언-!!
환희.
포수가 블로킹을 해야되나 말아야 되나 고민할 정도로 낮은 공을 억지로 퍼올려 중앙 담장을 넘겨버리는 상수 타이거즈의 4번타자 박해진.
마지막으로,
퍼엉-!
- 이번 시즌, 김한울은 무적입니다. 그 누구도 대적할래야 대적할 수가 없는, 부정할래야 부정할 수가 없는 완전무결한 투수입니다!
기대.
무사 만루의 대위기를 직구 하나만 가지고 마무리한 뒤 덤덤하게 마운드를 내려오는 ‘나’.
증명하라.
원하 챌린저스의 주역들, 그리고 상수 타이거즈의 주역들이 마주 보고 선 이미지를 마지막으로 2020시즌 한국시리즈 티저 영상이 끝났다.
“지금부터, 2020시즌 한국시리즈 미디어데이를 거행하겠습니다.”
영상이 끝나자마자 굵직한 목소리의 MBS 캐스터, 권명훈 캐스터가 비장한 표정으로 미디어데이의 시작을 알렸다.
“안녕하십니까, 야구팬 여러분. 2020시즌 한국시리즈 미디어데이를 진행할 MBS 캐스터, 권명훈입니다.”
그는 장내의 분위기가 최고점에 찍은 것을 확인한 뒤,
“먼저, 원하 챌린저스에선 이한주 감독님과 김한울 선수, 그리고 이명진 선수께서 참석해주셨구요, 상수 타이거즈 측에선 김석주 감독님과 박해진 선수, 그리고 신헌철 선수가 참석해주셨습니다.”
간단하게 오늘의 주인공들을 소개했다.
저마다 간단한 인사와 소개말을 전하고 처음으로 떨어진 질문은,
“작년과 똑같은 구도로 이 자리에 앉게 되셨는데요, 우선 양팀 감독님들께 소감 한 말씀 부탁드려도 될까요?”
지금 뭔 생각을 하는지에 대한 질문.
우리 감독님은 작년보다 더 강해진 마음으로 이 자리에 앉아있다 대답했고 저쪽 감독님은 작년과 같은 마음으로 앉아있다 맞받아쳤다.
“그렇다면 양팀 주장 분들께도 질문 드리겠습니다. 이번 시즌 팀원들 중에 가장 고마운 팀원이 있다면 누구일까요? 먼저 상수 타이거즈의 주장, 신헌철 선수부터 말씀 부탁드릴까요.”
“당연히 여기 있는 해진이죠. 단순히 눈에 보이는 성적도 중요하겠지만 한 팀에 소속된 사람으로서 가져야 할 덕목이라는 게 있잖아요. 그 부분에서도 해진이가 정말 고맙죠.”
한 팀에 소속된 사람으로서 가져야 할 덕목?
“음….”
내가 아는 누군가를 저격하는 멘트로 느껴진다만, 기분 탓이겠지.
“그렇다면 김한울 선수는 어느 선수가 가장 고마운 선수일까요?”
“어….”
고마운 팀원이라…….
“…저요.”
“예?”
베테랑 답지 않게, 권명훈 캐스터가 얼빠진 소릴 냈다. 그에 확인시켜줄 겸,
“저요.”
다시 한 번 나를 거론했다.
“어…제가 지금 대단히 당황스러운 게, 지금까지 미디어데이 행사를 진행하면서 본인을 꼽는 주장은 처음 봐서요.”
꼽을 준다거나 눈치를 준다기보단,
“이런 경험은 대단히 신선하게 느껴집니다.”
그냥 재밌어하는 표정이다.
“혹시 이유가 있을까요?”
“아까 헌철이가 얘기한 것들 있잖아요? 뭐 성적, 팀원들에 대한 어떤 뭐 그런 거 등등. 그거 제가 다 했습니다.”
그치만…….
“제가 봐도 그래요. 올해 한울이가 가장 고생도 많았고, 또 한울이가 많이 애썼죠.”
감독님도 인정해주시는걸?
“그럼 이명진 선수와 박해진 선수가 생각하는 각 팀의 주장들은 어떻게 평가하시나요?”
그 질문에 박해진은,
“항상 모든 팀원들을 아우러주시고, 제가 어려울 때마다 먼저 나서서 도와주시는 고마운 분입니다.”
이렇게 대답했다.
그에 반해 우리 명진이는…….
“같이 술 안 마셔주는 나쁜 형이요.”
“예?”
아, 제발.
이마를 짚는 소리가 내 왼쪽에서 같이 들리는 걸 보니 우리 감독님도 나와 같은 자세를 취했나보다.
아하하, 이 새끼가 지금 이런 자리에서 뭐라는 거야, 내가 잘못 들은 거겠지, 아하하하, 에라 모르겠고 다음 질문이나 넘어가자.
“작년 한국시리즈에선 원하 챌린저스가 아쉽게도 4 대 3으로 패배했습니다. 이와 관련해 미리 준비하신 내용이 있을까요?”
권명훈 캐스터는 그런 표정으로 큐시트를 다음 장으로 넘겼다.
“사실 제가 준비한 건 딱히 없습니다. 감독의 입장에서 부끄러운 이야기긴 하지만, 선수들이 워낙에 잘해줘서요. 그저 선수들이 엇나가지만 않게 잡아주면 될 것 같습니다.”
“김한울 선수는요?”
“선수들한테 부탁하기로 몸 관리만 잘하자고 했습니다.”
“컨디션 같은 이야기일까요?”
“네. 감독님 말씀대로 워낙에 다들 잘하니까요. 다치지만 말고, 자기들이 갖고 있는 것만 잘 풀어낸다면 충분히 이길 거라 생각합니다.”
“이명진 선수도 한 말씀 부탁드릴까요?”
“경기에서 이기는 준비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영웅이 될 준비는 모두 마친 상태입니다.”
미친놈인가.
미디어데이는 전반적으로 이런 분위기로 진행됐다.
양팀 감독님들의 비장한 각오.
양팀 주장들의 자신감 넘치는 발언.
박해진의 멋있는 말 한 마디.
“제가 만약 이번 시즌이 끝나고 영웅으로 추대 받는다면 그건 모두 여기, 여기 옆에 있는 한울이형 덕분입니다. 제 스승이시거든요.”
거기에 추가되는 명진이의 쌉소리.
이런 분위기 속에서 타팀 선수들의 인터뷰를 잠시 본다거나, 팬들의 선호도를 지켜본다든가 하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자…벌써 마지막 질문이네요.”
이 시간이 어찌나 빠르게 지나갔는지 벌써 끝날 시간이란다.
“작년과 비슷하면서도 작년과 묘하게 다른 분위기 속에서 다시금 한국시리즈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해 각오, 마지막으로 부탁드립니다.”
각오.
“우승은 상수 타이거즈가 하는 게 다른 분들께도 익숙할 겁니다.”
이런 자리에서 너무나도 흔하게 들을 수 있고 물어볼 수 있는 말이다.
“글쎄요, 그 논리가 맞다면 정규시즌 1위 팀이 한국시리즈까지 우승하는 게 다른 분들께도 익숙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조금만 삐끗하면 구설수에 오르기도 딱 좋은 자리지.
“그냥 상수 타이거즈가 우승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시는 게 편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때문에 말 잘해야한다.
“당연하다고 생각하던 게 언제까지고 당연하게 작용하지는 않더라구요.”
조금만 삐끗하면 싸가지 없다는 구설수에 휘말릴 수 있다.
“근데 그 당연한 게 아니게 되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생각보다 꽤 길 겁니다.”
아니면 그렇게 자신감이 없어서 얻다 써먹겠냐 핀잔을 들을 수도 있고.
“꼭 제가 영웅이 되어보이겠습니다. 영웅이 되어, 제 스승님께 칭찬 받겠습니다.”
넌 빼고, 새끼야.
“다들 말씀 감사합니다. 그럼 내일, 잠실구장에서 펼쳐질 대망의 한국시리즈에서 뵙도록 하겠습니다!”
* * *
“고생했고. 내일 보자고. 몸 똑바로 와라.”
“그럼요, 당연하죠, 네네치….”
“…….”
“…예. 컨디션 조절 잘해서 가겠습니다.”
감독님이 본인 차에 올라 떠나는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
“…아.”
…내려다가 없다는 걸 깨닫고 멈칫거렸다.
“흐음….”
이럴 때 한 대 피우면 분위기 좋고 작살나고 멋있고 그러는데.
“왜 그러세요?”
“아니, 잠깐 딴 생각 좀 하느라고.”
담배를 입에 대지 않은 지 꽤 긴 시간이 흘렀다.
시도 때도 없이 담배가 생각나던 위기는 확실히 지난 것 같고, 사소한 부분에서 오는 습관 같은 데서 멈칫거리는 정도에 온 것 같다.
“형님.”
“왜.”
“저 오늘 말 잘한 거 같습니다.”
어…….
“…그래. 잘했지.”
그냥 그렇다 해주자.
“저한테 좀 배워보시겠습니까?”
“아냐, 괜찮아. 나한텐 너무 높은 세계라 엄두가 안 난다, 야.”
“괜찮습니다. 저에게 영웅에 대한 가르침을 전수해준 분이니만큼 충분히 가능하십니다.”
제발.
이렇게 명진이와 노가리나 까면서 잠시 주차장에 머물렀다.
작년에도 그랬고 그전에도 그랬던 거 같은데, 미디어데이는 뭔가 묘-하게 집에 가기가 싫다.
아쉬움 같은 건가.
아까 이렇게 말할 걸, 이렇게 말하는 게 더 좋지 않았을까. 그것도 아니면 그냥 시즌 전반적인 부분에 대한 아쉬움일 수도 있고.
“넌 뭐 따로 준비한 거 있냐?”
그래서 그런지 과거에 집착하기보단 오히려 미래에 몰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저요? 그냥…하던대로 하는 거죠.”
“하던대로면…충분하지.”
“그쵸.”
작년에 하던대로면 올해 이길 거란 보장은 없다.
왜?
작년에 졌는데, 작년이랑 똑같이 하면 당연히 지겠지.
“올해가 진짜 적기야. 올해는 진짜 우승해야돼. 많이 달라졌어. 애들 분위기도 그렇고, 생각하는 것도 그렇고, 경험도 그렇고.”
하던대로, 이 의미는 올해에 국한되는 것이다.
다년간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오며 쌓인 경험.
가장 큰 무대까지 밟아봤다는 자신감.
우리도 충분히 상수와 대적할만한 자격이 있구나, 하는 안도감.
“올해는 다르다.”
“아이씨, 이상한 플래그 세우지 말고.”
“이 전쟁이 끝나면, 내 맥주 한 잔 사지.”
뇌절, 멈춰!
“근데 형님.”
“…왜.”
“그러고보니 올해가 진짜 마지막이지 않아요?”
“뭐가.”
“그때 왜. KP랑 준플레이오프하기 전에 했던 말이요.”
“아…그 3년 어쩌고 했던 거. 맞지. 올해가 마지막이지.”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요.”
“뭔데.”
“그때 왜 3년을 얘기하신 거예요?”
그때…왜 내가 3년이라 그랬더라.
“흠…그때 당시로 우리팀 나이랑 수준이랑 얼추 계산해봤거든. 그때 우리 실력으로 1년, 2년 갖곤 어림도 없을 것 같고. 4년 넘어가자니 너무 루즈해질 것 같고.”
“그래서 3년이요?”
“그치.”
“그럼 올해는 확실히 될 거라고 생각하시는 거네용?”
명진이의 말에 빠르게 암산해본다.
“돼.”
그리고 답변도 빠르게 내본다.
“너 그런 거 느끼지 않냐. 스읍…왜 상수가 예전만 못 하게 느껴지지, 이런 거.”
“어….”
혹시 누가 들을까, 명진이는 주변을 한 번 살핀 다음,
“…예. 좀 있어요.”
조용하게 대답했다.
“그게 상수가 못하는 거라 생각하냐?”
“아뇨? 그건 아니죠. 상수 엄청 세요. 다른 팀들 나자빠지는 거 보면 답 나오잖아요.”
“맞어, 상수 여전히 세. 아니, 객관적으로 보면 상수는 오히려 옛날보다 더 세.”
“그렇…죠. 다른 팀들이랑 하는 거 보면 오히려 더 무섭게 몰아붙이던데요?”
“근데 왜 우린 그런 상수를 보고 예전만 못 하게 느끼겠어.”
“어…우리가 더 강해서?”
“그거지.”
두루뭉술하게 펴낼 수 밖에 없지만 사실이다.
“투수, 수비, 타격, 주루. 그리고 멘탈이랑 파이팅. 어느 하나 빠짐없이 우리가 더 강해.”
“…근데 좀 걱정이에요. 형님이 그렇게 얘기하니까.”
“뭐가 걱정이야, 또.”
“형님 말대로면 우리가 너무 급작스럽게 커진 감이 있잖아요.”
“거품 같이 느껴진다고? 그래서 더 급하게 가라앉을까봐 걱정된다고?”
“예.”
사실 나도 이런 걱정이 드는 건 사실이다.
원래 사람이 커가면서 성장통이라는 것도 겪는데,
“사실 우리가 최근 포스트시즌에서만 탈락했었다 뿐이지, 성적 자체로만 놓고 보면 정말 좋은 팀이잖아요.”
우리의 지난날을 생각하면 포스트시즌에서 겪었던 좌절들은 성장통 축에도 못 끼는 것들이다.
“그게 우리 역할인 거지. 너무 다급하게 무너지지 않도록, 너무 거품이 빨리 꺼지지 않도록.”
“그걸 제가 할 수 있을까요?”
“못 할 것 같아도 해야돼. 어쩔 수 없어.”
“어렵네요.”
어렵지. 당연히 어렵지.
“어려울 게 있나. 그냥 했던 거 또하고, 질리도록 또 하고 계속하고 맨날하고. 그거면 돼.”
근데 이거보다 어려운 일은 세상에 널렸다.
“그러니까, 다치지 말고 내일 조심히 오라고. 괜히 삽질하다 어디 다치지 말고. 이런 데서 다치면 거품이고 나발이고, 그냥 다 개판이여.”
“아이, 그럼요. 영웅은 절대 다치지 않습니다.”
정신 나갈 것 같네, 진짜.
“그럼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들어가. 내일 보고.”
“예!”
먼저 떠나는 명진이의 등을 보다보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