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삼위일체
나는 올해 무엇을 했는가.
나는 올해 잘 살아왔는가.
나는 올해 어떤 사람이었는가.
“후우….”
그 답변을 얻기 위한 짧은 여정 앞에 서서,
툭툭―
오른손으로 내 왼쪽 가슴을 툭툭 쳤다.
“…오케.”
국민의례가 끝난 뒤 덕아웃으로 돌아왔다.
평소 같았으면 시끄럽게 박수치고, 시끄럽게 소리치고, 정신 사납게 싸돌아다녔겠지만, 지금은 그러지 않았다.
그냥 가만히 서서, 팔짱을 끼고 서서 그라운드의 동향을 살폈다.
빵빵 포수미트를 울려대는 혁준이.
내야진들을 진두지휘하는 성훈이형.
캐치볼보다 스트레칭을 우선시하며 몸을 푸는 성현이.
배터리, 내야와 외야진들까지 모두 한눈에 담고 나서야 마음이 놓인다.
1번타자, 중견수 고동욱
원하가 이 커다란 시리즈를 위해 베스트 라인업을 구성했듯, 상수 또한 본인들이 만들 수 있는 라인업 중 가장 빡빡한 스타팅 엔트리를 만들었다.
고동욱, 강대현이 물꼬를 트고 이용호, 박해진, 하해진이 해결한 뒤 헌철이, 신태범, 박명기, 민종현이 다음을 잇는 배팅 오더.
근데 뭐, 어제 명진이랑 얘기했듯,
퍼엉-!
“샤잌, 아웃!”
상수가 못하는 게 아니다.
띡!
빡!
“아웃!”
원하가 잘하는 거다.
“아우, 혁준이 수비 좋네!”
“여유 많다, 천천히! 천천히!”
그리고,
따악-!
“쇼옷!!”
“나이스 스탑!”
“명진이 빠르게!”
빡-!
“아웃!”
당연한 소리겠지만, 더 잘하는 팀이 이기는 건 아주 당연한 일이다.
마치 숨 쉬는 게 산소를 조금이라도 더 채취하기 위함이라는 말과 아주 똑같은 말이지.
뭔 소린지 잘 모르겠다고?
따악-!
“성현이 홈 보자, 홈!”
“에이, 슬라이딩 슬라이딩!”
“왼쪽, 왼쪼옥!!”
원하 챌린저스가 상수 타이거즈보다 더 강한 팀이다.
강한 팀이 이기는 건 아주 당연한 일이다.
따라서,
“세잎!”
원하 챌린저스가 상수 타이거즈에게 이기는 건 아주 당연한 일이다.
“진형이 나이쓰 배앳!!”
“진형이 이뻐, 아주 이뻐어!!”
“가가, 승주도 하나 보여줘!”
“보여줘, 보여줘!!”
1회 말, 이 논제를 위한 초석을 먼저 얻어냈다.
성현이가 안타를 치고, 기성이가 진루타를 어떻게든 쳐낸 뒤 진형이의 적시타.
그리고 뒤이어 나오는,
따악-!
“…갔네.”
승주의 클러치 홈런.
“나이쓰 승주형!!”
“승주형 얼른 들어와, 재깍재깍 뛰어와, 빨리 뛰어와아악!!”
승주의 투런으로 시작부터 멀리 도망간 원하 챌린저스는 이렇게 생각했다.
따악-!
다른 건 몰라도, 1차전만큼은 좀 쉽게쉽게 넘어가겠구나.
“…염병.”
하지만 쉽게쉽게 넘어가는 건 박해진의 타구였고.
혁준이는 잘 던졌다.
154km짜리 테일링 섞인 직구가 바깥쪽으로 도망가는 걸 그냥 잡아당겨서 저 먼 담장을 넘길 줄 누가 알았겠나.
타구가 넘어간 곳을 바라보던 혁준이는 박해진이 3루를 돌 때쯤, 어깨를 한 번 으쓱거리더니 심판을 향해 글러브를 들어보였다.
“쟤도 멘탈 많이 좋아졌네.”
성장했구나. 멘탈이 어쩌고 했던 게 고작 저번 달인데.
코 밑을 스윽 훑어야 하나, 그렇게 고민하는 사이 규진이형이 뜬금없는 소릴 냈다.
“너 욕 많이 하던데.”
“누가.”
“혁준이가.”
“…내 욕을 왜 해. 내가 뭘 잘못했다고.”
“너가 너무 강하게 키워서 그렇다는데.”
강하게…….
“이 바닥에서 약한 자는 살아남지 못한다, 뭐 그런 소릴 하셨던 게 누군데요.”
“아이씨, 술 처먹고 한 소리는 하지 말라니까.”
규진이형의 열렬한 반응을 보니 괜스레 집어먹었던 긴장감이 소화되는 게 느껴졌다.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은 건지, 혁준이는 씩씩하게 제 역할을 수행했다.
하해진에게는 유격수 뜬공.
헌철이에겐 공 네 개로 삼진.
신태범에겐 공 세 개로 중견수 플라이.
“…형.”
“왜.”
진형이가 타구를 잡아내는 모습을 보며 해맑게 웃는 혁준이를 보고 있자니 궁금한 게 생겼다.
“형은 긴장 안 돼?”
“긴장할 게 뭐 있다고 그런 걸 해.”
이 사람도 참 멘탈 좋아.
“내일 선발이잖아.”
“언젠 선발 아니었나.”
그런 의미가 아닌 거 뻔히 알면서.
“그럼 넌 왜 그렇게 긴장하고 있냐?”
“음….”
나처럼 덕아웃 입구 앞에서 팀원들을 기다리는 혁준이.
혁준이의 등짝을 후려갈긴 뒤 쌔앵 덕아웃으로 들어가버리는 명진이.
그런 명진이를 따라 얼른 쌔앵 들어가버리는 진형이.
“긴장이긴 한데. 정확하게 긴장이라기 보단….”
멋지게 이닝을 마치고 돌아오는 팀원들을 보며 잠시 생각했다.
지금 내가 느끼는 이 감정은 뭘까.
지금 내 머릿속에 들어있는 생각은 뭘까.
지금 내가 그라운드를 바라보는 시선은 무슨 뜻일까.
“…그냥. 그냥 생각이 좀 많네.”
“언젠 생각하면서 살았던 것처럼 얘기하네.”
“선생님, 저도 사람인데 생각 정도는 하고 살지 않겠습니까.”
“안 그랬던 것처럼 보여서요, 선생님.”
에이씨.
8번타자, 문!! 규!! 학!!
뭐 씹은 표정으로 규학이가 타석으로 걸어가는 모습을 눈에 담았다.
“생각하지 말라고, 그냥.”
자기가 말해놓고도 미안했는지, 규진이형이 한 마디 새로 추가했다.
“…생각 많은 것보단 낫다, 뭐 그런 건가.”
“아니. 생각없이 살던 놈이 그러고 있으면 어디 아파보여.”
“X발.”
미안한 게 아니라 그냥 엿 좀 더 맥이고 싶어서 한 소리였나보다.
“너가 생각할 게 있냐. 지금 네가 지금 당장에 뛰는 것도 아닌데.”
“지켜보는 입장이라 더 그런 거 아닐까 싶은데.”
할 수 있는 게 박수치고 응원하고 목소리 높이는 것 밖에 없는 사람은 무슨 마음으로 덕아웃에 앉아있을까.
나도 경기에 나가고 싶다?
부담되니까 그냥 나가기 싫다?
아, 나는 모르겠고 그냥 이겼으면 좋겠다?
“뭔가…조금이라도 도움 될 게 있을까, 그런 거 생각하는 거지.”
글쎄, 대부분의 사람이 내가 경기에 뛰어서, 내가 활약해서, 그렇게 이기는 경기를 하는 생각하지 않을까.
“그런 거 없어.”
하지만 규진이형은 현실을 이야기했다.
“니가 규학이 대신에 배트 들고 타석 들어갈래? 아니면 시리즈 전부 니가 완투할래? 그거 아니잖아. 애초에 그렇게 될 리도 없고.”
“아니지. 그리고 없지.”
“그러니까.”
따악-!
“그냥 이따가 너 올라갈 때 대비해서 몸이나 풀어.”
* * *
규진이형의 말로 인해 복잡했던 생각은 빠르게 정리됐다. 아니, 잠깐 잊고 있던 걸 다시금 깨달았다는 게 정확할 수도 있겠다.
퍼엉-!
“어우, 굿볼!”
내가 해야하는 것.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것.
빠앙-!
“어우, 오늘 포크볼 좋아요!”
역시, 생각이 많을 땐 그냥 공 잡는 게 가장 좋은 해결책인 것 같다.
어쩜 공 딱 잡자마자 잡생각이 그렇게 휴지조각처럼 휙 날아가 버리는지.
“직구.”
“헤이!”
퍼엉-!
“아우우우!”
건영이가 내는 늑대 성대모사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형, 지금 너무 좋으니까 힘 쬐애끔만, 진짜 요맨큼만 빼도 돼요!”
충고를 겸허히 받아들여, 쓸데없이 부스팅 된 근력을 내려놓기 위해 플레이트 뒤로 물러났다.
“후우….”
7회 말 2아웃, 스코어는 1회에 냈던 총합 네 점의 점수가 아직까지 유효하다.
그리고,
딱―
“한울이, 라스트 가야겠다.”
“예.”
8회 초를 맞이한 현재도 그러하며,
퍼엉-!
“형님 나이쓰!!”
약 10분 뒤, 8회 초가 끝났을 때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Your love is a wildcard, Folding is the hard part―
욜럽 이저 와-알드 카악!! 뽈딩 이저 하-알 파악!!
와아악-!!
김한울! 김한울!
불펜의 문이 열리자마자, 전광판에 내 이름이 등장하자마자, 내 등장곡이 구장 전반에 울려 퍼지자마자 모든 이들이 환호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I don't know if you'll hold me, Or leave me here feelin’ lonely―
노래를 흥얼거리며 마운드에 도착했다.
불펜에서 밟던 플레이트와 똑같은 재질의 플레이트를 밟고 우리 덕아웃을 쳐다봤다. 그리고 고개를 올려 그 위 관중들을 쳐다봤다.
“해야되는 일이랑 할 수 있는 일이 같다는 건 참 좋은 일이야.”
해야되는 일. 앞으로 등장할 상수 타이거즈의 타자 세 명을 깔끔하게 막아내는 것.
할 수 있는 일. 앞으로 등장할 상수 타이거즈의 타자 세 명을 깔끔하게 막아내는 것.
그리고,
“…하고 싶은 일도.”
하고 싶은 일. 앞으로 등장할 상수 타이거즈의 타자 세 명을 깔끔하게 막아내는 것.
삼위일체와 같은 아름다운 구성에 로진백을 말아쥐는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후!”
손에 과도하게 달라붙은 송진가루를 입김으로 흩날린 뒤 규학이에게 스플리터를 던지겠단 사인을 보냈다.
피처 플레이트 위에 외롭게 굴러다니던 공이 어디 상처받은 곳은 없는지 짤막하게 확인하고,
“웁!”
투닥―
블로킹이 아닌 적당한 미트질만으로 받아낼 수 있는 곳으로 스플리터가 떨어졌다.
괜찮네.
기타 여러 구종들을 빠짐없이 점검했다.
직구가 빠지진 않는지, 커브의 회전은 어떤지, 체인지업이 빠르진 않은지, 슬라이더가 풀리진 않는지, 싱커가 밀려들어가진 않는지.
컨디션이 좋은 구종, 쓸만한 구종, 신경써야 하는 구종, 오늘은 못 쓰겠다 싶은 구종들을 간단하게 솎아내면,
“플레이!”
나를 가리키는 심판에게서 눈을 떼고 포수에게 집중한다.
싱커만 아니면 전반적으로 다들 쓸만한 것 같은데 규학이는 어떤 사인을 낼지 궁금하네.
“…오케.”
그 첫 궁금증은,
“읍!”
뻐엉-!
“스라이잌-!”
5번타자 하해진의 몸쪽에서 몸쪽으로 파고드는 슬라이더로 해결됐다.
그렇다면 당연히 꼬리를 무는 다음 궁금증.
이 다음 공은 뭘까.
“윽!”
딱―
“파울-!”
이 또한 깊숙하게 파고드는 직구로 빠르게 해결되었다.
프론트도어 슬라이더, 그리고 볼에 가까운 직구.
빠득빠득―
플레이트에서 잠시 벗어나 손에 힘을 주고 공을 닦아냈다. 시선처리에 미숙한 감을 느껴 슬쩍 고개를 돌리니 복잡한 표정의 상대 팀 덕아웃이 보인다.
“그치, 포기해야지. 그게 맞지.”
내가 있는데.
내가 지금 마운드에 있는데.
내가 지금 8회를 도맡았는데.
지금에 와서 생각하지만, 미디어데이 때 봤던 티저 영상 그거 누가 만들었는진 모르겠지만 오류가 하나 있던 것 같다.
압도?
“끄윽!”
퍼엉-!
“샤잌, 아웃!”
그 아이콘을 나한테 붙여야지, 왜 다른 사람한테 붙여.
자기 앞에 서있던 타자가 시무룩하게 돌아오면 다음 타자는 할 수 있다는 표정으로 힘을 불어넣어줘야 하건만,
6번타자, 포수 신헌철
헌철이는 하해진보다 더욱 위축된 표정으로 타석에 나타났다.
“압도…압도….”
어젠 그렇게 잘도 뭐라뭐라 지껄이더니, 오늘따라 꽤나 침울해보이는구나, 헌철아.
“끄악!”
퍼엉-!
“스라이잌-!”
아무런 반응조차 하지 못하는 타자를 볼 때, 그리고 그 모습이 몇 번이고 오버랩 될 때마다 그런 생각을 한다.
“끕!”
부웅-!
“스윙-.”
내가 진짜로 압도라는 걸 하고 있구나. 그게 피지컬이든 뇌지컬이든, 정말로 내가 어떤 사람을 압도하고 있구나.
2스트라이크를 잡아놓고 잠시 로진백을 주물럭거리며 일부러 시간을 끌었다.
빠른 인터벌 좋지. 타자가 생각할 시간을 뺏고, 타자가 뭘 준비하기도 전에 내가 먼저 찌르고 들어간다는 그 이점은 당연히 크니까.
하지만 지금도 그럴까.
빠른 인터벌이 좋다는 건 타자가 뭘 생각하거나 계산할 겨를조차 없을 때 좋다는 거고, 지금처럼 생각이 많을 땐 오히려 시간을 주는 게 낫다.
그냥 날아오는 공 보고, 그에 맞춰서 팔을 뻗기만 하면 되는 걸 갖고 어느 쪽으로 허리를 돌려야 하는지, 어디를 봐야 하는지, 어디로 손목을 내야 하는지 세세하게 생각하고 있다.
“읍!”
그런 타자에게 생각할 시간을 준다는 건,
빵―
당연히 선택의 폭을 활짝 넓혀준다는 소리가 되고,
“샤잌, 아웃!!”
이는 자연스럽게 타자가 결정장애를 느끼도록 만들어버린다.
“후….”
얼마 안 남았다.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굴러다니는 택배 상자들마냥, 바로바로 공급되는 다음 타자를 보며,
“…오.”
미약한 감탄을 느꼈다.
주눅든 채 타석에 들어섰던 하해진이나 압도당한 채 나타난 헌철이와는 다르게 신태범은 꽤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등장했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는데, 난 할 수 있어.
표정뿐만 아니라 평소보다 크게 흔들리는 배트나 평소보다 넓게 벌린 스탠스에서도 그 증거를 찾을 수 있다.
“말고…그거 말고…그것도 말고…아니…오케.”
진부하게 느껴질 수 있으나 이런 타자라면 다른 의미로 쉽게 압도할 수 있다.
“흡!”
살살 구슬리거나 꼬드겨서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오는 것.
딱―
“파울-!”
사실 그건 좋게 표현한 거고, 그냥 가지고 논다는 게 더 적당한 표현이려나.
바깥쪽 직구에 얼추 타이밍이 맞는 파울이 나오자 신태범이 오늘의 제 컨디션에 확신을 가지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 이 정도면 쌉가능이지.
“끄윽!”
맞다. 쌉가능이다.
딱―
“마이이이이, 내가 잡을게!”
투수 플라이 쌉가능.
팍―
“아우웃-.”
내가 직접 잡은 공을 무심하게 플레이트 주변에 떨군 뒤 터덜터덜 걸어 덕아웃으로 돌아갔다.
가는 길에 규학이와 주먹을 맞대기도 하고, 명진이와 어깨를 부딪히기도 하고, 훈이와 서로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내가 이 정도여.”
“이정도 씨라구요?”
“미친놈인가.”
“전국에 계신 이정도 님들께 사과해라.”
“죄송합니다.”
쌉소리를 나누기도 하고.
각각의 팀원들과 동일시하는 자세나 이야기는 달랐지만 단 한 가지.
“에이, 에이! 찰칵!”
“찰칵!”
“찰칵-!”
착한 사람만 볼 수 있다는 핸드폰 카메라 구도 안에 들어오려고 노력하는 점은 우리 모두가 똑같았다.
8회 말 성훈이형이 안타를 치고 나갔을 때도, 9회 초 경석 선배가 마무리를 위해 불펜을 떠날 때도,
아웃-!
“와아아아악!!”
“나이쓰으으!!”
성현이가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잡아내며 경기를 끝냈을 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