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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로운 불펜생활-187화 (187/190)

187화. 멋지게 들어가자

만약 당신이 특정 프로 스포츠 팀이나 선수의 팬이라고 했을 때, 들으면 가장 기분이 싱숭생숭해지는 말이 뭐가 있을까.

이 팀에 뼈를 묻겠습니다!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켜 죄송합니다, 야구로 보답하겠습니다.

아 나는 잘했는데 팀이…….

여러가지 발언들이 있겠지만, 이 부류에 속하는 발언 중 가장 유명한 발언을 꼽으라면 ‘올해는 다르다’ 가 아닐까.

왜?

계약을 하거나 하기 직전, 무슨 큰 사고를 쳤을 때, 아니면 부적절한 발언을 했을 때.

그런 특수한 환경이 아니라 이 말은 시즌 초만 되면 8개구단 모두, 인터뷰하는 선수 모두 그러거든.

올해는 다르다!

작년에 부진했다면 올해는 선방하겠다는 의미로, 혹은 작년에 어떤 문제가 있었다면 올해는 충분히 해결했다는 의미로.

하지만 이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팬은 그다지 많지 않다.

아, 예. 그러시군요. 우리 존재 화이탕-.

대부분 또 시작이네, 하고 넘기지.

따악-!

하지만 정말로 올해는 다른 선수 한 명이 있다.

“갔다!”

“갔어어어!!”

“야, 뼈 맞았다!!”

작년 한국시리즈에서 고작 4푼을 기록하며 ‘4푼이’ 라는 멸칭을 잠시 얻었던 우리 성현이.

타격 깡패라는 별명이 부끄럽게도 작년 한국시리즈 땐 오히려 여기저기서 삥을 뜯기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예에에에!”

“야, 찰칵 임마, 찰칵!”

하지만 이번 시리즈 2차전, 성현이는 ‘올해는 다르다’를 시전할만한 자격이 있다.

1회 말 첫 타석 2루타. 3회 말 두 번째 타석도 2루타. 그리고 지금,

찰칵!

찰칵-!

5회 말 세 번째 타석에선 솔로 홈런을 하나 까며 정말 무시무시한 타격감을 보여줬다.

어제 경기에서도 4타수 4안타로 맹활약을 하더니 정말 이를 갈고 준비했구나, 라는 게 여실히 느껴진다.

뿐만아니라,

따악-!

“갔다아아악!!”

“기성이도 하나 갑니다!!”

그 뒤를 잇는 기성이까지.

압도.

한국시리즈 티저 영상에서 그 어마무시한 단어를 왜 성현이한테 갖다 붙였을까. 진짜 압도는 내가 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근데 지금에 와서 보니 그 생각은 다시 한 번 정정되는 게 맞는 것 같다.

딱-!

“진형이 홈 들어와, 문워크로 들어와!”

“미친놈아!”

나 하나한테만 붙이기보단 그냥 원하 챌린저스 전체에 갖다 붙이는 게 좋을 것 같다, 이쪽으로.

원하 챌린저스는 말 그대로 상수 타이거즈를 압도하고 있었다.

한국시리즈 전, 비등비등하거나 미세하게나마 상수 타이거즈의 우세를 점치던 이들의 예상을 대놓고 후려치는 모습은 정말이지 통쾌하게 느껴진다.

이게 말로만 듣던 그 사이다인가 그거냐.

그렇다고 우리 타선만 이런 사이다를 드링킹하는 건 아니다.

퍼엉-!

“하이이이앜-!”

오늘의 선발투수 규진이형.

“와우.”

“규진이형 오늘 힘 많이 들어가네.”

“그만큼 절실하시다는 거지.”

155km.

본인의 개인 통산 최고 구속을 여기서 또 한 번 재발급하며 2차전 승리에 대한 서류의 빈칸을 하나씩 채워가는 중이다.

근데 음…옥에 티가 하나 있다면…….

따악-!

이용호에 대한 천적 관계를 제대로 청산해내지 못했다는 것 정도.

확실히 이용호한테 규진이형이 잘 보이긴 하나봐. 아까도 그러더니, 지금 공도 154km짜린데 저걸 그냥 밀어서 넘겨버리네.

분명 이런 흐름은 투수에게 있어 꽤 커다란 줄기를 형성할 게 분명하지만, 규진이형은 이용호에게 연타석 홈런을 맞고도 그냥 어깨를 으쓱거릴 뿐이었다.

규진이형도 아는 거지.

퍼엉-!

“하이이이이앜-!”

이용호 ‘따위’ 한테만 매달려서 해결될 경기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지금까지 규진이형의 실점은 두 점에 그친다. 반면 우리 팀이 낸 점수는 무려 6점.

앞뒤만 꽉꽉 막아댄다면 오늘 이용호가 무슨 지랄을 하든 우리가 이길 거라는 확신이 있는 거다.

그리고,

딱―

“써드 뒤로, 뒤이!!”

“빼애애액!!”

탁―

“아웃!”

그 확신은 시간이 지나며 점점 사실이 되어간다.

* * *

잠시 작년의 경위를 떠올려보자.

압도까진 아니고, 그냥 깔끔하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1차전의 승리.

타선의 침묵으로 인해 석패를 인정해야 했던 2차전의 패배.

3차전에서 어찌어찌 이기긴 했지만 4차전, 5차전에서의 연패.

6차전에서 또 어찌어찌 이기긴 했지만 7차전에서 실력차를 뼈저리게 깨달으며 그대로 시리즈 탈락.

음, 이쯤에서 한 번 소리쳐도 괜찮겠지.

올해는 다르다!

2승. 그냥 2승도 아니고 시작하자마 2승. 패배는 없이 그냥 2승. 어찌어찌 이기는 것도 아니고 완전히 상대를 압도한 2승.

덕분에 2차전 끝나고 집에 가는 퇴근길이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었다.

덕분에 2차전과 3차전 사이에 껴있는 휴식일이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었다.

덕분에 오늘, 3차전을 위한 출근길이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었다.

근데 너무 편-안했나.

따악-!

“아놔.”

마치 신이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너무 편-안하기만 하면 재미없잖아, 가끔은 불-편하기도 해야지, 그치?

“…거 너무 하잖소.”

“뭐가.”

“저 꼬라지가.”

“흐음….”

3차전 선발인 준혁이는 그래, 잘 던지고 있다. 정말 잘 던지고 있어.

근데 세상사 만만한 게 없다는 게,

딱-!

“페어!”

꼭 이런 순간에 보이는 게 엿 같아서 그러지.

“아씨, 저게 들어오네.”

볼넷이야 준혁이의 문제라 쳐도 그 다음 타자의 텍사스 히트라든지, 꼭 지금 같은 라인 터치 타구라든지.

어쩌다 한 번 나와도 투수의 멘탈을 삭삭 갉아먹을만한 상황이 몇 번이나, 그것도 연속해서 나와버리니,

따악-!

“…갔다.”

이쯤되면 투수의 멘탈이 남아나는 게 더 신기할 지경이다.

애초에 준혁이의 투구 스타일이 그렇다. 140km대 초반대의 직구와 여러 변화구를 가지고 타자를 잡는다기보단 잡히게 만드는 스타일이니까.

타자의 배트와 공이 만나지 않는 게 더 이상한 투수고, 때문에 별의 별 상황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다는 거지.

근데 그 흐름이,

따악-!

“아웃!”

우리 타선에까지 영향이 간다는 건 좀 생각해봐야 할 문제가 아닐까.

“오늘 제대로 꼬이네.”

“그러게요. 그저께까지 너무 편하게 게임 했었나.”

“좀 편하긴 했지….”

치는 족족 라이너고. 치는 족족 파울이고. 치는 족족 호수비고.

뭐 이러냐.

팀 차원에서도 분위기 반전을 위해 이것저것 시도해보긴 했다.

대타로 주호를 내보거나, 7회 말 수비에 필승조 중 한 명인 은구 선배를 투입해본다거나, 훈이 대신 병천이를 수비에 투입한다거나.

근데,

따악-!

“아웃-.”

안 되는 건 안 되더라.

“에이씨, 텄다.”

* * *

4차전도 마찬가지.

이상하리만치 꼬여버린 경기의 흐름은 도저히 두 눈 뜨고 쳐다볼 수가 없었다.

아니, 어제보다 더하면 더했지 더 심각한 요소들이 산재했다.

다급함.

순조롭게 순항하던 선원들은 어쩌다 한 번 만날 수도 있고, 쉽게 제낄 수도 있는 암초를 무슨 배를 잡아먹는 크라켄처럼 생각한 모양이다.

살려야 돼, 살아야 돼, 어떻게든 계속 이겨야 돼.

크라켄보다 더 크고 더 위협적인 암초를 만난 통통배가 제대로 굴러갈 리가 있나.

그 흐름은 5차전, 오늘까지 이어지는 중이다.

그나마,

퍼엉-!

“스트락, 아웃!”

다시금 마운드 자리를 되찾은 혁준이가 힘을 좀 내주니 다행이지.

짝짝짝―

“잘했다, 혁준이.”

“나이스, 나이스!”

“고생했다, 야.”

팀 분위기가 전반적으로 많이 다운돼있다.

다들 아는 거다. 초반의 그 여유나 편안함을 언제까지고 소지할 순 없다는 걸.

으음…….

덕아웃 내 흐름을 잠시 지켜보다 흘끔 감독님이 계신 곳을 쳐다봤다. 감정을 보이지 않으려 무표정을 종용하긴 하지만 뭔 생각을 하실지는 뻔하지.

“감독님.”

“어.”

그런 감독님께 다가가 은근슬쩍 상황을 타개시켜볼 대책을 흘려본다.

“8회에 어떡하실 생각이십니까?”

“8회? 혁준이 그대로 나갈 거 같은데, 왜.”

7회 말까지 마친 혁준이의 투구수는 91개.

투구수 관리를 꽤 잘한 덕에 8회까지는 아마 무리는 없을 듯 싶다.

“8회에 저 올라가도 되겠습니까.”

“너가?”

…만.

“예.”

“왜.”

그래선 게임 트랙이 너무 평탄하게 흘러갈 것 같다.

“주제 넘은 말씀인 건 아는데요. 어….”

“그런 걸 거 아냐. 너가 올라가서 뭐 분위기 반전을 생각한다든지. 그런 거 아냐?”

“아, 예. 맞습니다.”

“으음….”

감독님 또한 내가 한 말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했는지 타석으로 들어서는 원하 챌린저스의 선두타자를 빤-히 쳐다봤다.

“…한울아.”

“예, 감독님.”

“올라갈 거면 아싸리 9회까지 되겠냐.”

“9회요?”

생각보다 격한 반응에 내 두 눈도 살짝 크게 뜨였다. 또 마찬가지로 감독님의 시선을 따라 타석에서 배트를 돌리는 훈이를 쳐다봤다.

“돼, 안 돼.”

“되죠. 당연히.”

“큰 이변 없으면 6차전에도 올라갈 건데, 아마. 그거 감당은 가능하고? 아마 오늘 지면 6차전은 더 길게 던질 수도 있는데.”

만약 내가 8회, 그리고 9회에 등판한다고 한들 오늘 이길 거란 완벽한 보장은 없다.

나는 상대팀의 점수를 억제하는 역할이지, 우리 팀의 점수를 만드는 역할은 아니거든.

시리즈 스코어 2 대 2를 기록하고 있는 지금, 만약 오늘 지게 된다면 6차전은 정말 사활을 걸 수밖에 없다.

그야 당연하지, 오늘 지고 6차전에서 지면 정말 그대로 끝이잖아.

근데,

“근데 말이 6차전이지, 그래봐야 내일 모레잖아요?”

반대로 오늘 이기고 내일 이기면 그것 또한 끝이다. 앞서 말한 것과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빨리 가서 준비해, 공격 빨리 끝날 거 같으니까.”

“예!”

허락을 받아낸 뒤 빠르게 불펜으로 향했다. 물론 가는 길에 내 글러브를 챙겨드는 것도 잊지 않고.

도도도도 뛰어 불펜의 문을 열자 불펜 멤버들은 매우 심각한 표정으로 경기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건영아!”

“예, 예?”

근데 그럴 시간 없다.

“캐치!”

“예?”

“빨리, 시간 없다.”

“아, 예!”

역시 건영이가 눈치가 참 좋아.

내가 간단하게 스트레칭으로 관절의 가동범위를 늘려줄 동안, 건영이는 미처 부착하지 못했던 포수장비를 얼른얼른 차기 시작했다.

렉가드는 차고 있었으니 놔두고, 낑낑거리며 프로텍터를 몸에 걸친 뒤 포수헬멧과 마스크를 집어들면,

뻥-!

“어우, 형 살살!”

“시간 없대니까.”

캐치볼 준비 완료.

지금 타석에 있는 우리 팀 타자들이 어떤 공격을 할지는 모른다.

비슷한 의미로,

펑-!

“건영아, 앉아줘.”

“예!”

나한테 주어진 워밍업 시간이 얼마나 될지는 모른다.

피칭이 가능한 몸 상태가 되자 빠르게 건영이를 자리에 앉힌 뒤, 거의 인터벌 없이 빠르게 공을 던져댔다.

대타, 김기범

그리고 벤치에서도 불펜의 상황을 알아주는 건지, 최대한 시간을 끌어주기 위해 온갖 작전과 술수를 뽐내주고 있다.

감사, 또 감사.

“어…싱커.”

“씽카!”

퍼엉-!

대타로 나선 기범이가 뭔 짓을 하든, 어떤 결과를 맞이하든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내 자신이 등판을 자처했는데 만약 좋지 못한 결과가 나오는 건 솔직히 너무 무섭다.

“한울이, 이제 올라가자.”

“라스트 하나만요.”

“어, 라스트.”

“건영아, 직구!”

“직구우우!”

퍼엉-!

“나이스, 나이스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신중에 신중을 기한 뒤 마운드로 향한다.

짝짝짝―

“한울이형 가자!!”

“한울이 보여줘, 보여줘어!!”

내 등판을 확인한 팀원들이 뒤에서 열심히 내 이름을 연호하는 소리가 너무 선명하게 들린다.

와아아아악-!!

김한울! 김한울! 김한울!

내 등판을 확인한 팬들이 관중석에서 열심히 내 이름을 연호하는 소리가 너무 또렷하게 들린다.

엉?

뭐야, 여기서?

왜?

내 등판을 확인한 상대팀이 상대 덕아웃에서 내 이름을 띄워놓는 효과음이 너무 분명하게 들린다.

“윽!”

퍼엉-!

마운드에 올라 가볍게 직구로 연습투구를 시작하며 확실하게 무언가가 변화될 것을 예고했다.

안 그래도 너네가 점수내기 어려웠던 혁준이보다 더 어려운 투수가 너네 눈앞에 있다.

“끄윽!”

퍼엉-!

어느덧 연습투구의 마지막 차례가 되자 무얼 체크할지 잠시 고민했다.

컨셉이 없다는 게, 틀에 박히지 않아 좋긴 하지만 바꿔말해 가이드조차 없어서 고민이 더 커진 느낌이거든.

“음….”

잠시 고민하다가 상대 타순을 확인한 뒤,

“흡!”

빵-!

체인지업을 던졌다.

“세컨!”

부웅―

팍-!

“어우, 규학이 나이스!”

꽤 잡기 어렵기도 했고, 송구 동작으로 잇기도 어려웠을 체인지업을 요령껏 건져낸 규학이가 2루 송구를 마지막으로 8회 말 수비의 선두타자인 신태범이 모습을 드러냈다.

손에 주섬주섬 송진가루를 묻히는 사이 내야수들의 라운딩도 모두 끝났다.

마지막으로 공을 받았던 기범이가 3루 지역에서 마운드까지 걸어왔다.

“뭔 생각으로 올라왔다냐.”

“그냥. 올라오고 싶어서.”

“쓸데없는 짓 하네, 아저씨.”

“다- 쓸데가 있습니다요, 아저씨.”

내 말에 기범이가 피식 웃으며 내 글러브 안에 야구공을 푹 집어넣었다.

“멋지게 들어가자고.”

“…오케.”

멋지게.

“후우….”

기범이의 말을 곱씹으며 플레이트를 밟았다. 글러브 안에 내 얼굴을 잠시 숨기며 마음가짐을 단정히 했다.

멋지게.

“플레이!”

멋지게 들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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