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평화로운 불펜생활-188화 (188/190)

188화. 내가 해야 할 일

고작 한 명이 ‘팀’ 단위를 바꾸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일까.

“윽!”

펑-!

“스트라아악!”

쌉가능.

만년 하위권에서 놀던 원하 챌린저스는 이제 자타가 공인하는 리그 최강팀이 됐다. 야구 팬들의 의견이 그 증언이며 리그 성적이 그 증거이다.

극단적인 변화를 이룩하는 데에 있어 가장 큰 요인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선수들의 노력, 프런트의 혜안, 팬들의 함성, 뭐 그런 진부한 얘기 말고.

“윽!”

뻥-!

“스트라아악-!”

뭐긴. 나지.

17시즌부터 물이 오른 내 피칭은 원하 챌린저스라는 한 팀을 분명하게 바꿔놓았다.

할 수 있다는 걸 알려주었고, 넘어지면 일어나면 된다는 걸 알려주었고, 피곤할 때 잠깐 쉬어도 된다는 걸 알려주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길 올해로 4년째.

“끄윽!”

부웅-!

“스윙, 아웃!”

김한울이라는 투수는 리그 최강의 투수가 됐고, 이 투수가 속한 팀은 리그 최강의 팀이 됐다.

8번타자, 박!! 명!! 기!!

물론 이 모든 게 순전히 내 힘으로, 내 노력으로 이뤄냈다는 오만은 가지지 않는다. 가질 생각도 없고.

정말 신이 실재하는지는 모르겠다만. 이 시스템과 상태창 덕분에 강해진 건 내 힘이 아니다.

때문에 가끔 급격한 불안에 빠질 때도 있다.

만약, 당장 내일에라도 이 힘이 사라지면 어떡하지?

만약, 당장 내일에라도 원래의 나로 돌아와버리면 어떡하지?

만약, 당장 내일에라도 내 모든 걸 잃어버리면 어떡하지?

“읍!”

퍼엉-!

“스트라아악-!”

하지만 그 걱정은 내일 하면 된다는게 내 결론이다.

지금에 집중하는 것. 내가 해야 할 일 중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선별하는 것.

“읍!”

부웅-!

“스윙-.”

일단 그게 당장에 내가 해야 할 일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으니까.

박명기에게 슬라이더로 첫 카운트를 잡아낸 뒤 잠시 플레이트 뒤로 넘어왔다.

“후우….”

이번 이닝 시작하면서부터 정말 정신없이 공을 던져댄 탓인지,

안타를 날려줘요 박명기!

박명기!!

안타를 날려줘요 박명기!

박명기!!

상대 타자를 응원하는 홈 팬들의 커다란 응원소리를 뒤늦게 인지했다.

가을 야구 맞냐. 어째 응원 열기만 해도 무슨 한여름 때 더위보다 더 빡신 거 같은데 말야.

물론,

“끄악!”

부웅-!

“스윙-!”

아, 한울이형 나이스나이스!

볼 너무 좋다, 계속 가자, 직구 좋아아악!!

뽈조아, 뽈조아!!

그것보다 우리 팀원들의 함성이 더욱 뜨겁다.

그리고,

삼진!

짝짝짝!

삼진!

짝짝짝!

그보다 원하 챌린저스의 관중들이 더더욱 뜨겁다.

0-2 카운트를 만들어 선보이자 다음 공도 당연히 스트라이크, 당연히 아웃일 거라 직감한 팬들은 수비 시간임에도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있었다.

치킨을 먹는다?

핸드폰을 본다?

맥주를 마신다?

와아아악!!

김한울! 김한울! 김한울!

욜럿 이저 와아알 캇!! 폴딩 이저 하아알 팟!!

모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신성모독이다.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경건하게, 손을 머리 위로 올리고 이리저리 흔들어대며 눈을 질끈 감으면,

“끄윽!”

저기 마운드에 있는 김한울이 이 고난을 모두 해결해주리라.

퍼엉-!

그렇게 모두 믿음을 잃지 않는다면,

“…볼!”

볼이 나와 카운트 1-2가 되리라.

“응?”

에이씨.

당연히 들어간 줄 알고 뒤도 안 돌아보고 플레이트 뒤로 빠졌는데.

규학이도 잡은 줄 알고 1루로 라운딩할 채비까지 마쳤는데.

심지어는 기성이조차 송구 받으러 앞으로 살짝 나왔었는데.

멋쩍음을 살짝 느끼며 심판에게 살짝 어필해보자 옆으로 좀 빠졌다는 손짓을 받았다. 그 멋쩍음을 심판도 이해하는지, 뒤이어 쬐-끔, 아주 쬐-끔이라는 제스처도 추가했다.

“에이, 좀 넣어주지.”

쬐-끔 벗어났다고 잡아주는 건 물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 당연한 걸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았기에 생긴 멋쩍음을 연료 삼아 다시 플레이트를 밟았다.

멋쩍음은 느낄지언정,

“윽!”

부웅-!

“스윙, 아웃!!”

머뭇거림은 있을 수가 없다.

9번타자, 민!! 종!! 현!!

상대 덕아웃, 상대 타자, 그리고 상대 홈 아나운서 또한 머뭇거리지 않았다.

왜?

내가, 우리 포수가, 우리 덕아웃이 머뭇거리지 않는 건 이해가 된다.

자신 있으니까.

“끄악!”

부웅-!

“스윙-.”

규학이가 도로 돌려주는 공을 받으면서도 궁금함은 가시지 않았다.

타자가, 상수 타이거즈 덕아웃이, 저기 응원석이 머뭇거리지 않는 이유가 뭘까.

“음….”

당연하겠지만 그게 그들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니까겠지.

내 공을 치기 위해 타석에 들어서고, 치리라 믿으며 타석에 내보내고, 쳐주리라 믿으며 응원하고.

“읏!”

빵-!

“스트라아악-!”

근데 크게 잘못 생각하는 것 같다.

나와 대적하고 있는 민종현이 해야 할 일은 감히 안타를 치거나 볼넷을 고르는 등 베이스로 나가는 게 아니다.

그냥 묵묵히, 가만히 서서 내 공을 구경하면 된다.

“흡!”

퍼엉-!

“스트라아악, 아악!!”

그렇게 이번 이닝 세 번째 아웃을 먹고 8회 말 수비를 끝내는 것. 그게 다른 누구도 아닌 민종현이 해야 할 일이다.

“나이스!”

“나이스 볼!”

“고씀다아!!”

팀원들은 8회를 깔끔하게 막아낸 나를 지나쳐가며 덕아웃으로 돌아갔다.

“음….”

왜케 맘에 안 드냐.

“야, 성현아.”

“어?”

“나 9회에도 올라간다.”

참 착하고 열심히 하는 애들인 건 알겠는데…….

우리 애들의 눈빛을 보니 어딘가 크게 몰려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아, 일단 실점 없이 넘어갔다.

아, 큰 고비 하나 넘겼다.

아, 근데 다음 공격은 어떡하지.

“…형이 왜?”

“왜겠냐. 생각 좀 해봐라.”

“…….”

9회 초 공격의 두 번째 타자로 임명되어있는 성현이는 복잡미묘한 눈빛으로 날 가만히 쳐다봤다.

후딱 장비 차고 넥스트 써클에 나가야 할 녀석이 이렇게 가만히 서있는 꼴을 보니,

“…오케.”

녀석도 이제 본인이 뭘 해야 하는지 느낀 것 같다.

근데 이렇게 성현이한테 얘기하는 걸로는 부족함이 다분하게 느껴진다.

뭔가…뭔가 더 어필할만한 구석이 필요하다.

“건영아!”

“예에에!!”

끼익, 거리는 불펜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건영이를 불렀다.

“한 번만 더 받아줘. 어깨 식을 거 같아서 그래.”

“예. 예?”

알았다고 대답해놓고 모르겠다고 물어보는 건 무슨 화법이야.

“천천히 준비해줘.”

“어…예!”

건영이가 풀어헤쳐놨던 포수 헬멧과 마스크를 재정비하는 동안 우리 타석의 근황을 살폈다.

아직 상대투수가 연습투구 중인 틈을 타 성현이가 명진이에게 다가가 뭐라뭐라 이야기를 한다.

“…또 뭔 소릴 하려고.”

아마, 점마 성격이라면 뭐 어찌어찌하는 식으로 공략해보자,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지 않았을까.

고등학교 때부터 성현이와 친한 동기였던 명진이는 분명 성현이가 이야기하는 바를 잘 이해할 것이고,

딱-!

또한 제대로 이행하리라 믿었고,

와아악-!!

명진이 나이쓰요!!

세컨…아니, 1루 멈춰!

그 믿음에 보답 받았다.

2번타자, 우익수 강성현

바로 이어 현 상황을 가장 깊게 이해하고 있는 이가 타석에 등장했다.

성현이는 내가 있는 불펜을 한 번, 상대 투수를 한 번, 1루에 있는 명진이를 한 번, 넥스트 써클에 있는 기성이를 한 번씩 쳐다본 뒤 타격 준비를 완료했다.

나를 본다는 건 내 의지를 알겠단 거겠지.

상대 투수를 본다는 건 어떻게든 때려내겠단 거겠지.

명진이를 본다는 건 무슨 일이 있어도 앞으로 보내주겠단 거겠지.

따악-!

“갔…!”

“아…아냐. 안 갔어.”

일단 제대로 때려내긴 했다. 잘 맞기도 했고.

하지만 너무 잘맞았다고 해야할지, 아니면 약간 힘이 모자르다고 해야할지.

탁―

“아웃-.”

좌익수가 담장 앞 깊숙한 곳에서 타구를 잡아내는 모습을 본 좌선심이 머리 위로 주먹을 들어올렸다.

3m만, 진짜 조금만 더 날아갔다면 아싸리 투런 홈런이 될 수도 있었을텐데.

“야, 쎄컨!!”

“뭣!”

…라는 생각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아니었다.

그저 성현이를 믿고, 또 명진이를 믿는 것.

촤악-!

명진이 또한 본인이 해야 할 일을 완벽히 이해하고 있었다.

“쎄잎, 쎄잎!!”

다음 베이스를 향해 어떻게든, 악착 같이 물고 늘어지는 것.

“아, 좋아, 명진이 집중력 좋다야!!”

어깨가 약한 편인 민종현 쪽으로 타구가 간데다가 단순 뜬공이라는 점에 안도했는지, 대충 내야로 공을 돌리는 틈을 타 명진이는 1루에서 2루까지 리터치를 성공시켰다.

짝짝짝―

“남기남기! 남기지 말고 싹 쓸어줘요!”

2루 베이스를 밟고 미친 소리나 하는 저 미친놈이 우리 팀에서 기범이 다음으로 주루 센스가 좋다는 게 참 믿기지가 않는다.

3번타자, 1루수 남기성

명진이와 성현이, 이 둘과 동갑인 또 다른 타자는 2루주자가 뭐라고 헛소릴 하든 신경쓰지 않고 타석으로 향했다.

알고 보면 이 놈도 명진이 못지않은 미친놈인데, 분명 속에서 쌉소리가 이리저리 들끓고 있을텐데, 어찌어찌 잘 참아내며 견갑골을 움찔거렸다.

마치 골프의 퍼팅 동작처럼 휘휘 배트를 저은 뒤, 엉덩이를 뒤로 쭈욱 뺀 뒤 왼쪽 어깨에 배트를 얹으면 배팅 준비 완료.

아까 성현이가 잠시 응시했던 곳은 다 나름의 이야기가 있었다.

그렇다면 남은 한 곳, 기성이는 과연 어떤 의미로 쳐다본 걸까.

딱―

“파울!”

뭐 깊게 생각할 필요도 없이 이어서 해결해달라는 그런 거 아닐까.

초구에 괜찮게 밀어냈던 타구가 좌선심 옆으로 떨어진 뒤 기성이는 잠시 타임을 부르곤 진형이에게 타르 스틱을 요청했다.

진형이가 휙 던져준 스틱을 받아 배트 그립에 죽죽 긁어댄 기성이는 새롭게 갱신된 끈적거림이 맘에 드는지 망설임없이 타석에 재입장했다.

타격 자세를 준비하는 기성이도, 투구 자세를 준비하는 투수도, 포구 자세를 준비하는 포수도 모두 조용하다.

사실 당연한 소리지. 지금 상황에서 그 누구보다 집중해야 할 세 명이니까.

근데,

“기성아아아악, 영웅 새끼 좀 불러와봐라아아악!!”

저 셋 말고 다른 사람들까지 조용한 건 이해가 안 되네.

짝짝짝―

“기성이 하나 보여줘!”

“명진이 라이나만 조심해!”

“원아웃, 원아웃! 부담없다, 부담없어!!”

목청껏 소리친 쌉소리가 기폭제가 되었는지, 3루측 덕아웃 멤버들도 제각기 목소릴 내기 시작했다.

마침 우리와 정면으로 마주보고 있던 기성이는 이 목소리들을 듣곤 잠시 우리 덕아웃을 흘끔 쳐다봤다.

그러곤 씨익, 하고 웃는 게 마치…….

“새끼.”

따악-!

“갔네.”

하나 제대로 해줄 것 같다.

“어, 어? 어어어?!”

“가나! 가나!”

“해치웠나?!”

“플래그 세우지마, 미친새끼야!”

좀 위로 부웅- 떠오른 탓에 넘어가나마나 애매하긴 했지만,

와아아아악-!!

남기성! 남기성! 남기성!!

확실히 넘어갔다.

9회 초, 0 대 0의 균형을 완벽하게 깨뜨리는 기성이의 선제 투런 홈런.

“나이싸아아!!”

“야아아악!!”

“남기남기야악!!”

분위기는 단숨에 달아오른다.

기성이의 이름을 목놓아 부르던 덕아웃도, 마찬가지로 기성이를 외치던 관중석도, 내 공을 받아줘야 할 건영이도.

내 어깨가 식지 않도록 함께 합을 맞춰야 하는 파트너가 딴짓을 하고 있음에도 가만히 놔두었다.

저 마음, 저 분위기, 모두 이해가 충분히 되니까.

그저, 가만히 서서,

탕- 탕- 탕―

“나이쓰야, 나이쓰! 기성이 나이쓰야아악!”

“남기 나이쓰요!!”

“명진이도 들어와, 빨리 들어와아악!”

팀원들이 득점을 올린 두 주자를 반기는 걸 지켜봤다.

잘하네. 우리 팀.

“건영아, 던지자.”

이 분위기를 한도 없이 누리고 싶은 건영이의 마음도 이해는 간다만,

“예에에에에에!!”

나도 할 일은 해야지.

건영이에게 양해를 구한 뒤 다시 불펜의 피처 플레이트를 밟았다.

“후우…읍!”

퍼엉-!

전의를 완벽하게 상실한 상대 투수가 공 두 개를 던질 동안 난 공 하나를 던지며 인터벌을 얼추 맞춰갔다.

몸을 푸는 게 아니라 한 번 달아오른 몸이 식지 않도록 유지만 하는 게 목적이니까.

“후….”

전의.

따악-!

우리는 소중한 선취점을 냈다. 다음으로 이어질 마지막 수비는 그 누구도 아닌 김한울이 던질 예정이다.

전의.

따악-!

이 중요한 상황에서 선취점을 허용해버렸다. 근데 다음 공격 때 또 김한울이 던진다더라.

같은 상황을 두고도 완벽하게 상충되는 두 입장을 두고, 그 입장들을 만든 당사자는 가만히 그라운드가 흘러가는 꼴을 쳐다봤다.

개판이네.

따악-!

물론 저쪽이.

“한울아, 점수 좀 났는데 어떡할래. 9회에 안 올라가도 될 것 같은데. 6차전이나 7차전 준비하는 게 더 낫지 않냐.”

“어….”

9회 초, 빅 이닝을 만들어낸 덕에 여유가 한참이나 생겼다.

굳이 내가 올라가지 않아도 우리 팀 투수들은 곧잘 막아낼 여유가 있는 점수이며, 굳이 내가 올라가지 않아도 상대 타자들이 대충 치고 끝낼 여유가 있는 점수.

따악-!

“음….”

또 한 번 안타를 만들어내는 기범이를 보며 감독님께 이야기했다.

“아직 할 일이 남은 거 같은데요.”

“할 일이 뭔데.”

“할 일이요?”

몰라서 물으시나.

“6차전에서 압살하는 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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