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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로운 불펜생활-189화 (189/190)

189화. 구원

[김형철의 돌직구 - 한국시리즈 5차전은 김한울의 승리다.]

한국시리즈 5차전은 4차전까지의 시리즈 스코어를 닮아 매우 팽팽하게 진행됐다.

이전 경기들까진 나름 점수들도 곧잘 내던 선수들이, 이상하리만치 5차전만큼은 선수들이 모두 저마다 균형의 수호자를 자처했다.

그렇게 8회 초 원하의 공격까지 0 대 0이던 상황에서 뜬금없이 김한울이 등판했다.

[한국시리즈 5차전, 8회 말 수비 때 마운드에 오르는 김한울]

물론 김한울이 등판해서 나쁠 건 없다. 아니, 나쁠 게 없는 게 아니라 오히려 매우 좋다.

한 점이라도 먼저 허용해버리면 그대로 분위기가 넘어갈 상황에서 그 누구보다 믿음직스러운 김한울이 올라왔다는 게 얼마나 든든할까.

하지만 동시에 의문도 생긴다.

꼭 김한울이 등판해야 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굳이 김한울이 등판할 필요까지는 없었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내가 내린 결론에 대해선 아래에 조금 더 후술하기로 하고, 김한울의 등판으로 인해 원하 챌린저스가 얻는 건 무엇이 있었을까?

[9회 초, 투런 홈런으로 빅 이닝의 서막을 알리는 남기성의 홈런]

정답은 바로 9회 초, 한 번의 공격에서 무려 6점을 뽑아내는 폭발력에 있었다.

꼬리에 꼬리를 한 번 물어보자. 그렇다면 이 폭발력의 원천은 어디서 왔을까.

[8회 말 수비를 잘 막은 뒤 9회 초 등판을 위해 불펜에서 캐치볼 중인 김한울]

야구는 멘탈 게임이라는 말은 이제 너무 흔해빠진 말이 되어버렸지만, 이 멘탈이라는 부분이 어디서 시작돼 어디까지 통용되는지에 대해선 아직 잘 모르는 사람이 많다.

사람의 멘탈이라는 건 본인이 생각하는 것보다 매우 유연하다.

이 글을 읽는 모두, 아주 사소한 일 때문에 감정의 극단까지 치달아 본 경험이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게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자, 그렇다면 위에서 내가 내린 결론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해보자.

나는 굳이 김한울의 등판까진 필요없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이야기했다. 하지만 이 말엔 한 가지 숨겨진 부분이 있다.

바로 ‘한국시리즈 5차전의 승리를 위해’라는 문구.

그럼 이 문구를 조금 바꿔서, ‘한국시리즈 우승을 위해 김한울의 등판까진 필요없다 생각했다’로 바꿔보면 어떨까.

글쎄, 바로 다음으로 이어진 9회 초 공격도 그렇고, 9회 말 공격을 깔끔하게 막은 김한울의 호투도 그렇고.

이 호투가 과연 5차전에 국한될까?

혹시나 싶어 미리 이야기하지만, 필자는 객관적으로 양팀의 전력을 분석한다. 그리고 객관적으로 그 결과를 예측할 뿐이다.

이쯤까지 칼럼을 읽었다면 필자가 어느 팀의 우승을 점치는지는 모두 알겠다만, 또 그렇기에 필자의 예상의 틀릴 경우 어마어마한 욕을 먹을 게 무섭긴 하지만 그래도 할 말은 해야겠다.

이번 시즌, 누가 뭐래도 한국시리즈 우승은 김한울의 것이다.

* * *

작년, 한국시리즈 5차전이 끝난 뒤 우리가 받은 성적표는 2승 3패.

당시 6차전을 맞이하는 원하 챌린저스의 마음가짐이라는 건 딱 한 가지였다.

절대 안 진다.

당연하지, 지면 그대로 끝나는데.

그리고 올해, 작년과 완벽히 반전되어 3승 2패라는 성적표를 받아든 원하 챌린저스는 마음가짐까지 완벽히 반전시켰다.

무조건 이긴다.

“오늘 이기자.”

무조건 이겨서, 오늘 끝내자.

“오늘 진다고 끝나는 건 아니야. 내일이 있긴 해.”

오늘 끝내서, 조금이라도 빨리 편해지자.

“근데 그렇게 생각하지는 말자.”

조금이라도 빨리 편해져서, 얼른 축배를 들자.

“이길 수 있을 때 이기자. 이 이상 질질 끌면 보는 사람들도 별로 안 좋아해.”

얼른 축배를 들어서, 모두에게 알리자.

“오늘 우승한다.”

우리가 우승했다는 걸 알리자.

“네에에!”

“예에에에에!!”

“와아아악!!”

사람 마음이라는 게 생각보다 물렁거리는 물질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이런 것 같고, 저렇게 생각하면 저런 것 같고.

간단한 말 몇 마디로 원하 챌린저스의 일원들은 상수 타이거즈를 ‘절대악’으로 단정짓고 모두 덕아웃 밖으로 나섰다.

원하- 챌린저스―

경기 시작 전, 아직까지 원하 챌린저스의 응원가 등이 나뒹구는 그라운드가 일순 조용해졌다.

아니,

와아아악-!!

호오오오-!!

더 시끄러워졌다.

“후우….”

짧게 국민의례가 진행되는 동안 먼저 그라운드에서 싸워줄 동료들의 상태를 확인했다.

마운드 위 굳건히 서서 고개를 끄덕이는 규진이형.

결연하게 포수 마스크를 헬멧 앞에 걸치는 규학이.

글러브 낀 왼손으로 1루측 관중석을 가리키는 명진이.

“멀쩡하네.”

다들 괜찮아 보이길래 미련없이 덕아웃 안으로 돌아왔다.

아으, 규진이형 가자가자!!

볼 좋더라, 보여줘!

보여줘, 보여줘! 직구 보여줘!!

보고 싶은 게 뭐 그렇게 많은지, 아직 플레이 콜이 나오기도 전부터 덕아웃은 떠들썩했다.

물론,

워어-! 최강원하 승리를 위해! 워어-! 하늘높이 크게 외쳐봐―

워어-! 최강원하 승리를 위해! 워어-! 앞만보고 달려나가자―

최! 강! 원! 하!

이 떠들썩거림은 관중석의 함성보단 덜했다.

여기 덕아웃과 그라운드에 있는 선수들보다 저들이 더 확실히, 그리고 깊숙하게 느끼고 있는 거다.

“이기자…이기자….”

오늘이 원하 챌린저스가 우승할 날이라는 걸.

1번타자, 중견수 고동욱―

투수의 연습투구도 끝나고, 내야수들의 라운딩도 끝나고, 외야수들의 롱토스도 끝나고, 포수의 2루 송구 연습까지 끝날 무렵 이번 게임의 첫 타자가 등장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좌타석에 등장해 간단한 루틴을 취한 고동욱이 타격 준비까지 완벽하게 마치자,

“플레이 볼!”

심판이 규진이형을 가리키며 플레이 볼 콜을 외쳤다.

긴장이라는 게 없는지, 아니면 그냥 아무 생각이 없는 건지.

퍼엉-!

“샤이잌-!”

규진이형은 초구부터 대뜸 직구를 하나 꽂아버리며,

“규진이형 볼 좋다, 좋다!”

“좋대니까, 계속 가, 가!!”

“규진이형 빠이띵이요!!”

단숨에 덕아웃의 분위기를 뜨겁게 달궜다.

압도.

아직 공 하나 밖에 안 봤는데, 고동욱은 시작하자마자 타석에서 잠시 벗어나며 생각할 시간을 요구했다.

그래, 확실히 압도.

공 하나로 이번 게임의, 이번 시리즈의 가닥이 대략적으로 잡히는 순간이 아닐까.

고동욱이, 강대현이, 이용호가,

퍼엉-!

“샤이잌-!”

압도당하는 이유는 그리 대단한 곳에 있지 않다.

분위기.

부웅-!

“스윙-!”

오늘 어떻게든 너네 잡아먹고 끝낸다.

오늘 어떻게든 너네 이기고 우승한다.

오늘 어떻게든 너네 뛰어넘고 인증한다.

퍼엉-!

“샤이아아앜-!!”

원하 챌린저스는, 규진이형은 본인의 천적인 이용호가 꼼짝도 못 하도록 묶어버리며 그 의도를 조금 더 명확히 표시했다.

짝짝짝-!

“아, 나이스나이스!”

“네이스네이스!”

“규진이 오늘 너무 좋다야!!”

첫 수비를 깔끔하게 막은 수비진에게 찬사를.

“점수도 바로바로 내자!”

“바로 내, 바로 도망가!”

“도망가자, 바로 가자!!”

첫 공격을 위해 출정을 나서는 타선에겐 응원을.

“어, 딜….”

“하지마, 이 미친새끼야!”

시작도 전부터 쌉쏘릴 지껄이는 미친놈에겐 철퇴를.

미친놈인가, 진짜.

옆에서 기성이가 미친 소리를 싸지르는 걸 어떻게든 막긴 했지만,

“오케!”

이 놈만큼 미친놈인 명진이는 무슨 소린지 똑디 알아들었는지 엄지를 한 번 척! 내보이곤 타석으로 향한다.

1번타자, 이!! 명!! 진!!

시리즈 2승 3패를 기록하는 팀이 가질 수 있는 마음가짐은 딱 한 가지 밖에 없다 이야기했었다.

절대 안 진다.

이 이야기는 비단 작년의 원하 챌린저스에만 허용되는 논리가 아니다.

딱―

“아웃!”

당연히 올해의 상수 타이거즈에도 해당되는 논지가 된다.

부웅-!

“스윙, 아웃!”

명진이도, 성현이도,

퍼엉-!

“샤이아아앜-!”

그리고 기성이도.

절대 지지 않겠다는 일념을 알차게 풀어낸 성상진은 1회 말을 마무리하곤 당당하게 자기 덕아웃으로 돌아갔다.

자존심 강한 두 강팀의 싸움.

퍼엉-!

“샤이아아앜-!!”

반드시 이긴다.

따악-!

촤악-!

“아우웃!”

절대 지지 않는다.

양팀은 본인들이 가진 감정을 에누리없이 덮어쓴 채 소리질렀다.

“기성이 나이쓰!”

“기성이가 웬일이야아악!!”

반드시 이길 거라고.

절대 지지 않을 거라고.

4회 초, 멋진 다이빙 스탑으로 세 번째 아웃 카운트를 장식한 기성이가 팀원들의 환대를 받으며 덕아웃으로 돌아왔다.

승주의 오른손과 부딪히는 기성이의 미트가 오늘따라 꽤나 가벼워보인다.

경석 선배가 때리는 기성이의 등짝이 오늘따라 꽤 넙데데해보인다.

병천이가 갖다바치는 기성이의 배트가 오늘따라 이상하게 길어보인다.

짝짝짝―

“기성이 아까 봤다, 아까 봤어!”

“아까 직구 봤잖아, 그대로 치면 돼!”

“남기성 배트 각도 줄여!”

4회 말, 기성이는 덕아웃에서 뭐라 쌉소리를 지껄이든 말든 묵직하게 타석으로 걸어갔다.

후우…같은 심호흡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하고.

“플레이!”

심판의 플레이 콜과 함께 성상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와인드업에 들어가는 모습에 맞춰 기성이도 타격 대기를 하더니,

퍼엉-!

“볼!”

일단 초구는 스킵.

오른손으론 배트를 꼬나쥐고, 왼손으론 헬멧을 재정비하고.

클린업 트리오에 속했다면, 아무리 이닝의 선두타자로 나섰다 한들 맘에 드는 공이 오면 맘껏 휘둘러도 뭐라 할 사람 아무도 없는데,

퍼엉-!

“샤이이잌-!”

기성이는 2구 또한 가만히 지켜보며 다음으로 나설 타자들에게 성상진의 정보를 최대한 넘겨주기 위해 애썼다.

지켜보고, 커트해내고, 지켜보고, 커트해내고, 커트해내고, 또 커트해내고.

“아우, 기성이 집중력 좋다, 좋아!!”

“타이밍 맞아가요!”

“가자가자, 기성이 가자!!”

9구째,

딱―

“파울!”

한 번 더 파울 타구를 만들어낸 기성이는 타석에서 벗어난다거나 다른 행동을 하는 등의 집중력을 떨어뜨리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

오롯하게, 오로지 상대 투수만을 노려보며 본인이 어떻게든 출루할 것이라 당당하게 선언했다.

이렇게 즉석에서 만들어 발표한 선언문은 분명,

따악―

공 10개짜리의 값어치가 있었다.

와아아악-!!

남기성! 남기성! 남기성!

홈팬들의 열광적인 연호에서 유추할 수 있듯,

“기성이 스탑, 스탑!!”

“무리하지 말고, 무리 말고!!”

그리고 팀원들의 콜에서 또한 유추가 가능하듯, 기성이는 우중간에 깔끔한 안타를 쳐낸 뒤 1루 주루코치님과 손바닥을 맞댔다.

팽팽한 경기 양상 속에서 이닝의 선두타자가 출루했다.

보통 이런 상황이라면,

“진형이면 그냥 치려나?”

“번트 갈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진형이도 작전이 나쁘진 않아서.”

“그렇긴 한데 감독님 성격상….”

번트를 예상할 수도 있으나 다음 타자가 4번타자라는 점과 더불어 현재의 분위기를 따져봤을 땐,

따악―

강공의 확률이 높지 않을까.

“파울-.”

비록 그 시도가 아쉽게 무위로 돌아가긴 했지만 전혀 쓸모없는 짓은 아니었다.

“아, 진형이 감 잡았다.”

끄덕, 끄덕, 끄덕끄덕―

살짝 밀렸던 파울타구 이후, 다음 공을 준비하는 동안 고개를 주억거리는 모습은 공부했던 시험범위를 시험지에서 맞이한 학생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아, 나 이거 알아. 나 이거 봤어. 이거 여기서 이렇게 해가지고 여기다가 이렇게 대입하면,

따악-!

정답이 이렇게 나오더라고.

“와아아악-!!”

“기성이 쓰리, 쓰리까지 가!!”

“진형이 세컨 가, 세컨 가야돼, 이건 가야돼!!”

넓디 넓은 우중간에 홀로 똑 떨어진 타구가 안쓰러웠는지 상수의 외야진이 얼른 달려가 따뜻한 손길을 내밀었다.

굳이 안 그래도 되는데.

굳이 안 그래도,

촤악-!

“세잎-.”

야아아악!!

진형이 나이쓰, 나이쓰배앳!!

이어가, 계속 이어가아아!!

기성이는 3루까지 갔고 진형이도 2루까지 미리 안착했는데.

굳이 안 그래도,

5번타자, 윤!! 승!! 주!!

다음 타자는 조금 전보다 더 외롭게 만들어버릴텐데.

빠암-! 빠바바밤! 빠바바바밤, 빠암- 빠바밤, 윤! 승! 주!

빠암-! 빠바바밤! 빠바바바밤, 빠암- 빠바밤, 윤! 승! 주!

1루측 관중석은 이런 상황에서 가장 믿음직스러운 타자를 향해 찬송가를 불러대기 시작했다.

믿음의 영역인 거다.

관중석에서 지켜볼 수 밖에 없는 이들이 가질 수 있는 건 신앙심 밖에 없으니까.

쳐주겠지.

한 점 내주겠지.

원하 챌린저스를 승리로 이끌어주겠지.

그들은 감히 상수 타이거즈 따위가 윤승주 교주님과 대적하는 것을 허락치 않았다.

안타! 윤승주! 안타! 윤승주! 안타! 윤승주!

뻥―

“보올-.”

물럿거라, 를 열심히 외쳐대던 그들의 기도문이 통했는지 초구는 포수가 막아낸 게 용할 정도로 크게 빠진 공이 돼버렸다.

이게 참 웃긴 게, 적당히 비등비등하게 가야 승부가 되는데 시작부터 저렇게 삐끗하니 오히려 걱정이 우리에게 넘어온다.

“…혹시 거르진 않겠죠?”

우리 윤승주 교주님이 활약할 기회가 사라지는 건 아닐지.

“못 거를 걸.”

“왜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라.

절대 지지 않겠다는 총력전보다 더욱 강한 총력전이 있으니,

“승주 거르면 성훈이형 타석에 주호 나갈 수도 있어.”

바로 반드시 이긴다는 총력전.

아직 4회 밖에 되지 않았지만, 벌써부터 주호가 배트를 이리저리 돌려대며 언제라도 타석에 들어갈 수 있도록 몸을 달궈놓기 시작했다.

타격 임팩트 하나만큼은 우리 팀에서 최강인 성현이와 엇비슷하게 평가받는 주호가 대기한다면, 이런 상황에선 오히려 승주를 걸러내주면 우리 입장에선 땡큐다.

“그냥 아무 생각하지 말고 쳐다보고 있으면 돼.”

체크 메이트.

우리는 그저 승주가, 늦어도 다음으로 나설 타자가 0의 연속을 끊어주리라 믿고 있으면 된다.

따악―

그렇게,

“와아아악-!!”

“돌아, 들어와!!”

“다 들어와, 진형이, 진형이도 다 들어와아악!!”

그에 따라 구원받으면 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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