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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전처리, 회귀하다-0화 (1/204)

패전처리, 회귀하다

프롤로그

신호가 떨어지고 불펜의 문을 열고 서서히 뛰어나간다.

외야의 잔디를 가로질러 내야의 고운 흙을 밟으며 야수들을 지나친다. 늘 하던 대로, 하늘에 닿을 것처럼 까마득한 3층 관중석부터 서서히 시선을 끌어내린다. 언제나처럼 군데군데 빈자리가 많이 보인다.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는 관중들도 여전하고.

짧은 순간 많은 생각들이 스쳐간다. 마침내 시선도, 발걸음도 두 사람이 기다리고 있는 작은 언덕에 닿는다.

“기분이 어떤가?”

“평소와... 똑같습니다.”

“그 동안 고생 많았네.”

후우.

일부러, 모자 챙을 깊게 주저앉혔다. 지혁을 오랫동안 아껴 줬던 이 흑인 감독의 눈과 마주하면 눈물이 터져나올 것 같아서. 사실 불펜에서 나올 때부터 이미 마음이 요동치고 있었다. 감상에 빠지지 않기 위해 애쓰는 지혁의 엉덩이를 두드린 감독이 공을 건넸다.

“마무리 잘 하게.”

“후우. 고맙습니다.”

포수 마스크를 벗고 지혁을 기다리던 새파란 신인 포수 짐 러셀이 공을 건넸다. 러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올 시즌 들어서야 데뷔한 포수가 자신의 커리어 마지막 경기를 치러야 할 투수에게 해줄 수 있는 조언이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잘 부탁한다.”

마운드를 걸어 내려가는 러셀의 뒤에 대고 괜스레 한 마디를 붙여 본다. 애송이 녀석이 씨익 웃으며 마스크를 내려 쓰는 꼴을 보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다.

팀이 크게 지고 있는 상태, 모두 승부를 포기한 8회말. 상대 팀 타자들은 기록이나 의식하는 큰 스윙으로 일관하고, 우리 팀 야수들도 집중의 나사를 반쯤 풀어놓고 있는 그런 경기.

지혁의 야구 인생 마지막 경기는 평소와 완전히 똑같이, 완벽히 평범하게 끝났다. 7번부터 시작한 휴스턴 애스트로스의 하위 타선을 맞아 볼넷 한 개를 주고 아웃카운트 세 개를 잡아냈다. 그리고 마운드를 내려오는 길에 마침내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9회초, 지혁의 소속팀 시애틀 매리너스는 역전하지 못했다. 그렇게 2028년 메이저리그 시즌이 끝났다. 그리고 서른여덟 살인 지혁이 재계약을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래. 선수 문지혁의 야구 인생도 여기서 끝이다. 정말로.

*

“티미. 한 잔만 더 줘.”

“새벽 두 시가 넘었어. 정말 괜찮겠어?”

“그냥 줘.”

“어휴, 진상. 나도 퇴근해야지! 우리 뚱보 마누라가 기다린다고.”

“들어가기 싫다고 난리를 피우던 사람이 무슨. 내가 이 쥐똥만한 바 먹여 살려 주는데 말이야, 엉?”

“그 정도 아니었으면 진작에 쫓아냈을 거야, 문.”

티미라고 불린 바텐더가 툴툴대면서도 꼬냑 한 잔을 졸졸 따라냈다.

“자. 잠깐 카운터 좀 보고 있어. 이 시간에 누가 들어올 리도 없지만 말야. 화장실 좀 다녀올게.”

이미 취기가 잔뜩 올라 있는 지혁이 손을 몇 번 허우적댄다. 티미는 혀를 차며 화장실로 향했다.

“하아- 씨바알. 씨이바아알.”

걸쭉하게 욕을 내뱉고 꼬냑을 목에 반쯤 털어넣었다. 목이 타들어가는 것 같더니 이내 뱃속이 뜨끈해지고, 머리가 찡 울리면서 눈앞이 핑그르르 돈다. 술기운이 도는 와중에도 지혁의 머릿속에는 여전히 녹색 야구장과 하얀 야구공만 떠올라 있었다.

팀에서 재계약 불가 선언을 한 건 이미 두 달도 넘은 일이었다. 컨디션이 좋을 때 메이저리그의 패전 처리 정도로 뛸 수 있는 늙은 한국 선수에게 기회를 줄 구단은 더 이상 없다. 술에 잔뜩 취한 지혁이 생각하기에도 그랬다.

그럼 어쩐다? 또 다시 트리플 A의 비어 있는 자리를 찾아 유랑할 것인가? 아니면 독립리그로 빠져나가 안 될 것이란 걸 알면서도 끝까지 비참한 희망을 안고 다시 도전할 것인가?

“아니지. 이젠, 너무 늦었지. 흐흐. 그렇게 막 살기엔 너어무 늦었다구.”

지혁의 입에서는 웃음소리가 흘러나왔지만 눈에서는 눈물이 떨어지고 있다. 야구를 그만둬야 할 때가 된 것이다. 지난 그의 야구 인생이 눈앞에 스쳐 지나가듯 그려졌다.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넘어왔던 순간부터, 뼈를 깎듯이 지독하게 훈련하고 또 훈련했던 마이너리거 시절, 나이 서른이 되어야 간신히 올라설 수 있었던 메이저리그 마운드.

그야말로 천운이 따른 결과긴 했지만 메이저리그 첫 승을 거두었던 순간도 잊을 수 없다. 오, 그러고 보니 전성기 시절도 있었지. 와일드카드 결정전을 거쳐서 결국 디비전시리즈까지도 가보긴 했다. 물론 패전처리로 1.2이닝을 잡아낸 게 전부지만.

“그래도 말야, 커리어에서, 앙? 커리어에서 임마... 디비전시리즈 한 번을 못 가본 새끼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래서 만족스러운가?”

“개똥 밟는 소리하고 자빠졌네. 만족? 씨부랄... 만족은 무슨.”

“자네 정도면 꽤 성공적인 선수 생활을 하지 않았는가? 결국 메이저에 올라갔고, 메이저리거로써 은퇴하게 되었으니 말일세.”

“풉. 하긴 애새끼들 뒤치다꺼리나 하는 패전처리도 메이저긴 하지. 일 년에 마이너리그를 몇 번이나 왔다갔다하긴 해도, 뭐 그래도 메이저리거긴 하지. 그래.”

자리에 앉아서도 휘청대던 지혁이 문득 고개를 돌렸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이 어느 새 옆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누구쇼?”

“보면 모르겠나? 바에 술 마시러 온 손님이지.”

“그래? 이 가게에 나 말고도 또 손님이 있네. 흐흐흐. 신기한걸.”

푸우우.

한숨이 끊이지 않으니 할 수 있는 건 술과 담배뿐이다. 지혁은 오랜만에 담배를 꺼내 물고 한 숨 크게 들이켰다. 알딸딸한 술기운에 오랜만에 태우는 담배 냄새까지 뒤섞이자 제대로 버틸 수가 없다.

지혁은 여전히 지난 날 마운드에 섰던 자신을 떠올리며 그대로 테이블에 엎어졌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와중에도 옆자리에 앉은 손님의 목소리만큼은 똑똑히 들렸다.

“야구, 후회 없이 했나?”

“후회? 후회 없을 정도로 했지. 나만큼 열심히 노력한 놈들 진짜 몇 명 없어. 그러니까 씨발, 특별할 거 없는 몸뚱이로 이 나이까지 던졌던 거지.”

“후회 없이 했다면서 왜 이러고 있는 겐가?”

“원망... 원망이 남거든. 진짜 어느 누구보다도 열심히 했는데. 그런데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도 딱 패전처리 까지였어. 그 이상으로 올라가보려고 진짜 있는 힘 없는 힘 다 쥐어짰는데 안되더라구. 메이저랑 마이너 사이 수준이 내 한계였던 거지. 빌어먹을 신, 그 개새끼가 나한테 준 재능이 딱 거기까지였어. 흐흐.”

지혁은 엎어져서도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달리고,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고, 공을 던지는 시간에 클럽에서 여자들을 끼고 술판을 벌이던 놈들이 떠올랐다. 4년을 꼬박 투자해서 간신히 메이저리거 다운 체인지업을 던지게 되었다고 좋아했을 때, 옆에서 그립을 한 번 잡아보더니 자신보다 훨씬 더 날카로운 공을 던지던 투수의 얼굴도 생각났다. 그 심드렁한 표정, 대수롭지 않다는 말투까지 다.

지혁의 재능은 거기까지였다. 한국의 고등학교를 다닐 때만 해도 재능으로는 또래 모든 선수들을 뛰어넘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미국에 넘어와서 보니 지혁의 재능은 그저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만한 것이었다. 기회의 땅인 줄 알았던 미국에는, 그 기회를 노리는 수많은 다이아몬드들이 널려 있었다. 지혁은 빛나는 다이아몬드 사이에서 이를 악물고 버텼다.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노력하고, 연습하고, 던지고, 달리는 것.

“끄으으...아. 그래서, 꺼억. 구속도 3마일 정도 끌어올리고. 변화구도 두 개 정도 더 던지게 됐고. 밋밋한 패스트볼이 안 먹히니까 손가락으로 장난하는 법도 배우고. 끄윽.”

지혁의 필사적인 노력은 결국 꿈에 그리던 메이저리그 마운드에 그를 데려다 놓았다. 하지만 노력만으로는 넘을 수 없는 거대한 벽에는 생채기를 내지 못했다. 그저 그뿐이다.

“흑... 젠장... 흑, 흑...”

기어이 울음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우는 게 스스로의 노력을 부정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그 어떤 상황에서도 속으로 삭여 왔던 울분이 터져버린 것이다.

재능! 지혁에게 부족한 건 하늘에서 내려 준 그 재능이었다.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섭리 아래에서 노력의 힘으로 도달할 수 있는 곳에는 한계가 명확했다.

수백 번, 수천 번 하늘을 원망했다. 선수 생활을 마무리하고 있는 지금까지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라는 진리를, 지혁은 인정하기 힘들었다.

“원망이 남았다라. 재미있는 말이군.”

울고 있는 지혁을 멀끄러미 바라보는 노신사의 얼굴에 의아한 미소가 떠올랐다. 테이블에 엎여저 어깨를 들썩이고 있는 광경을 한참 바라보던 그가 은근한 말투로 물었다.

“야구의 신에게 원망이 남았다면서도, 자네 야구가 하고 싶은 게지?”

“...”

“마운드에서 나는 냄새. 로진백의 끈적거리는 느낌. 홈 플레이트에 앉은 마누라의 싸인. 수만 명의 시선을 받으면서 한가운데에 패스트볼을 던질 때의 쾌감. 잊고 싶지 않은 거야. 맞지?”

“누구야, 당신?”

노신사가 빙긋 웃었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마지막 말 한 마디를 듣자마자, 지혁은 정신을 잃어버렸다.

“네가 그렇게 원망하고 있는, 야구의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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