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 신을 만나다.
“일어나. 야, 문! 일어나라고!”
어깨가 정신없이 흔들린다. 깨질 것 같은 머리가 울렁거려서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우욱...”
“씨발! 토하면 너 내가 죽여! 내가 진짜 죽일거야!”
머리가 터져나갈 것 같으면서도 그의 친구 티미의 목소리가 정겨웠다. 그런데 왜지? 조금은 날카로워지고 매끄러워진 목소리다. 어릴 때의 티미처럼.
“이제 막 가게 차렸는데! 아르바이트도 없는데! 토하기만 해봐!”
악에 받쳐 소리를 질러대는 티미. 이 친구 왜 이래? 그냥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고 말 친군데. 어차피 손님도 없는 가게 토하면 닦으면 되지.
“흔들지 마. 올라올 것 같으니까.”
“뭐야, 정신 들었어?”
“그래, 이 친구야. 그러니까 가만히 좀 놔둬.”
“뭐야, 갑자기 그 올드한 말투는? 80년대 영화 봤냐?”
게슴츠레 눈을 뜬 지혁은 잔뜩 뿔이 난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티미에게 고개를 돌렸다.
“... 뭐야?”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어린 시절의 티미가 눈앞에 있었다. 어울리지 않는 노란 앞치마를 맨 채로. 지혁이 여자 같다고 그렇게 놀려댔던 그 앞치마였다.
“뭐긴 뭐야. 빨리 일어나 이 새끼야. 문 닫을 시간이야.”
“잠깐, 잠깐만. 티미? 너 티미 맞지?”
“그럼 내가 누구냐! 더 짜증나게 하지 말고 화장실이나 갔다 와. 토할 거면 저기서 하라고.”
티미가 억지로 지혁을 끌어 일으켜서 등을 떠밀었다. 얼이 빠진 채로 화장실로 향하는 지혁의 등 뒤에서 티미가 소리쳤다.
“계단에 토하면 죽여버릴 줄 알아!”
계단? 이 가게에 계단이 어딨어? 8년 전 쯤에 인테리어 하면서 없애버렸잖아...는 아니네.
원래 화장실이 있어야 할 자리에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이 있었다. 초짜 건축가가 설계도도 제대로 못 읽어서 화장실을 반 층 위에 만들어 버렸었는데, 그 때 그 화장실로 향하는 계단이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내가 술이 덜 깼나. 아니지, 이건 꿈인가?”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계단을 올랐다. 기억도 희미한 옛날 화장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노신사 한 명이 손을 씻고 있었다. 어디서 본 것 같은 사람인데...
“왔나?”
“누구... 날 압니까?”
“문지혁. 시애틀 매리너스 소속 좌완 투수. 어제 은퇴했지.”
“야구 덕후신가? 어르신, 싸인이라도 한 장 해 드릴까요?”
“이건 어제까지고. 지금의 자네는 아마... 데이토나 컵스 소속이겠군. 하이 싱글 A.”
데이토나? 오래 전이다. 15년 전, 지혁을 지명할당으로 방출시켰던 바로 그 팀이다. 지혁에게 처음으로 방출의 느낌을 알게 해 줬던 팀.
“염병. 그 이름도 입에 올리지 마쇼. 치가 떨리니까.”
“자네 아직 날 못 알아보겠나?”
“그러니까 누구시냐고. 말을 똑부러지게 좀 해 주십쇼.”
“어지간히 마신 모양이군. 마지막에 내가 해준 말 못 들었나? 야구의 신이라고.”
술을 진탕 먹고 마지막으로 들었던 말. 내가 야구의 신이라고 하던 그 말. 지혁의 머릿속이 울리기 시작했다. 노신사는 클클거리며 말을 이어나갔다.
“자네는 나를 즐겁게 만들었던 친구야. 지금, 그러니까 자네가 은퇴하던 시점에서 모든 야구판을 통틀어서 가장 치열하게 노력했던 친구가 바로 자네였어. 그러니 자넨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해도 좋아. 재능은 부족했지만, 인간으로써 끌어낼 수 있는 최고의 잠재력까지 다 끌어낸 사람이니까.”
쏴아아- 노신사는 수도꼭지를 틀어 손을 닦으며 지혁에게 미소를 보냈다.
“내가 열심히 하긴 했지. 그런데 당신이 그걸... 와아아악!”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그제서야 발견한 지혁은 경악하고 말았다. 어릴 때의 그가, 아니, 어려진 그가 거울 속에 있었다. 팔자 주름이 진 볼도, 인상을 찌푸릴 때 잡히기 시작했던 미간 사이의 주름도, 거칠거칠해진 피부도 없어졌다. 한창 젊었을 때의 문지혁이 거울 속에 서서, 충격과 공포에 빠진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인간의 한계를 보는 것은 내 즐거움이었네. 자네에게는 잔혹한 일이었겠지만. 인정하네. 맞아, 자네에게 재능은 없었어. 하지만 자네에게 주어진 최후의 능력까지 다 쥐어짜냈지. 난 그 모든 걸 지켜보고 있었어. 두근두근하더군. 인간이 노력만으로 해낼 수 있는 한계까지 다다르다니 말이야. 보통은, 아니 자네를 제외한 전부는 그 끝을 보지 못하고 나가떨어지는데 말일세.”
너털웃음을 지은 노신사가 손을 내밀었다. 악수를 청하는 행동에, 지혁은 자신도 모르는 새 손을 내밀어 그의 손을 마주잡았다.
“내게 즐거움을 선사한 대가를 줌세. 지금은 2013년이야. 자네가 야구 인생에서 가장 미련을 가지고 있던 시점으로 보내주려고 했더니 이 때로 와 버렸군.”
노신사는 흥미로운 듯이 중얼거렸다.
“데이토나 컵스라니. 가장 미련이 있었던 때가 이 때였군. 클클클.”
지혁은 믿을 수 없는 상황에 충격을 받아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정신병을 앓고 있는 할아버지의 헛소리인줄 알았는데. 거울 속에 비친 젊은 지혁의 모습은 이 상황이 현실이라고 말하고 있는 듯했다.
“잠깐 정리할 시간을 좀...”
“오래는 안 된다네.”
“지금이 2013년이라고? 그러면 15년 전이고 내가 스물세 살. 데이토나 컵스...에서.”
곰곰이 생각하던 지혁은 노신사를 향해 빽 소리질렀다.
“지명할당 당했던 때잖아!”
“자네 친구가 듣겠네. 목소리를 좀 낮춰. 허허.”
“그러니까 당신이 야구의 신이고, 나를 이쁘게 봐서 과거로 돌려놨다는 건, 그래. 빌어먹을 꿈이면 곧 깰 테고 이게 말도 안 되는 현실이라면 받아들여야지. 그런데 왜! 왜 2013년이야!”
“말했잖나. 자네가 가장 미련을 많이 가지고 있던 시절로 돌아왔다고. 이건 내 의지가 아닐세.”
“미련은 무슨 미련! 개 같은 팀에서 간신히 빌어먹다가 쫓겨났는데...”
성질을 내던 지혁이 말꼬리를 흐렸다. 눈앞에 버젓이 서 있는 저 할아버지의 말이 사실이라면, 지금 느껴지는 생동감이 전부 다 현실이라면. 가장 미련이 있던 시절로 돌아왔다는 말에 한 가지 걸리는 데가 있다.
“생각났는가?”
“오늘 날짜, 설마...”
“2013년 9월 5일. 내일부터 싱글 A 포스트시즌 파이널이네.”
“하...”
커리어 내내 단 한 번의 우승 트로피를 들어보지 못했던 지혁이다. 한국에서 최대어 소리를 들으며 고등학교를 다닐 때도 그랬다. 대통령기, 봉황대기, 청룡기 전부 놓쳤다. 4강에서 탈락하는 것은 예사였고 결승전에서도 패배의 쓴잔을 마셔야 했다.
미국에 넘어와서는 파이널 시리즈에 진출한 적도 단 한 번밖에 없었다. 그게 바로 2013년 9월. 데이토나 컵스 소속일 때다.
“자네가 얼마나 절실하게 선수 생활을 했는지 증명하는 거라고 생각하게. 지난 생에서 자네는 언제나 최선의 노력을 다해 왔어. 그래서 미련이 별로 없었던 게지. 하지만 우승 트로피 한 번쯤 들어보고 싶다는 아쉬움은 남았던 것 같군 그래.”
노신사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지혁이 프로 선수가 되고 난 이후 유일하게 올라갔던 결승전이었다. 끝까지 아슬아슬한 경기를 했었고... 결국 졌다. 마지막 경기의 패전투수가 바로 지혁이었다.
“이봐, 문! 너 혹시 거기서 잠들었냐?”
티미가 계단 아래에서 큰 소리로 외친다.
“이런. 자네 친구가 곧 올라오겠군.”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차근히 설명하려면 긴 시간이 필요할걸세. 지금은 이것만 생각해. 파이널 시리즈에서 우승하는 일 말이야. 흐흐.”
“그러니까 지금이 진짜 2013년인 건 확실하단 소리 맞지?”
노신사는 거울 속 지혁을 가리키며 환하게 웃었다. 그 순간 화장실의 문이 거칠게 열렸다. 티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들어왔다.
“문. 너 괜찮아?”
“아, 티미.”
잠깐 티미 쪽으로 시선을 돌렸을 뿐인데 노신사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당황한 지혁은 이곳저곳을 둘러보았지만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다. 아마 진짜로 야구의 신... 신인가 보다.
“괜찮냐니까? 어디 아파?”
“으, 으응. 괜찮아. 어지러워서 그래.”
“난 또 변기에 쳐박혀서 자고 있는 줄 알았잖아.”
“저, 티미. 오늘이 며칠이지?”
“갑자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9월 5일이잖아. 이제 12시 넘어갔으니 6일이고.”
“20...13년?”
“응. 너 어디 아파? 갑자기 기억이 막 안 나고 그래?”
15년 전으로 돌아왔다. 눈앞에 있는 어린 시절의 티미가 확실히 증명하고 있다. 후덕하게 나왔던 뱃살도, 반쯤 벗겨지기 시작한 머리도 없다. 어린 시절의 친구 티미가 확실했다.
“아, 머리야. 머리가 터질 것 같아. 일단 집에 가야 되겠다.”
“그래. 제발 부탁이니 빨리 가 줘. 그리고 너 운전할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마. 선수 생활 종치고 싶지 않으면. 밖에 택시 불러놨으니까 택시 타고 가.”
“그래. 고맙다.”
“이 새끼 진짜 어떻게 됐나? 평소에 공짜 밥을 그렇게 먹여도 고맙단 소리 한 번도 않더니. 어쨌든 빨리 가. 내일 경기장 나가야지.”
*
티미가 불러 놓은 택시를 타고 집에 돌아가는 지혁의 머릿속이 핑핑 돌았다. 택시 라디오를 통해 옛날, 그러니까 2013년에나 유행하던 노래가 흘러나왔다.
‘꿈이면 빨리 깨라. 제발.’
하지만 허벅지를 살짝 꼬집었더니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로 아프다. 꿈일 리가 없다. 완벽한 현실이다. 진짜 2013년으로 돌아온 것이다.
허름한 건물 앞에 도착한 지혁은 문 앞에서 잠시 눈을 감았다. 잘 기억나지 않는 15년 전의 방 모습을 떠올려 본다. 오래 전에 처분했던 집에 들어가려니 괜히 마음이 두근거렸다.
“후우우.”
9회말 2아웃에 마운드에 서 있는 투수처럼 깊은 심호흡을 한 뒤 문을 열었다. 어두운 거실에서 익숙한 냄새가 났다. 거실의 전등을 켜자, 노신사, 아니 야구의 신이 그곳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