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전처리, 회귀하다-2화 (3/204)

2 - 신과의 거래.

“앉게.”

푸근한 미소로 커피를 내리고 있는 저 할아버지는, 분명히 신이다. 받아들여야만 한다. 지혁은 의자에 걸터앉았다.

“어디서부터 시작하는 게 좋을까?”

“이게 진짜 현실 맞습니까? 뉴스에서 곧 가상현실 시스템을 실제로 도입하네 마네 했었는데. 장난치는 거 아니죠?”

“오. 말투가 한결 정중해졌군. 아주 좋아. 내가 진짜 신이라고 믿기 시작했다는 뜻이니까.”

“저, 신님? 물어본 거에 대답을 해주세요.”

“대답할 필요가 있겠는가? 자네도 이미 답을 알고 있잖아.”

그래. 아무리 기술이 발전했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모든 감각을 완벽하게 구현해냈을 리가 없다. 지혁은 자기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돌아갈 수는 없는 겁니까?”

“돌아가? 2028년으로?”

“네. 그러니까... 혹시나 해서요. 꿈이 깨는 것처럼 그때로 확 돌아가지는 않을까 하는 거죠.”

“자네가 원한다면 언제든. 더 이상 야구를 하고 싶지 않다면 내게 말하게. 언제든 그 때로 되돌려줄 수 있어. 하지만...”

신이 따뜻한 커피를 건네며 인자하게 말했다.

“자넨 계속 날 원망하겠지.”

“제게 재능을 부여하지 않은 게 당신이라면, 아마도요.”

“반쯤은 맞고 반쯤은 틀린 말이네. 야구의 재능에 관해 내가 총괄하는 건 맞지만, 내가 모든 사람들의 재능을 일일이 부여하는 건 아니니까.”

커피를 마시자 속이 좀 진정되는 느낌이다. 신이 탄 커피여서 그런지 온 몸이 녹아내릴 것처럼 따스해졌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다시 야구를 하면 되는 건가요?”

“그렇지. 말했지만, 굳이 야구를 하지 않겠다면 언제든 돌아갈 거야.”

“야구를 해야만 한다는 말이네요.”

“뭐, 그렇게 되지. 어차피 자네 야구 말고는 아무 것도 모르는 인생이었잖아? 은퇴하고 나서도 미칠 듯이 야구를 그리워했고 말이야.”

“그건 그렇죠. 하지만...”

지혁은 확신이 없었다. 지금부터 야구를 다시 시작한다고 해서 과거의 일과 달라지는 게 있을까?

“신님께서 저에게 그랬죠. 최후의 잠재력까지 다 끌어냈다고.”

“좋아. 핵심을 짚었군. 그랬지.”

“그렇다면 지금부터 다시 야구를 한다고 해도. 정말 저번 생처럼 죽어라 노력한다고 해도 결국 메이저리그 패전처리용 선수밖에 못 된다는 뜻 아닙니까?”

“장담할 수는 없지. 하지만 매우 높은 확률로 그럴 걸세.”

하아. 결국 아무리 노력해도 안될 놈은 안 된다는 뜻이구만.

“그렇다면 신님께서는 악취미를 가지셨네요. 어차피 거기까지밖에 닿지 못할 놈을 왜 돌려놓으셨습니까. 아무리 노력해도 패전처리 인생을 살 수밖에 없는 놈에게 뭘 더 기대하시는 거에요?”

“흐흐. 자네에게 대가를 주겠다고 하지 않았나. 내가 재능을 주겠네.”

지혁의 눈이 번쩍 뜨였다.

재능.

갖고 싶어도 가질 수 없었던, 그것. 수많은 메이저리거들과 지혁 사이에 있던 결정적인 차이. 노력으로는 따라잡을 수 없었던 벽. 평생을 간절하게 원했던 바로 그 재능.

“물론 조건이 있지.”

신은 즐거워 보였다.

“미리 말해두지만, 이건 나만의 룰이 아니야. 모든 세계에서 모든 신들이 지켜야만 하는 룰이지. 자네 마음에 들지 않아도 어쩔 수 없네.”

“재능을 얻어서 완전히 다른 야구를 할 수 있다면 뭐든지 상관없어요. 제가 훨씬 더 높은 곳으로 갈 수 있는 재능이라면 어떤 조건이든지요.”

“재능과 선수 생명을 바꿔야 한다네.”

“... 네?”

“제대로 들은 것 맞아. 선수 생명을 바치는 대신 재능을 얻는다는 소리야.”

지혁이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자 신이 주섬주섬 일어섰다. 신은 방 안을 조용히 걸어다니며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나뿐만 아니고 많은 신들이 자신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했던 인간들에게 능력을 줬지. 음악을 관장하는 신은 로버트 존슨에게, 커트 코베인에게, 지미 헨드릭스에게 그랬어. 영화의 신은 제임스 딘과 히스 레저에게 선택권을 줬었고. 몇몇 사람들은 원래 가지고 있던 재능에, 신에게서 받은 재능을 더해서 천재성을 폭발시켰어! 하하, 대단했지. 하지만 평범한 사람에게 없던 재능을 부여하게 되면 생태계가 무너진다네. 균형이 깨지는 일이니까. 내가 자네의 선수 생명을 능력의 대가로 할 수밖에 없는 이유일세.”

“저, 저도... 그 사람들처럼 요절하는 건가요?”

“아니, 아니야. 저들은 평생 동안 음악을 하고 연기를 할 수 있으니까. 보통 저쪽을 담당하는 신들은 눈여겨봤던 인간들의 생명이 다할 때 제의를 한다네. 말하자면 한 번의 인생을 더 갖는 셈이지.”

“결국 저는 재능을 얻는 대신, 야구할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든다는 소리로군요.”

“정확해. 자네가 서른여덟의 나이로 은퇴했었으니 남은 시간은 이제 15년이야. 어떤 재능을 얻을 때마다 은퇴하는 날이 점점 더 앞당겨질 테고. 아무런 재능도 받지 않겠다면 15년 뒤에 은퇴하겠지.”

신은 지혁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었다. 가만히 생각에 잠겼던 지혁이 문득 물었다.

“신님께서는 저 말고 또 어떤 선수에게 이런 제의를 하셨었나요?”

“나쁘지 않은 질문이야. 뭐, 가장 최근이라면... 드와이트 구든이 있겠군. 그 전에는 샌디 쿠팩스도 있고. 아, 그리고. 호세 페르난데스. 이 친구도.”

“보트 사고가 났던 그...?”

“그래. 이 친구는 아주 안타까운 케이스였어. 원래의 삶에서도 교통사고를 당하고 말았거든. 열심히 하던 녀석이라서 내가 찾아갔지.”

쯧쯧. 신이 아쉬워하며 혀를 찼다. 운명이란 잔인한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을 억지로 돌이킬 수는 없다.

“좋아요. 어차피 노력만 해서 성공하지 못할 인생이라면, 까짓 거 인생 한 번 걸죠. 제게 사이 영의 재능을 주세요.”

“푸훗. 뭐? 자네 미쳤군.”

지혁은 신이 저렇게까지 노골적으로 비웃는 표정을 지어도 되는 건가 싶었다. 사실 이건 지혁의 발악이나 다름없었다. 어느 정도 감이 잡혔으니까. 신은 지혁이 절대로 듣고 싶지 않았던 대답을 해 주었다.

“사이 영의 재능이야 얼마든 줄 수 있지. 하지만 내일 곧장 은퇴해야 하네. 엄청난 재능을 얻으려면 당연히 엄청난 양의 선수 생명을 걸어야지. 정확히 말하면 자네의 남은 15년을 다 걸어도 부족하지만.”

“씨발... 그럴 줄 알았다.”

“자네가 아무리 작게 말해도 다 들려. 그냥 크게 욕해도 되네. 클클.”

“그럼 클레이튼 커쇼는요?”

“그것도 내일 은퇴일세.”

“랜디 존슨?”

“사흘 정도.”

하아. 한숨만 나온다. 메이저리그 레벨에서 비교할 때 타고난 재능이 거의 없다시피 했으니, 저런 위대한 선수들의 재능을 그대로 얻기 위해서는 남은 선수 인생 전부를 걸어야 한다. 잠깐, 전부?

“좋아요. 그럼 이건 어때요? 랜디 존슨의 슬라이더만 제게 주세요.”

“흐흐흐. 머리가 꽤 돌아가는군. 좋아, 그건... 10년은 줘야 하네.”

“구질 하나에 10년이나 바치라구요? 절대 안 돼요.”

“자네가 선택할 일이지.”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지만, 마리아노 리베라의 커터는...”

“13년일세.”

“그렉 매덕스의 제구력은 어때요?”

“미안하지만 내일 은퇴해야 하네.”

“트레버 호프먼의 배짱은?”

“그건 재능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아. 그 친구의 성격일 뿐이야.”

꺼질 듯한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동시에 낙담했다. 같은 메이저리거더라도 재능의 차이는 수십 년의 간극을 두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으니.

“이 자리에서 결정해야 되는 건가요?”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게. 오늘 당장 결정해야 하는 건 아니야. 자네가 원할 때, 원하는 재능을 쥐어주겠네.”

“다행이네요. 생각을 좀 해 봐야겠어요.”

“그럼. 신중해야지. 아, 그리고 혹시 오해하지 않을까 해서 한 가지 덧붙이자면.”

신이 잠시 큼큼거리며 뜸을 들였다.

“예를 들어 펠릭스 에르난데스의 체인지업에 관한 타고난 재능을 자네에게 준다고 치지. 그렇게 되더라도 당장 내일부터 펠릭스가 던지는 그 공을 던질 수 있는 건 아니야. 내가 줄 수 있는 건 재능이지. 펠릭스가 그 재능에 노력을 곁들인 결과물을 주는 건 아니라네. 그러니까...”

“그럴 줄 알았어요. 이번 생에서도 진짜 죽어라 해야 된다는 거죠?”

“그렇지. 저번 생보다도 더. 훨씬 큰 재능을 얻게 된다면, 노력도 그만큼 더 필요할걸세. 그리고 그 정도에 따라서 펠릭스의 체인지업보다 더 뛰어난 공을 던질 수도 있겠지.”

지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자기 숙취가 오는 것처럼 머리가 지끈거렸다. 비현실적인 정보들이 한번에 밀려들어와서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일단... 좀 자야겠어요. 지금이 9월 5일이라고 하니 당장 파이널시리즈도 준비해야 하구요.”

“제법 담담하게 받아들였군. 쿠팩스 녀석은 사흘 밤을 꼬박 새웠었는데. 역시 야구 인생에 큰 후회는 없었나보이.”

“시끄러워요. 재능은 눈곱만큼도 주지 않으신 분이... 지금 진짜 울렁거려서 죽을 것 같으니까 일단 잘래요.”

방에 들어가려던 지혁은 갑자기 신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혹시 사라지거나 하지는 않죠?”

“나라고 자네 옆에 항상 붙어있을 순 없지. 하지만 자네가 원할 때 언제든 나타나줄 수는 있어. 내가 필요하다면 어디서든 눈에 보이는 계단을 올라와 찾을 수 있는 빈 방에 들어오게.”

“이젠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으니까 그냥 알겠다고 하죠. 저는 잡니다.”

“좋아. 아주 좋은 반응이야.”

침대에 몸을 던진 지혁은 무슨 생각을 할 틈도 없이 기절하듯 잠에 들었다. 신과 조우한 첫 날의 밤이 그렇게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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