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전처리, 회귀하다-3화 (4/204)

3 - 데이토나 컵스.

아주 오래된 알람시계가 시끄럽게 울려댄다. 지혁은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더듬거리며 알람을 껐다. 잠이 덜 깬 몽롱한 와중에도 까끌거리는 침대의 촉감이 낯설었다.

‘제발. 제발 꿈이 아니기를.’

어젯밤의 그 말도 안 되는 일이 현실이기를 바라며 지혁이 눈을 슬그머니 떴다. 좁아터진 방과 곰팡이가 슬어버린 천장. 아무렇게나 던져진 크로스백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는, 15년 전 마이너리거 문지혁이 살던 그 모습 그대로가 눈앞에 있었다.

“됐어!”

시애틀로 옮기면서 있는 돈을 거의 다 털어 샀던 큰 집이 없어졌다는 건 더 지혁에게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다. 취미삼아 모으던 피규어들이 전부 없어진 것도 아깝지 않다.

“다시 야구를 한다. 진짜 돌아왔어.”

다시 야구를 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재능이 없는 것을 미치도록 원망했었다. 하지만 그건 정작 마운드에서 내려온 이후에는 아무 의미도 없는 원망이었다. 다시 야구공을 쥐고 마운드에 오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거대한 축복이다.

어제까지의 삶이 순식간에 스쳐 지나갔다. 지혁은 지난 생에 야구를 하면서 그 누구에게도 최선을 다했노라고 당당히 얘기할 수 있었다.

그래서 사실 신이 ‘그게 네 한계였어.’라고 말했을 때, 섭섭하면서 동시에 뿌듯하기도 했었다. 비록 최하위권에 있는 안쓰러운 실력의 메이저리거가 지혁의 정점일지라도, 스스로의 정점이 어디인지를 확인했으니까.

“이번에도 끝까지 한 번 해 보자.”

노력하는 건 지혁이 이 세상 누구보다 잘 하는 일이다. 게다가 다시 기회를 얻은 이번 생에는 재능도 얻을 수 있다. 이젠 진짜 끝까지 갈 수 있다.

*

오른쪽 어깨에 장비들을 넣은 크로스백을 매고 허름한 연립주택 밖으로 나오자 기가 막힌 가을 날씨가 펼쳐져 있다. 플로리다는 정말 야구하기 완벽한 조건을 갖춘 곳이다. 지혁은 정말 많은 팀들을 옮겨 다니며 셀 수도 없이 많은 도시들을 경험했지만, 플로리다만큼 야구에 딱 맞는 장소를 본 적이 없다. 이 동네 사람들이 야구에 별로 관심이 없다는 것만 빼고.

“크- 오랜만이네.”

데이토나 비치에 위치한 재키 로빈슨 파크. 핼리팩스 강변에서 툭 튀어나와 있는 지형에 위치한 정말로 아름다운 경기장이다. 지혁이 커리어 내내 경험했던 어느 구장보다도 더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하는 곳이다.

초가을의 아름다운 날씨와 눈부실 정도로 새파란 하늘, 환상적인 뷰를 자랑하는 곳에 새로운 기회를 얻어 돌아왔으니 콧노래가 저절로 흘러나왔다.

“오, 문. 왔어?”

“여~ 에드!”

“기분이... 좋아 보이네?”

“그럼. 최고야. 넌 어때?”

더그아웃에서 조용히 음료수를 마시고 있던 C.J. 에드워즈가 지혁을 맞았다. 지혁은 과거로 돌아온 것을 새삼 실감했다. 미래의 에드워즈는 메이저리그에서도 훌륭하게 성공할 선수다. 미래를 알고 있으니 지금의 깡마른 소년 같은 모습에서도 아우라가 느껴지는 것 같다.

‘막상 돌아오고 나니 정말 미치도록 좋네.’

에드워즈의 어린 시절을 보니 지혁은 과거로 돌아온 것을 실감했다. 지혁보다 훨씬 더 큰 재능을 갖고 있는 에드워즈다. 에드워즈와 어릴 적 시절을 다시 공유하면서 배울 수 있는 점이 많을 테고.

그런데 눈앞의 에드워즈는 뭔가 조심스러운 눈치다. 새로운 기회를 얻은 것이 마냥 신나서 실실거리며 웃고 있는 지혁을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다.

“아, 에드. 오늘 네가 선발이었던가?”

“응.”

“잘하라고. 나는 꼭 우승하고 싶으니까. 첫 판부터 아주 기를 죽여놔 줘.”

“그거야 당연하지.”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는 에드워즈의 모습이 듬직해 보인다. 지혁의 기억 속에서도 텍사스에서 트레이드 되어 온 이후로 하이 싱글 A에서는 거의 언터쳐블이었던 선수다.

“그럼 조금 달려볼까.”

메이저리그에서 몸 관리를 하던 루틴대로, 지혁은 일찍부터 운동장을 가볍게 달리기 시작했다. 아직 경기장에 나오지도 않은 선수들이 훨씬 더 많지만 지혁은 천천히 몸을 끌어올렸다.

착실하게 달려서 몸에서 땀을 내고, 정성껏 스트레칭을 해 놀라는 근육이 없도록 하는 일. 어린 선수들에게는 지루하고 따분한 작업일지라도 지혁에게는 매우 익숙한 일들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하루라도 빼먹어서는 안 되는 필수적인 일이기도 하다. 서른여덟이라는 나이에도 메이저리그에서 버틸 수 있었던 가장 큰 동력이 되어줬던 것은 꼼꼼하고 섬세한 몸 관리였으니까.

“에드, 컨디션은 어떤가?”

“좋아요. 요새 컨디션이 너무 좋아서 이상할 정도에요.”

“내가 딱 듣고 싶었던 대답이야. 그런데 쟤는 저기서 뭐해?”

“20분 전부터 저러고 있었어요. 그 전에 30분이나 달렸구요.”

한스 틸먼 투수코치는 그라운드에 등을 대고 누워 다리를 풀고 있는 지혁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원래 워크에씩만큼은 누구에게도 비교할 수 없는 선수였었다. 또래 녀석들보다 훨씬 먼저 운동장에 나오고 제일 늦게 집으로 돌아가는 선수. 그런데 오늘은 평소보다도 한 시간이나 일찍 나와서 몸을 풀고 있는 것이다.

“아까 잠깐 얘기해 봤는데, 쟤 오늘 이상해요. 기분이 좋아 보이던데요.”

“기분이 좋아 보인다고?”

에드워즈와 틸먼은 서로를 마주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을 주고받았다.

이번 파이널 시리즈가 끝나고 지명할당 될 것이라는 소문을 듣고 있는 선수가 왜 기분이 좋은 거지? 도대체 왜 평소보다 일찍 나와서 시리즈를 준비하고 있는 거지?

틸먼 코치는 그런 소문을 시리즈 전에 흘린 구단의 대처도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지명할당 예고를 듣고도 더 열심히 시리즈를 준비하고 있는 문지혁이라는 선수가 훨씬 더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거기까지가 아니었다. 틸먼 코치의 의문은 지혁이 불펜에서 공을 던지기 시작하자 더욱 커졌다.

“이봐, 문! 뭐야? 폼이 변했는데?”

“아, 코치님.”

지혁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난감했다. 사실 미래에서 조금 더 잘 던지려고 폼을 바꿨어요, 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어떻게 된 거야?”

“아... 그게. 요새 무릎에 무리가 좀 가는 것 같아서 혼자 연습하고 있었거든요. 이렇게 하니까 훨씬 편하고 또 좋아요.”

“디셉션도 생겼어요, 코치.”

불펜에서 공을 받아주던 포수 크리스트가 다가와 덧붙였다. 지혁의 왼팔이 뻗어 나오는 타이밍이 오른쪽 어깨에 아주 미묘하게 가려지고 있었다.

“디셉션까지?”

“네. 아마 좌타자들은 엄청 까다롭다고 생각할 거예요.”

틸먼 코치는 눈앞의 상황을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뭔가를 가르치면 수도 없이 반복해야 간신히 자기 것으로 만드는 스타일의 선수라고 판단했었다. 동양에서 넘어온 선수답게 정말 열심히는 하지만, 야구에 대한 타고난 센스와 재능은 떨어지던 선수. 결국 시카고 컵스가 재능의 부족을 이유로 방출할 것이라는 소문에 대해서 어쩔 수 없이 납득하게 만들던, 그런 선수가 바로 문지혁이었는데.

갑자기 편한 대로 폼을 바꿨는데, 그게 좋은 결과로 이어진다고?

“예전 폼보다 공은 더 좋아진 것 같은데요. 전체적인 구위도 그렇고. 제구도 좋아졌어요.”

“흐음... 문. 몇 개 더 던져봐. 조금 더 봐야겠어.”

지혁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폼에 대해서 더 까탈스럽게 물고 늘어지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정말로 난감할 뻔 했으니.

‘새로 장착했던 변화구들은 던져 볼 생각도 하지 말아야겠네.’

틸먼 코치가 대놓고 크리스트의 뒤에 팔짱을 끼고 섰다. 지혁은 천천히 와인드업을 하고 나서 크리스트가 미트를 대고 있는 쪽으로 패스트볼을 꽂아 넣었다. 손가락 끝에 볼이 채이는 감각은 메이저리그 마지막 등판에서와 꼭 같았다. 하지만 힘이 부족하다는 것이 몸으로 느껴졌다.

“방금 구속이 얼마야?”

“음, 87마일이네요.”

“구속은 평소랑 비슷하군. 조금 더 까다로운 위치로 요구해봐.”

“옙.”

크리스트는 홈 플레이트 상하좌우를 골고루 이용하면서 점점 더 까다로운 공들을 요구했다. 불펜 피칭이다 보니 전력으로 투구하지는 않았지만, 지혁의 공은 정확하고 깔끔하게 제구되고 있었다.

“확실히 좋아졌죠?”

“그렇군. 왜 하루아침에 이렇게 좋아진 거지?”

“오히려 마음이 편해진 거 아닐까요?”

“너 같으면 지명할당 될 거라는 소문을 듣고 나서 마음이 편해지겠냐?”

“절대 아니죠, 코치님.”

틸먼 코치와 크리스트가 쑥덕대는 사이, 지혁은 서서히 감을 잡아가고 있었다. 몇 번 정도 공을 던져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이전 생에 메이저리그에서 던질 때보다 전체적인 구속이 줄어들었고, 변화구도 덜 꺾이고 있다.

‘힘이 덜 붙었어. 지금 몸무게가.. 아직 80대인가? 조금 더 체중을 올려야겠어. 하체 운동이랑 악력 운동도 더 해야 될 것 같고. 흐, 징글징글한 웨이트 지옥에 빠져야겠네. 그 다음은 변화구를 좀 가다듬고...’

일단 최소한 저번 생에서 겪었던 수많은 시행착오들은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잘만 하면 단기간에 폼을 끌어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한 번 겪어 본 적이 있으니, 확실한 지름길을 알고 있는 셈이니까.

마이너리그 단계를 어떻게 밟아나가야 할지 로드맵이 그려진다. 일단 당장의 과제는 몸에 힘을 더 붙이는 일. 에드워즈처럼 깡마른 체구임에도 93마일 이상의 공을 펑펑 뿌려댈 수 있는 재능이 지혁에게는 아직 없다. 물론 신에게 요구할 수야 있겠지만.

“좋아. 피칭은 여기까지만 해, 문! 이제 곧 시합이니까.”

“옛.”

“그리고 이번 시리즈에서는 불펜으로 등판할 거야. 알고 있지?”

“... 그럼요.”

시즌을 치르는 동안 원래 5선발의 역할을 수행하던 지혁은 이런 단기전에서는 불펜으로 뛰곤 했다. 불펜으로 등판하는 것도 익숙한 일이다.

한편 한스 틸먼은 지혁의 낯선 변화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일단은, 눈앞에 닥친 파이널 시리즈부터 해결하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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