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 파이널시리즈.
석양이 지는 재키 로빈슨 파크의 풍경은 그야말로 절경 중의 절경이다. 주황색으로 변한 태양이 타오를 것처럼 빛나고, 보랏빛이 된 하늘 사이사이로 높이 솟아 있는 야자수들이 아름다움을 더한다. 가을바람이 살랑거리며 선수들의 머리칼을 간질인다. 그야말로 최고의 상태다.
뻐어엉!
“스트라이크- 아웃!”
최고의 날씨, 최고의 환경 속에서 최고의 컨디션을 자랑하는 C.J.에드워즈가 7이닝을 완벽하게 틀어막았다. 탬파베이 레이스 산하 싱글 A팀인 샬럿 스톤크랩스의 타자들은 에드워즈의 공에 완벽하게 눌려버렸다.
9월에 들어서면서 에드워즈의 컨디션은 최고점을 찍은 것처럼 보였다. 패스트볼 구속은 94마일을 넘어섰고, 두 번째 무기인 커브는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며 떨어졌다. 가끔씩 제구가 흔들려서 한복판으로 몰리는 공도 있었지만, 윽박지르는 구위에 밀려 내야 땅볼이 나오곤 했다.
7회가 끝난 시점에서 에드워즈는 단 3개의 안타만 허용하는 완벽한 피칭을 선보였다. 타선도 일찌감치 5점을 냈기 때문에, 데이토나 컵스는 비교적 여유 있는 상태였다.
“좋아, 제이크! 8회에는 네가 올라간다.”
“옛-써!”
데이빗 더그 감독이 선택한 다음 주자는 제이크 로데일이었다. 에드워즈의 투구가 워낙 인상적이어서, 그 반의 반만 하더라도 충분히 리드를 지킬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로데일은 더그 감독과 틸먼 투수코치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데이토나 컵스는 7회말 공격에서 크리스 브라이언트의 솔로 홈런으로 한 점을 더 달아나서 무려 여섯 점의 리드를 안고 마운드에 올랐음에도, 연속으로 세 개의 안타를 허용하며 순식간에 두 점을 내줬다. 다음으로 타석에 들어선 2번 타자는 파울 플라이로 잡아냈지만, 3번 타자인 드류 비틀슨에게 볼넷을 내주면서 1사 1,3루의 상황.
타악!
로데일에게는 운조차 따르지 않았다. 크리스트가 선택한 바깥쪽으로 떨어지는 슬라이더는 훌륭한 유인구였다. 하지만 샬럿의 리치 쉐퍼는 방망이를 놓치다시피 하며 툭 가져다 댔다. 방망이 끝에 맞은 공은 2루수의 키를 살짝 넘겨 중견수 앞에 떨어졌다.
6대3. 1사 1,2루. 분위기가 완전히 뒤집어졌다.
“틸먼 코치. 지금 불펜에 준비된 놈들 몇 명이나 있어?”
“제프리 로릭, 지혁 문. 둘입니다. 마무리 잭 케이츠는 아직 몸도 풀지 않았어요.”
“젠장! 로데일 저 녀석은 오늘따라 왜 이렇게 밸런스가 안 맞아?”
“불펜에서는 괜찮았는데...”
더그 감독이 손톱을 물어뜯었다. 아무리 싱글 A라고 하더라도 결승 시리즈는 결코 놓치고 싶지 않은 법.
“오늘 문 녀석 공이 괜찮습니다. 바로 올라갈 수 있는 상태구요.”
“확실해? 그 놈 방출 소문 돌고 있잖아. 정신적으로 흔들릴 거 아냐?”
“그게 좀 이상해요. 오늘 하루종일 기분이 아주 좋아 보이던데요. 컨디션도 그렇고.”
“뭐?”
더그는 그건 또 무슨 소리냐는 짜증스런 표정으로 틸먼 코치를 노려봤다. 하지만 틸먼은 그저 어깨를 으쓱할 뿐이다. 틸먼도 이유를 알 수 없었으니까. 지혁에겐 15년 전의 일이라, 방출 소문이 돌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도대체 누가 알 수 있겠는가?
더그 감독은 인상을 팍 쓰며 안주머니에서 울려대는 핸드폰을 꺼냈다.
“어쨌든 문을 마운드로 보내. 로데일은 이번 타자까지야.”
틸먼은 곧장 불펜으로 이동했다. 지혁은 불펜 마운드에서 글러브를 옆에 끼고 경기장을 내다보고 있었다.
“문! 다음 타석에 바로 올라간다. 준비됐지?”
“그럼요. 절 너무 늦게 찾은 거 아니에요?”
“농담까지 하는 걸 보니, 진짜로 뭘 잘못 먹은 것 같군. 혹시 너 약물이라도 한 거야?”
“코치님이야말로 이상한 농담 하지 마세요.”
“이상해도 너무 이상하단 말이지. 어쨌든 올라가! 마운드에 가서 로데일 저 놈의 엉덩이를 한 번 걷어차 주는 것 잊지 말고.”
데이토나 컵스와 지혁에게는 매우 다행스럽게도, 샬럿의 5번 타자 제프 맘이 때린 타구는 크리스 브라이언트의 호수비에 걸렸다. 3루 쪽 파울라인 위를 타고 빠져나갈 수 있는 아슬아슬한 공을 다이빙으로 건져낸 엄청난 수비였다. 불펜에서 초조하게 지켜보던 지혁도 슬그머니 미소지었다.
‘역시 나중에 MVP 먹는 놈은 떡잎부터 다르다니까.’
더그 감독이 직접 공을 들고 마운드로 향한다. 로데일은 처음 마운드로 향할 때의 밝은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찌푸린 얼굴로 걸어들어왔다.
지혁은 불펜에서 서서히 뛰어나갔다. 지난 선수 생활 동안 늘 하던 루틴대로, 야구장 꼭대기와 하늘이 맞닿은 곳에서부터 시선을 끌어내리면서.
“틸먼 말로는 컨디션이 꽤 좋다고 하던데.”
“네, 감독님. 오늘 컨디션 최고입니다.”
“흠, 좋아. 편하게 던져. 브라이언트 수비 봤지?”
“네. 수비 믿고 가겠습니다.”
“믿어보지.”
더그 감독은 공을 넘겨주고 마운드 뒤에 잠시 멈춰섰다. 지혁의 투구를 한두 개 정도 보고 내려갈 생각이었다.
싱글 A에 있는 선수들은 기본적으로 풋내기들. 상황에 따라 쉽게 흔들릴 수밖에 없다. 로데일도 시즌 중에는 꽤 준수한 녀석이었지만, 파이널시리즈라는 이유로 경기를 이 모양으로 만들어 놨으니까.
“으쌰!”
지혁은 연습투구임에도 기합 소리까지 내 가며 공을 뿌렸다. 패스트볼이 꽤 묵직하게 깔려들어간다. 더그 감독은 그제야 벤치로 돌아갔다.
“저거 뭐지? 정말 이상한 놈이네.”
라는 의문과 함께.
*
2사 1,2루에 3점 차. 사실 웬만한 선수들에게는 꽤 부담이 되는 상황이다. 하지만 지혁은 지난 생에 프로무대 마운드에서만 18년을 버텼다. 이 정도 위기는 너무 많이 경험하다 못해 신물이 날 지경이다.
게다가 상대는 이제 갓 싱글 A에서 꿈을 키우고 있는 마이너리거들. 소위 짬밥에서 차이가 나도 너무 심하게 나는 상대다.
지혁은 주심의 신호를 받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과거로 돌아와서 던지는 첫 공. 세트 포지션에서 오른발을 빠르게 뻗으며 강하게 뿌린다.
좌타자인 알레한드로 세고비아의 바깥쪽 모서리에 꽂히는 패스트볼. 전광판에는 90마일이 찍혔다. 지혁은 구속을 한 번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딱 이맘때 즈음 전력으로 던질 때 나오던 구속이네. 차라리 잘 됐어. 구속까지 3마일이나 올랐으면 훨씬 더 의심받았겠지.’
메이저리그에서 최고 94마일까지 나오던 패스트볼로 윽박지르는 맛은 확실히 떨어졌지만. 디셉션이 있는 폼에서 나오는 90마일짜리 제구된 패스트볼은 최소한 이곳 싱글 A에서는 충분히 통하고도 남는 볼이다. 아마 세고비아는 방망이를 내 볼 생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크리스트는 2구로 슬라이더를 요구했다. 바깥쪽 직구처럼 들어오다가 더 바깥쪽으로 빠져나가는 볼. 하지만 지혁은 고개를 흔들었다. 크리스트의 포구를 완전히 믿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지혁은 2구도 패스트볼을 선택했다. 이번에는 플레이트에 바짝 붙어 있는 세고비아의 몸쪽으로 과감하게 파고드는 공. 사실 살짝 빠졌지만 세고비아는 타이밍을 맞춰 휘둘렀고, 배트 안쪽에 맞은 공은 힘없이 파울 지역으로 굴러나간다.
카운트, 투 스트라이크 노 볼. 마운드에서 어느 때보다도 여유롭고 안정적으로 보이는 지혁 때문에 세고비아는 완전히 당황하고 있었다.
‘릴리버로 나와서 단번에 흐름에 적응했다고? 그것도 주자를 두 명이나 두고?’
이번 시즌 내내 상대했던 지혁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기도 전에 스트라이크 존에서 떨어지는 슬라이더가 세고비아의 방망이 한참 밑으로 지나갔다. 삼구 삼진. 맹렬하게 추격하던 샬럿 스톤크랩스의 분위기는 여기서 멈출 수밖에 없었다.
“문! 예쓰!”
“좋았어! 나이스 피칭이었어, 문.”
“슬라이더 꺾이는 게 예술이던데!”
이닝을 마무리하고 더그아웃에 돌아오자 벤치 멤버들이 일제히 나와 지혁을 맞아주었다. 평소보다 과하다 싶을 정도의 액션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데이토나 컵스의 벤치에서 지혁의 방출 소문을 모르고 있는 선수는 지혁 한 명 뿐이었으니까.
데이토나 컵스의 멤버들이 보기에는 팀에 대한 애정 때문에 마지막 불꽃을 태우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정작 지혁은 15년 전 자신의 몸에 적응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착실히 몸을 키운 이후 던졌던 폼을 과거로 가지고 오자 밸런스가 미묘하게 어긋나고 있었다. 큰 어려움이 있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당분간은 경기 운영으로 피칭을 하는 수밖에 없겠네. 하루라도 빨리 몸을 키워야겠어.’
8회초 공격이 조금 길어졌다. 타자들은 끈질기게 파울을 내며 샬럿의 투수진을 물고 늘어졌다. 그 사이 틸먼 코치가 벤치에 앉아 있는 지혁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문. 9회에는 제프리를 올릴 거야. 걔가 우리 팀 셋업이니까. 이해하지?”
“아, 그런가요? 컨디션 괜찮은데... 조금 아쉽네요.”
“그래. 내가 보기에도 컨디션이 좋아 보였어. 바뀐 폼도 효과가 좋은 것 같고.”
틸먼 코치는 더그아웃 벽에 붙은 달력을 잠깐 바라보고는 말했다.
“만약 우리가 5차전까지 간다면, 선발을 준비해. 오늘 공 세 개로 막았으니 부담도 없겠지. 체력적으로는 무리 없지?”
“네. 그런데 왜 갑자기... 에드는 어쩌고요?”
지혁은 갑작스런 틸먼의 요구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오늘 에드워즈는 나무랄 데 하나 없는 피칭을 했다. 휴식일을 포함해 4일을 쉬고 나서 5차전을 치르게 될 테니, 로테이션대로 흘러가도 에드워즈가 던지는 게 맞다.
“C.J.가 오늘 투구수 100개를 넘겼어. 내년에는 더블 A로 올라갈 녀석인데, 어깨에 조금이라도 부담을 주고 싶지 않은 거지.”
틸먼은 짜증난다는 표정으로 위를 가리켰다. 구단 차원에서 애지중지하는 특급 유망주를 보호하겠다는 뜻이었다.
코칭스태프의 입장에서 한 해 농사를 좌우하는 파이널 시리즈에서까지 핵심 투수를 아끼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도 결국 구단주와 단장 앞에선 일개 월급쟁이일 뿐. 시카고 컵스처럼 유망주들을 특히 아끼고 관리하는 팀은 마이너리거들을 절대 무리시키지 않는다. 그 대상이 싱글 A를 폭격한 C.J. 에드워즈라면 더욱 그럴 것이고.
“뭐, 알겠습니다. 최대한 오래 끌어 보도록 준비할게요.”
“좋아. 너는 몸 관리를 워낙 잘 하니까. 준비 잘 해 보라구.”
선발이라. 그것도 지혁의 야구 인생을 통틀어 첫 번째 우승 트로피를 들 수 있는 파이널 시리즈에서의 선발이라.
지혁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지난 생에서의 결과를 떠올렸다. 만약 과거대로 시리즈가 진행된다면, 반드시 5차전까지 흘러갈 것이다. 5차전에서 구원 등판해서 패전투수의 멍에를 썼던 게 바로 지혁이니까.
두근거리는 마음과 기대감이 샘솟기 시작할 때, 깨끗하고 맑은 타격음이 그라운드에서 들려왔다. 대만인 우익수 천펀치에가 우중간을 깔끔하게 가르는 타구를 날려 놓고서 3루까지 전력으로 뛰고 있었다. 1차전은 데이토나 컵스의 깔끔한 승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