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전처리, 회귀하다-5화 (6/204)

5 - 5차전.

“존 레스터의 원심 패스트볼은 얼마나 필요해요? 듣기로는 레스터는 엄청난 노력파라던데. 타고난 재능은 좀 작지 않나요?”

“언제까지 일일이 비교하고 고를 텐가?”

“나한테는 엄청 소중하고, 또 위험한 거래예요.”

지혁은 왼쪽 어깨를 툭툭 쳤다.

“선수 인생을 걸어야 된다구요. 그렇게 하라고 과거로 데려왔으면서 왜 이렇게 불평이 많아요? 얼른 알려줘요.”

“3년 8개월일세.”

“하... 3년 8개월. 4년으로 잡아야 하고. 그럼 11년...”

“아까운가? 자넨 이미 한평생 야구를 했었잖아.”

“거, 참. 남의 일이라고 말을 막 하시네. 4년이나 일찍 은퇴해야 되는 제 입장도 생각해 주셔야죠.”

지혁은 혼자 있는 시간만 되면 신을 찾고 있었다. 처음 몇 번 정도는 신도 꽤 즐거워했지만 이제는 슬슬 질린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정신 못 차리고 방방 날뛰다가 패스트볼에 모든 걸 투자했던 쿠팩스 녀석하고는 완전히 다르구만.”

“샌디 쿠팩스가 그랬었나요?”

“그래. 주저 없이 패스트볼을 골랐네. 그것도 8년이나 투자해서 말이야.”

“드와이트 구든은요? 커브겠죠?”

“말할 필요도 없지. 역사상 가장 강력한 커브를 던지겠다고 졸라댔었지.”

물론 어떤 재능을 받는 게 지혁에게 가장 도움이 될 일인지 결정해야 하는 점도 있었지만, 지혁이 신을 찾는 이유는 또 있었다.

신이 재능을 건넨 선수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지혁에겐 큰 즐거움이었다. 지금까지 살면서 결코 경험하지 못했던 최정상 세계의 이야기도 들었다.

신도 자신이 선택한 선수들이 역사에 한 획을 긋는 것을 매우 흥미롭게 지켜보았던 것 같았다. 과거의 이야기를 하면서 더없이 즐거워하곤 했다.

쿠팩스가 원래부터 갖고 있던 재능에 폭발적인 패스트볼이 더해졌을 때의 짜릿한 경험, 드와이트 구든이 눈에서부터 발끝까지 떨어지는 커브를 던질 때의 놀라움은 이야기를 듣는 지혁에게도 소름이 돋게 만들 정도였다.

“저도 그들처럼 될 수 있을까요?”

“글쎄. 그건 신인 나도 알 수 없는 게야. 자네가 하기에 따라 달린 거지.”

신은 샌디 쿠팩스나 드와이트 구든이 신에게서 재능을 받기 전에도 이미 엄청난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었다는 말을 굳이 덧붙이지 않았다. 지혁도 굳이 더 묻지 않았다.

그는 전생의 기억을 더듬어 어떤 재능을 선사받는 것이 보다 더 효과적일지만 고민했다. 시대를 호령했던 선수들의 재능을 받기엔 포기해야 할 날들이 너무 많다. 그렇다고 애매한 선택을 하자니 기껏 얻은 새로운 삶에서도 그저 그런 선수가 될지도 모른다.

“자네, 오늘도 결정하지 않을 모양이지?”

“네.”

“그럼 굳이 날 찾아왔어야 했나?”

“옆에서 조언을 해 줄 사람, 아니 신이 있으면 선택하기 편하니까요.”

“흐흐. 그것도 그렇군. 그나저나 이틀 뒤가 5차전 아닌가? 그 전에 재능을 받지 않아도 괜찮겠어?”

그 말에 지혁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제 짬밥을 뭘로 보시는 거예요? 아직 싱글 A에 있는 놈들은 제 실력으로도 충분해요.”

“호오, 정말인가?”

“당연하죠.”

지혁은 손에 들고 있던 자료집을 내려놓으며 의지를 불태웠다.

“제가 지난 생에 프로에서 18년을 굴렀어요. 첫 우승만큼은 신의 선물 없이 내 실력만으로 해낼 거예요.”

“자신감이 과한 것 아닌가? 자네가 메이저리그에서 뛸 때의 몸이 아니라고 하지 않았어?”

“그 동안 죽도록 해낸 내 노력에 대한 보상이에요.”

지혁은 스스로를 칭찬해 줄 생각이었다. 지난 생에 한 번도 얻지 못했던 우승이라는 경험을 신에게 의지하지 않고 본인의 힘으로 일구어내는 것으로. 두 번째 기회를 얻었다는 것 자체가 신에게 의지한 것이긴 하지만, 어떤 재능을 받기 전에 지난 18년간 최선의 노력을 다한 결과를 증명하고 싶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노력의 대가를 받아내야만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을 것이라는 신념 때문이기도 했다.

“그것도 나름대로 좋군. 잘 해 보게. 행운을 빌지.”

“신이면 그냥 행운을 내려주는 건 어때요?”

“방금 전에 내게서 아무것도 받지 않겠다고 했잖는가?”

“농담이에요. 행운도 내려주지 마세요.”

지혁은 웃었다. 자신감도 충분했다. 이제 던지는 일만 남았다.

*

5차전이 시작하기 직전에 더그 감독은 이례적으로 선수들 전원을 불러모았다. 더그는 이제 갓 이십대 초반 정도인 선수들이 흔들리고 있지는 않을까 걱정했다. C.J. 에드워즈와 피어스 존슨이 1, 2경기를 승리로 이끌었지만 샬럿 스톤크랩스는 기어이 3, 4차전을 따냈다.

우승하기 위해서 딱 한 경기만 더 이기면 되는 상황에서 두 경기를 내리 내준 것은 기세에 영향을 미친다. 샬럿의 기세는 상승세고, 데이토나의 기세는 하락세다.

“우리는 이번 시즌을 정말 잘 치렀다. 우승할 자격이 있어.”

더그 감독은 선수들의 면면을 한번 쭉 훑었다.

“1차전과 2차전에 하던 대로만 하면 돼. 여긴 우리 홈이다. 지난 두 경기는 잊어버려! 홈 팬들 앞에서 우승을 차지하게 됐으니 오히려 좋은 거라고 생각해라. 문!”

“네.”

“아주 혼쭐을 내주고 와. 자신 있지?”

“당연하죠. 많이도 말고 딱 3점만 내 주면 됩니다.”

지혁은 오른손에 낀 글러브로 가슴을 탕탕 쳤다. 선수들도, 코치들도, 더그 감독도 지명할당이 될 예정인 이 선수의 어디서 이 자신감이 나오는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이 경기를 마지막으로 자신들의 동료가 아니게 될 지혁의 어깨에 운명이 걸려 있다는 것도 사실이었다.

“좋아. 믿어 보지. 야수들도 집중해. 처음부터 문을 도와주자고. 알겠어?”

“예!”

“우승하자!”

“컵스!”

선수들이 한 목소리로 구호를 외치고 구장으로 뛰쳐나갔다. 지혁도 천천히 달려나간다. 마운드에 오르는 것은 특별할 것 없는 일이었지만, 오늘만큼은 정말 특별하게 느껴졌다. 순수한 문지혁의 실력으로 치르는 마지막 경기가 될 것이다. 이 경기 이후에는 뭐가 되었든 신에게서 재능을 받을 예정이었다.

“후우.”

마운드에 선 지혁은 일부러 소리를 내며 긴 숨을 내쉬었다. 지난 생에서의 모든 투구를, 모든 노력을 오늘 이 경기에 쏟아부을 것이다. 반드시 승리로 보상받고 싶었다. 어느 때보다도 간절했고, 또 자신감도 있다. 크리스트가 홈 플레이트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미트를 두드렸다.

“한가운데 패스트볼!”

크리스트가 일부러 크게 외쳤다. 연습 투구에서부터 기를 살려 가고 싶은 것이다. 지혁이 보기엔 새파란 애송이의 호기였지만 퍽 마음에 들었다. 지혁은 연습 투구였지만 전력으로 공을 뿌렸다. 손가락 끝에 실밥을 때리는 느낌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좋아. 컨디션 베스트야!”

지혁이 속으로 생각하던 말을 크리스트도 외쳐 주었다. 맞다. 지혁의 컨디션은 베스트다.

*

샬럿의 1번 타자 윌리 아르고는 공을 많이 보라는 특명을 받고 타석에 들어섰다. 시즌 내내 깔끔하기 그지없는 투구 폼을 유지했던 동양인 투수의 폼이 바뀌었다. 1차전에서 세고비아는 지혁의 공을 딱 세 개 봤을 뿐이다. 기다리고 있는 타자들에게 낯선 폼에 적응할 수 있는 시간을 주는 것이 아르고의 목표였다.

하지만 지혁은 산전수전을 다 겪은 베테랑이다. 그것도 마이너리그에서만 10년이 넘는 시간을 구른 선수다.

아르고도 나름대로 단단히 준비했을 테지만, 타석에서 마음먹은 대로 다 할 수 있다면 싱글 A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다. 아르고를 상대로 던진 초구는 홈 플레이트의 한복판에 꽂히는 패스트볼. 남들이 보기엔 실투에 가까울 정도의 공에도 아르고는 배트를 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공을 보고 싶지? 너무 뻔해.’

공 하나로 확신할 수 있었다. 지혁은 똑같은 코스에 똑같은 구속의 똑같은 공을 집어넣었다. 아르고는 본능적으로 움찔했지만 배트를 완전히 내뻗지 못했다. 아주 단순하고 공격적인 두 개의 공으로 스트라이크 두 개를 잡아냈다.

아르고가 당황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바깥쪽으로 약간 빠지는 세 번째 패스트볼에 결국 방망이가 따라나왔다. 3루수 크리스 브라이언트의 앞으로 힘없이 굴러가는 땅볼이다.

“땡큐, 크리스.”

“나이스 피칭.”

평범한 수비였지만 지혁은 브라이언트에게 감사의 표시를 보냈다. 훗날 올스타와 MVP를 석권하는 선수답게 하나도 긴장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2번 타자 제이크 헤이거도 초구 패스트볼에 배트를 내지 않았다. 지혁은 인터벌을 거의 주지 않고 곧장 와인드업해서 2구를 던졌다. 아르고 때와 같은 패턴이라는 것을 직감한 헤이거가 과감하게 스윙을 가져갔지만 지혁이 던진 공은 살짝 가라앉는 체인지업이었다. 방망이 밑에 빗겨 맞은 공은 2루수의 정면으로 굴렀다. 투 아웃.

‘좋아. 드류 비틀슨... 이 녀석은 초구를 노리고 있으려나?’

지혁은 글러브로 입가를 가리고 슬쩍 미소지었다. 오늘 그의 파트너인 채드 크리스트의 싸인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지혁은 한 번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립을 고쳐잡았다.

딱!

예상대로 비틀슨은 초구부터 적극적으로 휘둘렀다. 지혁이 공격적으로 피칭한다는 것을 알아냈지만, 그뿐이다. 지혁이 던진 공은 슬라이더였다. 타이밍이 어긋난 상태에서 따라가듯 맞춘 공은 힘없이 떠올랐고 좌익수 지안산티가 손쉽게 잡아냈다. 지혁이 아웃카운트 세 개를 잡아내는 데는 공 여섯 개밖에 필요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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