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전처리, 회귀하다-6화 (7/204)

6 - 5차전(2).

비록 관심도가 매우 떨어지는 하이 싱글 A의 포스트시즌이지만, 최소한 지금 재키 로빈슨 파크를 주목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흥미로운 경기가 전개되고 있었다.

정규 시즌 1위이자 올스타 포텐셜의 선수들을 두 명이나 보유한(크리스 브라이언트, C.J. 에드워즈) 데이토나 컵스는 마침표를 찍고 싶어한다. 반면 샬럿 스톤크랩스는 두 경기를 먼저 내주고 세 경기를 연달아 잡아내는 리버스 스윕을 목표로 절박하게 버티고 있다.

“문. 이번 회에는 조심해.”

“그래? 8번부터잖아.”

“8번하고 9번이 이번 시리즈에서 감이 좋아.”

“네 감은 오늘 별로인가 봐?”

포수인 크리스트는 2회말 공격에서 선두타자로 나서 평범한 땅볼을 쳤다. 그는 터덜터덜 들어오자마자 포수 장비를 챙겨 입으며 지혁의 옆에 앉았다.

“저 투수도 오늘 공이 꽤 좋아. 타이밍은 맞았는데 힘에서 밀렸어.”

“못 친 걸 변명하려는 건 아니고? 하하.”

“그런 것도 좀 있지, 자식아. 그냥 들어. 어쨌든 8번 드퓨랑 9번 카터. 이 두 명을 내보내면 1번으로 이어져. 골치 아플 거야.”

“그러면 변화구를 조금 더 던질까?”

“그래. 오늘 슬라이더 좋던데. 슬라이더를 많이 쓰자고.”

“오케이.”

지혁은 크리스트의 적극적인 자세가 꽤 마음에 들었다.

전생에서는 좋지 못한 타격 실력 때문에 결국 메이저리그를 밟지 못하고 은퇴했던 선수였다. 하지만 홈 플레이트에 앉아 있을 때만큼은 타자들을 읽어내려고 필사적으로 애쓰는 선수이기도 했다.

과거로 돌아와 상대 타자들의 특징이 잘 기억나지 않는 지혁에게는 매우 적합한 파트너라고 할 수 있었다.

“싸인대로 던질 테니까 제대로 리드해 줘.”

“오냐. 다음 타석에서는 하나 제대로 쳐 줄게.”

“그럴 리는 없을 것 같던데? 엉덩이 빠지면서 툭 대는 거 다 봤어.”

순간 더그아웃의 선수들이 기대감 어린 소리를 질렀다. 지혁과 크리스트도 더그아웃의 난간으로 뛰쳐나왔다.

“가라! 넘어가!”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가라... 아우!”

2루수인 웨스 다빌이 제대로 밀어친 공이 펜스 바로 앞에서 붙잡혔다. 우중간을 넘길 것처럼 보이던 공이었는데.

샬럿의 중견수 케스 카터는 엄청난 거리를 뛰어가더니 거의 땅바닥에 쳐박힐 듯한 자세로 공을 잡아냈다. 워닝 트랙 앞에서 한 바퀴를 구른 카터가 환호성을 질러댔다.

“저걸 잡네. 분위기가 넘어가겠어.”

“쟤가 9번이지?”

“응. 수비까지 잘 했으니까 더 조심해야겠다.”

“그러네. 긴장하고 던져야겠어.”

잘 맞은 타구가 호수비에 잡히고 나면 선수단의 분위기가 가라앉는다. 반대로 호수비로 위험을 탈출한 팀의 선수들은 끓어오른다. 야구의 신이 웃어주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 것이다. 뭘 해도 될 것 같은 느낌.

3회초를 위해 마운드에 오르던 지혁은 문득 야구의 신이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궁금해졌다. 정말 샬럿 스톤크랩스를 향해 웃어주고 있을까?

‘아마 보고 있겠지. 혹시 알아? 잘 던지면 보너스라도 베풀어줄지.’

새로운 재능 없이 지난 생에서의 결과로 우승하겠다는 말이 무색해지게 둘 순 없다. 야구의 신에게 보여줄만한 투구는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지혁은 8번 타자로 올라온 샬럿의 제이크 드퓨를 향해 자신 있게 초구를 뿌렸다.

슬라이더였다.

딱!

정타로 맞은 타구가 우익 선상을 향해 총알 같이 뻗어나갔다. 슬라이더를 노리고 있던 모양이었다.

‘이런 썅... 나가라! 밖에 떨어져!’

우익수 천펀치에는 공에서 한참 떨어져 있었다. 페어볼로 선언된다면 2루는 기본으로 내주고 3루까지도 내줄 수 있는 타구. 지혁은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1루심의 제스쳐에 주목했다.

자세를 잔뜩 낮추고 공이 떨어지는 지점을 바라보던 1루심은 두 손을 들어올렸다. 파울.

“워후. 큰일 날 뻔 했네.”

지혁은 모자를 벗고 큰 숨을 내쉬었다.

야구의 신은 아마 클클거리고 있을 것이다. 지금의 이 행운은 그가 내려준 것일까? 아니면 야구를 우습게보지 말라는 엄중한 경고일지도 모른다.

신의 의중이 무엇이었든, 아니면 신이 전혀 개입하지 않은 야구의 운명적인 결과이든 간에 방금의 이 타구는 정신이 번쩍 들게 만드는 타구였다.

2구를 위해 다시 마운드에 오른 지혁은 신중하게 싸인을 요구했다. 드퓨는 거의 살기가 뿜어져 나올 정도로 무서운 눈빛을 하고 있다.

패스트볼? 슬라이더? 체인지업?

지혁이 던질 수 있는 공의 싸인을 모두 거부하자, 크리스트가 미트를 잠시 내려놓았다. 그가 타임 요청을 보내려던 중, 지혁이 다시 사인을 보냈다. 패스트볼.

그 때 타석에 선 드퓨가 타임을 걸고 발을 뺐다. 인터벌이 너무 길어진 탓이다.

크리스트가 마스크를 벗고 일어섰다. 마운드에 잠시 올라오려는 것이다. 그 광경을 본 지혁이 오히려 글러브를 들어 크리스트를 말렸다.

“괜찮아! 그냥 앉아 있어!”

지혁은 일부러 로진백을 다시 한 번 만지고, 씹던 껌으로 풍선까지 작게 불었다. 잠시 야수들을 향해 서서 외야의 드넓은 잔디를 바라보며 목을 한 바퀴 돌리기도 했다. 날카로운 풀 스윙을 보여줬던 제이크 드퓨의 타이밍을 뺏는 행동들이었다.

긴장의 끈을 한계까지 조여 놓은 어린 선수들에게서 템포를 빼앗아오는 방법은 베테랑들이 아니면 알 수 없었다. 그러니까 이 공간에서는, 오직 지혁만이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피쳐! 빨리 마운드에 서!”

주심이 지혁을 보챌 때까지 늦장을 부리고서야 다시 투수판을 밟았다. 준비 동작에 들어가자마자 첫 번째 싸인을 받고, 곧장 와인드업 자세를 취했다.

지금까지 늦장을 부린 것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빠른 선택.

투수의 동작을 보고 속도를 맞춰야 하는 풋내기 타자들은 지혁의 이 노련한 방법에 적응이 되지 않을 것이다. 드퓨도 마찬가지였다.

“스트라이크!”

한복판에 꽂히는 88마일의 패스트볼. 방금 전 날카로운 스윙을 보여주었던 드퓨는 이번에는 움찔거릴 뿐 방망이를 내지 못했다.

“제구와 구속을 포기하면서도 템포를 빨리 가져갔군.”

더그 감독이 중얼거렸다. 내심 걱정을 하고 있던 차였는데, 지혁은 그 우려를 곧장 씻어버렸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마운드에서 타자를 대하는 태도였다. 때로는 구속이나 제구처럼 눈에 보이는 결과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이걸 어떻게 표현해야 되나...”

노련하다. 아니, 노련해졌다. 이전의 지혁에게서는 절대 찾아볼 수 없던 모습이었다. 스물세 살의 싱글 A 선수에게서는 찾기 어려운 모습이기도 했다. 더그는 이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종잡을 수 없었다.

드퓨는 이후 공 두 개를 커트해내고 볼 하나를 골라냈지만, 결국 우익수 플라이로 물러났다.

이어서 타석에 들어선 9번 타자 케스 카터도 지혁의 노련한 템포 조절에 휘말렸다. 카터는 저번 이닝에서의 호수비를 성공한 기세를 이어가겠다는 듯 힘차게 방망이를 휘둘렀다. 하지만 노련한 템포 조절로 타이밍을 빼앗는데다가 디셉션까지 있는 폼에서 나오는 공을 정확하게 맞추는 데는 실패했다.

“스트라이크! 배터 아웃!”

드퓨와 카터를 처리한 이후는 쉬웠다. 아르고는 첫 타석에서의 아쉬운 타격을 벗어나지 못했다. 날카롭게 떨어지는 체인지업에 방망이를 헛돌렸다.

“굿! 오늘 긁히는데?”

“잘 버텼어!”

호수비로 끝난 이닝. 넘어가려는 분위기. 지혁은 마운드에서 모든 것을 완전히 이겨냈다. 이제는 데이토나 컵스의 타자들이 해결해 줄 시간이었다.

*

딱!

“Fuck!”

3회말, 2아웃 2,3루. 데이토나 컵스의 4번 타자 보겔백의 타구는 유격수의 글러브로 곧장 빨려 들어가고 말았다.

따악!

4회말. 선두타자 크리스 브라이언트의 타구는 좌익수의 다이빙 캐치에 걸렸고.

“스윙! 배터 아웃!”

5회말. 2사 3루의 찬스. 3번 타자 더스틴 가이거는 딜런 플로로의 떨어지는 커브에 따라가지 못하고 삼진.

‘이걸 파이널시리즈 5차전답다고 해야 되는 건가?’

6회초 마운드에 오른 지혁은 착잡했다. 경기의 흐름이 꽉 막힌 것처럼 답답했다. 지혁이 5회까지 77개를 던지면서 무실점으로 막아내고 있지만, 그 사이에 타자들은 한 점도 따내지 못했다. 지금까지 득점권에서 불러들이지 못한 주자만 6명이다.

제 3자들이 보기에는 흥미진진한 투수전일지도 모르지만, 지난 20년 야구인생에서 이뤄내지 못했던 우승을 반드시 차지해야 하는 지혁에겐 답답하기 그지없는 경기다.

“플레이 볼!”

서서히 어둠에 쌓여 가는 재키 로빈슨 파크의 6회초. 지혁은 심리적으로 쫓긴다거나 조바심이 나지는 않았다. 하지만 딱 한 가지 간과했던 게 있다면, 체력적으로 완성되지 못했던 시점으로 돌아온 지혁의 몸 상태였다.

80구가 넘어가자 하체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고 악력도 초반보다 확실히 떨어졌다. 이번 파이널시리즈에서 .083의 타율에 그치고 있던 윌리 아르고를 상대했기 때문에 조금 방심했던 탓도 있을 것이다.

“막아! 3루 주지 마!”

밋밋한 패스트볼이었다. 손가락으로 때리는 힘이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아르고가 잡아당긴 타구가 우중간을 완전히 가르는 지점에 떨어졌다. 중견수 드보스와 우익수 천펀치에가 열심히 공을 쫓았지만, 천펀치에가 펜스까지 굴러간 공을 줍는 순간 이미 아르고는 2루 베이스를 통과하고 있었다.

“세잎.”

중계 플레이를 거쳐서 공이 3루까지 연결되기는 했지만, 아르고의 슬라이딩이 훨씬 더 빨랐다. 결과를 지켜볼 필요도 없는 세이프였다.

“씨발...”

이번 경기에서 처음으로 맞은 장타가 하필이면 노아웃에 나왔다. 게다가 1번 타자에게 내줬다. 지혁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딱 한 점만 리드하고 있었더라도 투구 내용은 완전히 달랐을지도 모른다. 벤치에서 틸먼 투수코치가 마운드로 걸어 나왔다.

“문. 괜찮아. 한 점 준다고 생각해.”

“...”

“우릴 믿어. 반드시 점수 내 줄게. 저 주자는 그냥 들여보내 주자.”

틸먼과 크리스트가 연신 지혁을 위로했다. 입을 열면 센 어조의 말이 튀어나올 것 같아서 지혁은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지금까지 잘 했어. 불펜도 대기하고 있고. 부담 갖지 말고 편하게 던져.”

틸먼은 지혁의 등을 두드려주고 내려갔다. 크리스트는 최대한 낮게 던지라는 말을 남기고 홈으로 돌아갔다.

‘후. 한 점도 안 주기는 힘들겠지?’

자꾸 지금까지의 결과를 돌이켜보게 된다. 5이닝 동안 맞은 안타는 단 두 개 뿐이었고, 볼넷도 하나밖에 주지 않았다. 아르고에게 3루타를 맞기 전까지 흠잡을 데 없는 경기를 해 왔다. 하지만 자칫 잘못하면 패전투수가 될 지도 모르는 상황까지 몰려 있었다.

잠시 모자를 벗고 흐르는 땀을 닦는다.

투수는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짧은 시간에 지혁은 한참을 고민했다. 지난 프로 생활에 그 답이 있었다. 어쩔 수 없는 답이기도 했다. 맞춰 주는 것. 세 명을 억지로 삼진을 잡으려다가는 오히려 주자만 채워 주게 된다.

지혁은 낮은 체인지업으로 땅볼을 유도했지만, 공의 속도가 너무 느려서 유격수가 공을 잡고도 홈으로 던지지 못했다. 아르고는 엄청난 준족이었고 배트에 공이 맞는 순간 이미 뛰기 시작한 상황. 샬럿의 제이크 헤이거는 빗맞은 유격수 땅볼을 치고도 더그아웃에서 엄청난 환호를 받았고, 전광판에는 처음으로 1이라는 숫자가 새겨졌다.

“씨발. 그래, 이게 야구지.”

6이닝 1실점. 투구수 92개. 피안타 3개, 볼넷 1개, 탈삼진 4개. 6회초를 마무리한 시점에서 지혁은 패전의 멍에를 쓰기 직전이었다. 전생에서의 기록과는 판이했지만, 결과는 같아지고 있다.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야구의 신한테 행운을 팍팍 내려달라고 할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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