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전처리, 회귀하다-7화 (8/204)

7 - 5차전(3).

6회초를 마치고 더그아웃에 들어온 지혁은 글러브를 집어던지고 싶었다. 샬럿의 선발 투수 딜런 플로로에게 수많은 기회를 얻어냈음에도 점수를 뽑지 못한 야수들에 대한 원망이 반 정도, 방심이 섞인 투구 때문에 1번 타자에게 3루타를 내준 스스로에 대한 짜증이 반 정도 섞인 그런 분노가 치밀었다.

아마 이 경기가 파이널시리즈가 아닌 일반적인 리그 경기였다면 그러고도 남았을 것이다. 지혁은 끓어오르는 화를 삭여 내며 벤치에 앉았다. 머리에 차가운 수건을 덮었다.

우승하는 것이 지금의 분노를 달랠 유일한 방법이었다. 괜히 여기서 감정을 표출했다가 다른 선수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은 악수다.

“좋은 피칭이었어.”

“에드.”

에드워즈가 지혁의 옆자리에 앉아서 손을 잡아주었다. 평소 같았으면 징그러운 스킨십이라고 여겼을 테지만, 이런 상황에서 투수의 마음을 잘 아는 것은 역시 동료 투수들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드워즈는 타고난 재능도 뛰어났지만 인성도 훌륭한 선수였다. 모두가 지혁이 억지로 화를 참고 있는 것을 보고도 쉽게 접근하지 않았다. 더그아웃에서 화가 난 선수를 배려하는 일은 생각보다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니까.

“쟤들한테 맡겨. 믿어. 해낼 거야.”

“... 그래.”

에드워즈가 아닌 다른 사람이 이런 위로를 했다면 속 편한 소리 하지 말라며 화를 냈을 테지만. 에드워즈니까 그냥 넘어가는 거다.

지혁은 땀을 닦으며 날카로운 눈매로 그라운드를 응시했다. 물론 승리가 훨씬 더 중요하긴 하지만, 이번 회에 득점을 내지 못하면 5차전의 승리 투수로 기록될 기회는 영영 사라지고 만다.

‘그딴 건 배부른 욕심이고. 좀 쳐라, 이 새끼들아. 제발!’

6회말 컵스의 선두 타자는 4번 댄 보겔백. 샬럿의 마운드에는 여전히 딜런 플로로가 있었다. 1차전 선발로 등판했던 플로로는 시리즈에서 다시 패배할 수는 없다는 것처럼 이를 악물고 던지는 중이다.

보겔백은 93마일짜리 몸쪽 패스트볼을 잡아당겼지만, 유격수 헤이거의 백핸드 캐치에 걸렸다.

“아! 아까워 죽겠네.”

벤치 난간에 매달린 어떤 선수의 아쉬움은 그만의 것이 아니었다. 오늘 컵스 타자들의 타구 질은 오히려 좋은 편에 속했다.

하지만 샬럿 스톤크랩스의 야수들은 대단한 집중력으로 연신 좋은 수비를 성공시켰다. 중견수 케스 카터를 포함해서 좌익수 아르고, 유격수 헤이거, 3루수 쉐퍼까지도.

이 경기를 만약 샬럿이 잡고 우승한다면, 그것은 순전히 수비에 의한 우승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자, 집중해! 크리스! 하나 보여 줘!”

에드워즈가 목소리를 높인다. 지혁은 대기 타석에서 배트를 돌리다가 서서히 걸어나가는 크리스 브라이언트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미래에서 그는 메이저리그에서 한 손 안에 꼽을 수 있는 선수가 된다. 지금 가장 의지할 수 있는 선수는 오직 그뿐이었다.

‘그래. 넌 빌어먹을 슈퍼스타니까. 하나 보여주라구.’

팀이 가장 필요로 할 때 해 주는 선수. 그게 바로 지혁의 기억에 남아 있는 크리스 브라이언트다.

따악!

묵직한 타구음이 울리자마자 모든 선수들이 자리를 박찼다. 플로로의 3구. 떨어져야 할 체인지업이 밋밋하게 밀려들어왔고, 크리스 브라이언트는 지체하지 않고 강하게 잡아당겼다. 타구가 뻗어나가는 순간 확실히 담장은 넘기는 공이었다. 모든 사람들의 이목이 좌측 폴대로 향했다.

“들어와라! 들어와라! 제발!”

브라이언트도 이례적으로 1루로 향하지 않고 타석에 그대로 서서 타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잘생긴 얼굴에 살짝 주름이 지는가 싶더니, 이내 1루를 향해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다. 직감했던 것이다.

그리고 크리스 브라이언트가 달려나가기 시작하자 재키 로빈슨 파크의 관중들과 데이토나 컵스 선수들이 엄청난 소리를 내질렀다. 공이 폴대 안쪽을 살짝 스치며 펜스를 훌쩍 넘어간다. 3루심도 손가락을 머리 위로 들어 빙빙 돌렸다.

“됐어! 역시 크리스야!”

“예에에에쓰!”

“가자! 역전시켜버려!”

브라이언트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홈을 밟았다. 이런 극적인 상황에서도 냉정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는 걸 보니 진짜 스타는 스타였다. 동료들이 헬멧을 두드리고 머리를 내려치는데도 웃음기 하나 없는 표정과 분위기는 브라이언트가 의도하는 바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크리스트도 그 의도를 눈치 챘는지 빽 소리질렀다.

“아직 동점이야! 끝까지 집중하자!”

크리스 브라이언트의 엄청난 홈런 한 방이 답답했던 흐름을 완전히 바꾸었다. 샬럿은 곧장 플로로를 내리고 앤드류 벨라티를 등판시켰다. 이제부터는 딱 한 번의 실수가 경기를 좌우하는 싸움으로 접어든다.

불펜에서 등판한 선수들의 적응력, 오랜 시간 수비에 나섰던 야수들의 집중력. 우승컵의 주인은 끝까지 그 집중력을 유지하는 팀이 될 것이다.

“고맙다, 크리스.”

“고맙긴. 아직 우승하려면 점수가 더 필요해.”

지혁은 그제야 머리에 얹어두었던 수건을 걷어냈다. 이제부터의 결과는 신에게 맡겨둬야 한다.

*

지혁의 뒤를 이어 등판한 제프리 로릭은 두 이닝을 깔끔하게 막아냈다. 컵스의 타자들도 앤드류 벨라티를 공략하지 못했다. 스코어 1대1의 경기는 9회까지 유지되었다.

이닝이 지날수록 우승 트로피에 대한 갈망이 심해졌다. 공 하나 하나마다 우승컵이 왔다갔다 하는 것이 느껴질 정도로.

선발 투수들은 어깨에 마사지를 하고 차분히 앉아서 경기를 지켜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지혁은 8회부터는 거의 난간에 매달려 있다시피 했다. 언제든 한 방만 터지면 그라운드로 달려나가서 우승을 만끽하고 싶었다.

“볼!”

주심의 존이 초반보다 명백히 좁아졌다. 컵스는 9회가 되면서 마무리인 잭 케이츠를 올렸는데, 좁아진 스트라이크 존에 애를 먹고 있었다.

샬럿의 클린업 트리오를 상대해야 하는 케이츠는 한 타자도 쉽게 내보내지 않겠다는 의지로 어려운 투구를 하는 중인데 존이 좁아졌으니 난감할 법 했다. 방금의 볼도 경기 초반이었다면 충분히 스트라이크 판정을 받을 수 있는 공이었다.

“조심해라, 조심해. 심판 저거 미친 거 아냐? 저걸 왜 안 잡아줘?”

“야, 문. 좀 조용히 하고 봐.”

지혁이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 못하자 주위의 선수들이 핀잔을 줬다.

‘칫. 니들은 몰라. 여기서 우승을 못 하면 평생 못 할 수도 있다고.’

두 번째 인생을 살게 된 지혁이야말로 여기 모인 모든 사람들 중에 가장 강렬한 열망을 갖고 있었다.

싱글 A에서 잘 나가고 있는 어린 녀석들은 이게 인생에서 찾아오는 단 한번뿐인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걸 체감하지 못하고 있다. 아마 패기만만한 녀석들은 언젠가 월드시리즈 우승도 차지할 거라고 믿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덤덤한지도 몰랐다.

인생의 쓴맛을 미리 맛본 지혁만이 어느 때보다도 간절한 얼굴로 경기를 바라보고 있다.

“스트라이크! 배터 아웃!”

다행히도 케이츠는 비틀슨과 쉐퍼를 연속 삼진으로 잡아냈다. 이제는 9회말. 컵스의 주자는 단 한 명만 홈에 돌아오면 경기는 즉시 끝나게 된다.

데이토나 컵스- 5번 타자, 써드 베이스맨! 크리스- 브라이언트!

장내 아나운서의 힘찬 소개 멘트가 울린다. 9회말, 한 방이면 우승을 확정짓는 상황에서 다시 타석에 들어선 것은 오늘의 스타 브라이언트. 그가 위협적으로 연습 스윙을 하는 것 만으로도 싱글 A의 경기치고는 굉장한 응원 소리가 울린다. 벤치에서 보기에도 그 존재감과 위압감이 어마어마할 정도였다.

평소의 무표정한 모습보다도 훨씬 더 냉정한 표정으로 타석에 선 브라이언트 정면 승부를 할 샬럿이 아니다. 9회말, 끝내기 주자가 루상에 나가는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브라이언트와는 승부를 하지 않겠다는 의도가 노골적으로 보이는 결과. 볼넷이었다.

“좋아, 무사 1루! 해보자!”

“이번에 끝내자, 크리스트!”

포수 크리스트는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배트를 들고 타석으로 향했다.

“헤이, 파트너! 제대로 한 방 갈겨버려!”

지혁은 큰 소리를 내며 크리스트를 불렀다. 그는 지혁을 돌아보면서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들어선 타석. 샬럿의 마무리 린스키가 던진 초구에 크리스트는 번트 자세를 취했다. 떨어지는 변화구가 들어오자 재빨리 방망이를 거둔다.

“뭐야, 번트야?”

“쟤 타율이 2할도 간당간당해. 번트가 당연하지.”

“근데 표정은 왜 저렇게 비장해?”

“하하하! 쟤 성격 알잖아. 팀의 운명을 자기 어깨에 다 짊어지고 있다고.”

그 말대로였다. 한참 동안 주루 코치의 싸인을 바라보던 크리스트가 깊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타석에 들어서서는 곧장 방망이를 내리고 무릎을 굽혔다. 명백한 희생 번트 자세였다. 세상 그 누구보다 진지한 표정으로.

린스키와 드퓨 배터리는 살짝 높은 공을 선택했다. 번트를 대겠다는 명백한 의지를 표출했으니, 최대한 번트를 대기 어렵게 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린스키가 공을 던지는 순간.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작전이 펼쳐졌다. 1루 주자 크리스 브라이언트가 스타트를 끊은 것이다.

“때려!”

지혁의 외침을 들었을까? 크리스트는 재빨리 방망이를 세우고 날아오는 높은 패스트볼을 그대로 밀어냈다. 공은 도루 때문에 베이스 커버를 들어간 샬럿의 2루수 헥터 게바라가 있어야 할 위치를 관통하며 외야를 향해나갔다.

크리스트의 타구가 내야를 벗어나는 순간, 컵스의 모든 구성원들이 더그아웃을 뛰쳐나왔다. 지혁을 비롯한 몇 명은 거의 홈 플레이트까지 달려나갔다.

“뛰어! 크리스! 무조건 뛰어!”

“홈! 홈!”

일찌감치 스타트를 끊은 브라이언트가 3루로 향할 때 주루코치는 정신없이 팔을 돌려대고 있었다. 크리스 브라이언트는 앞만 보며 전력으로 달렸다. 샬럿의 우익수로부터 출발한 공이 커트맨을 거치지 않고 홈으로 연결되었다. 하지만 샬럿의 포수 제이크 드퓨의 미트 안에 공이 들어왔을 때는 이미.

“우승이다!”

“크리스트! 크리스트 잡아! 예쓰!”

“예아아아아아!”

브라이언트의 슬라이딩이 홈 플레이트를 쓸고 지나간 뒤였다. 지혁과 컵스의 선수들은 2루 베이스 위에 서서 만세를 부르고 있는 크리스트에게 맹렬히 달려가 그를 덮쳤다. 한 덩어리가 된 선수들이 방방 뛰며 우승을 자축할 때 재키 로빈슨 파크에는 가벼운 불꽃이 터졌다.

“씨발... 더럽게, 더럽게 힘들었네.”

울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울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었다. 하지만 지혁의 눈은 이내 시뻘개졌다.

“뭐야? 야, 문 운다!”

“크하하하! 뭐? 운다고?”

“사내놈이 뭐하는 짓이야! 마이너리그 우승하고 울다니!”

크리스트를 때리느라 정신이 없었던 선수들이 지혁이 우는 것을 발견하고는 그를 둘러싸고 놀려댔다. 동양에서 온 투수는 지나치게 감상적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물론 지혁에겐 그런 생각 따위 아무런 상관도 없었지만.

‘드디어! 드디어 우승이라는 걸 해 보는구나.’

프로 인생 18년만의 첫 우승이다. 남들이 뭐라고 하든, 리그의 최고 위치에 올랐다는 벅찬 감정이 지혁을 녹아내리게 했다. 앞으로의 일은 어떻게든 되겠지.

오늘의 이 우승은 지난날의 필사적이고도 처절했던 노력의 보상이었다. 지혁은 기어이 통곡하다시피 눈물을 쏟아냈다.

한참 동안이나 끅끅대던 지혁에게 브라이언트가 다가왔다.

“마음 고생이 심했나 보네. 오늘 넌 승리투수의 자격이 있었어. 미리 점수를 내서 기록을 챙겨주지 못해 미안해.”

“크리스...”

데이토나 컵스 선수들의 시끌벅적한 환호와 지혁을 놀리는 녀석들의 웃음소리, 그리고 지혁을 안아 준 에드워즈와 브라이언트의 따뜻한 한 마디까지.

아름다운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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