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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전처리, 회귀하다-8화 (9/204)

8 - 패트릭 에이버리.

힘든 승부 끝에 싱글 A 우승을 거둔 뒤, 지혁은 일주일 정도를 쉬었다. 파이널시리즈를 끝낸 시점으로 돌아온 육체에도 피로가 많이 쌓여 있었고 결정적인 5차전에 선발 등판한 탓에 심적으로도 꽤 지쳤었다.

일주일의 휴식은 무척 달콤했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도 충분했다. 지혁의 노력과 능력만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했으니, 이제는 하루라도 빨리 재능을 얻어야 했다. 선수 생활은 줄어드는데 새로운 재능을 만개시킬 시간도 필요했으니 말이다.

그 때였다. 침대에 누워 앞으로의 계획을 구상하던 지혁의 핸드폰이 울렸다. 핸드폰 화면에 떠오른 번호를 보고, 지혁은 본능적으로 인상을 썼다. 지혁의 기억 속에 선명히 남아 있는 ‘그 날’이다.

“여보세요?”

“문지혁 선수? 시카고 컵스 프런트 오피스의 딕 페스토입니다.”

“네. 말씀하세요.”

“만나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

지혁은 일부러 소리 내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들으라는 듯이.

“그 일이군요?”

“역시 알고 있었군요? 소문이 흘러나간 것에 대해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구단 측의 실수였어요.”

딕은 연기를 꽤 잘 하는 녀석이었지. 지혁은 속으로만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만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구장으로 출근 가능하십니까?”

“네. 지금 출발하겠습니다. 15분이면 됩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럼.”

*

“아, 마침 왔네요. 들어와요, 문.”

“실례하겠습니다.”

30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딕 페스토는 지혁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모습 그대로였다. 자글자글한 곱슬머리와 커다란 뿔테 안경. 살짝 거슬리는 하이톤의 목소리와 다소 방정맞아 보이는 행동들까지. 흔히 미국 드라마에서 나오는 전형적인 ‘nerd’들 같이 생겼다.

지혁은 전생에서의 안 좋은 기억을 떠올렸다. 저 녀석 입에서 방출이라는 소리가 나왔을 때 얼마나 화가 났었는지, 또 분했었는지. 지금도 생생하니까.

“싱글 A 파이널시리즈 마지막 경기를 봤어요. 아주 좋은 투구를 했더군요.”

“고맙습니다.”

지혁은 무덤덤히 답하며 소파에 앉았다. 딕의 입발린 말에도 지혁은 큰 기대를 걸지 않았다. 그가 지명할당 조치를 당했던 가장 큰 명분은 따로 있었다. 파이널시리즈 최종전에서 좋은 투구를 보여줬다 해도, 컵스는 그를 방출 처리할 것이다.

“조금만 더 빨리 그런 투구를 보여줬으면 좋았을 텐데요.”

“이봐, 딕. 그렇게 말하지 말게. 문은 시즌 내내 괜찮게 던져 줬어.”

더그 감독도 이 딕 페스토라는 구단 직원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딕의 얇고 가는 목소리가 들릴 때마다 인상을 쓰곤 했으니까. 현장과 프런트의 관계는 늘 그런 것이다.

“아쉬워서 그러죠, 감독님. 아쉬워서. 하아- 이것 참.”

딕은 가지고 있는 서류를 내려다보며 연신 아쉽다는 듯 혀를 찼다. 지혁은 그 모습이 솔직히 조금 역겨웠다.

“본론만 빠르게 말씀하시죠.”

“음? 생각보다 성격이 급하시네요. 마운드에서는 꽤 침착해 보였는데.”

“딕! 이 친구를 놀릴 셈이야? 여긴 장난하는 자리가 아니야. 사람 구실을 못 하게 되고 싶은가?”

“워워. 감독님. 제가 뭘 그렇게 심하게 말했다고 그러세요?”

딕은 능글맞게 굴었다. 한 대 제대로 때려주고 싶은 마음은 지혁도 더그와 같았다. 저게 프런트 세계에서 살아남는 방식이라면, 지혁은 은퇴하고 나서 프런트에 몸을 담굴 일은 없을 것이다. 지혁과 더그가 딕을 쏘아보자, 딕은 목을 가다듬고는 웅변하듯 읊었다.

“시카고 컵스의 단장님을 비롯한 여러 임원 분들, 그리고 현장의 목소리를 종합한 결과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시카고 컵스 산하 하이 싱글 A팀 데이토나 컵스 소속 한국인 좌완 투수, 스물세 살. 문지혁 선수. 이번 시즌을 끝으로 우리와는 함께 할 수 없다는 점을 알려드립니다.”

딕은 전생에서와 꼭 같이 말했다.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기억 속에 똑같이 남은 장면이 그대로 재생되는데도 화가 끓어올랐다. 지혁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알아챘는지, 딕이 아쉽다는 듯한 제스처를 표했다.

“아쉽지만 이건 계약이에요. 문지혁 선수. 게다가 십자인대가 파열되었던 부상의 재발 위험도 있잖아요? 틸먼 코치가 그러던데. 무릎이 조금씩 아프다면서요?”

“잠깐. 그만 말해요. 어차피 계약도 끝났겠다 나한테 한 대 얻어맞고 싶지 않으면.”

보기만 해도 짜증나는 녀석이 어깨를 으쓱했다. 주먹에 힘이 들어가려던 순간 더그 감독이 지혁에게 말을 건넸다.

“문. 상황이 이렇게 된 걸 미안하게 생각하네. 하이 싱글 A에도 정해진 자리가 있어. 내년에 로우 싱글 A에서 올라와야 할 녀석들이 세 명이야. 우리는 자리를 비워내야만 했네.”

“더블 A에서 내려와야 할 선수도 있어요, 감독님.”

“딕! 내가 분명히 말하는데, 한번만 더 깐족거려 보게. 이 사무실에서 성한 몸으로 걸어나갈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을거야.”

“오우! 죄송합니다. 저는 한 대만 맞아도 뼈 한 마디는 부러지는 사람이라서요.”

더그와 지혁은 딕을 꼭 한 대 쳐야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컴퓨터 앞에서 자판이나 두드리던 샌님이 힘없는 마이너리거를 방출시키는 자리에 오니 마치 엄청난 권력자라도 된 것처럼 느껴지는 모양이다.

“어쨌든, 문. 내가 잘 아는 에이전트가 있어. 유명하지는 않아. 마이너리그에 있는 선수들을 주로 데리고 있거든. 하지만 선수들의 평가는 확실히 좋은 에이전트일세. 요 몇 년 정도 쉬고 있기는 하지만.”

“감독님...?”

“어때. 이 친구에게 연락 한 번 해 보겠나?”

더그의 제안은 지혁의 예상에 없던 것이다. 파이널시리즈 5차전 등판에서 더그는 지혁의 새로운 모습을 본 모양이었다.

실제로 새 구단을 찾기 위해 지혁이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일이 괜찮은 에이전트를 구하는 일이다. 고등학교 때 계약을 맺었던 한국의 에이전시는 오랜 시간 마이너리그에 머물러 있던 지혁을 거의 방치하다시피 했다. 새로운 에이전트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래. 패트릭 에이버리라고 하는 놈인데. 성격이 좀 괴짜지만 그래도 일은 확실히 하는 놈이니까. 한 번 만나보게.”

더그는 안주머니에서 명함을 한 무더기 꺼내 뒤지다가 낡은 것 하나를 골라냈다. 꽤 오래 된 명함이었는지 군데군데 누르스름하게 변해버린 채였다.

Patrick Aiverey.

지혁은 명함에 쓰여 있는 이름을 한참 내려다봤다. 전생의 기억을 아무리 더듬어도 이름 한 번 들어본 적 없는 사람이었다. 어느 정도 유능한 사람일지는 알 수 없었지만, 최소한 더그 감독의 성의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됐네. 은혜는 무슨. 그냥 보내기는 뭔가 걸리는 게 있을 뿐이야. 어디에 가서 야구를 계속할지 모르겠지만, 저번 등판처럼만 하면 충분히 잘 해낼 수 있을 거라고 보네. 자넨 워낙 성실하니까.”

더그는 코를 쓱 훑고는 손을 내밀었다. 지혁은 지금까지 더그 감독을 인자한 감독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지만, 이제는 생각을 바꿔야 할 것 같았다. 더그가 내민 손을 마주잡자, 더그는 손에 힘을 꽉 쥐었다.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네.”

“감독님...”

“지키다뇨, 더그. 아까도 말했지만 이건 계약이에요... 우왁!”

더그가 집어 던진 서류철이 딕의 안면을 강타하자 웃음이 터져 나왔다. 데이토나 컵스라는 팀에서의 마지막에 웃음이 존재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감사합니다, 감독님.”

“인연이 된다면 또 볼 수 있겠지. 열심히 해 보게.”

*

다음날, 지혁은 패트릭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간 지 한참 지났는데도 전화를 받지 않아 막 끊으려던 차에 이제 막 잠에서 깬 부스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패트릭 에이버리? 맞습니까?”

“... 누구?”

“아, 안녕하세요. 데이빗 더그 감독님이 소개해 주셔서 연락드렸습니다. 데이토나 컵스 소속의...”

“지혁 문?”

“네. 맞습니다. 더그 감독님이 미리 연락하셨나요?”

“아니.”

“그럼 저인 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이 시점에 에이전트한테 연락할 놈들은 방출된 놈들밖에 없어. 더그 그 양반이 있는 팀은 데이토나고, 데이토나에서 방출될 놈은 몇 명 없지. 많아야 세 명? 그리고 그 중 두 명은 흑인이고. 너 같은 목소리가 아니야. 그럼 답은 뻔하지. 아시아인, 아. 정정. 한국인. 투수. 스물세 살. 문지혁. 좌완이고, 선발로 쓰기도 불펜으로 쓰기도 애매한 선수.”

수화기 너머 속 패트릭은 끼어들 틈을 주지 않고 순식간에 말을 마쳤다. 지혁이 그의 말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다 들었다고 확신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어... 네. 그러니까 제가 문지혁은 맞습니다. 어...”

“방출당한 것도 맞겠지. 나한테 연락한 걸 보니.”

“네, 그것도 맞구요.”

“젠장. 일하기 싫은데.”

“예?”

“난 다시는 너처럼 재능 없는 투수는 안 맡기로 했어. 선수로써 포텐셜이 없다고. 내가 데리고 있는 머저리 같은 녀석들도 다 그렇지만.”

패트릭이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욕을 뇌까리는 것을 지혁은 분명히 들었다.

“하지만. 내가 더그한테 빚을 하나 졌어. 아마 네 놈을 맡는 걸로 퉁칠 생각인가보군.”

“제가 당신하고 반드시 계약할 거라고 장담하시는 건가요?”

“싫어? 싫으면 끊어. 더그한테는 내가 찬 게 아니고 네가 스스로 복을 걷어찼다고 똑똑히 말하고. 난 어차피 이 전화를 받은 시점에서 빚을 해결한 거야.”

지혁이 겪어 본 어떤 에이전트도 선수를 이런 식으로 대하지 않았다. 특히나 계약을 위해 연락해 온 선수에게는.

에이전트라는 사람들은 늘 선수들을 현혹했다. 이건 이렇게, 저건 저렇게. 또 계약은 이렇게 저렇게 하세요, 라며. 개중 질이 나쁜 몇몇은 선수는 야구에만 집중할 수 있게 해 주겠다는 허울 좋은 핑계를 대며 알 수 없는 일들을 저지르기도 했다.

앞에서는 좋은 말로 구슬리고, 뒤에서는 켕기는 짓을 해대는 사람들이 바로 에이전트다.

그리고 지난 생에 수많은 에이전트를 겪어 본 지혁이야말로, 선수의 앞에서 듣기 싫은 말을 하는 사람들이 진짜배기라는 것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 패트릭 에이버리는 목소리만 듣고도 전화를 걸어온 사람이 지혁이라는 사실을 알아냈고, 포텐셜이 없는 그저 그런 투수라고 평가하는 것을 서슴지 않았다.

“그럴 리가요. 당신이 얼마나 유능한 사람인지는 바로 알았어요. 한 번 만나시죠.”

“... 이렇게 하면 어중이떠중이들은 보통 떨어져 나가던데. 젠장. 진짜 귀찮게 됐잖아.”

“제가 문자로 시간과 장소를 알려드릴게요. 계약서 가져오시는 것 잊지 말구요.”

“하. 그럽시다. 빌어먹을 더그. 마냥 쉬고 싶었는데.”

“그리고, 한 가지만 물어볼게요. 내가 던지는 구질들에 대해서 알고 있나요?”

“보통 정도 패스트볼. 평균 이하의 슬라이더. 낙폭은 괜찮은데 제구는 별로인 체인지업. 그냥 던질 줄 아는 정도인 커브.”

“맞아요. 그리고 하나 추가해주세요.”

지혁은 전화기를 들고 소파에 느긋이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는 신을 바라봤다.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여유롭게 모든 것을 듣고 있던 신이 웃었다.

“싱커. 하드 싱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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