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 패트릭 에이버리(2).
잠도 자지 않고 새벽까지 선수들의 재능을 일일이 확인하던 지혁은 마침내 환호성을 질렀다. 그에게 아주 정확하게 필요했던 공을 던지던 투수가 있었다.
2006년 내셔널리그 사이영 수상자이자, 2008년 내셔널리그 다승왕에 빛나던 에이스.
브랜든 웹.
“정말로? 정말로 웹의 싱커가 3년밖에 안 필요하다구요?”
“그렇네.”
“아니 어떻게?”
“그 친구의 싱커는 특별했지.”
“무슨 소리에요? 특별한 재능이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한 거 아니에요?”
“흐흐흐.”
신은 지혁이 애타게 매달리는데도 그저 웃고 말았다. 더 이상은 말해줄 수 없다는 신호였다. 지혁은 재빨리 인터넷에서 브랜든 웹의 투구를 찾았다.
80마일 대 후반에서 90마일 대 초반까지 나오는 패스트볼과 비슷한 구속의 싱커. 그리고 허를 찌르는 체인지업과 슬라이더. 타자들의 방망이는 헛돌기 일쑤였으며 빗맞아 부러지기 예사다.
“이해가 안 가네. 왜 이 싱커가 3년밖에 안 필요한 거지?”
“타고난 재능이 아주 작더라도 거대한 파도를 만들 수 있다는 걸 보여준 게지.”
“음...”
모니터 속 브랜든 웹은 어느 때 보다도 거대해 보였다. 묵직하게 휘며 떨어지는 싱커는 언제나 그라운드 안을 구르는 볼을 만들어냈다. 한참 동안이나 웹의 피칭을 감상하고 있던 지혁은 문득 신에게 물었다.
“케빈 브라운은요? 케빈 브라운의 싱커는 얼마나 필요하죠?”
“케빈! 그 친구도 어마어마했지. 그 싱커는 8년은 줘야 한다네.”
“하하하! 오케이. 알겠습니다.”
신의 대답에 지혁은 손뼉을 치며 웃었다. 웹과 브라운 모두 리그를 지배했던 싱커를 던지던 투수다. 그런데 왜 두 배가 넘는 선수 생명을 필요로 하는지 어느 정도 감이 잡혔다.
케빈 브라운의 싱커는 그 자체로 무지막지했다. 95마일에서 97마일까지 나오는 공이 엄청난 각도로 떨어지기까지 한다. 하지만 웹의 싱커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싱커만 놓고 보면 다른 투수들의 공과 별 차이점이 없어 보일 정도로.
웹은 그 싱커를 아주 잘 ‘이용’하는 투수였다. 패스트볼과 싱커, 그리고 체인지업과 슬라이더를 필요한 순간, 필요한 곳에 찔러넣는다. 마운드 위에서의 운용으로 부족한 재능을 커버하고, 그걸 넘어서서 정점에 다다랐던 투수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지혁이 추구하는 투수였다. 패스트볼도, 변화구도, 제구력도 모두 노력만으로 구사해야 하는 지혁이 승부를 볼 수 있는 것은 마운드 위에서의 노련한 운영, 배짱, 심리 싸움이니까.
웹의 싱커는 이 욕구를 채워줄 수 있으면서도 가장 소모량이 적은 구질이다.
“웹의 싱커로 할게요. 무조건.”
“흐흐. 기어이 찾아냈군. 좋네, 좋아. 나야 어떤 쪽이든 만족이라네.”
*
패트릭과의 첫 번째 만남은 통화가 있은 지 열흘 뒤였다. 뉴욕에 머물고 있던 패트릭이 플로리다로 넘어오기로 했다.
패트릭 에이버리의 첫 인상은 지혁이 예상을 완벽히 깨뜨렸다. 약속한 카페에서 먼저 기다리고 있었던 지혁은 눈앞을 서성이던 사람이 패트릭이라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지혁이 앉아 있는 테이블 옆에서 몇 분쯤 어슬렁거리던 금발의 미남이 갑자기 맞은편에 앉아서 명함을 내밀었을 때 지혁의 표정은...
“다들 처음엔 그렇게 봅니다. 나도 인정해요. 내가 생긴 거랑 매칭이 잘 안 되긴 하니까.”
“당신이 정말 패트릭 에이버리 맞습니까?”
“몇 번 물어봐도 대답은 똑같으니까, 쓸데없는 질문은 그만하시죠?”
스크린 속 조각 미남이 튀어나온 것처럼 생긴 패트릭은 살짝 인상을 쓰고 있었다. 팔짱을 낀 와이셔츠에서는 패트릭의 탄탄한 팔 근육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지혁은 순간적으로 플로리다의 허름한 카페가 영화 속 로맨틱한 공간이 된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하드 싱커를 던진다구요?”
“아, 아아. 네? 뭐라구요?”
“집중해요. 혹시... 당신, 게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겁니까!”
“아니면 됐고. 내가 아무리 능력이 좋은 에이전트긴 해도 성적 취향에 대해서는 알 방법이 없어서요. 그리고 만약에 당신이 게이라면 그 사실을 가장 먼저 알아야 할 사람은 에이전트가 될 사람인 나에요. 잊지 말길 바랍니다. 그리고 게이도 아닌데 뭘 그렇게 쳐다봐요? 잘생긴 남자 처음 보나?”
패트릭이 짜증을 내는 장면이 마치 인상을 쓰는 반지의 제왕에 나온 레골라스처럼 보여서, 지혁은 정신을 차리기 위해 심호흡을 해야 했다.
“미안합니다. 너무... 뭐랄까, 비현실적이어서요.”
“그 정도는 아닙니다. 오버하지 마세요.”
“이미지랑 너무 달라서...”
“내 질문에나 대답해요. 하드 싱커를 던진다고 했습니까?”
“네.”
“알아봤는데, 시즌 중에 싱커를 던진 적이 단 한번도 없었어요. 심지어 연습투구에서조차도. 그런데도 하드 싱커를 던진다?”
“혼자 따로 연습하고 있었어요. 실전에서 쓸 정도는 아니라고 판단했지만요.”
“흐음. 내년부터는 실전에서 써먹을 생각입니까?”
“네. 이번 겨울부터는 싱커에 초점을 맞출 생각이에요.”
패트릭은 턱을 괴고 한참 동안 생각에 빠졌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시면서, 지혁은 패트릭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아마 여자라면 분명히 반했을 거다. 마치 글로벌 기업의 후계자가 기업의 미래를 고민하는 것처럼 보이니까.
“싱커를 던질 거라면 내가 추천하는 다음 팀은 세 개에요. 1순위는 탬파베이 레이스. 2순위는 볼티모어 오리올스. 3순위는 뉴욕 메츠.”
“왜죠?”
“세 팀 모두 싱글 A와 더블 A에 괜찮은 투수들이 부족한 게 첫 번째 이유. 두 번째는 세 팀의 프런트와 코치들이 무브먼트가 있는 패스트볼을 선호한다는 점. 싱커를 제대로 배우고 제대로 던지려면 이쪽이 좋을 겁니다. 또 세 팀 다 피지컬 트레이너들이 하체를 잘 다뤄요. 당신은 무릎 수술 경력이 있으니까 꼭 필요한 조건이죠. 마지막으로 세 팀 모두 당분간 우승할 일은 없을 거라는 점.”
“첫 번째 이유랑 두 번째 이유는 알겠어요. 세 번째도 오케이. 네 번째는 왜죠?”
지혁은 눈앞에 있는 패트릭이 정말 끝을 알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패트릭이 꼽은 세 팀 모두 지혁의 전생에서 결국 우승을 차지하지 못했던 팀이다.
“탬파베이와 볼티모어는 애매한 팀이죠. 어쩔 때는 우승권이었다가 또 어쩔 때는 리빌딩을 하기도 하고. 매 년 반복이에요. 대권에 도전해야겠다는 강한 의지와 그걸 뒷받침할 재정이 확실하지 않은 팀. 결국 이 두 팀이 아메리칸리그 동부지구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끊임없이 유망주를 생산하고, 그걸로 장사하는 겁니다. 이 팀들은 검증되지 않은 복권들을 최대한 많이 가지고 있는 게 이득인 팀들이에요. 그런 만큼 유망주들을 잘 성장시키는 데 일가견이 있고.”
패트릭은 숨도 쉬지 않고 빠르게 말을 이어갔다.
“뉴욕 메츠는 조금 다른 케이스. 지금부터 몇 년 정도는 우승을 노릴 겁니다. 하지만 내가 볼 때 성공할 것 같지는 않고. 타자진이 영 꽝이야. 어쨌든 향후 3년에서 5년 사이까지 월드시리즈 우승에 도전하다가 그 이후에 리빌딩으로 방향을 틀 겁니다. 그러니 우승 도전 기간 동안 마이너리그에서 가치를 조금만 끌어올리면 다른 팀의 슈퍼스타와 트레이드 될 가능성이 높고, 리빌딩 기간까지 버티고 있는다면 메이저 진입이 쉬워지죠. 무슨 말인지 이해합니까?”
후우. 패트릭은 그제야 길게 숨을 쉬었다.
후우. 속사포 같이 쏟아지는 말을 듣던 지혁도 숨을 내쉬었다.
“제가 확실히 이해한 건 하나 있어요.”
“하나로는 안 되는데.”
“성격이 괴짜지만 능력은 확실하다는 더그 감독님의 말. 그게 이해가 되네요.”
지혁은 주머니 안쪽에서 펜을 꺼냈다.
“계약서 꺼내요, 패트릭. 다른 건 더 들어볼 필요도 없고, 조건도 마음대로 해요. 당신이랑 무조건 같이 해야겠으니까.”
*
패트릭과 계약을 맺고 난 후, 그를 다시 만나기로 약속한 것은 세 달 뒤인 12월이다. 패트릭은 윈터 미팅 기간에 이적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했다. 지혁은 그를 한 번 만났을 뿐이지만, 패트릭이 하자는 대로 하는 것이 최소한 지혁이 단독으로 판단하고 움직이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세 달의 여유 기간 동안 지혁은 웨이트 트레이닝에 집중했다. 목표는 벌크업. 메이저리그에서 뛰던 시점의 몸으로 가는 것이다.
188cm의 신장에 82kg라는 체중은 지나치게 적었다. 지난 생에 수도 없는 시행착오를 겪은 끝에 알아낸 적절한 몸무게는 100kg 내외. 그 정도의 체중은 있어야 공에 구위를 제대로 실어낼 수 있다.
“으아아아... 으아!”
마지막 벤치 프레스를 들고 난 이후 축 늘어졌다. 어깨와 팔의 근력을 끌어올리고, 스쿼트를 통해 하체를 단단하게 만드는 운동을 하루 종일 반복하는 일은 훈련의 단계를 넘어 고통에 가깝다.
엄청난 운동량으로 근육을 태우고 나면, 태운만큼, 아니 그보다 더 먹어야 한다. 마이너리거들이 아주 질 낮은 빵 조각과 소시지 몇 개로 끼니를 때우는 것은 사실이지만, 단기간에 몸을 키우기 위해서는 엄청난 양의 칼로리가 반드시 필요했다.
다른 마이너리거들은 바로 이 식비를 벌기 위해 파트타임 잡까지 병행하기도 한다. 지혁에게 티미가 있다는 것이 그래서 참 다행이었다.
“야. 더 먹어라.”
“땡큐, 티미.”
“지랄하지 마. 니가 고맙다고 하면 그 말 한 마디로 퉁치는 거 같잖아. 절대 안 돼.”
“내가 무조건 열 배로 갚아 준다니까. 외상 달아 놔.”
“안 그래도 달아놓고 있어. 장부 보여줘?”
개인 운동을 하는 지혁은 티미의 가게를 아지트 삼아 운동을 하고 있었다. 오전과 오후 동안은 식당 영업을 하고 밤이 되면 펍의 역할을 하는 티미의 가게는 부족한 식단을 해결하는 데 안성맞춤이었다.
“하여튼 입만 살아가지고... 다음 팀은 알아보고 있냐?”
“응. 에이전트가 알아서 해 주겠대.”
“확실한 거야? 시궁창 속에서 현실만 보고 사는 마이너리거들 등쳐먹는 새끼들이 얼마나 많은데.”
립을 뜯던 지혁이 잠시 멈칫했다.
패트릭이 지혁을 사로잡은 방법은 인간이라면 다 외우기 힘들 것 같은 마이너리그 선수들의 정보, 코치와 프런트의 성향, 팀이 가지고 있는 비전 등을 막힘없이 술술 풀어놓은 것이었다.
선수와 에이전트의 표면적인 관계는 이것뿐이다. 선수는 돈의 일부를 지급하고 에이전트는 정보와 계약으로 그 대가를 치르는 것. 패트릭은 본인이 일을 제대로 할 수 있다는 점을 어필했고, 지혁은 그 능력을 보고 계약을 맺었다.
하지만 선수와 에이전트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관계도 영향을 끼치곤 한다. 비즈니스적인 거래만 하는 사이라고 단정 짓기는 힘든 사이다.
인간적인 믿음과 신뢰.
한 배를 탄 사람들 사이에서 구축되어야 하는 신뢰 관계는 필수적이다. 더그의 소개를 받아 패트릭에게 전화를 걸었고, 플로리다에서 한 번 그를 만났다. 그게 전부다.
“... 내가 잘 알아볼게. 걱정하지 마.”
“그래, 새끼야. 잘 좀 해.”
티미는 옆에 놓여 있는 빈 접시를 들고 일어섰다.
“부족하면 말해. 더 만들어 줄테니까.”
“역시 내 친구야. 고마워.”
“진짜 미쳤냐? 고맙다고 좀 하지 마. 소름돋으니까. 언제부턴가 왜 자꾸 고맙다고 하는거야? 평소처럼 틱틱대기나 할 것이지.”
“하하하. 그래그래.”
지혁은 립을 하나 새로 뜯으면서 패트릭 에이버리를 떠올렸다. 데이빗 더그 감독과 나눴던 마지막 악수도 떠올렸다. 티미의 말을 들으니 번뜩 정신이 드는 기분도 들었다. 전생에서 패트릭 에이버리라는 에이전트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없었던 것은 왜일까?
얼마 전 카페에서 봤던 그는 선수들의 기록과 특징을 샅샅이 외우고 있던 사람이었다. 자료를 찾아볼 필요도 없을 정도로 열정적이고 똑똑한 사람이라면, 전생에서도 분명히 이름을 한 번 쯤은 들어봤어야 했을 것이다.
“패트릭 에이버리라...”
일단 윈터 미팅 기간까지는 몸을 키우는 게 우선이다. 최소한 패트릭을 한 번은 더 만나 봐야 제대로 된 평가를 내릴 수 있을 것이다.
*
2013년 메이저리그가 끝났다. 월드시리즈는 정규 시즌에서 나란히 .599로 최고 승률을 기록한 두 팀의 대결이었다. 보스턴 레드삭스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보스턴 레드삭스는 2012년 처참한 내용으로 아메리칸리그 동부지구 꼴찌를 기록했었다. 팀의 고액 연봉자들을 대거 처리하고 감독을 존 패럴로 바꾼 보스턴은 고작 1년 만에 완벽한 부활에 성공했다.
존 레스터와 존 래키, 두 선발투수는 전성기의 기량을 되찾았고 타자와 준이치와 우에하라 코지의 일본인 불펜들은 뒷문을 완벽하게 틀어막았다. 특히 우에하라의 포크볼은 메이저리그 전체에서도 손꼽히는 마구로 인정받고 있었다.
[ 우에하라가 보스턴 레드삭스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위한 마지막 타자를 상대합니다. 오늘 4타수 3안타를 기록하고 있는 맷 카펜터. 카펜터만 잡아내면 레드삭스는 무려 95년 만에 보스턴의 홈구장인 팬웨이 파크에서 월드 챔피언이 됩니다. ]
티미의 가게에서도 월드시리즈를 틀어놓았다. 지혁은 치킨을 뜯으며 세인트루이스의 9회초 마지막 공격을 지켜보고 있었다. 팬웨이 파크에 모인 만원 관중이 일제히 ‘코-지! 코-지!’를 연호하는 것이 스크린을 타고 그대로 전달된다.
“저 포크볼은 못 쳐.”
투 스트라이크 투 볼 상황에서 지혁이 중얼거렸다. 지혁은 마운드에 선 노장 일본인 선수가 월드시리즈를 마무리하는 장면을 이미 수차례 보았다. 하지만 매번 전율이 이는 것은 똑같았다.
[ 던집니다, 헛스윙! 우에하라의 포크볼에 헛스윙 삼진을 당하는 카펜터! 2013년 월드 챔피언, 보스턴 레드삭스입니다! ]
6차전의 결승 쓰리런 홈런을 때려낸 쉐인 빅토리노, 월드시리즈 MVP를 수상할 데이빗 오티즈, 그리고 환골탈태하며 리그 최고의 불펜으로 자리잡은 우에하라 코지가 마운드에서 환호를 질러대는 장면이 작은 텔레비전 속에서 재생된다. 속에서 울컥거리는 것이 밀려 올라왔다.
‘신의 은총으로 한 번의 기회를 더 얻었다. 월드시리즈 무대에 반드시 선다. 반드시.’
마운드에서 방방 뛰는, 모자를 하늘로 집어던지고 모든 힘을 짜내 소리를 질러대고 있는, 그리고 눈물까지 흘리고 있는 보스턴의 선수들을 보며 지혁은 각오를 다졌다.
새로운 야구 인생은 단순한 보너스나 선물이 아니다. 자상한 인상의 노신사, 아니 야구의 신은 새로운 재능을 내려줄 수 있다. 대신 야속하게도 지혁의 선수 인생을 조금씩 앗아갈 것이고. 선수 생명까지 바쳐가며 재능을 얻은 새로운 인생에서 반드시 월드시리즈 정상을 밟아야만 한다.
부르르르- 부르르르-
“여보세요?”
“문? TV 보고 있죠?”
“오랜만이네요, 패트릭.”
“그렇네요. 그런 인사는 접어둬요. 불필요하니까. 기분이 어때요?”
“뭐가요?”
“아시아인 투수가 월드시리즈의 마지막 장면을 장식하는 걸 본 기분이 어떠냐구요.”
“꼭 저 무대에 서야겠다는 생각밖에 안 드네요.”
“좋아요. 아주 좋아. 딱 그 기분이에요.”
수화기 너머로 패트릭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패트릭이 아닌 다른 사람의 목소리도 같이 들려왔다.
“패트릭?”
“잠시만요, 문. 잠깐만 기다려요.”
패트릭은 스페인어로 같이 있는 사람에게 무어라 말을 하는 것 같았다. 1분 쯤 뒤에 다시 패트릭이 입을 열었다.
“헬로? 아직 듣고 있죠?”
“네. 패트릭. 지금 뭐 해요?”
“뭐죠, 그 여자친구에게나 물어볼 법한 질문은?”
“에?”
패트릭 에이버리라는 사람의 화술은 한국인인 지혁이 감당하기엔 지나치게 직설적인 부분이 있었다. 살짝 당황스러울 정도로.
“장난입니다. 뭐 하긴요. 일 중이지.”
“일...입니까?”
“네. 지금 나랑 같이 있는 사람은 빙햄턴 메츠의 감독인 페드로 로페즈에요.”
“빙햄턴? 메츠의 더블 A 구단 말인가요?”
“네. 내가 저번에 추천해 준 팀 세 개 중에 하나죠. 페드로는 꽤 유쾌한 편이어서 다루기가 쉬운 편이에요.”
“내 다음 팀을 알아보고 있는 건가요?”
지혁의 물음에 패트릭이 이상하다는 말투로 대답했다.
“당연한 걸 왜 묻죠? 나는 당신의 에이전트인데. 에이전트가 영업하는 건 당연하잖아요?”
“오늘은 월드시리즈 6차전이 있는 날인데. 그런 날에도 영업을 한다구요? 야구 안 보고?”
“야구를 같이 보는 것 자체가 훌륭한 영업입니다. 이 세계에서는.” 순간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더블 A 구단의 감독과 직접 술을 마시면서 소위 ‘영업’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패트릭은.
“내가 좀 바빠서요. 끊읍시다.”
“아... 네. 그러죠.”
“아, 잠깐. 혹시 아픈 데 있습니까? 무릎은 괜찮아요?”
“네. 멀쩡해요. 근육량을 확 늘리고 있긴 한데, 아직까지 무릎에 무리가 가는 수준은 아니에요.”
“좋아요. 조금이라도 아프면, 아주 미세한 통증이라도 느껴지면 반드시! 꼭! 나한테 먼저 얘기해야 해요. 내년에 무직이고 싶지 않다면. 오케이?”
“그러죠.”
“좋습니다. 이제 끊어요.”
패트릭은 지혁이 대답하기도 전에 전화를 끊었다. 패트릭이 유능하고 열정적인 에이전트라는 것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제 막 계약을 맺은, 전화통화 한 번과 만남 한 번을 가진 선수를 위해서 벌써부터 영업에 뛰어든 사람이다.
하지만 여전히 티미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이 사람이 고려하고 있는 지혁과의 인간적인 감정, 우정, 관계 같은 건 전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방금 전의 통화만 봐도 서로의 안부를 묻는 의례적인 행위조차 용납하지 않았다. 패트릭에게 그런 건 쓸데없는 일인 셈이다.
‘이 사람은 대체 뭐지...’
오직 일만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기계적인, 아주 비즈니스적인 관계로만 여기고 있는 것 같다. 패트릭은... 단순한 워크홀릭? 아니면 혹시 감정이 없는 사람인가? 싸이코패스? 그런 사람들일수록 인상이 좋고 잘 생겼다는데.
더그 감독의 소개로 갑자기 지혁의 인생에 들어온 패트릭 에이버리에 대한 생각은 끝 모를 망상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정말 알 수 없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