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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전처리, 회귀하다-10화 (11/204)

10 - 윈터 미팅.

메이저리그가 끝나고 비로소 데이토나 컵스에서 모든 짐을 챙겨 나왔다. 정식으로 된 서류도 받았다. 패트릭이 자신의 사무실로 온 계약 해지 서류를 지혁에게 팩스로 보내 준 것이다. 그 동안 최소한 서류상으로는 데이토나 컵스 소속이었던 지혁은 이제 진짜 무직자가 되었다. 뭐, 이 바닥에서는 그런 선수들을 FA라고 부르긴 하지만.

도미니카처럼 따뜻한 곳에서는 윈터 리그가 열리고, 마이너리거들 중 몇 명은 겨우내 실전 감각을 유지하기 위해 도미니카에서 뛰기도 하지만 미국 내에서는 더 이상 야구는 없다. 사람들의 관심은 아이스하키와 농구로 쏠릴 것이고, 선수들은 한 해 동안 몸에 쌓인 피로를 풀 시간인 것이다.

그리고 지혁에게는 치열한 시간이기도 했다. 9월 중순부터 시작한 웨이트 트레이닝과 꾸준한 벌크업의 결과로 12월에 들어선 시점에는 체중이 94kg까지 늘어났다. 어깨가 훨씬 더 넓어졌고 허벅지는 시즌 때보다도 더 튼튼해졌다.

공을 던지는 일을 잠시 미뤄두고 몸 관리에만 온 힘을 쏟은 결과물.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꽤 만족스러웠다. 데이토나 컵스에서 방출된 이후 아직까지 투구를 하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지혁의 투구 밸런스는 전생에 메이저리그에서 활동하던 몸에 맞춰져 있었기 때문에 좋아지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12월 7일. 2013년 윈터 미팅이 시작되기 이틀 전.

지혁은 패트릭을 만났다. 다행히도 이번 시즌의 윈터 미팅은 지혁이 살고 있는 곳과 가까운 곳에서 열린다. 플로리다 주 올랜도와 탬파 근처에 있는 레이크 부에나 비스타다.

“패트릭, 도착했나요?”

올랜도 국제공항 D 게이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지혁은 패트릭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침 게이트에서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나오는 패트릭이 보였다.

“네. 패트릭 에이버리입니다.”

“저 지금 D 게이트 앞에 있습니다.”

“문? 뭐하러 나왔어요?”

“뭐하러 나오긴요. 에이전트 마중 나왔지.”

“왜 쓸데없는 짓을 하고 그럽니까? 야구선수가 컨디션 다 망가지게.”

패트릭은 지혁을 만나자마자 잔소리를 쏟아냈다. 오랜만에 봤지만 이마에 살짝 주름이 잡힌, 짜증 섞인 표정은 그대로였다.

“공항에 마중까지 나와 줬으면 그냥 고맙다고 해요.”

“하나도 안 고맙습니다. 그냥 집에서 쉬지 그랬어요.”

패트릭이 툴툴거리는 것을 보며 지혁은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왔다.

“풋.”

“왜 웃습니까?”

“아니, 왜 내 주위 사람들은 이렇게 다 츤데레인가 싶어서요.”

“츤, 뭐요? 내가 모르는 말인 거 같은데.”

“그런 게 있습니다. 몰라도 돼요.”

지혁은 처음으로 패트릭에게서 의문 섞인 표정을 발견했다. 선글라스로 가렸지만 그 속에 담긴 새로운 모습 때문에, 아주 잠시 동안이지만 패트릭이라는 사람과 조금 가까워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

“뭐, 됐고. 몸이 아주 좋아졌군요?”

“딱 봐도 태가 좀 나죠?”

“네. 밸런스에 문제는 없습니까? 체중을 끌어올리는 게 전체적으로 도움은 되겠지만 투구 밸런스가 흐트러질 위험이 큰데.”

“그건 걱정하지 말아요. 천천히 감을 잡고 있으니까.”

패트릭은 지혁과 함께 택시에 오르면서 수많은 정보들을 순식간에 쏟아냈다. 주로 패트릭이 이야기를 쏟아내고 지혁은 듣는 입장이었다.

지난 번 만남 이후 패트릭이 해 왔던 일들에 대해 들으면서 지혁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신출귀몰하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많은 곳들을 오간 것이다.

“메츠는 앞으로의 구상이 명확해요. 맷 하비, 제이콥 디그롬, 노아 신더가드, 스티븐 마츠. 빠르면 2년, 늦어도 4년 안에는 이 선발진을 돌릴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내 생각에 디그롬과 마츠는 트레이드 카드로 쓰지 않을까 했는데, 프런트 쪽의 의지가 생각보다 훨씬 더 강합니다.”

“볼티모어는 영 꽝이에요. 괜찮은 투수 유망주들의 성장 속도가 더디더군요. 알아보니까, 하위 단계 마이너리그 코치들과 새로 부임한 메이저리그 코치들 사이의 의견 차이가 심해요. 이쪽에 좌완 투수에게 싱커를 잘 가르치는 코치가 있어서 추천했었는데 지금은 우선순위에서 밀렸습니다.”

“오히려 클리블랜드나 애리조나 쪽이 가능성이 좀 보입니다. 이쪽도 염두에 두고 있어요.”

한 손으로는 트위터를 정신없이 훑으면서 다른 손으로는 지혁에게 전달해야 할 서류를 찾고, 또 입으로는 지혁이 꼭 알아야 할 정보들을 토해내고 있는 패트릭은 거의 사람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로봇이 말을 하고 있나 싶을 정도니까. 미리 패트릭이 잡아 둔 호텔에 도착하고 간단히 짐을 풀고 나서야 패트릭의 입이 멈췄다.

“뭐 좀 먹을래요?”

지혁 역시 간단히 짐을 풀면서 물었다.

“그거 내가 할 말입니다.”

“네?”

“세상에 어떤 에이전트가 자기가 데리고 있는 선수한테 밥 사게 한답니까? 그리고 소속팀도 없는 마이너리거가 돈이 어딨다고 밥을 사요?”

패트릭의 말투는 놀랍도록 차갑고 딱딱했다. 내용도 지극히 비즈니스적인 관점에서 나온 말이었고. 하지만 지혁은 처음으로 패트릭에게서 인간적인 감정을 느꼈다. 남에게 밥을 산다는 건 그런 거니까.

“난 내가 산다고 한 적 없어요. 배고프니까 사달라고 한 거지.”

지혁의 농담에 패트릭이 아주 작게 픽 하고 웃었다. 그의 웃음은 김이 새는 소리처럼 들렸다.

“좋습니다. 이제부터 일주일은 전쟁이나 다름없는 시간이 될 테니까. 전쟁터 나가기 전에 든든히 먹어두는 것도 나쁘지 않죠.”

“몸 커진 거 보이죠? 엄청나게 먹을 겁니다.”

*

플로리다 오렌지카운티에 위치한 레이크 부에나 비스타는 휴양지이자 관광지다. 조금만 차를 몰고 가면 디즈니랜드가 있고, 해변까지도 멀지 않다. 플로리다의 따뜻한 날씨 때문에 겨울이 될수록 관광객이 더 많아지는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 이 기간만큼은, 패트릭의 말마따나 전쟁터나 다름없다. 수도 없이 많은 구단 관계자들과 에이전트들, 기자, 통계학자, 의료진, 방송인들이 마치 좀비처럼 걸어다니고 있다.

그 속에서 패트릭은 정신없이 돌아다녔다. 전생에서도 현장에서 이렇게 치열한 윈터 미팅을 경험하지는 못했던 지혁은 패트릭의 뒤꽁무니를 쫓느라 넋이 나갈 지경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패트릭은 마치 축지법을 쓰는 것처럼 움직인다. 그러면서도 마주치는 모든 사람들과 악수를 나누면서. 그 중 원래부터 안면이 있던 것처럼 보이는 몇몇은 패트릭이 이곳에 있다는 것에 놀란 모양이었다.

“자네 복귀하는 건가?”

“슬슬? 사실 마음 같아선 더 놀고 싶긴 하지.”

“아무런 말도 없이 잠적하더니 그 동안 얼굴이 아주 좋아졌구만 그래?”

“그래. 자네도 이 기회에 좀 쉬는 게 어때? 그렇게 마음이 편할 수가 없어.”

“하하핫! 속 편한 소리. 마누라 바가지를 어떻게 견디려고?”

지혁은 패트릭이 싱그러운 미소를 짓는 것을 처음 보았다. 안 그래도 영화배우처럼 생긴 사람이 웃으니까 훨씬 더 잘생겼다. 모르긴 몰라도 저 정도면 여자친구를 사흘에 한번씩은 바꿀 것이다.

“이 친구가 자네 고객인가?”

“그래. 지혁 문이라고. 투수야.”

“지혁 문?”

“아마 들어본 적 없을 거네. 아직 싱글 A에 있거든.”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패트릭의 뒤를 따라다니는 지혁과도 한 번씩 악수를 나눴다. 물론 저들은 어디로 돌아서도 또 다른 사람들과 악수를 나눌 테지만, 어쨌든 패트릭과 같이 다닌다는 것만으로 많은 사람들과 안면 정도는 틀 수 있었다. 그 수가 하도 많아서 몇 분 전에 악수를 나눴던 사람과 또 인사를 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여기 있었군요, 앨런!”

“오, 패트릭!”

패트릭을 발견하고 깜짝 놀란 표정의 한 대머리 사내가 황급히 악수를 청했다. 앨런이라는 사람은 다른 손에 들고 있던 토스트가 떨어질 정도로 놀란 모습이었다.

“이런. 식사 중이었나요? 우리가 방해를 했나 보네.”

“쓰읍... 괜찮네. 다시 사야지, 뭐.”

“아무리 바빠도 이런 토스트 몇 개로 식사를 때우지는 마세요. 먹고 살자고 하는 짓 아닙니까.”

패트릭이 능글맞게 굴자 앨런이라는 사람이 정색을 하고 패트릭에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

“자네가 시즌 끝나자마자 전화를 몇 번을 했는지 알아? 메일을 몇 통을 보냈는지 알고? 그런데도 그런 소리가 나와?”

“하하... 미안합니다, 앨런.”

“이 친구인가? 그 왼손 투수?”

“반갑습니다. 문지혁이라고 합니다.”

지혁은 한국식으로 고개를 살짝 숙였다. 앨런은 익숙하지 않은 듯 멋쩍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한국에서 왔다더니, 아시아식 인사로구만. 반가워요. 난 뉴욕 메츠 마이너리그 스카우트 팀장 앨런 틸레스. 앨런이라고 불러도 됩니다.”

지혁은 짧은 순간 앨런이 위아래로 몸을 훑는 것을 느꼈다.

“패트릭이 보내 준 자료에는 82kg이라고 되어 있었는데. 그것보다는 더 나갈 것 같은데?”

“네. 시즌이 끝나고 웨이트를 좀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체중이 어떻게 되죠?”

“93.7kg입니다.”

“그사이에 12kg이나? 와우. 꽤 열심히 했군요.”

“힘들었습니다. 하하.”

앨런이 지혁에게 몇 가지를 물었다. 구종과 구속에 관해서였는데, 작년 지혁의 자료를 한 번이라도 봤다면 으레 알 수 있는 내용이었다. 그저 그런 문답이 이어지자 패트릭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앨런. 어느 호텔에 묵고 있습니까?”

“하, 패트릭. 자네 성격 여전하구만. 단도직입적이야.”

“여긴 환경이 너무 좋지 않잖아요. 식사도 마저 하셔야 하고.”

“어찌된 게 젊을 때보다 더 능글맞아졌어.”

“좋은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이 옆에 래디슨 호텔에 있네. 1307호일세.”

“좋습니다. 제가 곧 연락드리죠.”

패트릭은 그 말을 끝으로 몸을 돌려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지혁은 가볍게 고개를 까닥하는 것으로 앨런에게 인사를 하고는 황급히 패트릭을 쫓았다. 전생에서도 이런 식으로 윈터 미팅을 보내본 적이 없던 지혁에게는 낯선 일들의 연속이었다.

“패트릭. 나는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그런데, 방금 얻은 소득이 있나요?”

“하나도 없습니다. 메츠는 생각보다 반응이 별로네요.”

“왜죠? 그냥 평범한 반응인 것 같았는데.”

“뭐, 장담할 수는 없는데. 일반적으로 이 자리에 나올 때는 미리 구단 차원에서 결정을 반 정도는 내려놓고 옵니다. 그리고 계약할 의사가 있다면 에이전트를 만나거나 선수를 만나고 나서 먼저 자신들이 묵고 있는 호텔을 알려주죠. 그게 협상을 해보자는 신호에요.”

지혁은 그제야 패트릭이 뒤도 보지 않고 앨런에게서 빠져나온 의도를 알아챘다.

“메츠는 절 영입하지 않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는 겁니까?”

“확신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최소한 영입에 강한 의지를 갖고 있지는 않다고 볼 수 있죠.”

“후우. 쉽지 않군요.”

“구직 활동은 언제나 그런 법이죠. 실망할 것 없습니다.”

셔츠 주머니에 끼워 놨던 선글라스를 꺼내 끼며 패트릭이 말했다.

“아직 만날 구단은 일곱 개나 더 있으니까.”

일곱 개. 지혁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전쟁터이자 면접장인 이곳에서, 최소한 해가 질 때까지는 빠져나갈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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