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 윈터 미팅(2).
“아... 쓰러질 것 같네요.”
“운동선수가 에이전트보다 체력이 약해서 어디다 씁니까?”
“체력도 체력인데 정신이 피폐해지는 것 같은데요, 이거.”
“그게 이 바닥 생리입니다. 마이너리거, 그 중에서도 소속팀이 없는 방출된 마이너리거들은 스스로를 어필해야 하니까 어쩔 수 없죠.”
“상처받겠네요. 그만 찌르시죠.”
“전 사실만 말합니다.”
늦은 밤이 되어야 호텔로 돌아온 지혁은 곧장 침대로 몸을 던졌다. 체육관에서 운동을 하는 것보다 몇 배는 더 심한 피로감이 몰려들었다.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 나자 잠이 쏟아진다.
패트릭은 지치지도 않는지 곧장 노트북을 켜고 벽에 걸린 텔레비전도 켰다. 한 손에는 핸드폰을 들고 있다. 도대체 저 많은 화면들과 서류를 어떻게 동시에 다루는 것인지 봐도 봐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 뉴욕 양키스가 외야수 카를로스 벨트란과 3년 4500만 달러 규모의 FA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이 계약으로 인해 이번 시즌 외야 FA 3인방 중 자코비 엘스버리와 카를로스 벨트란, 두 명이 모두 양키스의 스트라이프 유니폼을 입게 되었습니다. ]
[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시애틀 매리너스, 텍사스 레인저스가 한국인 외야수 최성수의 유력한 행선지로 점쳐지고 있습니다. 자코비 엘스버리와 로빈슨 카노, 브라이언 맥캔 같은 대형 FA들이 일찌감치 계약을 체결한 가운데, 최성수는 현재 남아있는 FA들 중 최대어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 ]
[ 보스턴의 우승 멤버인 마이크 나폴리는 레드삭스와 재계약에 성공했습니다. 2년 3200만 달러의 계약입니다. ... ]
연달아 메이저리거들의 계약 소식이 들려온다. 그리고 사실, 지혁은 이 결과물들을 전부 알고 있다. 세세하고 정확하게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굵직굵직한 이적들은 기억한다. 지혁은 문득 재밌는 생각이 떠올랐다. 어쩌면 패트릭과 더 친해질 수 있는 기회일지도 모른다.
“패트릭. 양키스가 벨트란과 엘스버리를 모두 데려간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요?”
“뭘요? 데려간 거지.”
“음, 비즈니스적인 관점에서요.”
“엘스버리는 좋은 계약. 벨트란은 나쁜 계약.”
“그러면 나머지 외야수인 최성수 선배는 어디로 갈 것 같아요?”
“흠. 연락하는 사이입니까? 다른 구단에 줄을 대 줄 수 있는 사람이에요?”
어휴. 못 말리는 사람이다. 지혁의 모든 말을 업무에 연관시키려고 하는 사람.
“그런 건 아니고요. 그냥 같은 한국인이니까. 에이전트는 어떻게 보고 있나 궁금해서요.”
“내 고객이 아니어서 별 관심 없습니다.”
“우리 내기 해볼래요? 최성수 선배가 어디로 가는지?”
“말했잖습니까. 관심 없다고.”
지혁이 몸을 일으켰다.
“재미로 한 번 해 보자니까요. 맞추면 뭐든 서로 요구하는 거 하나씩 들어주기 합시다. 어때요?”
“자신 있어요? 나 에이전트인데. 이 바닥에서 굴러먹으면서 아는 사람이 하나둘인줄 알아요?”
“내가 최성수 선배랑 연락이 되는지 안 되는지 그쪽이 알아요?”
“그건 반칙이고.”
“서로 깔끔하게 어디 연락하지 말고, 이 자리에서 결정하는 걸로. 콜?”
“하아...”
패트릭은 마침내 손에 들고 있던 서류 더미를 내려놓았다.
“좋습니다. 뭐든 들어주기, 무르기 없습니다.”
“콜! 먼저 골라 보세요.”
패트릭은 TV 뉴스를 보면서 잠시 생각하더니, 주저없이 팀을 골랐다.
“시애틀 매리너스.”
“친정팀으로의 화려한 복귀? 일리 있네요.”
“문. 당신 차례에요.”
“난...”
패트릭의 오답에 신이 난 지혁은 싱글거리며 잠시 시간을 끌었다.
“텍사스 레인저스.”
“존 다니엘스 단장은 이미 프린스 필더를 데려왔습니다. 돈도 엄청나게 썼고. 더 돈을 쓸 여력이 없을 것 같은데.”
“결과는 나중에. 오피셜이 뜨면 얘기합시다.”
“... 왜 그렇게 자신만만한거죠?”
뜨끔했다. 미래를 알고 있다고 답할 순 없으니까.
“감이죠. 하하. 감. 내가 감이 꽤 좋은 편이라서요.”
“어쨌든 내기 무르기 없습니다.”
“저한테 원하는 뭔가가 있나 봐요? 미리 말해봐요. 당신이 이기면 내가 뭘 들어줘야 하는지.”
“서로 쓸데없는 얘기 안 하고 일 얘기만 하기.”
미친 워커홀릭. 싸이코패스! 지혁은 패트릭의 단호함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
패트릭이 플로리다에 도착하자마자 수많은 관계자들을 만난 탓에 하루는 쉬고, 공식적으로 윈터 미팅이 시작된 9일에야 두 사람은 다시 움직였다. 아침 일찍부터 행사장에 나왔는데도 이미 엄청난 사람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 중 태반은 눈이 시뻘개져 있는 것이 아마 잠도 자지 않은 것이 분명해 보였다.
“브래디! 오랜만입니다.”
“이렇게 일찍부터 나오다니. 패트릭 자네는 여전하군.”
“잘 지냈습니까? 하하하. 머리가 더 벗겨진 것 같은데요?”
“감독이 스트레스를 얼마나 받는지 잘 아는 친구가. 짓궂은 건 알아줘야 해.”
지혁은 재빨리 브래디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미국식으로.
“문지혁이라고 합니다.”
“오! 패트릭이 추천하던 친구로군. 샬럿과의 5차전 마지막 투수였다지?”
“그랬습니다. 아십니까?”
“그럼. 샬럿 스톤크랩스에서 뛰던 녀석들 중 대부분이 이번에 우리 팀으로 올라오거든. 내가 볼 땐 더블 A에서 막힐 놈들이 거의 대부분이긴 하지만. 싱글 A 감독이 자네를 꽤 인상 깊게 본 것 같더군.”
40대 초반 정도의 나이로 보이는 브래디 윌리엄스는 지금 탬파베이 레이스 산하 더블 A 팀인 몽고메리 비스킷츠의 감독이었다. 지혁이 상대했던 샬럿 스톤크랩스의 소식을 전해들은 모양이었다. 인상적인 투구를 했었으니 한번쯤 지혁의 얘기를 들었을 것이다.
“갑자기 폼도 바뀌고 패턴도 바뀌어서 우리 선수들이 꽤 애를 먹었다고 하더군. 경기를 아직 보지는 못했지만. 패트릭이 자네가 팀을 구하고 있다고 했을 때 반가우면서도 또 의아했어. 괜찮은 좌완을 컵스가 왜 풀었을까?”
“하하... 글쎄요.”
브래디는 표정에 생각이 잘 드러나지 않는 사람이었다. 브래디는 패트릭과 농담 따먹기를 하면서도 계속해서 지혁의 몸을 훑어보고 있었다.
“어쨌든 우리 프런트도 나쁘지 않게 생각하고 있어. 안 그래도 우리가 좌완 선발이 모자라거든. 올해는 유독 그렇고. 이야기를 좀 해보지 않겠나?”
“그럼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우리 베이스캠프는 래디슨 호텔 702호에 있네.”
“제가 찾아가도록 하죠.”
“그래. 자세한 얘기는 그 때 하지.”
지혁은 미소를 숨기지 못했다. 뉴욕 메츠의 사람과는 달리 먼저 묵고 있는 호텔 방을 알려줬기 때문이었다. 패트릭의 말에 의하면 최소한 탬파베이 레이스는 호의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는 셈이니까.
*
윈터 미팅이 공식적으로 시작해서인지 사람들의 발걸음이 훨씬 더 빠르게 움직인다. 메이저리그 관계자들을 비롯해 수많은 마이너리그 관계자들, 거기에 더해 한국과 일본의 스카우트 팀과 에이전트들까지 모인 행사장은 아수라장을 방불케 했다.
지혁과 패트릭은 오전 내내 마이너리그 관계자들을 찾아다녔다. 패트릭이 미리 작업을 해 둔 구단 관계자들과의 반복되는 미팅 일정을 소화하고 나자 점심시간을 훌쩍 넘겼다. 지혁은 그제 만났던 앨런 틸레스가 토스트로 식사를 대신하는 것을 안쓰럽게 생각했었는데, 그걸 취소해야 할 판이었다. 지혁과 패트릭도 간단한 샌드위치로 점심을 대신해야 했으니까.
그나마도 지혁은 조금 여유가 있는 편이었다. 패트릭은 허겁지겁 샌드위치를 먹어 치우고 또 다른 사람을 만나러 떠나버렸다.
“실례합니다.”
“누구시죠?”
“전 뉴욕 메츠의 프런트에서 나온 앤드류 비터스라고 합니다. 혹시 패트릭 에이버리 에이전트의 선수 맞으신가요?”
“네. 그렇습니다만.”
지혁보다도 더 어려 보이는 사람이 프런트 직원이라니. 샌드위치를 베어물고 있던 지혁은 살짝 당황했다.
“제가 제대로 찾았네요. 지혁 문, 투수. 맞죠?”
“그렇습니다만...”
“저희 스카우트 팀장님께서 꼭 찾아오라고 하셔서요...”
말의 뒤끝을 살짝 흐리는 걸 보아하니 이제 갓 프런트에 입사한 인턴이 분명했다. 그것도 윈터 미팅에는 처음 참여해보는 새파란 초년병. 앤드류는 지혁에게 말을 건네면서도 주위를 슬쩍슬쩍 살피고 있었다. 초특급 스타를 보기라도 기대하는 것일까.
“지금 패트릭이 잠시 자리를 비워서요. 패트릭이 오면 말을 전하겠습니다.”
“그래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거, 제 명함인데.”
앤드류는 주섬주섬 명함을 꺼내 지혁에게 건넸다. 손으로 전화 받는 표시를 하며 꼭 자기의 번호로 연락해 달라는 말을 남겼다.
“그런데 무슨 일이죠?”
“아... 저는 그것까진 잘 모르겠어요.”
쑥스러운 듯 살짝 뒷머리를 긁는 폼이 완전히 애송이였다. 그 때 앤드류의 핸드폰이 울렸고 그는 황급히 전화를 받아들었다.
“예, 팀장님!”
두 손으로 공손히 전화를 받으면서 급하게 자리를 떠나는 모습이 마치 어릴 때의 지혁을 보는 것 같았다. 전생에 처음으로 미국에 넘어왔을 때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구단이 시키던 대로 하던 때의 지혁도 저래 보였을 것이다.
“다 먹었습니까?”
“아, 패트릭. 방금 메츠 쪽 사람이 와서 연락해 달라고 하던데요.”
“출발은 메츠 쪽이군요. 좋습니다.”
패트릭이 전화를 꺼내 다이얼을 누르려던 차에 지혁이 말리고 나섰다.
“잠깐. 이 사람에게 연락해요.”
“왜요?”
“그냥요. 꼭 이 번호로 연락 달라고 하더라구요.”
“전 스카우트 팀장이랑 다이렉트로 연락할 수 있는데요.”
“이 사람 나보다도 더 어려 보이던데. 아마 팀장한테 한 건 했다고 자랑이라도 하려는 거 아닐까요?”
“그런데요?”
“기 한 번 살려주면 좋잖아요.”
패트릭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대답했다.
“그런 쓸데없는 호의는 도움될 게 하나도 없습니다. 당신에게도, 그 애송이한테도.”
패트릭은 지체하지 않고 앤드류의 명함을 땅에 버려 버렸다.
‘싸이코패스다. 진짜 싸이코패스야.’
지혁은 속으로만 그렇게 생각했다. 일에 관해서는 정말 지독한 사람이다. 조금이라도 더 이득이 될 수 있는 쪽으로만 움직이는 사람.
‘비즈니스만 놓고 보면 최고의 에이전트이기는 한데. 후. 어떻게 생겨먹은 사람이 인간적인 구석이 하나도 안 보이냐.’
“문? 듣고 있습니까?”
“...네? 미안합니다. 못 들었어요.”
“정신 차려요. 까딱 정신 놓으면 내년에 실업자로 지낼 겁니다.”
“... 그래요, 미안합니다. 왜요?”
“글러브 준비돼 있죠? 투구할 수 있겠어요?”
“지금? 당장요?”
패트릭은 핸드폰의 말 하는 부분을 한 손으로 막고 낮게 말했다.
“싱커 때문에. 아무도 싱커를 던지는 걸 본 사람이 없어서 관계자들이 확인하고 싶어합니다. 일종의 쇼케이스가 될 거에요. 많이 던질 필요는 없고, 구종별로 다섯 개씩만 던지면 될 것 같은데. 되겠어요?”
“그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아요. 그런데 싱커는...”
“문제 있습니까?”
제대로 던져본 적이 없는데. 문제는 그거다.
신에게서 하드 싱커에 관한 재능을 받긴 했는데, 컵스에서 방출된 이후 제대로 공을 던질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공을 만지면서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싱커의 그립이나 팔 스윙은 있었지만 막상 마운드에서 싱커를 던져 본 경험은 없었다.
패트릭은 이 사실을 꿈에도 모른다. 절대 알아서도 안 되고. 짧은 시간 동안 지혁은 번뇌에 가까운 고민을 해야 했다.
“안 돼요? 빨리 말해요.”
“... 됩니다. 해 볼게요.”
“오케이. 이왕 쇼케이스 하는 김에 다른 구단 사람들도 다 부를 겁니다. 미리 알고 있어요.”
“넵.”
“앨런? 투구하는 걸 직접 보실 수 있게 준비하겠습니다. 대신 다른 구단 사람들도 같이 참관할 거예요. 상관없겠죠? 좋습니다. 오늘은 조금 급하고, 내일 저녁으로 준비하죠.”
앨런과의 전화를 끊고 곧장 다른 구단 관계자들에게 전화를 돌리는 패트릭을 옆에 두고 지혁은 마음을 가다듬었다. 신에게서 받은 재능이라는 걸 확인해야 할 시간이었다.
브랜든 웹의 싱커.
이 새로운 공에 지혁의 취업이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