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전처리, 회귀하다-12화 (13/204)

12 - 쇼케이스.

“긴장하지 말고 편하게 던져요.”

“알겠습니다.”

“얼굴 좀 펴시고.”

레이크 부에나 비스타 근처의 작은 실내 연습장은 윈터 미팅에서 팀을 구하는 많은 선수들이 간단한 컨디션 점검용으로 사용하는 곳이었다. 그래서인지 불펜에 있는 마운드의 정비도 깔끔했고, 로진백도 새 것으로 준비되어 있었다. 사무국에서 이렇게 쇼케이스가 열릴 것을 대비해 대기시켜 놓은 포수도 대기하고 있었고.

“매튜? 잠시 이리로 와 봐요.”

“몇 구나 던지는 겁니까?”

“패스트볼, 슬라이더, 체인지업, 커브, 싱커. 다섯 개씩. 구단들이 조금 더 요구할 수도 있구요.”

“금방 끝나겠구만.”

포수 장비를 찬 매튜라는 사람이 걸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오늘 투수는 동양인이군. 잘 해 보쇼.”

“그러죠.”

스파이크를 신고 마운드에 오르는 건 세 달 만이다. 투구판을 밟기 전에 몇 차례 스트라이드를 내딛어 보며 디딤발이 닿을 자리를 적당히 파 두었다.

심장이 조금씩 빨리 뛰기 시작했다. 지혁의 투구를 보기 위해 모인 여덟 개 구단 관계자들 때문이 아니었다.

싱커.

신에게서 받은 재능을 직접 확인할 첫 번째 기회이기 때문이다.

매튜가 마스크를 내리고 자리에 앉아 미트를 팡팡 쳤다. 준비되었다는 신호. 스피드건을 들고 옆쪽에 선 패트릭이 보인다. 모자를 한 번 고쳐 쓴 지혁은 옆에 서 있는 관계자들을 향해 물었다.

“시작할까요?”

팔짱을 낀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지혁은 글러브 안에 두 손을 모으고 다시 한 번 깊게 심호흡했다. 우선은 패스트볼.

뻐어엉!

“92마일!”

매튜의 가슴 한가운데로 정확하게 꽂히는 패스트볼. 불어난 체중과 근육 덕택에 확실히 공 끝에 힘이 묵직하게 실렸다. 실내 연습장이어서 그런지 포수 미트에 공이 박히는 순간 제법 큰 소리가 울렸다.

이어진 2구. 매튜는 한 발 옆으로 빗겨 앉았다. 두 번째 공은 우타자의 몸쪽을 파고드는 크로스파이어 형태의 패스트볼. 타자가 서 있었다면 무릎 높이쯤 되었을 코스에 빨려 들어갔다.

“93마일!”

패트릭의 목소리에 만족스러운 기색이 어렸다. 겨우내 착실하게 몸을 만들어 온 결과는 만족스럽게 드러나고 있었다. 패스트볼에 이어 슬라이더와 체인지업도 괜찮았다. 체인지업 하나가 살짝 밋밋하게 떨어지기는 했지만. 커브는 솔직히 조금 좋지 않았다. 공이 덜 미끄러지면서 제구가 잘 잡히지 않았다.

“이제 싱커! 싱커 던지겠습니다!”

패트릭의 싸인이 떨어지고, 글러브 속에서 공을 빙빙 돌리던 지혁이 그립을 잡았다. 두근거리는 심장이 터지기 직전이었다.

어차피 던져본 적이 없던 공. 도박이긴 했지만, 그저 몸이 시키는 대로 던져보기로 했다. 유투브를 통해 수도 없이 돌려 봤던 브랜든 웹의 싱커를 떠올리며, 글러브를 머리 위로 천천히 끌어올렸다.

‘떨어뜨린다. 패스트볼을 떨어뜨린다는 생각으로.’

오른발을 앞으로 힘차게 내딛으며 글러브에서 뺀 왼팔을 빠르게 돌렸다. 공의 실밥을 채는 마지막 순간에 팔꿈치를 살짝 바깥쪽으로 틀어내면서, 검지와 중지를 차례로 통과하는 공의 감촉을 느낀다.

지혁의 손에서 공이 떠나고 포수 미트에 박히기까지 1초도 채 되지 않는 순간. 날아가는 공에서 시선을 떼지 않던 지혁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처음 공이 날아가는 궤적은 홈플레이트 한가운데를 향했지만, 공이 홈플레이트에 닿기 직전부터 날카롭게 가라앉더니 우타자의 바깥쪽 낮은 위치에서 미트에 들어갔다.

“오? 생각보다 괜찮은데?”

“바깥쪽으로 잘 떨어지는군.”

“패트릭, 방금 공 구속이 얼마야?”

“89마일입니다!”

“구속도 나쁘지 않은걸? 조금만 더 올라오면 아주 좋겠어.”

“컨디션이 베스트라면 훨씬 더 위력적이겠는데. 흠.”

관계자들이 조금씩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패트릭이 미리 보내 놓은 지혁의 지난 시즌 투구 영상을 다 체크하고 온 사람들이다. 새로운 공을 선보인 지금이야말로 ‘쇼케이스’라는 말이 가장 적합한 순간이었다.

“계속 가겠습니다.”

이어진 두 번째 싱커. 지혁은 새로운 이미지를 떠올렸다. 일반적인 싱커가 사선으로 가라앉는다면, 이번 공은 사선보다는 수직에 가깝게 떨어뜨려보고 싶었다.

‘손가락 장난은 지난 생에 메이저리그 마운드에서도 종종 해봤으니까. 그 느낌대로 해 보지 뭐.’

방금 전에 던진 싱커와 같은 느낌으로 던지면서 마지막 순간에 검지보다 중지에 힘을 아주 살짝 더 준다. 우타자의 몸쪽을 파고들어가던 공이 그 상태에서 수직으로 가라앉았다. 싱커보다는 고속 스플리터나 고속 체인지업에 가까운 궤적이었다. 매튜가 일반적인 싱커의 궤적을 예상하고 미트를 댔다가 공을 제대로 포구하지 못했다.

“88마일!”

“뭐야, 방금 스플리터야?”

“아닙니다. 싱커입니다.”

“첫 번째 던진 공하고 떨어지는 궤적이 다른데?”

“일부러 각도를 바꿔 봤습니다.”

“뭐라고? 떨어지는 각도를 조절할 수 있나?”

지혁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 동안 던져온 다른 공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 지경이었다. 지금의 이 싱커는 분명히 엄청나게 위력적이다. 특히 떨어지는 각도와 방향까지 조절할 수 있다면 더더욱 그랬다.

세 번째 공에서 지혁은 또 다른 시험을 했다. 전력으로 던지면서 구속을 최대치로 끌어올려 본 것이다. 이번 공은 마치 투심 패스트볼 같은 궤적을 그렸다.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정도는 덜했지만 앞선 두 공보다도 홈플레이트와 가까운 지점에서 마지막에 변화하는 공이었다.

네 번째 공은 그 반대였다. 속도를 줄이는 대신 떨어지는 낙폭을 크게 만들었다. 스트라이크 존 낮은 쪽에 걸칠 것처럼 들어가던 공이 홈플레이트에 다다라서는 거의 바운드가 될 정도로 떨어졌다.

“이봐요! 같은 공 맞아? 네 개가 다 다른 공 같은데? 이럴 거면 미리 말을 해주쇼!”

매튜가 성질을 냈다. 하지만 그 짜증이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대박이야. 나랑 완전히 딱 맞는 공이야!’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게 메이저리그를 주름잡는 녀석들의 재능이었다. 18년이 넘는 시간동안 공을 던져왔지만, 지혁이 던졌던 어느 공도 오늘 처음 던져본 이 싱커보다 위력적이라고 얘기할 수 없다.

“문, 마지막입니다! 싱커!”

패트릭이 마운드에서 옅은 미소를 띄고 있는 지혁을 독촉했다. 고개를 끄덕인 지혁이 서서히 와인드업을 하고 공을 뿌렸다. 우타자의 바깥쪽 가장 먼 곳으로 향하던 공이 좌타자의 배터 박스 안까지 떨어졌다.

“나이스 볼! 마지막 공 구속은 90마일입니다!”

패트릭의 외침을 끝으로 쇼케이스는 마무리되었다. 구단에서 나온 사람들은 더 이상의 공을 요구하지 않았다. 살짝 눈치를 보고 있던 지혁은 마운드로 다가온 패트릭에게 물었다.

“괜찮았어요?”

“이 공을 가지고 있으면서 왜 실전에서는 안 쓴 거죠? 그랬다면 방출될 일도 없었을 것 같은데.”

“하하하. 아마 당신을 만나려고 그랬나 보죠.”

“징그러운 소리.”

“그나저나 몇 개 정도 더 던지게 될 줄 알았는데, 따로 요구는 없네요?”

지혁은 같은 구단 사람들끼리 열심히 쑥덕거리고 있는 무리를 바라봤다.

“방금 공 다섯 개면 충분해요. 나라도 알 수 있겠는데.”

“뭘요?”

“최소한 더블 A에서는 무조건 먹히는 공입니다. 무조건. 한 가지 패턴의 공도 아니고, 구속이랑 낙폭도 컨트롤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줬으니까요. 아마 당신이 던지는 모든 공의 피치 밸류 중에서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았을 거예요.”

“20-80 스케일로 한다면요?”

“난 현장 출신이 아니라서 그건 모릅니다. 하지만 다섯 개 구종 중에서 제일 위력적이었던 건 분명해요.”

지혁과 패트릭, 그리고 매튜가 불펜 바깥으로 걸어나오자 모든 관계자들이 일제히 접근했다. 그 모습이 마치 기자 무리들 같아서 살짝 웃음이 나왔다.

“패트릭. 오랜만에 현장으로 복귀한다 싶더니 또 깜짝 선물을 가져왔군.”

“하하. 제가 보통 선수들이었다면 복귀도 안 했겠죠.”

“문? 저녁은 먹었나? 우리 메츠랑 식사라도 같이 하지.”

“잠깐! 플로리다에 왔으면 탬파에게 우선권이 있는 것 아닌가?”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고 그래? 그런 게 어딨어?”

하, 하하. 세 달 전만 해도 방출되었던 지혁인데. 비록 마이너리그 담당자들이지만 구단 관계자들과 감독들이 서로 먼저 데려가려고 하는 모습이라니. 전생에서도 이런 기억은 없었다.

신이 강림했던 그 날, 지혁의 운명은 완전히 뒤바뀌어 있던 것이다.

자꾸 새어나오는 웃음을 감출 수가 없어서 글러브로 얼굴을 가렸다.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고 서 있는 패트릭의 얼굴에도 미소가 슬쩍 걸렸다.

“성공적이었던 것 같죠? 메츠는 우리한테 호텔 룸도 안 알려줬었잖아요.”

“솔직히 이건 예상하지 못한 행운입니다. 인정할게요.”

“행운이라니? 실력이라고 해 주시죠.”

“지금까지 숨기고 있었던 게 행운이라는 겁니다. 상황이 극적이 되면서, 이제 구직자의 입장이 아니라 면접관의 입장이 된 거 같거든요.”

지혁은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신이 그에게 내려준다던 재능은 확실하고도 즉각적인 효과를 가져왔다.

행운이라고? 당연히 행운이지.

지금쯤 이 장면을 바라보면서 클클거리고 있을 신의 얼굴이 떠올랐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지혁은 작은 목소리로 감사 인사를 건넸다. 노신사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