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 믿음, 결정.
시카고 화이트삭스 프런트와의 미팅을 끝으로 지혁의 쇼케이스를 관람한 모든 팀들과 얘기를 나눴다. 모든 관계자들이 하나같이 지혁의 싱커에 큰 관심을 드러냈다. 투구를 한 지혁조차도 스스로 놀랄 지경이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가장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은 대체 이 구종을 왜 그동안 던지지 않았냐는 것이었다. 패트릭은 지혁에게 대답해야 할 멘트를 주입시켰다.
“실전에서 쓸만큼 위력적이지 않다고 봤습니다. 연습한 지 얼마 안 돼서요. 불펜에서만 던져 봤지 아직 타자를 세워 놓고 던져보지도 않았습니다.”
이게 지혁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답변이었다. 또 최선의 답변이기도 했고.
“타자를 세워 놓고 던지지 않았다는 말은 자르지 않은 수박 같은 겁니다. 잘라 보지 않고는 이게 달콤하게 잘 익은 것인지, 덜 익어서 뱉어내야 하는 것인지 모르는 거죠. 쇼케이스에서 당신은 수박을 똑똑 하고 두드려봤어요. 관계자들의 귀에는 아주 청아한 소리가 들렸을 겁니다. 상당히 좋은 무브먼트를 보여줬으니까요.”
패트릭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잘라 보지 않고는 못 배길 겁니다.”
그 말을 남기고 패트릭은 또 사람들을 만나러 호텔을 나섰다. 세세한 협상은 패트릭에게 맡기고 쉬기로 한 지혁은 혼자 레이크 부에나 비스타 주위를 산책하기로 했다.
*
닷새간 열리는 윈터 미팅 중 나흘째를 맞는 이곳은 마치 바이러스라도 퍼진 것처럼 피로한 분위기가 떠돌고 있었다. 벤치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는 사람들이 한두 명이 아니었다. 수십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목에 ID 카드를 걸고서 단체로 졸고 있는 모습은 장관이다.
“지혁 문? 여기서 또 보는군.”
벤치에 앉아서 담배를 태우던 사람이 지혁에게 악수를 건넸다. 지혁은 이번 윈터 미팅 기간 동안 많은 사람을 만났고 수도 없는 얘기를 나눴지만, 단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기억에 남았던 사람이었다.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더블 A의 투수코치인 루 카슨.
“미스터 카슨. 반갑습니다.”
“여유로워 보이는구만.”
“그럴 리가 있나요. 방출되어서 팀을 찾고 있는 마이너리거인데요.”
“흐흐. 나도 참 의문스러워. ‘그’ 싱커를 던지면서 왜 방출되었는지.”
카슨 코치는 담배를 탁탁 내려쳐 껐다.
“어제 내가 했던 말을 기억하나?”
“그럼요.”
안 그래도 어제 카슨이 내뱉은 의미심장한 한 마디를 떠올리고 있던 지혁은 뜨끔했다.
루 카슨은 유일한 사람이었다. 지혁의 공이 ‘브랜든 웹의 싱커’라는 걸 알아챈 유일한 사람. 애리조나 프런트 사람들이 정신없는 이야기들을 나열할 때, 카슨은 나지막이 딱 한 마디만을 던졌다.
“다른건 몰라도 싱커만큼은 마치 브랜든 웹이 왼손으로 던지는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과거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의 에이스였던 브랜든 웹을 떠올린 관계자들은 눈이 희번덕하게 뒤집어져서 침을 튀겨대며 얘기를 했었다.
“나는 아직도 브랜든의 싱커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어. 브랜든이 켄터키 대학교를 졸업하고 싱글 A에 합류했을 때 나도 막 은퇴해서 투수코치로 합류했었지. 그 때 처음으로 브랜든의 싱커를 봤고. 그래서 어제 그런 소리를 했던 거야. 신인 때 브랜든의 느낌이 났거든.”
카슨은 담배꽁초를 튕겨내며 곧장 하나를 더 꺼내 물었다.
“우리 팀에 올 생각 있나?”
“저는 뭐, 불러 주는 곳으로 가야죠. 다만 확실한 답을 드리긴 좀...”
“아쉽군. 우리 팀으로 오겠다고 했으면 브랜든의 영업 비밀을 하나 전수해 주려고 했는데.”
순간 지혁의 눈에 스쳐가는 간절한 생각을 읽은 것처럼 카슨은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딱 하나만 말해줄까?”
“네!”
“브랜든이 대학을 졸업하고 처음 마이너리그에 왔을 때 싱커는 밋밋하기 짝이 없었지. 그 싱커에 디렉션을 준 게 바로 나였어.”
카슨은 오른손을 들어보여 손가락을 이리저리 까딱거렸다.
“싱커 같은 공은 손가락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완전히 다른 공이 되거든.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네.”
“이건 보통 가진 구위가 떨어지는 투수들이 정글에서 살아남으려고 억지로 배우는 거지. 당신은 아직 어린데도 그런 트릭을 잘 구사하더군.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치 전생의 지혁을 보고 말하는 듯한 느낌 때문에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브랜든도 패스트볼 구위가 썩 좋지 않아서 고민하고 있던 녀석이었어. 난 내가 메이저리그에서 살아남기 위해 익혔던 기술들을 알려줬고. 브랜든은 똑똑하게 받아들였어. 결과는 알다시피. 사이 영 상을 탔고.”
“브랜든 웹의 전담 코치셨군요?”
“그래. 이제 우리 팀에 올 마음이 좀 생겼나?”
한 번 크게 숨을 내쉬어본다. 루 카슨이 브랜든 웹의 싱커라는 것을 알아챈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가장 가까이서 그 싱커를 봤던 사람이니 당연했다. 지혁이 판단해야 할 것은 과연 카슨이 브랜든 웹의 싱커에 실제로 얼마나 많은 영향을 줬느냐였다.
싱커를 실전에서 효율적으로 쓰기 위해, 싱커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카슨의 도움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래봬도 프로 무대에서 18년을 굴렀던 경험이 있는 사람이다. 지금의 지혁에겐 패트릭이 있다. 지혁이 결정을 내리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은 카슨의 도움이 아니라 패트릭의 정보와 조언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에이전트와 상의해서 연락드리겠습니다.”
“...어린 친구답지 않군. 혈기 넘치는 결정을 하길 기대했는데.”
“안 그래도 에이전트를 만나야 해서요. 잘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럼.”
카슨의 마지막 말에서 씁쓸한 기색이 느껴졌다.
*
호텔 방에서 월드시리즈 재방송을 보고 있는데도 카슨의 제안이 머리에서 쉽게 떠나지 않았다.
“어떤 선택을 할 겐가?”
“글쎄요. 아직 결정 안 했어요.”
“흐흐. 여전히 신중하구만. 마운드에서는 과감한 편이데 말이지.”
패트릭의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 신을 향해 지혁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선수 인생의 3년을 투자했네. 좀 더 빨리 싱커를 숙달하려면 카슨의 팀으로 가는 게 낫지 않겠나?”
“뭐, 제가 애리조나를 선택하게 된다면 그건 아마 카슨이 있기 때문이겠죠.”
“여유가 넘치는군? 막상 3년의 인생과 바꿀 때는 그렇게 고민하면서 덜덜 떨더니.”
“딱히 여유가 있는 건 아니에요. 단지 이건 믿음의 문제라고 생각하거든요.”
“믿음?”
“네. 카슨이라는 그 사람, 아마 브랜든 웹의 코치였던 건 맞을 거예요. 그게 아니고서는 단번에 내 싱커를 보고 브랜든 웹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았겠죠. 하지만 브랜든 웹은 싱글 A에서 고작 한 시즌을 보냈을 뿐이에요. 카슨이 웹에게 어떤 지도를 했고, 그게 어떤 효과가 있었는지는 카슨의 말만 믿어야 하는 상황이죠. 그리고 저는 어제 얼굴을 처음 본 카슨이라는 사람보다 패트릭을 훨씬 더 믿어요. 그뿐이에요.”
“흐흐. 그것도 그렇군.”
신은 재미있다는 듯 클클거리며 손에 든 야구공을 빙글빙글 돌렸다. 그 때 도어락이 울리며 패트릭이 특유의 인상 쓴 표정으로 방에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신은 거짓말처럼 없어졌다.
“문. 결정합시다.”
“좋아요. 얘기는 잘 됐습니까?”
“조건은 어차피 거기서 거기예요. 별로 의미 있는 얘기들은 없었어요.”
“그러면 내 말부터 먼저 들어봐요.”
지혁은 오늘 산책 중에 카슨과 만난 일을 얘기해 주었다.
“브랜든 웹의 싱커라... 엄청난 칭찬입니다, 그거.”
“나도 알아요.”
“애리조나 관계자들은 브랜든 웹에 대한 향수가 있어요. 사이 영 상을 수상했을 정도로 위력적이었고, 리그를 지배할 선수일 줄 알았을 겁니다. 부상 때문에 통산 100승도 못하고 은퇴한 선수니까 팀에서는 에이스에 대한 향수가 있죠. 실제로 랜디 존슨과 커트 실링이 뛰던 시절 이후에 나타난 유일한 에이스였으니까. 아직도 웹의 뒤를 잇는 선수가 애리조나에는 없고요.”
하지만 말과는 다르게 패트릭은 순간 얼굴이 굳었다.
“애리조나는 별로라고 생각하는군요?”
“눈치가 빠르네요. 그 팀은 마이너리그 투수진이 충분해요. 체이스 앤더슨. 아치 브래들리. 애런 블레어. A.J. 쉬겔. 더블 A 선발 로테이션에 최소한 네 명은 확정되어 있습니다. 설령 애리조나가 싱커를 다듬기에 가장 좋은 곳이라고 해도...”
“던질 기회를 얻지 못할 수도 있다는 말이죠?”
지혁은 패트릭이 해야 할 말을 가로챘다. 패트릭은 지혁의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다.
선발 마운드에서 던질 수 있는 곳.
싱커를 잘 조련하는 곳은 사실 우선순위는 아니다. 일단 마운드에 올라야 죽도 밥도 되는 것 아니겠는가? 선수가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을 최우선순위로 설정하는 에이전트가 바로 패트릭이어서, 믿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럼 어디랑 계약하는 게 좋을까요?”
“탬파베이 레이스.”
“다른 팀보다 레이스가 나은 이유는요?”
“좌완 선발이 없어요. 더블 A, 트리플 A 통틀어서 두 명 있습니다. 지금 탬파베이가 당신을 원하는 가장 큰 이유죠. 플러스로 무빙이 있는 패스트볼에 대한 관점과 주관이 확실한 구단이라는 것. 단순한 패스트볼, 투심 패스트볼, 컷 패스트볼, 싱킹 패스트볼. 네 가지로 크게 나눈 패스트볼에 대한 연구도 충분한 팀이라는 것. 알다시피 다른 구단들은 패스트볼을 이런 식으로 다루지는 않습니다. 몇몇 팀들은 진보적이고 파격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고, 새로운 시험을 하는 데 주저함이 없죠. 탬파베이는 그런 팀입니다. 그만큼 당신은 많은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거고. 또...”
지혁은 또 다시 패트릭의 말을 끊었다. 그는 마음을 굳혔다.
“오케이.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당신의 선택을 믿어 볼게요, 패트릭.”
*
“잘 해 봅시다, 문지혁 선수.”
마이너리거에게 입단식이나 기자회견 따위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오히려 이렇게 금방 끝나도 되나 싶을 정도로 간단하게 끝나버린다.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프런트 직원, 스카우트 팀장, 더블 A 감독과 악수를 하면 그 순간부터 계약이 성립되는 것이다. 이 짧은 시간을 위해 패트릭은 세 달 내내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메디컬 테스트는 사흘 뒤에 하겠습니다. 마침 플로리다에 머물고 있다고 하셨으니 동선이 짧아서 좋네요. 필요한 서류와 자료는 에이전트를 통해서 전달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웰컴 투 레이스.”
탬파베이의 더블 A 감독인 브래디 윌리엄스가 반쯤 벗겨진 머리로 지혁에게 눈을 찡긋했다. 프런트 관계자는 탬파베이 로고가 새겨진 메이저리그 모자를 선물했다. 비록 마이너리그 계약이었지만, 지혁은 그렇게 탬파베이 레이스의 일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