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전처리, 회귀하다-14화 (15/204)

14 - 도미니카 윈터리그.

메디컬 테스트는 깔끔했다. 시즌이 끝난 뒤에도 운동을 쉬지 않았기 때문에 기초 체력 테스트 정도는 충분히 통과했다. 지구력, 폐활량, 근육의 회복력 등 모든 부분에서 상당히 높은 점수가 나왔다.

깐깐해 보이는 여자 주치의는 모든 부분에서 오케이를 외쳤다. 컵스에서 넘어온 각종 차트들을 볼 때를 빼고.

“무릎. 지금은 안 아픈가요?”

“네. 멀쩡합니다.”

“투구폼을 바꿨고 몸무게도 늘어났어요. 조금이라도 통증이 있으면 지금 얘기하세요. 잘못하면 의료 소송으로 번질 수도 있는 문제니까.”

“없어요. 깔끔하다니까요.”

“흠.”

닥터 로즈베리의 눈빛이 순간 째릿하는 것 같았지만 지혁은 태연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의 몸은 스스로가 제일 잘 안다. 위태위태하지만, 한 번 칼을 댔던 몸을 관리하기 위해 쌓은 노하우만 15년이다.

“좋아요. 가보셔도 좋습니다. 오늘 수고하셨어요.”

“합격이죠?”

“별다른 문제는 없어요. 에이전트 통해서 연락 갈 거예요.”

*

“컵스가 이 선수를 푼 결정적인 이유가 바로 이거 때문이었네요.”

닥터 로즈베리는 지혁의 MRI 차트에 레이저 포인터를 비췄다.

“축발이 되는 왼쪽 무릎에 전방 십자인대 완전 파열로 재건 수술을 받았어요.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고요. 보이시죠? 여기.”

메디컬 테스트는 신속하게 진행되었고, 모든 부분에서 지혁은 걸리는 것 하나 없이 깔끔했다. 문제는 단 하나였다. 2년 전에 수술 받은 왼쪽 무릎. 그 점 때문에 최종 결정이 늦어지고 있었다.

“이형진이 받은 수술과 정확히 같은 거였어요.”

탬파베이에는 또 다른 한국인 유망주가 있다. 유격수 이형진. 꽤 오랜 시간 상당히 촉망받는 수비형 유격수였고, 팀에서도 큰 기대를 갖고 애지중지 키워왔던 선수였다. 하지만 시즌 초 더블 플레이 과정에서 주자의 깊은 슬라이딩과 충돌했고 십자인대가 완전히 파열됐다. 이형진도 십자인대 재건 수술을 받고 재활 중에 있었다.

“닥터 로즈베리. 문의 무릎이 지금 상황에서 투구에 영향을 줄 정도입니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아요. 이번 시즌 컵스에서 그래도 풀타임을 소화한 걸 보면. 통증도 없다고 하고요.”

“체중을 상당히 많이 찌웠습니다. 무릎에 부담이 가지는 않겠습니까?”

“글쎄요. 솔직히 알 수 없어요. 당장 문제가 있는 건 아니겠지만, 시즌을 소화하다 보면 무리가 갈 확률은 높다고 해야겠죠.”

회의실에 앉은 모두가 각자의 노트북을 한참 바라보며 자료를 찾아댄다. 닥터 로즈베리는 잠시 생긴 여유 시간 동안 생수병을 따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레이스의 분위기는 항상 이렇다. 노트북 화면 속에서 의미 있는 자료를 찾으려고 애쓰곤 한다. 그 유명한 앤드류 프리드먼 단장의 스태프들이니까. 이들은 전부 ‘베이스볼 너드’다.

“솔직히 저 무릎은 시한폭탄을 안고 가는 거나 마찬가지긴 해요. 하지만 몽고메리 비스킷츠에 투수가 모자라요. 이 정도 실링이면 기회는 줄 법 한 선수고요.”

“내 생각은 좀 달라요. 룰5 드래프트에만 봐도 저 정도 선수는 뽑아올 수 있어요. 굳이 부상 전례가 있고 위험도가 큰 아시아 선수를 쓸 필요가 있나요?”

“이 친구 그라운드볼 비율이 낮아요. 장기적으로 봤을 때 우리 팀에서 오래 쓰기는 힘들 것 같은데.”

“아니지. 그 자료에는 싱커가 빠져 있습니다. 이 투수의 진가는 이번 시즌에 확인해야 해요.”

갑론을박이 펼쳐졌다. 지혁은 탬파베이 레이스라는 팀에 입단하는 과정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해도 가지 않는 자료들을 가지고 이렇게 치열한 토론을 하는 것을 꿈에도 모를 것이다.

“됐습니다. 얘기는 충분히 잘 들었어요.”

제일 상석에 앉은 젊은 사람이 입을 열었다.

체임 블룸. 마이너리그 계약을 최종적으로 논의하고 단장인 프리드먼에게 보고할 결정권자.

“우리는 최대한 많은 선수에게, 최대한 많은 기회를 줘서, 최대한 많은 성장을 이뤄내고, 그 카드로 최대한 좋은 트레이드를 이끌어내는 팀입니다. 맞죠?”

모두가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체임 블룸은 손가락을 튕기며 쿨하게 결정을 내렸다.

“써 보고 판단합시다. 던져보지 않았는데 위력적인 구종이 있고, 이유를 알 수 없지만 투구폼이 바뀌어 있고, 갑자기 노련해진 선수. 우리는 자료를 보고 분석하지만, 그 자료 자체가 무의미한 선수라는 뜻이죠. 하지만 또 현장 평가는 아주 좋고. 이 복권은 무조건 긁어봐야 하는 겁니다. 성공이든 실패든.”

블룸은 단번에 회의를 정리했다.

“단. 우리는 최대한 빨리 그 가려진 복권을 긁어봐야 합니다. 이번 도미니카 윈터리그에 아직 자리 남았죠?”

“네. 있습니다.”

“보내세요. 실전에서 확인합시다. 끝까지 데리고 갈지, 일찌감치 포기할지.”

“알겠습니다. 바로 진행시키겠습니다.”

*

도미니카의 수도 산토도밍고에서는 익숙한 바다 냄새가 진동했다. 카리브의 눈부신 바다는 언제 봐도 절경이었다. 물론, 관광 차 놀러 왔을 때만.

“레이스에서 보낸 투수가 당신입니까?”

“네.”

“팀에서 보낸 등록 서류가... 어디 보자. 잠깐 기다려요.”

윈터리그를 뛰기 위해 도미니카를 찾게 되면 아름다운 카리브 해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특히 눈도장을 찍기 위해 발버둥쳐야 하는 마이너리거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지혁이 딱 그 상황에 처해 있었다.

“한국? 낯선 곳이네.”

몇 명 없는 행정 직원 중 한 명이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그는 서류 몇 장을 주섬주섬 챙기더니 한 장을 내밀었다.

“이름 쓰고, 포지션 쓰고. 여기에 서명하세요.”

지혁이 펜을 들고 비어 있는 칸을 채워나가는 동안, 그 직원은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었다.

“따로 숙박할 곳을 구하지 않을 거죠? 구단에 단체 도미토리가 있는데 등록할 거면 그 밑에 신청하는 데가 있어요. 탬파베이 레이스에서 왔으니... 브라울리오 리리랑 같은 방을 쓰면 되겠네.”

서명을 다 하고 난 서류를 내밀자 그 직원은 컴퓨터에 입력하더니 고개도 들지 않고 손을 들어 반대편을 가리켰다.

“다 됐어요. 저 쪽으로 나가면서 유니폼이랑 모자 받아가세요. 따로 더 지급되지는 않으니까 아껴 쓰시고.”

지혁은 그저 고개만 끄덕이고는 행정실 바깥으로 나왔다. 유니폼과 장비 몇 개를 지원해주는 창고가 있었다.

마이너리그보다도 더 열악한 곳이 바로 도미니카 윈터리그다. 새삼 전생에서 지긋지긋하게 이곳을 드나들었던 때가 떠올랐다. 창고지기는 80번대 등번호 중 아무거나 집어 지혁에게 내밀었다.

“훈련은 내일부터 합류하세요.”

“오늘부터는 안 됩니까?”

“단체 훈련은 이미 끝났을 걸요? 개인 훈련이라도 할 거라면 상관없고. 아, 투수들은 등판하기 전에 매니저가 미리 말을 해 주니까 준비하시면 됩니다.”

남은 12월을 함께할 유니폼을 받아 가방에 넣었다. 퀴퀴한 창고에서 걸어나오자 카리브 특유의 비릿하고 강렬한 내음이 가득 찬 느낌이었다.

‘새로운 인생, 진짜 출발점은 여기구나.’

속에서 솟아오르는 새로운 삶에 대한 강한 열망이 느껴졌다.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쳤던 지난 생에서의 노하우에 브랜든 웹이 던지던 싱커까지 장착했다. 이번 도미니카 윈터리그가 그 새로운 시작의 무대가 될 것이다.

“가자.”

훈련장으로 이동하면서 계속해서 소리를 내며 되뇌었다. 이번엔 반드시 더 높은 곳으로 갈 것이다.

*

티그레 델 리세이 팀의 불펜은 이미 공을 던지는 선수들로 바글바글했다. 꽉 찬 불펜 바깥에서 두 명이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언뜻 훑어보니 티그레를 자기 소속팀으로 삼는 선수들은 한 명도 없는 것 같았다. 전부 마이너리거들인 것이다.

‘하긴. 겨울에도 쉬지 않고 야구를 하러 여기까지 왔다는 건 그만큼 절박하다는 뜻이니까.’

지혁도 불펜 주위를 어슬렁거렸다. 오늘 새로 온 아시아인 투수는 분명히 선수들의 이목을 끌 만한데도, 아무도 지혁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 윈터리그는 오직 야구만 보고 가는 레이스니까. 관심을 줄 여유가 없겠지.

‘여기는 그래도 한 가닥 하는 놈들은 없네.’

불펜에서 공을 던지는 어린 선수들을 보며 전생의 기억을 더듬어봤지만 딱히 임팩트가 강했던 선수는 없었다. 아주 잠깐 선수 생활을 같이 했던 루비 데 라 로사 정도만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십 분쯤 기다렸을까? 지혁의 앞에서 대기하고 있는 두 명도 아직 불펜에 들어가질 못했다.

“어이. 새로 왔어?”

그 때, 너무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설마. 설마 하는 마음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시안? 새로 온 친구냐고. 아, 혹시 영어 못 해?”

“아니. 할 줄 알아.”

“불펜에서 계속 기다릴 거야? 나랑 나가서 롱토스라도 할래?”

지혁은 놀라서 입이 벌어졌다.

페르난도 ‘퀵 팝’ 멘데스.

메이저리그에서 야디에르 몰리나의 뒤를 이어 또 하나의 전설을 만들어 낸 라틴계 포수. 결국에는 몰리나와 이반 로드리게스를 넘어서 버스터 포지, 마이크 피아자 같은 미국인 전설들과도 비견되던 그가 거기 있었다. 새파랗게 젊은 얼굴로.

“뭐야? 입 왜 그래? 하하하.”

깔깔대는 멘데스가 왜 여기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지혁은 훗날 전설이 될 멘데스를 앉혀 놓고 공을 던져야겠다는 마음뿐이었다.

“나가자. 빨리!”

“그래. 보채지 마. 왜 이래 갑자기?”

불펜에서 야구장으로 걸어나가는 짧은 순간에도 지혁은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어떻게 여기서 만날 수 있지? 신의 선물인가? 아니면 원래 여기 있었던 걸까?

“자. 캐치볼부터. 오케이?”

“오케이.”

멘데스가 자리를 잡고 서서 가볍게 공을 던졌다. 별다를 거 없는 캐치볼이지만 바로 그 ‘퀵 팝’의 공이었다. 천천히 날아오는 공이 글러브 속에 빨려 들어오자 감격스럽기까지 했다.

“넌 어느 팀에서 왔어?”

“탬파베이 레이스.”

“메이저리거라고?”

“아니. 이번에 새로 계약했어. 아마 더블 A에서 뛸걸?”

“뭐야. 그럼 라라랑 같은 팀이네. 라라도 그 팀에서 왔는데.”

두 사람은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며 점차 거리를 벌려 갔다. 30미터, 50미터. 그리고 70미터까지. 그리고 몇 차례 공을 던지고 다시 거리를 좁힌다.

“투수가 그렇게 멀리 가도 괜찮아?”

“난 원래 100미터 넘기기도 해. 오늘은 비시즌이니까 이 정도만 하는 거야.”

“투수들은 이런 거 잘 안 하는데. 넌 좀 특이하네.”

멘데스는 소문대로 친절하고 유쾌한 성격이었다. 특유의 낙천적이고 사교적인 성격은 빅리그 안방에서도 그 소문이 자자했었다. 물론 지혁이 멘데스와 친해지려는 의욕이 강했던 것도 있지만, 그게 없었더라도 두 사람은 금방 친해질 수 있었을 것이다. 워낙 멘데스가 살갑게 굴었고, 두 사람은 동갑이기까지 했다.

“슬슬 들어가 볼까? 공 한 번 받아 봐야지.”

“나야 좋지. 기대하라고.”

마침 불펜투구를 마친 데 라 로사가 걸어나오던 참이어서 빈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멘데스는 마스크를 쓰지 않고 일어서서 몇 개를 받았다. 지혁이 마운드의 높이에 적응할 수 있게 배려한 것이다. 하지만 지혁은 빨리 멘데스를 앉히고 싶어서 조바심이 날 지경이었다.

“헤이, 멘데스! 이제 앉아도 돼!”

“벌써? 세 개밖에 안 던졌잖아?”

“괜찮아. 얼른 앉아 봐!”

멘데스는 마스크를 내려 쓰고 홈 플레이트 뒤에 쪼그려 앉았다. 마운드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지혁은 이 허름한 불펜이 마치 월드시리즈 마운드가 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원래대로라면 적어도 5년 안에 월드시리즈 무대에 앉아 있을 포수가 바로 멘데스다. 깊은 심호흡을 한 지혁이 서서히 글러브를 들어올렸다.

뻐엉!

패스트볼이 쭉 뻗어나가며 멘데스의 미트에 박힌다.

“나이스 볼! 괜찮은데?”

멘데스의 칭찬에 몸이 찌릿거렸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