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 선발 등판.
멘데스를 앉혀두고 던진 불펜 피칭의 느낌은 아주 짜릿했다. 싱커는 날카롭게 가라앉았고 슬라이더도 괜찮게 꺾였다. 스스로도 모를 정도로 힘이 조금 들어갔지만, 그럴 때마다 멘데스가 귀신 같이 알아채고 힘을 빼라는 제스처를 취해 줬다.
20개 정도만 던질 생각이었는데 워낙 투구 컨디션이 괜찮아서인지 10개 정도를 더 던졌다.
“오케이! 와, 너 싱커 되게 좋다!”
마지막 공을 받은 멘데스가 마운드를 향해 걸어오며 웃었다.
“진짜 괜찮았어?”
“어. 왼손 투수고, 폼도 좀 까다롭고.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패스트볼을 던질 때랑 투구폼 차이도 없는 것 같아. 되게 날카롭게 떨어질 때도 있고, 조금 떨어지지만 거의 다 와서 변할 때도 있고. 이 공 되게 좋은데?”
“고마워. 하하.”
“너 한 달짜리 계약이야?”
“응. 1월 초까지만 있을 거야.”
“아쉽다. 이 정도 공이면 당장 우리 리그에서도 틀림없이 통할 텐데.”
멘데스는 웃으며 한 마디를 보탰다.
“아마 계약 끝나서 돌아간 크리스 자리에 네가 들어갈 것 같은데. 감독이랑 만나 봤어?”
“아니, 아직. 스탭들은 아직 못 만났어.”
“내가 얘기해 볼게. 티그레에 와서 던진 첫 공을 내가 받았는데. 네가 선발로 올라갈 때 파트너는 내가 했으면 해서.”
펄쩍 뛸 것 같은 기분을 억지로 누르면서, 지혁은 멘데스의 어깨에 손을 턱 얹었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다시 이럴 수 있을지 모른다.
“아미고, 그라시아스!”
“뭐? 하하하. 스페인어 발음 엄청 이상해. 다신 하지 마.”
작은 일에도 항상 유쾌하게 웃는 멘데스를 만난 것은 그야말로 행운이다. 불펜 피칭을 할 때마다 멘데스가 와서 공을 받아주는 것은 호사 중에 호사가 아닐 수 없다.
아직 메이저리그 팀과 계약을 맺지 않고 도미니카에서 뛰고 있지만, 이미 멘데스는 많은 팀들이 노리고 있는 선수였다. 국제 FA 자격을 얻는 올해 말이 되면 메이저리그 팀들이 정신없이 달려들 것이 확실했다.
아직 각성하지 않은 공격력은 둘째치더라도 마운드의 투수를 이끌어가는 능력, 절묘한 프레이밍, 타자를 파악하고 상황에 맞춰 싸인을 내는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수준이었다. 특히 훗날 메이저리그에서 그의 별명이 되기도 하는 ‘퀵 팝’은 까무러칠 지경이었다.
주자의 도루를 저지하기 위해 포수 미트에서 공을 빼는 순간부터 송구가 2루수의 글러브로 들어가기까지의 시간을 의미하는 ‘팝 타임’은 포수의 주요 덕목 중 하나다. 1.9초 정도가 메이저리거 평균이고, 2초를 넘어가면 못 쓸 포수로 평가받곤 한다. 세인트루이스의 야디에르 몰리나는 꾸준히 1.8초대를 기록하면서 최고의 주자 킬러로 손꼽히고 있었다.
그런데 멘데스의 평균 팝 타임은 무려 1.7초대 중반이었다. 그가 컨디션이 좋은 날에는 엄청난 스피드를 자랑하는 선수들도 감히 2루를 훔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심지어 투수가 타이밍을 뺏겨도 2루에서 잡는 상황까지 벌어지곤 했다.
도루 저지 훈련을 바라보며 지혁은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투수를 해도 될 정도의 어깨로 홈에서 2루까지 쭉 뻗어나가는 공은 레이저처럼 보일 정도였다.
“나이스 태그!”
그러면서도 멘데스는 꼭 베이스 커버를 들어온 내야수를 칭찬했다. 이 정도면 마운드에서 주자 걱정 따위는 하지 않아도 된다. 투수에게 있어 최고의 파트너였다.
“정말 엄청나지?”
“네. 사람이 아닌 것 같아요.”
지혁은 누가 물었는지도 의식하지 못하고 속내를 그대로 드러냈다.
“다음 경기 네 파트너야. 내일 모레 선발 등판이니까 준비해.”
“아, 감독님?”
“어차피 넌 승패도 중요하지 않잖아? 그냥 멘데스가 이끌어가는 대로만 해. 너는 첫 경기니까 딱 5이닝만 던질 거야.”
“그 이상은 안 되구요?”
“당연하지. 마운드에 올라갈 녀석은 차고 넘치니까. 어쨌든 그렇게 알고 준비해.”
뚱보 감독은 그 말만 남기고 뒤뚱거리며 가 버렸다.
새로운 인생, 첫 번째 기회가 그렇게 찾아왔다. 게다가 파트너는 저 괴물 같은 수비력을 자랑하는 페르난도 멘데스란다. 이건 정말 꿈같은 일이다.
*
유독 햇빛이 진하게 내리쬐는 바람에 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일찌감치 몸을 풀어 놓고 더그아웃에 앉아 음료수를 마시고 있던 지혁에게 멘데스가 슬그머니 다가왔다.
“요~ 아미고. 컨디션 어때?”
“좋아. 적당히 땀도 나고. 이 정도면 시즌 때랑 비슷한 구속도 나올 것 같아.”
“잘 됐네. 베스트 컨디션이어야 돼. 오늘 저 팀 라인업 봤어?”
“아직. 왜?”
멘데스는 살짝 사악해 보이는 미소를 짓더니 이름을 부르며 손가락을 꼽아나갔다.
“후안 페레즈. 후안 라가레스. 조나단 비야르. 솔리오 알몬테. 윌린 로사리오. 앤디 마르테. 6명이더라고. 메이저리그에서 뛰는 선수가.”
지혁은 입꼬리를 틀어 올리며 대답했다.
“윈터리그까지 와서 누가 명함 다 까고 야구해? 걔네들이 메이저리거면 더 잘 됐네. 쟤네들 때려잡고 나도 메이저리그 가면 되지.”
“큭큭. 싱글 A 팀에서도 방출 당했다던 투수가 갑자기 왜 이렇게 자신감이 넘쳐?”
“난 이제 그때랑은 달라. 그리고 내 공 받을 마누라도 웬만한 메이저리거들 뺨치는 녀석이고.”
“미리 점수 따는 거야? 좋아. 퀵 모션 대충 해. 내가 2루에서 다 잡아줄게.”
“무슨 소리를 그렇게 섭섭하게 하냐? 1루도 쉽게 안 줄 건데.”
“하하하! 잘 해 보자고.”
“그래. 싸인만 내. 무조건 그대로 갈 거니까.”
“맘에 들어. 너 정말 맘에 드는 투수야. 굿 보이, 굿 피쳐.”
멘데스는 특유의 사람 좋아 뵈는 얼굴로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나는 펑고 하러 먼저 나간다. 어깨 잘 풀어두라고.”
장비를 챙겨 입은 멘데스가 거구의 몸을 이끌고 그라운드로 걸어나가고, 야수들의 시합 전 펑고가 시작됐다. 더그아웃이 모처럼 조용해졌다.
지혁은 티그레의 야수진이 생각보다 괜찮다는 것에 살짝 놀랐다. 오늘 상대할 아길라스 팀처럼 메이저리거가 널린 팀은 아니었지만, 지혁의 전생에서는 메이저리그를 주름잡던 선수들이 앳된 얼굴로 글러브를 끼고 있었다.
특히 내야는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유격수에는 쥬릭슨 프로파가, 2루수는 디 고든이, 3루에는 후안 프란시스코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1루수로 나서는 야마이코 나바로는 한국에서 대단한 성공을 거두게 되는 타자였고.
그 중에서도 프로파와 고든의 키스톤은 유독 컨디션이 좋은 듯 코치의 어려운 펑고 타구를 너무나 쉽게 건져냈다.
“싱커를 잘 쓰면 되겠어. 내야가 거의 그물이네, 그물.”
지혁이 나지막이 중얼거린 말을, 멘데스도 그라운드 위에서 똑같이 하고 있었다.
*
“오케이! 나이스 볼!”
딱 좋다. 마운드 흙의 단단함도, 사실상 비시즌이 아닌 거나 다름없는 몸 상태도, 그리고 저 쪽에서 공을 받고 있는 포수도. 윈터리그에서 데뷔전이라고 표현하기는 좀 뭣하지만 그래도 첫 경기를 치르기에는 딱 좋은 환경이었다. 땀이 나는 날씨 탓에 살짝 습기를 머금은 공은 실밥을 채어내기에 알맞은 상태였다.
아길라스의 1번 타자 조나단 비야르가 타석에 들어섰다. 작은 체구로도 위협적인 연습 스윙을 보여주고는 세상 진지한 모습으로 지혁을 응시한다.
‘언제였더라? 올스타까지 나갔던 녀석이었지?’
지혁은 비야르의 특성을 떠올려내려고 잠시 생각했다. 하지만 이내 곧 머리를 흔들어 생각을 털어냈다. 만약 여기가 메이저리그 마운드였다면 무조건 약점을 파고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윈터리그고, 윈터리그에서 해야 할 일은 경험이나 노련미를 뽐내는 것이 아니라 공의 구위를 체크하는 일이다. 지금 상태를 파악하는 일. 오늘 지혁이 마운드에서 해야 할 일은 그것뿐이었다.
그렇기에 멘데스가 보낸 싸인대로, 초구부터 몸쪽에 붙는 하이 패스트볼을 던졌다. 93마일 짜리였다.
“볼!”
비야르가 재빨리 허리를 뒤로 젖히고 대번에 짜증 섞인 표정을 지었다. 초구부터 가슴 바로 앞에 붙는 빠른 공이 들어갔으니 기분이 나쁠 법 하다. 멘데스는 아마 저걸 이용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비야르가 슬쩍 포수 쪽을 내려다보며 분명히 뭐라고 주억거리고 있었다.
이어서 2구와 3구도 몸에 붙였다. 홈플레이트에 살짝 걸쳐 들어가는 공 두 개가 모두 스트라이크 판정을 받자, 엉덩이를 뒤로 쭉 뺐던 비야르는 짜증이 나는 모양이었다. 방망이를 툭툭 내려찍었다.
‘흐흐. 아직 어린놈이지. 메이저리거라도.’
물론 지혁보다 나이가 많았지만, 이미 지혁은 38년 인생을 산 경험이 있으니까. 비야르의 혈기를 애송이의 것으로 치부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패스트볼 세 개를 연속으로 던지고 나자 슬슬 싱커가 던지고 싶었는데, 멘데스도 그렇게 생각한 모양이었다.
‘싱커. 바깥쪽 땅에 쳐박아 버려.’
멘데스의 싸인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지혁은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지혁에겐 실전에서 싱커를 처음 던져 보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어떤 순간보다도 집중하면서, 와인드업 이후 힘차게 공을 뿌렸다. 하지만.
‘이런!’
지나치게 낙폭을 의식하다보니 제구가 잘 안 됐다. 가운데로 몰리면서도 살짝 높은 위치로 향하는 공이었다. 스위치 타자여서 우타석에 들어선 비야르가 싱커 같지 않은 싱커를 툭 밀어 때렸다.
다행히 움직임이 있는 공이라서 히팅 타이밍이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제법 잘 맞은 타구가 내야를 빠져나가려는 순간 디 고든이 재빨리 몸을 날렸다. 숏바운드가 된 공이 고든의 글러브에 투박하게 빨려들었고, 재빨리 일어난 고든이 1루에서 비야르를 잡아냈다.
“나이스 세컨! 나~이스!”
멘데스가 벌떡 일어나서 온 그라운드를 쩌렁쩌렁 울렸다. 지혁도 글러브를 들어 고든에게 감사를 표했다. 나바로에게서 공을 돌려 받은 고든이 사슴 같은 눈망울을 빛내며 씨익 웃었다.
‘초장부터 기분 나쁠 뻔 했네. 다행이다.’
지혁은 마운드를 고르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타이밍을 빼앗는데는 성공했지만 메이저리거의 타격은 다르다는 걸 체감했다. 싱글 A 녀석들이라면 공이 조금 몰렸어도 충분히 헛스윙을 했을 텐데.
다음 타자는 뉴욕 메츠가 공들여 키운 중견수 후안 라가레스. 작년에 메이저리그에서 데뷔한 그는 아직 타격 능력이 좋은 선수는 아니었다.
라가레스를 상대로는 공 다섯 개를 던졌다. 모두 싱커였다. 첫 번째 싱커가 제구가 잘 되지 않은 것이 지혁에게도, 멘데스에게도 모두 신경이 쓰였던 것이다.
다섯 개의 공이 모두 위력적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결국 방망이 아래쪽에 맞은 마지막 공은 지혁에게 원바운드로 되돌아왔다. 천천히 1루로 토스하면서 투 아웃.
3번으로 나온 앤디 마르테는 무지막지할 정도로 큰 스윙으로 일관했고, 몸쪽으로 붙어 들어오다가 아래로 떨어지는 슬라이더에 삼진을 당했다.
“후우.”
“괜찮았어. 1회치고는. 점점 더 좋아질 것 같던데?”
메이저리거 세 명을 처리하고 더그아웃으로 돌아가는 지혁에게 재빨리 멘데스가 붙었다.
“싱커. 별로였지?”
“불펜에서보다는.”
“정확히 뭐가 안 좋았어?”
“스피드. 무브먼트. 컨트롤.”
“전부 안 좋았다는 소리네.”
“사실이야. 그래도 라가레스 상대로 한 마지막 공은 좋았어. 딱 그 정도 느낌이면 돼.”
“그래. 알겠어.”
멘데스가 지혁의 어깨를 툭툭 쳐 주었다.
생각이 너무 많아서였을까? 아니면 싱커가 익숙하지 않기 때문일까?
메이저리거 세 명을 깔끔하게 돌려세웠다는 뿌듯함을 느낄 겨를이 없다. 싱커를 던지는 투수로는 이제 첫 걸음을 내딛었을 뿐이다. 그것도 아슬아슬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