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 위압감과 싸우는 법.
다음 회 선두타자는 1루수 댄 블랙. 스위치 타자인 그가 육중한 몸을 이끌고 우타석에 들어섰다. 위협적으로 방망이를 흔드는 폼이 마치 ‘걸리기만 해 봐라. 바로 홈런이야.’라고 말하는 것 같다.
지혁은 글러브 속에 두 손을 모으고 공을 이리저리 돌렸다. 멘데스는 초구부터 싱커를 요구했다. 이번 회에도 싱커가 제대로 말을 듣지 않으면 좀 곤란할 것이다.
지금 타석에 있는 블랙도 그렇고, 대기하고 있는 로사리오도 그렇고. 어설픈 공은 맞으면 무조건 넘어갈 것 같은 위압감을 주는 몸집이니까.
‘힘을 빼고. 바깥쪽 낮게. 제구에 집중하자. 제구. 제구.’
어깨를 한 번 털어내고는 투구 자세를 잡았다. 서서히 와인드업, 그리고... 바깥쪽!
한복판으로 향하던 공은 초구부터 방망이를 불러내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지혁의 싱커가 이번에는 제대로 말을 들었다. 마지막 순간 날카롭게 바깥쪽으로 꺾이며 가라앉는 공은 방망이에 닿지 않고 멘데스의 미트에 박혔다.
“나이스 볼! 굿 피쳐!”
멘데스가 볼을 되돌려주며 소리 질렀다. 아마추어 야구가 아닌 이상 이례적인 일이었지만, 멘데스의 신호는 확실했다. 싱커는 딱 이 느낌이라는 기준점을 잡아 준 것이다.
한 번 싱커가 들어가기 시작하자 금방 감이 잡혔다. 타자들은 싱커를 한두 개만 제대로 보여주고 나면 바깥쪽 공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멘데스라는 영리한 포수는 그 심리를 정확하게 꿰뚫는 선수고.
블랙을 힘없는 3루 플라이로 잡아낸 몸 쪽 패스트볼이 딱 그 역할을 했다.
5번으로 들어선 솔리오 알몬테는 앞선 네 타자를 보고 어느 정도 감을 잡은 모양이었다. 바깥쪽으로 흘러나가는 싱커에는 방망이를 꾹 참았고, 존을 공략하는 패스트볼과 슬라이더는 적극적으로 커트해냈다. 지난 시즌 메이저리그에 데뷔한 선수답게 타석에서 꽤 침착한 모습을 가진 놈이다.
“볼.”
볼카운트 2-2에서 던진 떨어지는 체인지업에도 방망이를 멈춘다. 멘데스는 재빨리 1루심에게 체크스윙 판정을 요구했지만 판정은 변함없이 볼.
‘쳇. 이번 공은 나름 승부구였는데.’
쉽지 않다는 느낌이 들자마자, 마지막 공이 손에서 살짝 빠졌다. 볼넷. 1사 1루.
그리고 대기 타석에 서 있던 윌린 로사리오가 성큼성큼 타석에 들어섰다. 저번 시즌부터 콜로라도 로키스의 주전 포수 자리를 유지하고 있는 선수, 윌린 로사리오. 작년에는 신인왕 투표 4위에까지 올랐고, 이번 시즌에도 풀타임을 소화하며 2년 연속 장타율 .500대와 OPS .800대를 기록한 무식하게 힘 센 녀석.
‘오늘 점수를 안 주려면 이 녀석을 잘 처리해야 되는데.’
1루를 정면으로 응시하면서 세트 포지션으로 섰다. 1루 주자 알몬테는 다리가 매우 길어서 베이스에서 제법 큰 폭으로 떨어져 있었다. 왼발을 탁탁 구르는 것이 언제든 뛰겠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경험 없는 어린 애송이라면 몰라도 지혁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을 제스쳐다. 게다가 안방에는 퀵 팝도 떡하니 앉아 있다. 지혁은 알몬테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그대로 초구를 던졌다.
“스트라이크!”
아슬아슬한 공에 이번에는 주심이 손을 들어준다. 바깥쪽에 아주 살짝 걸친 패스트볼이었다. 로사리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심에게 뭔가를 물었다. 도미니카 출신의 로사리오는 심판과 자유롭게 얘기를 나누었다.
‘어차피 저기엔 멘데스도 있어. 멘데스가 알아서 리드해 준다.’
지혁은 조금이라도 멘탈이 흔들리지 않기 위해 묵묵히 멘데스의 손가락 끝만 보았다. 멘데스는 검지 하나를 펴고 움직이지 않는다.
패스트볼.
로사리오의 힘을 구위로 이겨낼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지만 멘데스를 믿기로 했다. 어차피 체크하기 위한 경기니까.
지혁이 준비 동작에 들어가자 멘데스가 반쯤 일어섰다. 그는 로사리오의 가슴 높이 정중앙에 미트를 대고 있었다. 멘데스는 대놓고 얘기하는 것이다. 힘 대 힘으로 붙으라고.
“으럇!”
지혁은 기합까지 써 가며 있는 힘껏 던졌다. 세트 포지션에서 할 수 있는 전력을 짜내 던진 공이었다. 로사리오의 방망이가 무섭게 휘둘러져 나오는 게 슬로우 모션처럼 보였다.
따아악!
공이 쪼개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공은 까마득하게 떠올랐다. 공이 배트에 맞는 순간 고개를 확 돌려 좌측을 바라봤다. 하지만 공은 다행히 파울 라인을 넘어선 곳 관중석에 떨어졌다. 아찔했다.
‘와. 힘 봐라 힘... 골로 갈 뻔 했네.’
지혁은 속으로 혀를 내두르며 홈을 바라봤다. 멘데스는 무슨 생각으로 이런 위험한 리드를 한 것일까? 멘데스는 아주 짧은 싸인만 내고 곧장 미트를 쭉 뻗었다. 빨리 던지라는 뜻. 인터벌을 가져갈 시간도 없었다.
멘데스가 요구한 지혁의 3구는 몸 쪽에 붙는 싱커. 마지막에 실밥을 채는 순간까지도 방금 전 타구의 아찔한 공포감이 몰려왔다. 방금 전 공으로 빠른 공의 타이밍을 정확히 맞춰 놓은 로사리오가 주저하지 않고 있는 힘껏 풀 스윙을 돌렸다.
딱!
패스트볼 타이밍에 맞춰 나오던 로사리오의 배트 밑 부분에 공이 맞았다. 동시에 배트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고. 빗맞은 타구는 유격수 프로파의 글러브 앞으로 정확히 굴러갔다. 프로파의 가벼운 토스를 받은 고든이 1루로 공을 던졌다. 맞는 순간부터 병살타임을 직감한 로사리오는 이미 포기하고 천천히 뛰는 중이었다.
“오케이! 나이스 피쳐!”
6-4-3의 깔끔한 더블 플레이를 만들어내고 마운드를 내려오는 지혁은 식은땀이 흘렀다. 메이저리그에서 25홈런 이상을 기록하는 강타자의 위압이라는 것은 이렇다.
전생에 메이저리그에서 필사적으로 버티던 때가 떠올랐다. 매 타석마다, 모든 공마다 이런 공포감과 맞서야 했다. 압도적인 구위를 가지고 있지 않은 투수의 숙명이다.
“그라운드볼 유도 아주 좋았어.”
프로파가 다가와 지혁의 엉덩이를 툭 쳤다.
“너도 수비 좋았어. 고맙다.”
“고맙긴. 완전 평범한 타구였어.”
프로파는 수비 장갑과 글러브를 휙 벗어제끼고 배팅 장갑으로 갈아 끼웠다. 지혁도 자리에 털썩 앉아 글러브를 벗었다. 로사리오를 땅볼로 처리했으면서도 관중석 2층에 떨어졌던 엄청난 파울 타구가 계속해서 머리에 맴돈다. 타이밍이 조금만 늦었어도 꼼짝없이 중앙 담장을 넘어갔을 공이다.
“쫄았어?”
“어?”
“표정만 봐도 알겠네. 뭘 그렇게 쫄아? 홈런 맞으면 맞는거지.”
멘데스가 어느 새 포수 장비를 벗고 지혁의 앞에 다가왔다.
“너무 위험한 요구였어. 조금만 타이밍이 맞았어도 넘어갔을 거야.”
“타이밍이 맞을 수가 없었어. 그래서 그렇게 요구한 거야.”
“어떻게 알아?”
“초구 바깥쪽 꽉 찬 공을 보고 나서 주심이랑 싱커 얘기를 하더라고. ‘이 투수 볼 끝이 움직여요?’ 라고 물어보잖아.”
“그래서 한복판에 높은 패스트볼을 유도했다고?”
“어. 패스트볼이 아니라 싱커에 타이밍을 맞추고 있으면 정작 패스트볼이 들어왔을 때 반응이 안 맞아. 엄청 빠르거나, 엄청 늦거나. 둘 중 하나가 되니까.”
지혁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운드에 있는 투수는 알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공과 방망이가 만나는 지점은 결국 홈플레이트 위. 그곳에서 싸우고 있는 타자와 포수만이 알 수 있는 묘한 차이가 있는 것이다. 생각의 차이. 멘데스는 그것을 정확히 캐치해내는 포수였다.
“...그래. 앞으로도 부탁해. 리드만 믿고 던질테니까.”
“역시. 널 잘못 본 게 아니었어. 나만 믿으라구.”
멘데스는 웃으며 대기 타석으로 걸어나갔다. 그리고 그 이닝에 멘데스는 선취점을 얻어내는 중월 3루타를 터뜨렸다. 지금껏 지혁이 만난 모든 파트너들 중에서 이렇게까지 의지가 되는 선수는 없었다.
*
딱!
3루수로 나선 나바로가 공이 맞는 순간 달려나왔다. 글러브의 앞에서 짧게 튀어오른 공을 잡자마자 2루로, 그리고 2루수 프로파가 잡자마자 몸을 틀어 곧장 1루로. 지혁의 윈터리그 마지막 등판, 마지막 타자를 상대로도 땅볼을 유도해 낸 것이다.
“나이스 피칭!”
“땅볼 머신이야, 완전?”
더그아웃의 모든 사람들이 등판을 마치고 내려오는 지혁에게 가벼운 하이파이브를 건네고 농담 몇 마디를 내뱉었다.
‘후우. 끝났다.’
모자를 벗고 흐르는 땀을 훔쳤다.
도미니카 윈터리그, 티그레 델 리세이에 와서 오늘로 세 경기를 마무리지었다.
첫 경기에서 5이닝 1실점. 두 번째 경기, 6과 2/3이닝 동안 4피안타 2실점. 그리고 오늘 경기에서 6이닝 7피안타 무실점. 결과적으로도, 내용적으로도 실망스럽지 않은 윈터리그였다.
“수고했어. 갈수록 더 좋아지네.”
“땡큐. 하하.”
“아쉽네. 마지막 등판이라니. 내가 미국에 갈 때까지는 다시 볼 일이 없겠네?”
“아마도? 내년에 미국으로 올 거잖아? 기다리고 있을게.”
“하하하. 좋아. 그런데 난 바로 메이저리그로 가는데. 넌 그때까지 메이저리그로 올라갈 수 있겠어?”
“뭐... 해 봐야 아는 거지.”
“꼭 메이저리그에 가 있으라고. 쪽팔리게 마이너리그에서 재회할 순 없잖아?”
“여기 마이너리거가 몇 명인데 그런 소리를 해? 맞아 죽으려고? 하하하.”
세 경기 내내 그의 공을 받은 포수 멘데스의 리드는 큰 도움을 줬다. 도미니카 리그에서 뛰는 타자들의 습성을 정확히 알고 있던 멘데스는 필요한 순간 필요한 공을 적재적소에 요구했다.
싱커가 여물지 않아서 안타를 꽤 많이 맞았지만, 멘데스의 리드를 잘 따라가면 결과가 좋았다. 숱한 더블플레이 타구도 그렇게 만들어졌고.
전설적인 포수가 될 멘데스와 합을 맞춘 것은 지혁 개인적으로도 엄청난 성장의 밑거름이 되었다.
지난 18년간 프로생활을 했던 와중에 느끼지 못했던 것들을 멘데스는 짚어냈다. 지혁에게 이번 도미니카 윈터리그는 외로운 마운드에서 의지할 수 있는 파트너를 만난다는 게 얼마나 큰 행운인지 깨닫는 시간이었다.
특히 이제 막 실전에서 싱커를 던지기 시작한 지혁에게, 싱커라는 공이 가진 무브먼트와 위력을 어떤 방식으로 어느 타이밍에 사용해야 하는지를 절실하게 알려줬다.
딱!
마지막 등판을 마치고 내려온 지혁에게 팀원들은 승리를 선사했다. 프로파의 싹쓸이 2루타가 터지면서 대량 득점에 성공한 것이다. 3경기 1승. 평균자책점 1.53. 도미니카의 겨울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