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전처리, 회귀하다-17화 (18/204)

17 - 야구관.

지혁은 도미니카에서 한 달짜리 계약을 끝내고 미국으로 돌아왔다. 정신없이 야구를 하는 동안 벌써 2014년이다. 며칠 정도 휴식을 취하던 지혁에게 곧장 탬파베이 프런트 오피스로부터 호출이 들어왔다.

“반갑습니다. 나는 처음 보죠? 프런트 오피스의 마이너리그 담당 팀장, 체임 블룸이라고 합니다.”

“네. 반갑습니다. 문지혁입니다.”

탬파베이 레이스의 메이저리그 사무실에 온 것은 처음이다. 살짝 긴장한 상태로 대기하고 있었는데 아주 젊은 청년 하나가 부리부리한 눈매로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

지혁은 내심 깜짝 놀랐다. 탬파베이 레이스가 앤드류 프리드먼 단장을 위시로 아주 어린 리더들을 고용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었지만 눈앞의 블룸은 예상보다 훨씬 어려 보였기 때문이다. 이제 스물넷이 된 지혁과 비슷한 나이대로 보일 지경이었다.

“윈터리그에서 문이 던진 비디오를 좀 보느라고 늦었습니다. 미안합니다.”

“괜찮습니다. 저도 이제 막 왔으니까요.”

“앉아서 얘기할까요?”

블룸은 사무실의 상석을 비워 두고 지혁과 마주볼 수 있는 자리에 앉았다. 각설탕 두 개를 띄운 커피를 마시면서 블룸은 비디오를 본 감상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싱커는 이번에 처음 던졌다고 하는데 맞나요?”

“네. 실전에서는 처음입니다.”

“꽤 위력적이더군요. 메이저리거들을 상대로도 그라운드 볼을 많이 유도한 게 인상적이었습니다.”

“칭찬 감사합니다.”

“우리 스카우트 팀이 깜짝 놀랐어요. 알고 있나요? 본인이 기록한 윈터리그에서의 그라운드볼 비율. 아니면 FIP라던가, 피OPS?”

“어...플라이볼을 많이 준 것 같진 않은데... 저는 숫자에는 좀 약해서요.”

“하하. 대부분의 선수들이 그렇죠. 숫자를 찾아내는 건 야구를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보는 사람들이 하는 일이니까요. 우리 팀은 그 숫자에서 의미 있는 무언가를 발견하는 것을 선호합니다. 그게 현장으로 이어지게끔 하는 게 우리의 전략이에요.”

야구를 조금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들. 흔히 세이버매트리션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바로 탬파베이 레이스가 선호하는 사람들이다. 프리드먼 단장도, 실버맨 사장도, 그리고 그들의 사람인 체임 블룸도 그렇다. 블룸은 커다란 매부리코를 쓱쓱 문지르며 웃었다.

“선수들과 우리는 조금 다른 생각을 갖고 있죠. 이해합니다. 나는 우리가 그 생각의 차이를 좁혀나가는 과정을 걷고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숫자를 보고 하나 둘 앞의 미래를 예측해내면, 선수와 스탭들은 그것들을 현장에서 검증하는 겁니다. 이 과정을 통해 야구의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는 거죠.”

이후 블룸은 지혁에게는 지나치게 어려운 얘기들을 쏟아냈다. 솔직히 말하면, 블룸의 말을 절반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다.

전생 동안에도 세이버매트릭스라는 통계학적 접근이 범람하긴 했었지만 그것이 그라운드에서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 선수들은 통계대로 움직이는 존재가 아니었다. 선수들의 결과를 놓고 통계학적으로 분석하는 사람들이 있었을지언정.

지혁은 대부분의 선수들과 마찬가지로 통계는 통계일 뿐이라는 생각으로 선수 생활을 했다. 타자의 출루율이 어떻고, 투수의 구종과 구속에 따른 피출루율이 어떻고, 조정방어율이 어떻고. wOBA나 Run Value, Run Share 같은 이해하기도 어려운 얘기들을 떠드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솔직히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야구는 투수가 공을 던지고, 타자가 공을 치는 운동이다. 결과는 기록지에 남지만 그것이 만들어지는 곳은 운동장이다. 통계로는 설명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이 야구에 녹아 있다. 감정의 변화라든지, 분기점의 폭발이라든지, 기분 낸다고 던진 공이 기가 막힌 결과를 가져온다든지. 인간의 영역에서는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런 선수들의 결과물을 가지고 이상하고 어려운 해석을 내놓는 사람들은 한번이라도 마운드에 올라본 적 없는 사람들이다. 지혁은 그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내놓는 숫자에서 큰 의미를 찾기 힘들었다고나 할까.

“하하하. 괜찮아요. 나랑 미팅한 99%의 사람들이 당신 같은 표정을 지었어요. 내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했고.”

지혁의 속내를 알아챈 블룸이 유쾌하게 웃었다.

“세상은 우리를 너드라고 불러요. 다른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나는 인정해요. 우리는 너드가 맞죠. 선수들은 어렸을 때부터 야구에 목숨을 걸었고 나는 그 시간에 공부를 해서 예일 대학교를 졸업했습니다. 내가 야구장 위에 있을 때는 동네에서 거동이 힘든 뚱보 아저씨들과 함께였죠. 그러니 우리의 야구관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야구관... 다르겠죠.”

“당연합니다. 내가 프런트에 들어오고 나서 배운 게 있습니다. 야구를 어떤 방식으로 바라보느냐는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겁니다. 중요한 건 같은 곳을 향해서 간다는 거죠. 젠장, 앤드류가 말할 땐 멋있어 보였는데 내가 하려니 영. 하하하.”

어린 리더라고 은근히 깔봤다가는 호되게 당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프런트의 사람들은 항상 이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블룸은 매우 능숙하게 대화를 주도해나가고 있다. 비즈니스의 세계에서처럼.

“자. 어쨌든. 탬파베이 레이스를 위해서 일하는 나. 탬파베이 레이스의 유니폼을 입고 던지는 당신. 우리는 목표가 같아요. 맞죠? 이기는 거. 크게는 월드시리즈 우승이겠지만, 작게는 매일매일 이기는 겁니다.”

블룸은 대답을 듣지도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늘 하던 것처럼 운동장에서 모든 걸 쏟아내십시오. 우리는 숫자를 읽어내면서 돕겠습니다. 문지혁이라는 투수가 어떤 결과를 만들어내고 있는지 해석하고, 더 발전하기 위해 어떤 방식으로 변화하는 게 좋을지 매뉴얼을 작성하는 건 우리가 할 테니까요. 구단이 당신을 믿는 것처럼 당신도 구단을 믿어줬으면 좋겠군요.”

지혁은 블룸의 마지막 말이 꽤 마음에 들었다. 지혁의 실력을 믿겠다는 말. 전생에서도 한 번 들어본 적 없던 말이다. 대충 블룸의 말이 다 끝난 것 같아서 지혁은 일어나 악수를 건넸다. 블룸도 흔쾌히 일어나 손을 잡고 흔들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기회를 주신 거,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우리도 최선을 다할 겁니다. 당신이 레이스를 선택한 거,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일부러 지혁의 말을 따라 한 블룸이 찡긋 윙크를 건넸다. 웃으며 블룸의 사무실을 나오자 새삼 데이토나 컵스에서의 마지막이 떠올랐다.

딕 페스토 이 망할 자식.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그는 영업도 더럽게 못하는 새끼였다. 블룸처럼 말해주면 적개심은 안 생기잖아?

*

집으로 돌아온 지혁은 곧장 짐을 꾸렸다. 알라바마 주 몽고메리로 방을 옮겨야 한다. 얼마 있지도 않은 짐을 꾸리면서 지혁은 신을 찾았다.

“오랜만입니다.”

“클클. 도미니카에서는 일부러 나를 안 찾더니. 돌아오자마자 찾는 건 또 무슨 심산인가?”

“그냥요. 보고 싶어서?”

“여자친구도 없는 사람이 어디서 그런 멘트를 배워왔는가?”

“드라마 많이 봤어요.”

신과 농담 따먹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오직 지혁 뿐이다. 신은 완벽하게 비밀이 보장된 대화 상대가 되어주었다.

“도미니카에서 던진 경기 다 보셨죠?”

“그렇네.”

“어땠어요?”

“허허허! 내 평가가 듣고 싶은 겐가?”

“네. 솔직하게요.”

신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어째서 그가 선택한 선수들은 이렇게까지 당돌하고 또 직선적인가? 이상하게도 지금까지 신과 함께 했던 모든 선수들이 그랬다. 심지어 지혁은 전생에서는 이런 성격도 아니었다. 신조차도 이들의 마음을 알 길은 없었다.

“38살을 살고 다시 돌아온 녀석한테 어울리는 말은 아니지만, 풋내기였지.”

“하하하. 역시.”

“그럼 이제 처음으로 실전에서 던져 놓고, 얼마나 좋은 평가를 기대했는가?”

“좋은 평가를 기대한 적 없어요. 풋내기라는 말이 듣고 싶었던 거죠.”

“변태 같은 성격을 가졌구만.”

“윈터리그에서 메이저리거 몇 명을 상대하면서 느꼈어요. 공이 아직 부족하다고. 무게감도, 제구력도, 무브먼트도 생각만큼 안 나와요. 그러니까 브랜든 웹이 던지던 공 같이 안 나오더라구요.”

“당연한 게지.”

“그런데 결과는 어쨌든 좋았잖아요. 싱커 없이 원래 던지던 공만으로 승부를 봤으면 결과가 나왔을까요?”

윈터리그를 통해 지혁이 가장 절실하게 느꼈던 점을 딱 하나 꼽으라면, 싱커를 던진다는 사실이 타자들에게 혼란을 이끌어낸다는 것이었다. 싱커의 움직임이나 구위가 조금 떨어지더라도 괜찮다는 것을 일깨운 멘데스의 리드 덕분이었다.

“싱커처럼 빠르고 날카롭게 변하는 공이 있다는 자체가 시너지를 만들더라구요. 싱커를 신경쓰고 있으면 패스트볼이 평소보다 더 빠르게 느껴지고, 싱커만 신경쓰다보면 같은 궤적으로 떨어지는 체인지업에는 타이밍이 안 맞는대요. 멘데스가.”

“흐흐. 자네는 참 운이 좋은 친구야. 거기서 페르난도 멘데스를 만나다니. 그것도 팀원으로.”

“그러니까요. 혹시 선물을 주시는 거 아닌가 생각했었다니까요.”

“그럴 리가. 만약 내 의지였다면 자네 선수 생활을 더 받아냈을 걸세.”

챙길만한 짐이 워낙 없어서 30분도 채 되지 않아서 다 꾸릴 수 있었다. 신은 여전히 침대에 누워 지혁의 대화 상대를 해 주었다. 싱커 이야기, 로사리오가 타석에 섰을 때의 위압감, 멘데스의 리드와 2루 송구, 디 고든과 프로파의 내야 수비... 지혁은 쉬지 않고 얘기했다.

“원래 이렇게 말이 많은 성격은 아니었잖은가? 술에 잔뜩 취할 때 빼고는 말일세.”

“... 그러게요. 말 많이 하는 스타일은 아닌데.”

장비 가방에 글러브와 배팅 장갑을 쑤셔박은 지혁이 지퍼를 닫으며 멋쩍게 웃었다.

“이게 누구한테도 얘기할 수 없는 내용이다 보니까. 티미한테도 안 되는 얘기잖아요. 내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상대가 신님밖에 없으니까요.”

“비밀을 가진 자는 그 무게를 짊어져야 하는 법이지.”

“그렇죠.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칠 대나무 숲이 필요한데.”

“한국식 조크로군.”

“조크? 아니죠. 이건 속담? 아니, 격언인가? 어쨌든. 다른 사람들이 왜 그렇게 신님에게 매달렸는지 알 것 같다는 말이에요. 절대로 말이 새어나갈 수 없는 존재가 눈앞에 바로 있으니까.”

그 때 식탁에 올려두었던 핸드폰이 울렸다. 패트릭이었다.

“패트릭?”

“문. 짐은 다 챙겼습니까?”

“방금요. 이동만 하면 됩니다.”

“잠깐 기다려요. 이사는 며칠 뒤로 미루죠.”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아주 중요한 일. 만나서 얘기합시다.”

“플로리다로 올 겁니까?”

“이미 플로리다에요. 내가 다시 연락하죠.”

와우. 여긴 또 언제 왔담. 지혁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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