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전처리, 회귀하다-19화 (20/204)

19 - 스프링캠프!

샬럿. 지혁이 지난 시즌 데이토나 컵스에서 상대했던 스톤크랩스의 경기장이 있기도 한 이곳에서 탬파베이 레이스는 스프링캠프를 시작했다.

2014년 2월 15일. 투수조와 포수조가 서서히 모이기 시작했다. 보통 투수들은 몸을 끌어올릴 시간이 더 필요해서 야수들보다는 조금 일찍 합류한다.

지혁은 투수조 중에서도 가장 먼저 샬럿에 도착했다. 캠프에 가장 먼저 도착해서 짐을 푸는 사이 두 번째 주자가 도착했다. 놀랍게도 그는 알렉스 콥이었다.

“누구?”

“문지혁이라고 합니다. 이번 시즌에 새로 합류했습니다.”

“문? 한국인?”

“맞습니다.”

“형진이랑 같은 나라네? 잘됐다. 반가워. 난 알렉스 콥.”

콥은 짐을 풀지도 않고 지혁에게 이것저것 가르쳐 주기 시작했다. 콥은 메이저리그 선발진 한 자리를 차지했고, 작년에는 2~3선발을 유지하며 프라이스의 뒤를 든든히 받치는 선수다. 그런 선수가 마이너리거들보다 훨씬 더 먼저 캠프에 합류한 것이다. 지혁은 물었다.

“굉장히 빨리 오셨네요?”

“원래 우리 팀은 투수조 조장이 제일 먼저 모여. 제임스가 그랬었거든. 전통이라고 하기엔 역사가 좀 짧고, 약속 같은 거야.”

“아아.”

“얘기 들어 봤어?”

그런 전통 같은 걸 들은 적은 없었지만 재작년까지 탬파베이의 기둥이었던 제임스 쉴즈가 특출난 클럽하우스 리더였다는 소문은 들어본 적이 있었다.

“네. 제임스 쉴즈 얘기요.”

“위대한 사람이지. 하하. 올해는 내가 그 역할을 해야 하고. 그러니까 궁금한 거나 불편한 게 있으면 언제든 나를 찾아와. 절대 망설이지 말고.”

“고마워요.”

“우리 팀에서는 당연한 거야.”

알렉스 콥은 리더 역할에 충실한 선수였다. 탬파베이 레이스 팀원 중에서 가장 먼저 알렉스 콥과 만난 건 행운이었다. 그나마 안면이 있는 브라울리오 라라가 개인적인 일로 매우 늦게 합류하게 되면서 지혁은 외딴 섬에 던져진 한 마리 새 같은 존재가 될 뻔 했다. 콥은 지혁을 데리고 다니며 선수들을 한 명씩 붙잡고 인사를 시켰다.

“신입이야?”

“누구야?”

“이름이 뭐야?”

“한국인? 형진 리랑 같은 나라 출신이라고?”

“작년에 싱글 A였는데 스프링캠프에 합류했다고? 잘못 안 거 아니야?”

초청선수가 아닌 마이너리그 계약을 맺은 선수가 단번에 메이저리그 캠프에 합류했으니 꽤 이례적인 일이다. 수많은 선수들이 한 번씩은 지혁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 때마다 지혁은 어설프게 웃으며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수많은 팀을 떠돌았던 지혁은 팀의 분위기를 파악하는 데는 도가 큰 사람이다. 하지만 콥의 도움이 없었다면 적응하기가 결코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콥이 적응에 도움을 주는 것과는 별개로, 막상 프리드먼과 매든의 앞에서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 있다.

스프링캠프는 치열하다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경쟁의 장이라는 것.

이미 팀 내에서 입지가 탄탄한 몇몇 선수들을 제외하고는 낯선 한국인 투수를 경계하는 선수들이 훨씬 더 많았다. 특히 마이너리그에서 기회를 노리고 있는 모든 투수들은 지혁에게 짤막한 인사를 제외하면 말을 걸지조차 않는다.

“지혁아!”

“이형진. 오랜만이다.”

이틀 뒤 한국인 유격수 이형진도 캠프에 합류했다. 1990년 생으로 동갑인 두 사람은 고등학교 때 전국대회에서 숱하게 마주쳤던 사이였다. 나란히 시카고 컵스와 계약을 맺었고 미국에도 같이 넘어왔다.

하지만 이형진은 지혁보다 항상 훨씬 더 기대 받던 선수였다. 신체조건이 매우 좋고 수비력이 뛰어난 유격수였으니까. 컵스의 팜에서도 한 손 안에 꼽힐 정도로 평가받던 그는 2010년 겨울 트레이드로 탬파베이 레이스로 건너갔다.

“무릎은 괜찮냐?”

“그거 네가 할 걱정이냐? 너는 어떤데?”

이형진이 트레이드 되었던 시점은 지혁이 십자인대 파열로 수술을 받은 직후였다. 병원에 누워 있는 채로 이형진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었는데, 작년에 이형진이 똑같은 부상을 당했다. 지혁은 자신의 왼쪽 무릎을 가리키며 웃었다.

“비 오면 죽을 맛이야, 임마.”

“나도 그래. 재활하는데 죽을 뻔했다.”

“몸 관리 잘해라. 그거 오래간다.”

“니가 언제부터 나한테 조언할 짬밥이었냐, 새꺄! 하하하.”

유쾌하게 웃는 형진의 얼굴이 시큰하게 느껴졌다. 결국 저 부상의 후유증을 이겨내지 못하고 한국으로 돌아갔던 것을 떠올리니 안쓰러워졌다.

“어쨌든 다시 봐서 좋다.”

“그래. 나도 너 온다고 해서 기쁘더라.”

주먹을 툭툭 맞댄 두 사람은 오랜만에 만난 회포를 풀며 잡다한 얘기들을 나눴다. 아직 메이저리그에 올라가지는 못했지만 트리플 A 팀인 더램 불스까지 승승장구하며 올라갔었던 형진은 야수들에게도 지혁을 소개시켰다.

투수 쪽에서는 알렉스 콥이, 야수 쪽에서는 형진이 지혁의 적응을 도와주는 셈이다. 덕분에 지혁은 탬파베이 레이스라는 팀에 수월하게 녹아들기 시작했다.

*

“오랜만이야, 제군들. 따뜻한 이불 속에서 나와서 지옥으로 돌아온 소감이 어때?”

“하하하. 코치님. 벌써 몇 년째 똑같은 멘트로 시작하는 거에요?”

“20년도 넘었다, 크리스.”

메이저리그 팀 투수코치인 짐 힉키가 투수들을 모아놓고 본격적인 시작을 알린다. 한참 어린 선수들과 자유롭게 농담을 주고받는 팀 분위기가 만들어져 있다. 탬파베이가 워낙 어린 선수들을 키워 쓰는 팀이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나쁘지 않네. 유망주들이 에너지를 불어 넣고, 콥이나 프라이스 같은 선수들이 중심을 잡고. 이러니까 어린 투수들이 메이저에서 성공적으로 안착한건가?’

몸은 24살이지만 경험은 40대의 것을 갖고 있는 지혁은 팀을 관찰하는 입장이었다. 힉키 투수코치와 피칭 인스트럭터 두 사람이 편안한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만들어낸다. 상대적으로 경험이 적은 선수들이 위축되지 않도록.

“오늘부터 사흘 정도는 런닝이랑 캐치볼만 할 거야. 이후에 30미터 토스, 50미터 토스까지 차례대로 올린 다음에 불펜 투구에 들어갈거고. 수비 훈련은 오늘부터 진행한다. 야수조랑 같이 하는 수비는 일주일 뒤. 여기까지 질문?”

“없습니다!”

“좋아. 깔끔하군. 자! 지옥의 레이스를 시작해 보자고! 다들 움직여! 그리고 초청선수들이랑 스프링캠프가 처음인 사람들은 잠깐 나 좀 보지.”

한 무더기의 선수들이 운동장으로 빠져나가고 지혁과 몇몇 선수만이 남았다.

“히스, 에릭. 자네들은 베테랑이니까 내가 따로 조언할 필요는 없겠지. 우리 팀은 어린 놈들이 많아. 자네들은 모범이 되어 주길 바라네.”

“옛.”

“좋아. 마크? 매든 감독이 말하길 투심 패스트볼을 집중적으로 체크하라고 하더군. 이번 봄에 확실하게 보여주라고.”

“네.”

“그리고... 문?”

“네?”

“자넨 아직 보여준 게 없더군. 윈터리그에서는 좋았지만 딱 세 경기였고.”

힉키의 눈동자에는 의문이 가득 담겼다. 이름도 들어본 적 없던 한국인 마이너리거가 도대체 어떻게 지금 이 캠프에 있는 것인가? 당연한 의문이다.

“캠프는 한 달 하고 조금 더 진행되네.”

“그렇죠.”

“좋은 인상을 남겨주게.”

지혁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구체적인 목표가 제시된 캠프는 오히려 쉽다. 하지만 힉키의 주문처럼 추상적인 목표가 세워져 있으면 모든 부분에서 압박을 받게 된다.

구속? 구위? 제구? 아니면 야구 외적인 부분들? 그 모든 것을 합쳐서 인상을 남겨야 한다.

압도적인 인상을 남겨도 당장 메이저리그에 합류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몇 년 뒤에라도 메이저리그에 합류하려면 지금부터 기초를 쌓아야 하는 것이다.

“모든 부분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호오.”

힉키의 표정에 의문이 한층 더해졌다. 원하는 대답을 들은 것이다.

‘아무래도 내 의중을 파악한 모양이군. 이 꼬맹이는 처세술이 뛰어난 건가? 단순히 눈치가 좋은 건가?’

지혁은 살짝 고개를 숙이고는 장비를 챙겨 운동장으로 향했다. 새로운 상황, 새로운 환경. 모든 것에서 문지혁이라는 존재감을 남겨야만 하는 지옥의 스프링캠프가 이제 막 시작되었다.

*

사이 영 위너였던 데이비드 프라이스, 혜성처럼 등장한 맷 무어. 지혁보다 한참 높은 곳에 있는 두 좌완 투수들은 스프링캠프임에도 불같은 강속구를 뻥뻥 뿌려댔다. 크리스 아처의 슬라이더는 괴물처럼 떨어졌고 알렉스 콥의 체인지업은 시간을 멈춘 것처럼 느껴졌다.

“와우.”

프라이스의 불펜 피칭 마지막 공은 소름이 돋을 정도로 묵직했다. 스프링캠프라서 몸이 다 올라오지 않은 상황임에도 그랬다.

“컨디션이 영...”

지혁과는 확실히 비교되는 구위를 보여줬으면서도 만족스럽지 않은 표정으로 불펜에서 걸어나온 프라이스는 글러브로 지혁의 어깨를 툭 치며 지나갔다.

“네 차례야. 루키.”

공을 받아주는 포수도 메이저리그 팀의 호세 몰리나에서 더블 A 팀의 루크 메일리로 바뀌었다. 지혁이 마운드에 오르자 메일리의 뒤쪽에 투수 인스트럭터인 드위 로빈슨이 섰다. 그는 마운드 위에서 심호흡을 하고 있는 지혁에게 느긋이 말했다.

“여기 월드시리즈 마운드 아니야. 어깨에 힘 빼.”

“네!”

“다른 변화구는 던지지 마. 패스트볼 20개, 싱커만 10개.”

지혁은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로진백을 한 번 만졌다.

‘속 편한 소리 하고 있네. 힘을 빼라고? 방금 프라이스가 미트를 찢을 것처럼 던지고 나갔는데.’

지금부터 경쟁의 시작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지혁은 메일리의 미트를 바라보며 온 정신을 집중했다. 공 하나하나에 최선을 다해야만 한다. 모든 부분에서 존재감을 알려야 하니까. 서서히 와인드업을 하고 있는 힘껏 패스트볼을 뿌린다.

뻐엉!

지혁의 손에서 떠난 공이 메일리의 미트에 박히는 소리가 우렁차게 울려퍼진다. 지혁은 메일리 위쪽에 표시된 작은 기계에 기록된 구속을 체크했다. 91마일.

“오케이!”

메일리는 공을 던져주며 오케이를 외쳤다. 하지만 드위 로빈슨의 표정은 돌멩이를 본 것처럼 변함이 없다. 두 번째 공과 세 번째 공은 90마일을 기록했다. 프라이스가 첫 불펜 피칭으로 던진 힘 뺀 공과 같은 구속이었다. 지혁은 사실상 전력투구나 마찬가지였는데도.

공 열 개가 넘어가자 로빈슨이 그제야 입을 열었다.

“문. 힘 빼라니까?”

“예?”

“지금부터 전력으로 달리다가 시즌 중에 퍼지면 난 책임 못 져.”

“하하. 네.”

지혁은 멋쩍은 웃음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다음 공은 92마일이 찍혔다. 무력시위다. 신인은 원래 이렇게 한다. 이렇게 해야 하고.

‘한 번 더 살아서 좋을 게 뭐 따로 있나. 지금 힉키 코치랑 매든 감독이 내 공을 보고 있다는 걸 아는 게 좋은 거지.’

지혁은 단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지만, 많은 코치들이 그의 투구를 슬쩍슬쩍 살피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존재감을 알리기 위한 발악은 이미 시작된 것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