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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전처리, 회귀하다-20화 (21/204)

20 - Who is he?

스프링캠프에서 눈에 띄기 위한 발악이 조금은 효과를 발휘한 탓일까. 힉키 투수코치와 로빈슨 인스트럭터는 지혁에게 꽤 적극적으로 달라붙었다. 힉키가 가장 먼저 요구한 것은 투구폼의 미세한, 아주 미세한 변화였다.

“아니야, 문. 오른 다리를 아주 조금만 더 정면으로 뻗어 봐.”

“이 정도까지요?”

“그건 너무 갔어. 그 정도까지 가면 네 디셉션이 사라질 거야. 반 발짝만 안쪽으로.”

선수들에게 뒤늦게 들어서 안 것인데, 힉키 투수코치는 투구폼을 조절하는 데 손꼽히는 평가를 듣는 사람이란다.

팀의 과거이자 현재인 데이비드 프라이스도. 팀의 현재이자 미래인 맷 무어도 모두 힉키의 투구폼 개조를 거쳤다고 한다. 지금 마이너리그에서 성장하고 있는 선수들 대부분이 힉키의 도움을 받았다.

전생의 노하우가 있는 지혁이 힉키의 조언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이유였다.

“오케이! 딱 거기까지야. 지금의 딜리버리를 잘 기억해. 일단 쉐도우 피칭으로 폼을 잡아보자고. 그리고 지금 3루쪽 플레이트를 밟고 던지고 있지? 그것도 두 발 정도 1루 쪽으로 옮겨보는 걸 추천해. 우타자를 상대로 싱커 제구가 훨씬 수월해질 거야.”

“공을 던져봐도 될까요?”

“물론이지. 오늘 오후에 한 번 해 보자고. 그때까지는 자넨 쉐도우 피칭에 집중해 봐. 별로 달라지는 건 없고 디딤발 놓는 곳만 옮기는 거니까 금방 적응할 거야. 그리고 오른쪽 어깨가 떨어지지 않게 주의하고.”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이게 내 일이지. 잘 던지는 건 네 일이고.”

*

“투수들은 분명히 돌아가면서 기회를 받을 겁니다. 우린 특히 에릭 베다드에게 기회를 많이 줄 생각이에요. 우린 그에게 단순히 마운드에서뿐 아니라 클럽하우스에서도 좋은 리더가 되어줄 수 있다고 기대합니다.”

“고마워요, 조.”

“그런데 이거 너무 대답이 뻔한 질문 아니었나?”

“아시잖아요. 이런 뻔한 질문으로 먹고 살아야하는 거.”

“헛헛헛! 그렇지. 내가 알면서도 실수를 했네. 그럼 다음?”

매든은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인터뷰를 하는 중이었다. 스프링캠프가 시작한지 2주 정도가 흘렀고, 탬파베이 지역의 기자들과 마이너리그 전문 기자들이 플로리다를 투어하고 있다.

또 한 해의 야구시즌이 시작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신호다. 기자들이 몰려들기 시작하는 것. 그 중에는 한국에서 온 기자도 한 명 섞여 있었다.

“제 차롄가요?”

“오! 조. 나와 이름이 같은 사람 중에서 가장 매력적인 사람이었지? 다시 만나서 반갑네.”

“하하, 감독님도. 같은 농담을 몇 번이나 하시는 거예요. 조는 제 이름이 아니라 성이라니까요.”

“무슨 상관인가? 하하.”

“참, 감독님도.”

베이스볼코리아의 얼마 없는 메이저리그 특파원인 조예은은 펜 뚜껑을 열며 생글거렸다. 조 매든 감독은 언제나 그렇듯 위트가 넘치는 사람이다.

“먼저, 이형진 선수의 몸 상태는 어떤가요?”

“그는 힘든 수술을 했죠. 재활도 아주 길었고. 하지만 모든 과정을 성실하고 열정적으로 견뎌냈습니다. 이제 다시 그라운드에서 뛸 준비가 되었다고 판단하고 있어요. 하지만 워낙 끔찍한 부상이었기 때문에 중요한 건 적응하는 겁니다. 육체적으로든 심리적으로든.”

“많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부분인데요. 이형진 선수의 장점은 역동적인 플레이에 있었습니다. 지금은 빠른 발과 민첩함을 바탕으로 한 주루, 수비 능력에 의심을 받고 있는 상황인데요. 올 시즌 이형진 선수의 계획은 어떨까요?”

“형진은 정말 열심히 하고 있어요. 예전의 좋았던 몸 상태로 돌아가기 위해서요. 운동능력이 떨어진다는 건 그에게 큰 위기처럼 느껴지겠지만, 불운은 언제나 행운과 같이 오는 법이죠. 힘든 상황을 잘 넘기고 좋았던 모습으로 돌아간다면 언제든 메이저리그의 문에 도전할 수 있을 겁니다.”

“구체적인 계획은요?”

“알잖아요, 뷰티풀 조. 한 시간 뒤의 일도 알 수 없는 게 이 세계라는 거.”

매든은 능구렁이처럼 빠져나간다. 예은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쓸 말이 하나도 없어요, 감독님.”

“그걸 가지고 기사를 쓰는 게 기자의 임무잖나.”

“하아... 그럼 질문 하나만 더 할게요.”

“얼마든지.”

“한국인 투수가 한 명 있던데. 문지혁 선수. 어째서 메이저리그 스프링캠프에 문지혁 선수가 있는 거죠? 단순히 이형진 선수랑 친구라서 그런 건 아닐테고.”

“오. 두 사람이 원래 친구였나?”

“네. 한국에서부터요. 나이도 같고 해서 어렸을 때부터 자주 마주쳤던 사이래요.”

“그렇군. 어쨌든 질문에 대해서 답을 해주자면...”

뿔테 안경을 한 번 치켜 올린 매든은 잠깐 고민했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굳혔다.

“앤드류 프리드먼이 뭔가 발견한 투수입니다. 윈터리그에서 꽤 좋았고. 나도 계약하고 이번 캠프에서 던지는 걸 처음 봤는데 의외였어요. 기대했던 것보다 더 좋은 공을 던지더군요. 데이토나 컵스가 이 선수를 방출한 이유를 잘 모르겠을 정도로요. 뭐, 그가 당장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할 수는 없겠지만 포텐셜이 충분한 선수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에게 경험을 쌓아주자는 게 프리드먼의 생각입니다. 나도 마찬가지고.”

“프리드먼 단장이 꽂혔다구요?”

예은만 아니라 자리에 모인 모든 기자들이 웅성거렸다.

“그래서 그게 누구죠?”

“이름이 뭐라고 했지?”

“한국인?”

매든은 껄껄 웃었다.

“오늘 질문은 여기까지 받도록 하지. 내일 또 봅시다.”

*

“문. 준비해. 다음이야.”

스프링캠프 기간 중 3월부터는 시범경기가 열린다. 시범경기가 시작하기 직전까지는 자체 청백전을 가지며 컨디션을 서서히 올리는 팀들이 있다.

하지만 탬파베이 레이스의 투수 인스트럭터들은 그 기간 동안 연습 경기를 하는 것보다는 타자를 세워 놓고 던지는 라이브 피칭을 더 선호했다. 지금 마운드에서 던지고 있는 투수들은 실전에 들어가기 직전 마지막으로 점검하는 중이다.

뻐어엉!

마운드에서 마지막 공을 던진 맷 무어가 왼쪽 어깨를 빙빙 돌리며 내려온다. 97마일이 찍히는 빠른 공이다. 좌완이 저 구위로 97마일까지 나오니까 팀에서 장기 계약을 안긴 것이다.

‘부럽다. 썅. 피지컬은 내가 더 좋은데 대체 어떻게 저런 공을 던지는 거지?’

배팅케이지 뒤에서 무어의 공을 지켜본 지혁은 내심 혀를 내두르며 마운드로 올라갔다. 포수 뒤쪽에서 본 공은 어마어마했다. 죽일 듯이 달려드는 97마일짜리 패스트볼. 아마 꿈에도 던지지 못할 공이다. 지혁은 어깨가 빠질 정도로 던져도 95마일을 넘겨보지 못했었는데.

지혁이 마운드를 잠시 고르는 동안 포수도 루크 메일리로 바뀌었다.

“준비됐어?”

메일리의 신호를 받은 지혁은 글러브를 들어 준비되었음을 알렸다. 그러자 대기하고 있던 유넬 에스코바가 헬멧을 쓰고 타석에 들어섰다. 포수 뒤쪽 그물망을 넘어 줄줄이 서 있는 코치들이 눈에 들어왔다.

‘방금 전에 무어의 빠르고 힘있는 공을 봤으니까... 좀 비교되겠네. 그렇다면 난 아예 제구에만 집중해야겠다.’

“던져 봐, 루키!”

에스코바가 방망이로 홈플레이트를 툭툭 두드리고는 지혁을 향해 외쳤다. 지혁은 쓴웃음을 흘렸다.

‘루키라고? 이 새끼. 어린 노무 새끼.’

에스코바는 타석에 바짝 붙는 스타일은 아니다. 그렇다면 공략은 당연히 바깥쪽이다. 지혁은 힉키가 잡아준 딜리버리에 집중하면서 초구를 바깥쪽에 집어넣었다. 꽉 찬 바깥쪽 패스트볼이 플레이트 위를 날카롭게 스쳐 들어갔다.

“스트라이크!”

팔짱을 끼고 선 힉키가 크게 외친다. 초구의 제구는 지혁 스스로도 깜짝 놀랄 정도로 완벽했다. 정확하게 공 반 개 정도가 존에 걸친 공. 던진 사람이 기분이 좋아질 정도의 공이다.

메일리는 방금 공이 들어갔던 그 자리에 정확하게 다시 미트를 댔고, 2구도 비슷한 코스로 들어갔다. 에스코바는 과감하게 배트를 휘둘렀지만 방망이 끝에 밀려 맞은 타구는 힘없이 파울라인 바깥쪽으로 굴렀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와우, 이거 뭐야?”

“왜 그래?”

“힉키. 방금 공 스피드가 얼마 정도 나온 것 같아?”

“글쎄? 느낌상으로는 한 93마일 정도 나온 것 같은데.”

“하하. 나도 그런 줄 알았어. 이거 봐봐.”

드위 로빈슨이 건넨 스피드건에는 예상 외의 구속이 쓰여 있었다. 힉키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89마일이라고?”

“놀라지 마. 첫 번째 공은 88마일이었어.”

지혁이 던진 3구가 에스코바의 몸쪽을 찔렀다. 하지만 한 개 정도 빠지는 볼. 에스코바는 방망이를 움찔거렸지만 스윙을 멈추었다.

“볼 끝이 엄청 좋은데? 이 친구 원래 이랬어?”

“아니야. 이 정도는 아니었어.”

“딜리버리가 바뀐 게 먹힌건가?”

“디딤발이 한 발자국 정도 앞으로 더 나오는 것 같아. 공을 놓는 지점도 더 앞으로 끌고 나오는 것 같고.”

메일리는 검지와 새끼를 폈다. 싱커 싸인이다. 지혁은 초구에 집어넣었던 코스를 떠올렸다. 그 코스 그대로 가다가 바깥쪽으로 휘어져 떨어지는 싱커. 그 공이면 무조건 내야로 굴려보낼 수 있다.

‘딜리버리. 릴리즈포인트. 바깥쪽. 제구에만 집중하자.’

공을 던지기 전에 빠르게 체크해야 할 것들을 떠올린 뒤, 다리를 들어 중심을 이동시킨다. 평소와 똑같은 팔 스윙이 이어지고 마지막 순간에 팔꿈치를 비틀어냈다. 공이 빠져나가는 느낌이 괜찮았다.

바깥쪽 패스트볼처럼 들어오던 공이 마지막에 가라앉기 시작하고, 에스코바의 방망이에 빗맞는 소리가 나며 2루수 쪽으로 힘없이 굴러간다.

“나이스 볼! 원아웃!”

메일리가 크게 소리질렀고, 에스코바는 툴툴대며 배터 박스를 벗어났다. 힉키가 팔짱을 풀며 에스코바에게 물었다.

“유넬. 저 친구 공 어때?”

“쉽지 않은데요. 마지막 공 뭐였죠? 투심인가?”

“싱커였어.”

“그 공 예사롭지 않네요.”

“패스트볼 구속은 어떤 것 같아?”

“끝까지 살아서 들어오는 게 구속도 꽤 나왔을 것 같은데. 93? 94?”

“놀라지 마. 88이었어.”

“왓?”

에스코바는 헬멧을 벗으며 인상을 팍 찌푸렸다.

“쟤 도대체 누구야?”

*

스프링캠프, 그레이프프루트 리그 시범경기 세 번째 경기. 탬파베이 레이스와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매치업.

탬파베이의 선발투수 맷 무어가 1.2이닝을, 두 번째 투수 리펜하우저가 1.1이닝을, 세 번째 투수 히스 벨이 1이닝을 던지고 난 5회초. 탬파베이의 네 번쨰 투수로 지혁이 마운드에 올랐다.

상대는 필라델피아의 2번 앤드러스 블랑코, 3번 도미닉 브라운, 4번 마이켈 프랑코. 방망이에 맞추는 능력보다 한 방이 있는 세 선수를 상대하는 데 싱커보다 좋은 구질은 존재할 수 없었다.

초구부터 과감히 방망이를 돌렸던 블랑코는 몸쪽 싱커에 방망이가 부러지며 3루수 땅볼로 물러났다.

패스트볼 하나를 지켜본 브라운은 2구째 싱커에 큰 스윙을 돌렸지만 배트의 아래쪽에 맞으며 2루 베이스 위에 서 있던 유격수 앞으로 향한 땅볼.

풀카운트까지 공을 골라낸 프랑코도 결국 마지막 싱커를 당겼지만 힘없는 3루수 땅볼로 물러났다.

“잘했어.”

더그아웃으로 걸어 내려오는 지혁에게 힉키가 주먹을 들어 보였다. 지혁은 웃으며 힉키와 주먹을 마주쳤다.

“좋은 인상을 남기고 있군. 지금까지는.”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겁니다.”

같은 시간 필라델피아의 더그아웃, 그리고 기자석에 모인 사람들은 눈살을 찌푸리며 같은 말을 내뱉고 있었다.

“So, who is 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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