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 몽고메리 비스킷츠.
“짐을 챙기게. 앨러바마로 가야 하네.”
“결국 제 차례군요.”
매든 감독이 지혁을 감독실로 불렀을 때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시범경기에서 많은 경기에 나서지는 못했다. 4경기 동안 4.1이닝을 던졌고, 뉴욕 양키스의 로마인에게 뜬금없는 투런 홈런을 한 방 허용하면서 2실점했다.
이제 몽고메리 비스킷츠로 돌아갈 때다. 메이저리그 스프링캠프는 좋았지만, 아직 지혁의 자리는 그곳이 아니다.
“이해하게. 우린...”
“무슨 말씀을 하셔도 다 이유가 되겠죠. 인터뷰 하신대로 경험 차원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흠. 자네가 올해 몇 살이었지? 스물넷?”
“그렇습니다.”
“화나지 않는가?”
“전 작년까지만 해도 하이 싱글 A에서 던지던 투수입니다. 제 에이전트와 단장님의 인연 덕분에 메이저리그 캠프에 합류한 것뿐이죠. 이제 제자리로 가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난 가끔 자네가 좀 의심스러워. 늙은이 같아. 말하는 것도, 행동하는 것도, 생각하는 것도.”
“하, 하하. 제가 애늙은이 같다는 소리는 많이 듣습니다.”
매든은 지혁의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기스가 잔뜩 난 뿔테 안경 너머에 있는 매든의 눈동자는 무언가를 꿰뚫어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럴 리야 없지만, 마치 회귀했다는 것을 알아챈 것처럼.
“이번 시즌 안에 꼭 다시 뵈었으면 좋겠습니다.”
“기대하고 있겠네.”
“그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매든의 눈매를 피해 감독실에서 나오니 뒤늦게 씁쓸한 기분이 밀려들었다.
다시 기회를 얻은 이후 메이저리그에서 뛰던 몸 상태까지 단기간에 끌어올렸다. 신으로부터 브랜든 웹의 싱커를 배운 후로는 투구의 다양성이 강화되었다. 힉키의 투구폼 교정은 보다 날카로운 제구를 구사할 수 있게 해 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메이저리그 수준과는 거리가 조금 있었다.
‘내가 타고난 재능이 조금만 더 있었어도 확연히 달랐을지도 모르지.’
약간의 재능이 더해진 것만으로도 데이토나 시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애초에 가지지 못한 것을 원망할 수는 없다. 오히려 그 덕분에 새로운 기회를 얻었으니 더 좋은 일일지도 모르고.
“하아. 최대한 빨리 다시 오자. 메이저리그로.”
지혁은 앞만 보기로 했다. 첫 번째 목표는 메이저리그 진입이다. 앨러바마에서 머무는 기간을 최소한으로 줄이는 일. 샬럿에서 짐을 챙겨 앨러바마로 향하면서 지혁은 마음을 다잡았다.
*
“오랜만이네, 문.”
리버워크 스타디움 속 감독실은 소박했다. 감독실에 앉아있는 브래디 윌리엄스가 스프링캠프에서 넘어온 자료들을 훑어보며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힉키가 투구폼을 만져 줬다면서?”
“그렇습니다.”
“적응은 다 했나?”
“네. 그냥 딜리버리를 살짝 바꾼 수준입니다.”
“괜찮다니 다행이군. 리히텐슈타인 코치와 이야기해서 폼을 안정시킬 수 있도록 하게. 흠... 자네에게 기대가 크네. 나도 그렇고, 프런트에서도 그렇고. 나에게까지 따로 언급이 올 정도라면 굉장히 주목받고 있다는 뜻이야.”
지혁은 앤드류 프리드먼의 얼굴을 떠올렸다. 탬파베이 레이스라는 팀을 대표하는 사람에게 나쁘지 않은 인상을 준 것은 이럴 때 큰 도움이 된다.
“자넨 세 번째 선발로 로테이션을 돌 거네. 한 시즌 동안 잘 해 보자고.”
“알겠습니다.”
“좋아. 내일부터 훈련에 합류하게. 개막까지 2주 정도 남았으니 잘 적응하게.”
윌리엄스 감독과 악수를 나누고 감독실을 나서자 핸드폰이 울렸다. 패트릭이다.
“여보세요?”
“문. 몽고메리에 도착했습니까?”
“방금요. 감독이랑 미팅했어요.”
“좋군요. 그나저나 내가 빚을 하나 갚으려고 하는데 말이죠.”
“빚이요?”
“쳇. 역시 기억 못하고 있군요?”
“뭘 말입니까?”
“최성수가 어디로 갈지 내기했던 거 말입니다.”
“아아. 그거.”
최성수는 FA 시장에서 텍사스 레인저스와 7년 간 1억 3천만 달러의 초대형 잭팟을 터뜨렸다. 패트릭과의 내기는, 조금 비겁하지만 미래를 알고 있던 지혁의 승리였다.
“원하는 거 하나씩 들어주기로 했는데, 원하는 거 말고 내 조건을 들어보는 게 어떻습니까?”
“그게 뭡니까?”
“몽고메리에 집을 하나 마련했어요. 어떻습니까? 1년 정도 머물기에는 딱 알맞을텐데.”
다시금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패트릭은 정말로 훌륭한 에이전트였다. 그의 고객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을 정확히 알고 편의를 제공해준다는 점에서.
“안 그래도 숙소를 하나 구할 생각이었는데...”
“그럴 줄 알고 준비했습니다. 어때요. 이걸로 퉁치죠?”
“흠. 내가 원하는 건 따로 있었는데요.”
“뭔데요? 집보다 더 가치 있는 겁니까?”
“큰 건 아니고, 그냥 당신 과거 얘기나 좀 들어봤으면 해서요.”
수화기 너머 패트릭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 당신은 정말 쓸데없는 일에 관심이 많네요. 그냥 숙소로 퉁치시죠.”
“내기 조건은 원하는 거 들어주기 아니었습니까?”
“그러면 숙소 계약 해지할까요?”
“... 아뇨. 그냥 숙소로 하죠. 집 구하는 게 보통 일이 아니긴 하니까요.”
“좋아요. 문자로 주소 찍어줄게요. 도착하면 나한테 다시 전화 한 통 해요.”
“왜요?”
“그냥요. 내가 좀 바쁘기도 하고. 이따 다시 전화합시다.”
패트릭은 그 말만 남기고 끊었다. 곧장 핸드폰이 부르르 떨었다. 패트릭이 구해둔 숙소는 리버워크 스타디움에서 10분도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하여간 진짜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사람이라니까.’
지혁은 쓴웃음을 지으며 가방을 들쳐맸다. 몽고메리의 한적한 거리를 걸으며 이 낯선 풍경을 하나씩 눈에 담는다. 빨리 적응해야겠다는 생각과, 빨리 이곳을 탈출해서 플로리다 탬파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
지혁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입을 떡 벌렸다. 곧장 핸드폰을 열어 전화를 걸었다.
“패트릭? 이거... 혼자 살기엔 지나치게 좋은 집 아닙니까?”
“도착했어요? 마음에 듭니까?”
“들다마다요. 혼자 사는 마이너리거한테는 과분한데요. 방은 왜 두 개나 있는 겁니까?”
“일부러 힘 좀 줬습니다. 부탁할 게 있어서.”
“부탁할 건 또 뭔데요?”
패트릭은 잠깐 뜸을 들이고는 말했다.
“페르난도 멘데스. 번호 알죠? 그 친구 번호 좀 알려줘요.”
“아하. 그게 뭐 부탁이라고.”
“난 받고는 못 사는 성격이라서. 집이 아~주 마음에 든다면 멘데스한테 문자라도 하나 넣어요. 패트릭 에이버리라는 사람 한 번 만나보라고.”
“일도 아니죠. 그렇게 할게요.”
“고맙습니다. 스프링캠프 동안 별 일 없었습니까?”
지혁은 널따란 거실에 가방을 대충 던져두고는 집을 한 바퀴 돌아다니며 대답했다.
“힉키 코치랑 투구폼을 좀 바꿨어요. 확실히 제구는 좀 잘 잡히던데요.”
“흠. 내가 본 당신은 투수치고는 좀 둔감하니까. 별다른 위화감이나 이질감이 있으면 다시 원래의 폼으로 돌아가요. 약간의 통증이라도 생긴다면, 구단에 알리는 것보다 나한테 먼저 알려야 합니다. 무조건.”
“당연하죠. 구단에 알렸다간 무슨 난리가 날지 모르는데.”
“알고 있으니 다행이네요.”
“거 말 좀 예쁘게 하지. 어쨌든 고마워요.”
“고맙긴. 내기에서 졌으니까 당연한 겁니다. 게다가 페르난도 멘데스 번호도 얻었고. 적당한 기브 앤 테이크라고 해 둡시다.”
“참 나. 너무 빡빡하게 살아도 병납니다.”
“난 그럴 일 없어요. 당분간 도미니카를 오갈 거예요. 문제 생기면 연락하고, 문제없이 연락 안하면 당신이 최고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할게요. 그러니 연락하지 마세요. 그럼 이만 끊습니다.”
지혁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침대에 몸을 던졌다.
“츤데레도 저런 츤데레는 또 본 적이 없네. 어휴.”
*
4월.
드디어 개막의 불꽃에 불이 붙었다. 목이 빠져라 야구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야구장에 모여들고 선수들의 플레이에 환호를 보낸다. 드넓은 외야의 푸른 잔디가 주는 여유로움을 만끽하면서, 야구장 위에 흐르는 정적과 긴장을 살피면서 하얀 공의 자취를 따라가는 한 시즌이 또 시작된 것이다.
메이저리그 개막에 이어 마이너리그도 연이어 닻을 올렸다. 몽고메리 비스킷츠가 속한 더블 A 남부 리그(Southern League)에도 주심의 호쾌한 선언이 울려 퍼졌다.
“플레이 볼!”
몽고메리의 개막 시리즈 상대는 남부 리그 중에서도 북부 디비전에 속한 시카고 화이트삭스 산하 더블 A 팀, 버밍햄 배런스.
양 팀 모두 타자들의 컨디션이 투수들보다 빨리 올라온 상태였다. 덕분에 개막 시리즈에 마운드에 오른 양 팀의 투수들은 호되게 얻어맞았다. 두 팀은 개막전에서 8대12, 2차전에서는 9대8이라는 스코어를 만들었다.
“최대한 많은 이닝을 끌어줘야 하네.”
“알고 있습니다, 감독님.”
“좋아.”
마운드에 오르기 직전에 윌리엄스 감독의 마지막 주문을 가슴에 새겼다. 개막전 선발투수 빅터 마테오는 3.1이닝밖에 던지지 못했다. 2차전 선발투수였던 딜런 플로로는 더했다. 1.1이닝만에 6실점했다. 나머지 이닝들을 전부 불펜이 부담한 것이다.
아무리 시즌 초반이라고 해도 개막하자마자 연속으로 불펜에게 맡길 수는 없다. 고로 오늘의 미션은 확실하게 정해져 있었다.
‘최소 6이닝. 무조건 그 이상 버틴다.’
시간이 되었다. 야수들이 자기 위치로 달려나간다. 지혁도 서서히 마운드로 걸음을 옮겼다. 리버워크 스타디움 중앙에 작게 솟아 있는 언덕이 아직까지는 조금 낯설었다. 좌우를 둘러보며 경기장을 찾은 사람들의 모습을 살핀다.
확실히 마이너리그 경기장이다 보니 느껴지는 긴장감 자체가 달랐다. 승리를 향한 강한 열망보다도 야구 그 자체를 즐기기 위한 사람들이 더 많아 보인다. 저들은 아직 모른다. 이 구장에 앞으로 메이저리그를 호령할 미래의 스타들이 있다는 것을.
연습투구 몇 개를 던져보니 어깨가 빨리 돌아간다. 팔이 경쾌하게 휘둘러진다. 스파이크도 흙에 적당히 박힌다. 몸 상태가 아주 좋았다. 겨우내 도미니카에서, 그리고 스프링캠프에서 만들어 온 몸이 빨리 던지고 싶어서 안달이 난 것 같았다.
버밍햄의 선두 타자가 방망이를 고쳐 잡으며 서서히 타석에 들어섰다. 그리고 심판이 지혁을 바라보며 손을 쭉 뻗었다. 경기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