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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전처리, 회귀하다-22화 (23/204)

22 - 선발 출격!

버밍햄의 선두 타자는 이전 두 경기에서 연속 홈런을 쏘아올린 2루수 마이카 존슨. 더그아웃에서 지켜보면서도 타격감이 절정에 이르러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살벌하게 휘둘러대던 녀석이다. 타석에 들어선 존슨의 날카롭게 쏘아보는 시선에 큰 엿을 먹이고 싶다. 지혁은 메일리의 초구 패스트볼 싸인에 고개를 흔들었다.

‘초구부터 싱커로.’

하지만 방망이에 공을 맞춰 주고 싶지는 않았다. 타격감이 좋은 녀석들은 간혹 이해할 수 없는 안타를 만들어내곤 하니까. 살살 꼬시는 공으로 스윙을 유도할 것이다. 일단 방망이에 공이 맞고 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를 일. 선두타자에게 출루를 허용하는 일처럼 기분 나쁜 일은 없다. 지혁은 일부러 각이 큰 싱커를 선택했다.

한복판으로 향하던 공이 구속은 조금 떨어지지만, 꽤 많이 떨어지는 공. 존슨은 예상대로 초구부터 큰 스윙을 휘둘렀다. 지혁의 예상대로 공은 방망이 한참 밑을 지나갔다.

“스윙. 스트라이크 원!”

큰 스윙을 이기지 못하고 휘청거린 존슨이 살벌한 기세를 쏟아냈다. 하지만 그 지나친 승부욕 때문에, 오히려 지혁은 존슨을 잡아낼 수 있다고 확신했다. 베테랑과 애송이의 차이는 냉정함을 유지하는 것에서 온다.

“볼!”

2구를 가슴팍에 가깝게 붙였다. 스윙을 하려고 달려나오던 존슨의 손에 맞을 뻔한 아슬아슬한 공. 그 공이 존슨에게 충분한 공포감을 줬을 것이다. 바깥쪽을 파고 들어가는 패스트볼에 반응이 늦은 것이 존슨의 공포감을 증명했다. 그리고 4구째. 3구째와 똑같은 코스에서 바깥쪽으로 떨어지는 고속 싱커에 존슨이 따라오지 못했다.

“스윙! 배터 아웃!”

존슨이 씩씩대는 것이 마운드에서도 느껴질 정도다. 메일리가 공을 야수들에게 한 번씩 돌리는 사이 지혁은 버밍햄의 더그아웃을 슬쩍 바라봤다. 지난 두 경기에서 경험한 그들의 타격감을 과신하고 있는 것인지 분위기가 나쁘지는 않다. 그리고 지혁은 저 과신을 작살내 줄 생각이었다.

버밍햄의 2번 타자 하이메 페드로사도 두 경기에서 안타 5개를 쳐낸 선수. 과감한 초구 패스트볼이 몸쪽에 파고들었다. 아슬아슬하게 스트라이크 콜을 받았다. 레그킥을 하며 타이밍을 잡아본 페드로사가 고개를 끄덕거린다.

‘칠만한 것 같냐? 그럼 휘둘러 봐, 새끼야.’

페드로사의 자신만만한 표정에 오히려 코웃음이 났다. 작년까지 싱글 A에서 뛰던 이름 없는 한국인 투수라서 무시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2구는 원바운드 되는 커브. 따라나오던 방망이가 멈췄지만 상관없다. 메일리도, 지혁도 다분히 타이밍을 빼앗으려는 의도에서 던진 공이니까. 3구와 4구는 공격적으로 존에 집어넣었지만 페드로사가 커트해냈다.

2스트라이크 1볼의 카운트. 명백한 싱커 타이밍이다.

딱!

스트라이크 존 정중앙에서 떨어지기 시작하는 싱커가 페드로사의 발목 높이까지 향했다. 방망이 끝에 맞은 공이 땅에 크게 튀어오르며 지혁의 머리를 넘겼다.

‘빠지나?’

순간적으로 의문이 들었지만 유격수 헤이거가 발 빠르게 베이스 위를 커버하고 있다. 달려오는 속도에 맞춰 세련된 글러브질까지 선보인 헤이거가 처리하며 2아웃을 만들어낸다.

경쾌한 움직임에 관중석에서 휘파람 소리가 울린다. 헤이거가 글러브를 들며 씩 웃었다. 지혁도 가볍게 박수를 보내 줬다.

확실히 탬파베이 레이스라는 구단이 추구하는 방향은 수비를 우선시하는 것이다. 타자들을 키워내는 데는 큰 재미를 보지 못하고 있지만, 좋은 투수들과 훌륭한 수비로 실점을 최소화하는 것이 레이스의 방침이다. 메이저리그 레벨부터 하위 리그의 선수들까지 그 기조를 명확히 하고 있었다.

방금 전 헤이거의 수비에서도, 그리고 3번 타자 트레이스 톰슨의 타구를 처리한 2루수 라이언 브렛의 수비에서도 그것이 증명되었다. 중견수 앞으로 빠져나갈 법한 타구를 백핸드로 건져낸 브렛은 스텝을 밟지 않고 빠른 송구로 연결했다.

내야 키스톤 콤비의 좋은 수비 두 개로 1회가 끝났다. 첫 등판의 1회를 가볍게 넘긴 지혁은 더그아웃 앞에서 헤이거와 브렛을 기다려 등을 두드려 주었다.

“땡큐! 든든해.”

“이 정도는 껌이지.”

헤이거는 수비에 자신감을 드러냈다. 브렛은 시크한 녀석이라 그냥 고개를 끄덕거리고 지나갔지만 그 역시 내심 수비에서는 밀리지 않는다고 생각할 것이다. 메일리는 프로텍터를 벗으며 가벼운 하이파이브를 건넸다.

“문. 저 녀석들 치고 싶어서 안달이 났어. 내야로 굴려주면 될 것 같아.”

“그래. 살살 꼬셔보자고.”

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출발이 상큼한 것이 예감이 아주 좋은 날이다.

*

1회말 공격에서 몽고메리는 선두타자 테일러 모터의 2루타와 아르고의 진루타, 카메론 싸이처의 희생플라이로 한 점을 선취했다. 그리고 터져 나온 4번 타자 리치 쉐퍼의 큼지막한 솔로 홈런으로 추가점도 얻어냈다. 버밍햄과 마찬가지로 몽고메리의 타격감도 살아 있었던 것이다.

지혁은 버밍햄을 막아냈고, 스노드그래스는 막아내지 못했다. 이 흐름은 2회에도 이어졌다.

틱!

지혁을 상대로 풀카운트까지 끈질기게 버텨내던 버밍햄의 4번, 마레로의 타구도 결국에는 완전히 빗맞았다. 3루수 리치 쉐퍼가 달려들며 맨손 캐치로 멋들어진 송구까지 보여주며 타자를 잡아낸다. 싱커와 패스트볼의 조합으로 타이밍을 묘하게 흔드는 피칭이 제대로 먹혀 들어가고 있다.

이어진 좌타자 두 명, 리치몬드와 얼리를 상대로는 과감하게 몸쪽 승부로 맞섰다. 지혁의 폼은 특히 좌타자에게 더 까다롭다는 것을 이용하기 위함이다. 게다가 좌투수의 싱커는 좌타자들에게는 더욱 큰 효과를 발휘한다. 패스트볼처럼 날아오던 공이 갑자기 품 안으로 달려드는 것처럼 느껴졌을 터.

두 타자 모두 배트 안쪽에 간신히 맞히는 데에만 성공했다. 힘없는 1루수 직선타와 투수 땅볼. 깔끔한 삼자범퇴가 이어졌다.

2회말, 버밍햄의 스노드그래스가 완전히 무너졌다. 지명타자로 나선 커트 카살리와 라이언 브렛이 연속 안타를 터뜨렸고, 8번 헤이거는 볼넷으로 출루하며 무사 만루 상황. 9번 조이 리카드가 2타점 적시타를 때렸고 1번 테일러 모터가 쓰리런 홈런을 날리며 일찌감치 대못을 박아버렸다.

스코어 7대0. 2이닝도 채우지 못하고 7실점을 한 스노드그래스는 고개를 숙이고 마운드에서 물러났다.

“오늘은 운이 아주 좋아.”

3회초 마운드에 오른 지혁은 담담히 되뇌었다. 선발 투수로 나서서 일곱 점의 리드를 안는 상황은 쉽게 접할 수 없다. 심리적으로 이보다 더 편한 상황은 찾기 힘들다.

하지만 그 방심이 애매한 공을 던지게 만들기도 한다. 찍어누르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제구가 잘 된 것도 아닌 공들. 타고난 구위가 압도적이지 않는 한 언제 맞아나가도 이상하지 않은 공들 말이다.

“집중해라, 지혁아. 집중해야 돼.”

끊임없이 중얼거리며 글러브를 머리 위로 끌어올렸다. 새로운 팀에서의 첫 경기. 7대0이라는 스코어. 그런 조건이 투구에 영향을 끼치게 해서는 안 된다. 꾸준하고 강력한 피칭을 선보여야만 메이저리그에 진입할 수 있다. 지혁은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스트라이크!”

우타자 제레미 파렐의 바깥쪽 끝을 정확하게 찌르는 패스트볼. 오늘 경기에서 가장 완벽한 제구가 된 공이다.

“저 친구 오늘 긁히는데?”

“긴장이 조금 풀릴 줄 알았는데, 오히려 텐션을 끌어올렸네요.”

“속에 뱀 몇 마리는 넉넉히 앉아있는 친구야. 능구렁이라니까, 완전.”

리버워크 스타디움에 얼마 없는 VIP 룸에서 경기를 지켜보던 프리드먼이 쓴웃음을 지었다. 아직 한 경기 뿐이지만 앞으로도 이런 피칭을 계속한다면 패트릭과의 약속을 떠나서 일찍 메이저에 올려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 될 것 같다. 옆에서 매부리코를 만지작거리던 체임 블룸은 시계를 들여다보며 물었다.

“다음 미팅 시간까지 얼마 안 남았습니다. 언제 탬파로 가실 겁니까?”

“한 타순 돌고 나서 어떻게 던지는지. 거기까지 보고 일어나자고.”

“그렇게 하죠.”

프리드먼은 진한 커피를 들이부었다. 패트릭 에이버리가 현장에 복귀하며 데려온 투수는 최소한 3회까지는, 넝쿨째 굴러들어온 복덩이가 될 확률이 커 보였다.

“문지혁...”

그 순간 9번 타자 케닌 워커가 스트라이크 낫아웃으로 물러나며 3이닝 연속 삼자범퇴로 버밍햄의 공격이 끝나버렸다. 부담없는 하위 타선을 상대로도 방심하지 않는 투구를 마친 새로운 투수. 그가 덤덤한 표정으로 마운드를 내려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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