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 선발 출격!(2).
“다시 상위 타순이야. 변화를 좀 줄까? 슬라이더나 체인지업?”
메일리가 슬쩍 물었다. 그는 지난 시즌 로우 싱글 A에서 단번에 승격된 선수다. 괜찮은 수비력을 가진 포수는 모든 팀이 키우고 싶어 하는 법. 덕분에 꽤 파격적인 승진에 성공한 어린 포수.
나쁜 말로 다시 말하자면 지금 더블 A 로스터에서 가장 위기감을 느끼고 있는 선수다. 더블 A의 주전 포수로는 이미 커트 카살리가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에 몇 번 안 되는 기회에서 존재감을 증명해야 하는 선수이기도 하고. 그래서인지 메일리는 꽤 적극적이었다.
“아니. 아직까지는 싱커가 좋으니까. 몇 번 맞아나가면 모를까 지금은 좀 그래. 안타 몇 개 맞으면 슬라이더 던지자.”
“흠, 그래. 그 정도면 되겠네.”
메일리는 코치들 앞에서 일부러 의견을 내세웠지만, 지혁이 거절하자 약간 시무룩해진 모습이다. 하지만 싱커가 제대로 먹히고 있는 상황에서 굳이 변화를 선택할 필요까지는 없었다. 4회초에도 지혁의 싱커는 위력을 톡톡히 발휘했다.
“Shit!”
마이카 존슨이 초구부터 과감하게 방망이를 냈다. 하지만 꿈틀거리는 싱커에 다시 한 번 먹힌 타구가 나왔다. 큰 소리로 욕을 내뱉으며 1루를 향해 전력으로 달렸지만 브렛의 송구가 훨씬 더 빠르다.
“나이스 볼!”
“렛츠 고 비스킷츠!”
관중석에서도 서서히 지혁의 투구에 감탄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지혁은 흐르는 땀을 한 번 닦으며 심호흡했다.
‘흔들리지 말자. 침착하게 하는 거야. 침착하게.’
펑!
페드로사에게 던진 바깥쪽에서 더 바깥쪽으로 떨어지는 싱커. 자세가 무너지며 따라나왔지만 방망이는 공중을 헛돈다.
초구 스트라이크를 잡은 이후에도 다시 싱커. 제구가 살짝 어긋나서 한복판에 가까이 들어갔지만 이미 페드로사의 리듬은 완전히 흐트러져 있었다. 빗맞은 파울.
“바로 가자!”
관중들 중 누군가가 외쳤다. 그의 말대로 지혁은 인터벌을 거의 두지 않고 곧장 세 번째 공을 던졌다. 메일리는 반쯤 일어난 상태로 거의 페드로사의 눈높이에 미트를 대고 있다. 스트라이크 존보다도 더 높은 쪽을 노린 패스트볼.
경기 내내 낮은 공을 던지려고 노력한 모습과 낮게 빠져나가는 싱커 때문에 높은 코스는 신경도 쓰지 않고 있던 페드로사는 본능을 이겨내지 못했다. 눈높이로 오는 공에 본능적으로 방망이가 따라나온 것이다.
제법 우스꽝스러운 스윙으로 삼진을 당한 페드로사가 방망이를 땅에 크게 내리치며 더그아웃으로 돌아간다. 마운드에서 본 그의 뒷모습에서 분노가 읽혔다.
‘하하. 화내라 화 내. 그래야 농락하는 재미가 좀 있지.’
메일리의 리드가 좋았다. 허를 찌르는 선택이었다. 아마 이번 경기에서 다시는 높은 공을 던지지 않을 테지만, 이제 버밍햄 타자들이 생각해야 할 변수가 하나 더 늘은 셈이다. 지혁과 메일리는 톰슨을 상대로 바깥쪽 승부를 이어갔다.
“볼!”
“스트라이크!”
“볼!”
“볼!”
“돌았어요!”
메일리가 재빨리 일어나 1루심에게 체크 스윙 판정 여부를 물었다. 하지만 1루심은 냉정하게 두 팔을 넓게 벌렸다. 잠깐 고개를 돌려 1루심을 바라봤던 지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방금 전 스윙은 마운드에서는 무조건 돌아간 것처럼 보였었다.
4회초, 2아웃. 주자 없는 상태에서 3번 타자 톰슨을 상대로 볼 카운트가 몰렸다.
“이 경기에서 처음이군.”
“뭐가요?”
“볼 카운트가 몰린 것 말야. 풀카운트는 두 번 있었지만.”
“오... 그런가요?”
프리드먼은 자리를 떠나기 직전 마지막 타자를 상대하는 지혁을 바라봤다. 열두 타자를 상대하는 동안 처음으로 카운트 싸움에서 졌다는 건 많은 것을 의미하는 지표다. 그만큼 공격적으로 타자를 압박했다는 말이니까.
프리드먼은 지혁이 무슨 생각으로 마운드에서 던지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그리고 볼카운트가 몰린 지금, 스트라이크를 잡아야만 하는 순간에 어떤 공을 던질지도 의문스러웠다.
지혁은 메일리의 싸인을 두 번 거절했다. 패스트볼과 슬라이더 싸인이었다. 던져야 할 공은 싱커다. 싱커의 구위로 찍어누르는 장면이 필요했다. 지금까지 적극적으로 덤벼 왔던 버밍햄의 선수들에게 똑똑히 알려줘야 할 시점이니까.
여기서 빠지는 공으로 도망친다면 앞으로 나올 타자들은 하나같이 긴 승부를 유도할 것이다. 긴 이닝을 소화해야 하는 임무를 맡은 지혁에겐 피하고 싶은 상황이 온다.
“으랴쌰!”
존 정가운데에 미트를 대고 있는 메일리를 향해 기합 소리까지 내 가며 공을 던졌다. 어깨에 힘이 조금 들어가서 제구가 흔들렸지만, 워낙 타겟이 한가운데였던지라 존을 벗어나지는 않았다. 강하고 빠른 싱커가 날아가면서 움틀거리는 것이 지혁의 눈에도 똑똑히 보였다.
따악!
배팅 카운트에 있던 톰슨은 한가운데로 오는 공을 지켜보고 있지 않았다. 힘 대 힘으로 붙는다면 자신 있다는 생각도 있었을 것이다. 빠른 싱커에 타이밍을 잡고 있었는지 스윙 타이밍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공이 방망이에 맞는 순간, 이 타구는 그라운드로 구르고 말았다.
유격수 헤이거의 커버 범위 안에 들어가는 원바운드 공. 빠르게 움직인 헤이거는 정면에서 공을 건져올린 뒤 날렵한 스텝으로 이닝을 마무리했다. 지혁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하하하. 힘으로 붙어서 그라운드 볼을 만들어냈군.”
“오늘 4이닝 퍼펙트로군요.”
“체임. 저 친구 끝나고 미팅해 봐. 무슨 생각으로 던지고 있는지 알면 좋겠어.”
“네. 그러죠.”
4회초가 끝난 공수교대 시점 프리드먼은 리버워크 스타디움을 떠났다. 세인트 피터스버그로 떠나는 짧은 비행 동안에도 그는 지혁의 피칭을 떠올렸다.
몇 년쯤 전에 될성부른 떡잎을 천재적으로 알아냈던, 그리고 협상 테이블에 앉아 선수의 포텐셜을 어필하던 에이전트 패트릭 에이버리의 선수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지혁의 피칭 내용 자체에 특별한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일까?
프리드먼은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
버밍햄의 타자들이 확실히 전략을 바꾼 것이 느껴졌다. 4이닝을 퍼펙트로 막아낸 지혁은 5회에 결국 볼넷 한 개를 내주었다. 바깥쪽으로 흘러나가는 싱커를 의식하고 들어온 타자들이 이를 악물고 공을 참아냈다. 경기 초반에 공격적인 상대에게 비슷한 공들을 던져줘서 맞춰 잡는 전략을 더 이상 고수하기 힘들어진 셈이다.
‘후우.’
원 아웃에 1루에 나간 리치몬드는 신경을 거슬리는 주자는 아니었다. 워낙에 덩치가 크고 발이 느린 선수다. 세트 포지션에 서서 메일리의 싸인만을 응시하던 지혁이 발을 살짝 들어 빠르게 내딛었다.
마지막 순간 공이 살짝 빠지며 원바운드로 들어갔다. 초구부터 원바운드 공이 들어오자 메일리가 타임을 요청하고 마운드로 뛰어 올라왔다.
“주자 신경 안 써도 돼. 쟤는 죽어도 도루 못 하니까.”
“나도 알아. 그냥 손에서 빠진 거야.”
“그리고 쟤네들 서서히 공 보고 있는 거 알지?”
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공격적으로 존에 찔러 넣어. 오늘 구위가 좋아서 먹히는 공이 많이 나올 거야.”
“지금 내 싱커 어때?”
“아주 좋아. 낮게 구사만 되면 무조건 땅볼이야.”
“알겠어. 미트를 존 아래쪽 경계선에 대 줘.”
메일리는 지혁의 어깨를 툭툭 쳐주고는 돌아갔다. 로진백을 한 번 만지고 야수들을 한번씩 훑어봤다. 지혁은 검지와 새끼를 동시에 들어 보였다.
“더블 플레이 가자!”
헤이거가 지혁의 뜻을 이해하고 내야수들에게 긴장감을 불러 일으켰다. 글러브를 팡팡 치는 폼이 집중력을 잃지는 않은 것 같아서 퍽 마음에 든다. 점수 차이가 많이 나는 경기에서 야수들이 집중하지 못하는 경우가 왕왕 있는데, 방금 헤이거가 한 번 일깨워 준 것이 좋은 환기가 되었을 것이다.
지혁은 오늘 공을 하나도 잡지 못한 외야수들 쪽도 한 번 응시하고는 다시 마운드에서 자리를 잡았다. 메일리가 일어서서 프로텍터를 툭툭 만지며 수비수들에게 싸인을 보냈다.
‘마이클 얼리... 장타는 거의 없고. 밀어치기보다는 당겨치는 스타일.’
경기 전 비디오 자료를 봤던 내용을 기억해 본다. 얼리는 확실히 배트를 한 뼘 정도 짧게 쥐고 있다. 메일리의 싱커 싸인을 보고 단번에 고개를 끄덕인다.
원 아웃에 주자 1루. 장타 능력이 부족한 얼리에게 맞아봤자 점수는 주지 않을 것이다. 지혁은 자신감 있게 중앙만을 보고 공을 뿌렸다.
“스트라이크!”
싱커가 스트라이크 존 낮은 곳에 박혔다. 가운데를 향하는 공이었지만 방망이를 내지 않은 걸 보니 이제부터는 완벽히 투구수를 늘릴 작정인 모양이다.
‘사양할 거 없지.’
“스트라이크!”
3구도 스트라이크 존을 통과했다. 몸쪽에서 살짝 꺾이며 존으로 들어오는 공에도 얼리는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다. 노골적으로 바깥쪽 흘러나가는 싱커를 노리고 있었던 듯하다. 카운트를 낭비하지 않고 스트라이크 두 개를 던진 것은 결과적으로 효과적인 선택이 되었다.
‘이젠 치려고 하겠지.’
따로 견제 싸인도 없었고, 리드라고 할 수 있는 정도도 아니었지만 1루에 견제구를 한 번 던져 본다. 1루수 싸이처가 가볍게 캐치볼을 하는 듯 공을 되돌려준다. 험악한 인상의 리치몬드가 뜬금없이 왜 견제냐며 인상을 썼지만 지혁은 본 체도 않았다. 타자의 타이밍을 뺏기 위해서는 삼십 번도 더 던질 수 있다.
공을 매만지던 지혁은 글러브 속에서 그립을 잡았다. 일부러 지금까지 던지던 싱커 그립보다 손가락을 조금 더 벌려 잡았다.
그리고 던진 4구. 얼리가 지금까지 원하고 있던 코스로 싱커를 던졌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싱커와는 조금 다르게. 속도를 줄이고 낙폭을 보다 크게 만든 공.
딱!
“세컨!”
억지로 끌어당긴 타구는 한 번 바운드되며 3루수 쉐퍼에게로 향했다. 지혁의 고개가 공을 따라 돌아갔다. 2루에서 브렛이 유연한 턴을 보여주며 1루로 던졌고, 싸이처의 글러브에 공이 박히는 순간 지혁은 박수를 치며 마운드에서 내려왔다. 모든 것이 생각대로 되었다.
“나이스 피쳐!”
“나이스!”
야수들이 신나게 달려오며 하이파이브를 한다. 유일하게 내보낸 주자를 단숨에 지워버리면서 이들도 확신했다. 오늘 경기는 대승, 완파다.
*
5이닝까지 안타 하나도 맞지 않고 경기를 풀어나가자 스멀스멀 노히트 노런에 대한 의식이 피어올랐다. 지혁도 살짝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5이닝 노히트는 전생을 포함해서도 처음 던져 본 기록이었다.
6회에도 마운드에 오른 지혁은 틈나는 대로 숨을 골랐지만, 생각이라는 게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었다.
딱!
버밍햄의 8번 타자 미겔 곤잘레스가 친 타구가 시프트를 걸었던 브렛의 옆을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우익수 앞 안타. 오늘 경기에서 처음으로 외야에 있던 야수가 공을 잡게 되었다. 관중들도 노히트 행진을 이어가고 있던 기록이 깨진 게 아쉬운지 탄식을 쏟아냈다.
“쳇.”
지혁은 일부러 땅을 발로 몇 번 굴렀다. 스파이크에 박혀 있던 흙이 툭툭 튀어나간다. 기록이라는 건 그렇다. 의식하면 안 된다. 6회초, 1아웃을 잡고 난 이후 안타를 맞으며 결국 노히트노런도 깨졌다.
벤치의 감독과 코치들도, 내심 노히트를 기대하던 야수들도 마운드 위의 새로운 팀 메이트를 은근히 걱정했다. 잘 던지다가도 한 순간부터 무너지는 선수들이 숱하게 많다.
하지만 마운드 위에 선 지혁은 담담하게 투구를 이어나갔다. 애초에 기대하지 않았던 기록에 연연하는 건 미련한 짓이다. 결코 어린 선수가 아닌 지혁이다.
지혁의 싱커는 2구만에 케닌 워커의 방망이를 부러뜨렸다. 브렛의 정면으로 향한 타구. 5회에 이어 또 다시 병살타가 만들어졌다.
“도대체 컵스는 저 녀석을 왜 방출한 거야?”
“그러게요. 엄청 노련하네요. 멘탈도 강하고...”
“FA로 이런 투수를 잡았다니. 기대 이상이군.”
브래디 윌리엄스 감독은 더그아웃에서 환하게 웃었다. VIP 룸의 체임 블룸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인터넷으로 경기를 지켜보던 패트릭 에이버리도 그랬고, 관중석 한 켠에서 맥주를 마시며 경기를 보고 있는 신도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