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전처리, 회귀하다-24화 (25/204)

24 - 꼭 맞는 곳.

- 몽고메리 비스킷츠, 러버 매치에서 대승.

- MILB 칼럼니스트 다니엘 샌드버그.

몽고메리 비스킷츠가 버밍햄 배런스와의 개막 시리즈 러버 매치에서 11대1의 대승을 거두며 산뜻한 출발을 시작했다. 이 날 몽고메리의 선발 투수로 나선 한국인 투수 문지혁은 지난 두 경기에서 20득점을 뽑아냈던 버밍햄 배런스의 타자를 상대로 7.1이닝 2피안타 무실점의 완벽한 피칭을 선보였다.

... (중략) ...

지난 시즌까지 시카고 컵스 산하 하이 싱글 A 팀인 데이토나 컵스에서 뛰던 문지혁은 이번 시즌 몽고메리와 마이너리그 계약을 맺은 선수다. 지난 시즌 데이토나 컵스에서의 기록은 6승 8패, 평균자책점 4.93이었다. 단순히 마이너리그 뎁스를 채우기 위한 영입이었던 것으로 여겨졌으나 메이저리그 스프링캠프에 깜짝 초대되며 궁금증을 자아냈던 선수이기도 하다.

조 매든 탬파베이 레이스 감독은 스프링캠프 도중 인터뷰에서 문지혁을 가리켜 “앤드류 프리드먼이 가능성을 발견한 투수가 있다.”는 언급을 하기도 했다. 메이저리그 스프링캠프 시범경기에서 4.1이닝 2실점을 한 뒤 몽고메리 비스킷츠에 합류한 문지혁은 훌륭한 투구를 보이며 프리드먼의 기대치에 부응하는 모습을 보였다.

문지혁은 4.1이닝 동안 퍼펙트 피칭을 선보였고, 5.1이닝 동안 노히트를 기록했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그의 그라운드볼 유도 능력인데, 총 22개의 아웃카운트를 잡아내는 동안 외야 플라이는 단 하나에 불과했다. 21개의 아웃카운트 중 삼진 4개를 제외한 17개가 모두 내야에서 만들어졌다. 그의 투구수 102개 중 절반에 해당하는 56개의 공이 싱커였으며, 이 싱커가 많은 땅볼을 양산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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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튿날 몽고메리 지역지에는 마운드 위에서 공을 뿌리고 있는 지혁의 얼굴이 실렸다. 마이너리그 홈페이지 구석 한 곳에도 지혁의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이너리그를 담당하는 여러 기자들이 ‘아주 인상적인(very impressive)’ 데뷔전을 치렀다는 표현을 썼다. 태블릿 PC를 슥슥 올려보며 기사들을 체크한 지혁은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기분 좋은가?”

“당연하죠. 어떻게 안 좋을 수 있겠어요?”

“여기는 세인트 피터스버그가 아니야. 앨러바마 몽고메리지.”

“단계를 밟아나가는 거라고 생각해야죠. 전생에서는 이 때 팀도 못 구하고 개인 훈련하고 있었어요. 그걸 생각하면 이건 엄청난 출발이죠.”

“허허허.”

신은 뭐가 그리 재밌는지 연신 웃었다.

“왜 그렇게 웃으세요?”

“흐흐. 그냥 자네 성장이 기대되어 그런다고 해 두지.”

“그건 자신 있어요. 갈수록 좋아지고 있는 걸 저도 느끼고 있으니까.”

지혁이 자신 있는 모습으로 가슴을 탕탕 쳤다. 그 모습을 본 신은 또 다시 웃었다. 신의 표정이 뭔가 평소와는 다른 것 같았지만, 샌드버그의 기사를 정신없이 다시 읽는 지혁은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

버밍햄과의 개막 시리즈가 끝난 후, 몽고메리 선수단은 펜서콜라 지역으로 이동했다. 그들의 다음 상대는 신시내티 레즈 산하 더블 A 팀인 펜서콜라 블루 워후스. 지혁은 4연전 마지막 경기에 등판이 예정되어 있다.

신시내티의 마이너리그 팜 수준은 메이저리그 30개 구단 중에서도 최하위권에 위치했다. 펜서콜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펜서콜라로 향하는 덜컹거리는 버스 안에서 구단에서 나눠준 상대 팀 자료들을 들추어 봐도 아는 얼굴이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기껏해야 도날드 러츠와 투수인 마이클 로렌젠 정도만이 이름을 한 번 들어본 정도다. 나머지 선수들 중 주의를 기울여야 할 선수들도 몇 없었다.

시리즈 1차전에서 몽고메리는 홈 개막전을 치르는 펜서콜라의 기세에 밀려 한 경기를 내줬다. 로렌젠이 등판해 100마일까지 나오는 광속구로 8이닝을 막아낸 덕분이었다. 그러나 로렌젠을 받쳐 줄 다른 투수들이 부실하다. 2차전과 3차전에는 몽고메리의 타자들이 응집력을 발휘했다.

앞선 세 경기에서 두 팀의 전력 차이는 명확히 드러났다. 몽고메리는 모든 면에서 펜서콜라보다 한 수 위였다. 지혁이 유의해야 할 것은 뜬금없는 큰 것 한 방. Raw power라고 불리는 타고난 힘 하나만큼은 대단한 선수들이 타선 곳곳에 자리잡고 있다.

“유격수!”

홈플레이트 근처에서 날카롭게 가라앉는 공에 펜서콜라의 8번 스티브 셀스키가 힘껏 휘둘렀다. 하지만 방망이 끝에 맞은 공은 잔뜩 힘이 빠진 채 지혁의 옆을 스친다. 헤이거가 경쾌하게 앞으로 뛰어들며 공을 건져내서 1루로.

타선이 한 바퀴 돌았는데도 펜서콜라의 타자들이 싱커에 전혀 타이밍을 맞추지 못했다. 스윙이 큰 타자들은 싱커로 그라운드볼을 유도하는 지혁에게는 딱 좋은 먹잇감이다.

“두 경기 연속 무실점이라.”

브래디 윌리엄스 감독이 해바라기 씨를 씹으며 낮게 중얼거렸다. 리히텐슈타인 투수코치가 옆에서 거들었다.

“스타트가 나쁘지 않네요, 저 친구.”

“나쁘지 않다고? 그게 무슨 소리야? 12이닝 무실점으로 시작하고 있는데. 나쁘지 않은 게 아니라 엄청나게 좋은 게지.”

“좋다는 평가를 내리기엔 이르지요. 아직 두 경기밖에 안 했잖습니까.”

“또 모르지? 지금의 반만큼만 해 줘도 대만족 아닌가? 이번 시즌 우리 로테이션 중에 제일 좋은 성적을 거둘지도 모르는 일이야.”

“싱글 A에서 올라온 선수치고는 좋다는 건 부인할 수 없지만... 감독님이 얼마 지켜보지도 않고 호평을 내리는 건 오랜만에 보네요.”

윌리엄스는 가만히 고개를 주억거리며 대답했다.

“나도 성급해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어. 하지만 쟤는 좀 달라. 마운드에 섰을 때 주는 느낌이... 아니지. 사람 자체가 그래. 좀 다른 느낌이야.”

“저도 어렴풋이 느끼고는 있습니다. 특별한 뭔가가 언뜻언뜻 보여요.”

“그래. 그걸 말로 표현을 못 하겠단 말이지. 윈터미팅 때 만났을 때부터 느낌이 이상했어. 그래서 자꾸 객관적으로 못 보는 것 같기도 하고.”

윌리엄스는 더그아웃으로 내려오며 선수들과 하이파이브를 하는 지혁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저 투수를. 아니, 저 사람을.

*

몽고메리는 6회초 공격에서 괜찮은 성과를 내고 있었다. 8번타자로 나선 제프 맘이 10구까지 가는 승부 끝에 볼넷으로 출루했고, 9번 아르고도 7구 승부 끝에 내야안타로 살아나갔다. 펜서콜라는 흔들리는 투수를 불펜으로 바꾸는 중이다. 그 때 카살리가 지혁에게 다가왔다.

“문. 6회에는 슬라이더를 던져 보지 않겠어?”

“슬라이더라고?”

“응. 네 슬라이더 아주 못 써먹을 수준은 아니잖아.”

카살리는 유니폼 속의 땀을 수건으로 슥슥 닦아내며 말을 이어나갔다.

“지금까지 패스트볼이랑 싱커만 계속 던졌어. 이제 슬슬 노리고 들어올 거야. 파워가 워낙 좋은 놈들이라서 눈 먼 스윙 하나에 제대로 맞기라도 하면 꼼짝없이 넘어갈걸.”

“하긴, 변화구를 아예 안 던지긴 했지.”

“오늘 커브 한 개랑 체인지업 다섯 개 던진 게 다니까. 저 쪽 타자들은 슬라이더는 생각도 못하고 있을걸?”

“그럴까? 슬라이더는 좀 어정쩡하긴 한데.”

“괜찮아. 첫 타자한테 결정구로 한 번 쓰고, 그 다음부터는 보여주기만 해도 될 거야.”

카살리의 말에는 큰 자신감이 어려 있었다. 그래서 지혁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솔직히 싱커를 배운 이후로는 슬라이더나 체인지업을 키울 생각도 하지 못했다. 싱커에 적응하고 싱커를 숙달하는 게 당면한 최우선 과제였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싱커에 초점을 맞춰서 투구를 할 예정이다.

하지만 뭐, 보여주기 용으로 몇 개 정도 던지는 건 나쁘지 않다. 지혁은 옆에 놓여 있던 공 하나를 쥐어들고 슬라이더 그립을 잡아봤다. 어설픈 공이긴 하지만 메이저리그에서도 꽤 던졌던 공이기도 하다. 구종 가치는 엄청 낮았었지만.

“써드 피치라.”

패스트볼과 싱커의 조합은 지금까지는 분명히 위력적이었다. 하지만 상대가 지혁을 분석하기 시작하면 이야기는 달라질 터.

더블 A를 벗어나 더 높은 리그로 향하게 된다면? 메이저리그 마운드에서는?

분명히 써드 피치의 필요성이 갈수록 증가할 것이다. 더블 A에서 싱커와 패스트볼을 최대한 성장시키면서, 동시에 타자의 타이밍을 빼앗을 수 있는 공 하나 정도도 연마해 둘 필요가 있다.

도미니카에서 윈터리그를 시작한 순간부터 뒷전으로 밀어 놨던 슬라이더를 던져야겠다고 결심한 순간.

경기장에 빗방울이 하나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테일러 모터가 타석에서 공을 볼 여유도 없었다. 한두 방울 떨어지는 줄 알았던 비가 순식간에 장대비로 변했다. 대기 중이던 진행 요원들이 황급히 달려나와 그라운드 보호막을 펼친다.

“갑자기 웬 소나기람.”

지혁은 더그아웃 난간에 기대 순식간에 쏟아지는 비를 감상했다.

쏴아아.

빗방울이 야구장에 내려앉는 소리가 갈수록 진해졌다. 아무 생각도 않고 가만히 빗소리를 듣고 있자니 모처럼 마음이 편안해졌다.

“문. 오늘 피칭은 여기까지야.”

비 때문에 경기가 중단된지 벌써 20분이 넘어섰다. 리히텐슈타인 코치가 다가와 지혁의 어깨를 한 번 두드려주었다. 어깨가 꽤 오래 식었으니 당연하다. 굳이 무리해야 할 필요도 없으니까. 슬라이더는 다음 경기로 미뤄두기로 했다.

지혁이 유니폼을 갈아입고 어깨에 아이싱을 하던 도중, 심판이 소나기를 맞으며 더그아웃으로 다가왔다. 그는 윌리엄스 감독에게 무어라 설명하더니 반대편 펜서콜라의 더그아웃으로 향했다. 그 쪽에서도 몇 마디를 하고는 홈플레이트로 걸어 나오며 손을 들어 경기 종료 시그널을 보냈다.

“뭐야? 끝이야?”

“그렇대.”

“집에 가자!”

더그아웃이 부산스러워졌다. 각자 자신의 짐을 챙기느라 여념이 없다. 그 와중에 지혁만이 알아챘다. 5이닝 완봉승인 셈이다. 9이닝을 다 던진 것은 아니지만, 명백한 완봉이다. 기록지에 SHO가 적힐 것이다.

고등학생 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선발로 등판해서 경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무실점으로 책임졌다는 의미. 찝찝하긴 했지만 기분이 좋은 건 사실이다. 웃음이 새어나왔다. 아무도 이렇게 경기가 끝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을 테니 기념구를 챙길 수도 없지만 그런 건 아무 상관없었다.

“흐흐흐.”

“문! 뭘 얼쩡거리고 있어? 빨리 챙겨서 나와. 스윗 홈으로 가자고.”

비에 잔뜩 맞은 헤이거가 지혁의 엉덩이를 툭하고 쳤다. 그는 지혁을 스쳐 지나가다가 고개를 휙 돌리고는 끔찍한 윙크를 보냈다.

“완봉승 축하해, 친구.”

“고맙다. 그리고 다시는 윙크하지 마.”

“왜?”

“남자한테 윙크 받는 게 어떤 기분인지 알아? 한 번 볼래?”

“으웩!”

지혁도 윙크로 되받아쳤다. 헤이거는 토할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이 웃겨서 지혁은 소리내어 웃고 말았다.

몽고메리 비스킷츠는 지혁이 완전히 다른 생을 살기에 아주 적합한 구단이었다. 방출당한 마이너리거가 아니라, 완봉승을 거두며 웃을 수 있는 마이너리거가 되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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