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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전처리, 회귀하다-26화 (27/204)

26 - 개자식.

팡! 팡!

몽고메리의 선수들이 굳은 표정으로 캐치볼을 하고 있다. 지혁은 외야의 워닝 트랙을 따라서 묵묵히 달렸다. 달리면서 동료 선수들의 분위기를 살핀다. 항상 싱글거리던 녀석들도 오늘은 표정이 굳어 있었다.

4연패가 주는 패배감. 어제 경기에서 확인한 베이베어스 마운드의 강력함. 이런 것들이 선수들을 억누르고 있다.

‘애들 상태가 영 좋지 않아.’

내심 걱정이 피어오른다. 어제까지의 타격감을 놓고 보면 많은 득점 지원을 바랄 순 없다. 첫 번째 등판 경기와는 완전히 다르게 흘러갈 것이다. 최소한 2이닝 만에 7점이나 되는 리드를 안고 시작할 수는 없을 터.

걱정이 쌓이니 불펜에서 연습투구를 몇 구 던지는데도 힘이 들어갔다.

“문! 평소처럼 던져. 부담 갖지 말고.”

오늘 지혁과 호흡을 맞출 포수 커트 카살리가 공을 되돌려주며 말했다. 힘이 들어가다 보니 공이 가운데로 몰리고 있다. 지혁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선발로 나선 두 경기 동안 좋았던 투구폼이 흐트러지고 있다. 손에 로진을 잔뜩 묻히며 마음을 가다듬는다.

‘난 구위로 먹고 사는 투수가 아니니까. 제구가 삐끗하면 결과를 장담할 수 없어.’

고개를 한 번 잔뜩 흔들고 어깨도 툭툭 털어내 본다. 지혁은 잠시 눈을 감고 전생의 투구를 떠올렸다.

패전처리로 주로 뛰었던 그 때도 그랬다. 경기에 나선 선수들 대부분이 이미 포기한 상태에서 마운드에 올랐었다. 경험에서 배워야 한다. 이미 그라운드에 패배감이 깔려 있는 상태에서 마운드에 올라 잔뜩 사기가 오른 상대 타자들과 맞서야 했던 경험에서.

“자, 패스트볼! 여기다 던져 봐!”

카살리가 좌타자의 몸쪽에 미트를 댔다. 존에 정확하게 걸치는 위치. 심호흡을 하고 완벽한 공을 상상해 본다. 그리고 어깨에 힘을 빼고 가벼운 동작으로 공을 뿌렸다. 실밥을 때리는 순간 안정감이 느껴졌다. 공이 정확하게 미트 속으로 빨려들었다.

“오케이! 나이스 볼!”

*

모바일 베이베어스의 홈 경기장인 행크 아론 스타디움에 관중들이 서서히 입장하기 시작한다. 때맞춰 홈 팀 베이베어스가 타격 훈련을 시작했다. 지혁은 더그아웃 난간에 기대어 방망이를 휘두르는 베이베어스 선수들을 응시했다. 구단에서 준 자료를 머릿속으로 떠올리며 실제 선수들의 스윙을 비교하는 중이다.

‘데이빗 페랄타. 저 놈이 제일 위험하네. 하긴 전생에서도 꽤 성공한 메이저리거니까...’

‘뭐야? 제이크 램도 있었어? 쟤 똥파워는 진짜 장난 아닌데.’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가 가장 큰 기대를 걸고 있는 두 야수가 모두 베이베어스에 있다. 그 중 제이크 램은 부상으로 결장하다가 오늘부터 시즌을 출발한다. 하필이면 지혁이 등판하는 날에.

훗날 메이저리그에서 40홈런을 기록할 정도로 파워 하나는 타고난 타자라서, 하나라도 실투가 들어갔다간 결과를 장담할 수 없다. 램은 배팅볼을 담장 저 멀리 뻥뻥 쳐대며 무력 시위를 하고 있다.

지혁은 자기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철저하게 제구된 공으로만 승부하는 게 좋아보였다.

그렇게 가만히 타격 훈련을 지켜보던 지혁에게 한 명이 구부정하게 다가왔다. 베이베어스의 유니폼을 입고 있는 사람이어서, 지혁은 자기를 찾아온 사람인지도 몰랐다. 그가 와서 낮게 갈라진 목소리로 말을 걸었을 때에야 알아볼 수 있었다.

“여기서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미스터 카슨.”

루 카슨. 윈터미팅에서 만났던 투수코치였다. 누런 이가 드러난 모습은 여전했다. 그가 입을 열자 담배 껌 냄새가 훅 끼쳐 왔다.

“싱커는 좀 좋아졌나?”

“경기에서 확인하시죠.”

한 팀의 투수코치쯤 되는 사람이다. 지혁이 지난 두 경기 쾌조의 스타트를 보였다는 것을 모르고 있을 리가 없었다. 지혁은 일부러 자신 있다는 듯 대답했다.

“브랜든을 지도했던 나를 거절하고 몽고메리로 갔었지. 어느 정도 좋아졌는지 한 번 유심히 보겠어. 흐흐. 자네가 후회하지 않을지 모르겠군.”

“후회는 안 합니다. 이 팀에서 충분히 만족하고 있거든요.”

“그래? 내려갈 팀은 내려가는 법인데. 아직 잘 모르나 보군. 내려가고 있는데도 그렇게 자신만만한 걸 보니.”

“뭐라구요?”

카슨이 한층 날카로워진 목소리로 지혁을 도발했다.

“오늘 우리 팀 선발이 누구인지 아나?”

“마이클 리라고 하던데요.”

“그래. 마이클도 싱커볼러지. 한 번 지켜보라고. 어떻게 던지는지 말이야. 싱커를 어떻게 쓰는 게 맞는 건지 자네에게 보여줄 거야. 자넨 이제 막 싱커를 던지기 시작한 초짜니까. 배운다고 생각하라구. 나를 깠으니 한 번 제대로 당해 봐야지. 클클.”

카슨은 일부러 들으라는 듯이 기분 나쁜 웃음소리를 남긴 채 돌아갔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하. 저 새끼 뭐야, 씨발.”

경기 전에 상대 투수를 흔들기 위한 명백한 도발인데, 이렇게 수준 떨어지는 방법으로, 직접적으로 도발하는 사람은 처음 봤다. 상대 코치가 와서 선발투수에게 헛소리를 하고 간다? 지혁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주 오랜 삶을 살았지만 그라운드 위에서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일이다.

“문.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참 나. 내가 살다살다 어이가 없어서.”

방금 카슨이 와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갔는지 이야기해주자 동료들의 표정도 지혁처럼 변했다. 어이가 없어서 말문이 막힌 표정들이다.

“야. 카슨인지 나발인지가 우리 투수를 흔들려고 했나본데. 제대로 조져놓자고.”

카살리가 전의에 불타는 목소리로 선수들을 독려했다. 지난 네 경기 동안의 형편없는 타격 때문에 가라앉아 있던 분위기가 오히려 적극적으로 변했다.

테일러 모터는 방망이를 위아래로 흔들며 위협적인 시선으로 그라운드를 응시했고, 리치 쉐퍼도 배팅 장갑을 일부러 다시 조이며 눈빛을 달리 한다. 뒤늦게 카슨의 도발을 알게 된 헤이거는 욕을 한 바가지 내뱉었다.

“무슨 일이야? 왜 이렇게 시끄러워?”

불펜에서 투수들을 점검하다 더그아웃으로 돌아오던 리히텐슈타인 코치가 물었다. 지혁이 간단히 얘기를 해 주자, 리히텐슈타인의 미간도 확 찌푸려졌다.

“감독님께 보고드릴 테니 너희들은 경기에 집중해. 동료가 이딴 말을 듣고 있는데도 나사 빠진 것처럼 플레이하는 녀석은 없을 거라 믿겠다.”

“당연하죠!”

카슨의 질 낮은 도발 덕분에 오히려 몽고메리 선수들의 전의가 타오르기 시작했다. 베이베어스 선수들의 타격 훈련이 끝날 즈음에는 몽고메리의 더그아웃은 거의 활활 타는 화로 같았다.

‘웬 미친놈 하나 덕분에 분위기는 괜찮아졌네.’

가만히 앉아 살펴보니, 확연히 달라진 분위기가 느껴진다. 4연패를 기록하는 동안의 더그아웃은 조용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누구 할 것 없이 상대의 전력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베이베어스 선발인 마이클 리의 공은 이렇고 저렇고. 상대 타자들의 누구는 컨디션이 어떻고. 특히 가빈은 어제 던지며 느꼈던 점을 주절주절 늘어놓고 있었다.

“페랄타는 몸쪽 공에도 타이밍을 제대로 맞추고 있었어. 얘 컨디션이 엄청 좋은 것 같아. 조심해야 돼.”

“그래.”

“근데 문. 저 카슨인가 하는 코치랑 아는 사이야?”

“아니. 그냥 윈터미팅 때 한 번 본 게 다야. 내가 팀 구하고 있을 때였거든.”

“아하. 근데 저 사람은 왜 와서 이딴 짓을 하고 간 거지?”

“자, 다들 모여 봐!”

오지 코치가 선수들을 불러모았다. 윌리엄스 감독이 두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는 무서운 표정으로 서 있었다.

“아주 짜증나는 얘기를 들었다. 너희들 모두 알고 있지?”

“네!”

“오늘 너희들이 그라운드에서 저 새끼들 때려잡지 않으면, 내가 가서 쥐어 팰 거다. 그리고 너희들이 쟤네를 때려잡아도, 내가 가서 개지랄을 할 거고.”

“흐하하!”

윌리엄스 감독의 차가운 반 농담에 몇몇 선수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웃는 건 좋아. 대신 경기가 시작되면 확실하게 해라. 너희들 동료가 모욕당한 일이야. 확실하게 보여줘라. 알겠어?”

“예스!”

“어제까지 안 좋았다는 건 생각도 하지 마. 오늘은 월드시리즈 무대라고 생각하고 게임에 나서라. 자, 모여 봐!”

윌리엄스가 주머니에서 손을 빼 쭉 내밀었다. 선수들이 하나 같이 손을 뻗어 그 위에 포갰다.

“가자, 비스킷츠!”

“예에에쓰!”

“가자!”

몽고메리의 더그아웃에서 모처럼 큰 기합이 울려퍼졌다.

*

지혁은 1회초 피칭을 위해 마운드에 오른 마이클 리의 연습 투구를 주시했다. 다리를 들어올리는 과정에서 살짝 딜레이를 걸며 타이밍을 빼앗는다. 그리고 낮은 팔 각도로 던지는 공은 자연스럽게 테일링이 걸리면서 홈 플레이트 앞에서 궤적이 변한다.

확실히 까다로운 싱커를 던지는 투수였다. 지난 두 경기에서 12.2이닝을 던져서 실점하지 않고 있는 것이 납득이 조금 갔다.

루 카슨이 그런 수준 낮은 도발을 하고 갔다는 건 어느 정도 자신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몽고메리 타자들은 어제 체이스 앤더슨의 타점 높은 곳에서 내려찍히는 공을 봤다. 그리고 오늘은 거의 쓰리쿼터에 가까운 낮은 지점에서 출발해 낮게 깔리는 공을 상대해야 한다.

하지만 경기 시작 전까지만 해도 걱정되었던 마음이 오히려 편안했다. 지혁의 오랜 경험이 말해주는 것 같았다. 오히려 기세가 바뀌었다는 것을.

아무리 타격감이 좋지 않은 상황이라지만, 야구와는 상관없는 이런 일을 계기로 그 감이라는 것들은 요동치기 마련이다. 집중력이 최고조에 달하면 평소보다 볼이 더 잘 보이고, 평소보다 볼이 더 잘 보이면 좋은 공을 골라서 칠 수 있게 된다. 어제의 타자들에게서는 그런 걸 기대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전의에 불타고 있는 지금은 아니다.

더그아웃 난간에 기대서 마운드만 응시하고 있는 지혁에게 윌리엄스 감독이 다가왔다.

“가서 네 피칭에만 집중해.”

“아, 감독님.”

“저 녀석을 공략하는 건 동료들한테 맡겨 둬. 안 그래도 감이 안 잡혀서 크게 혼이나 낼까 했는데. 카슨인지 뭔지 하는 버러지한테 고맙다는 말이나 전해야 될지 모르겠어.”

“알고 있습니다. 오늘은 타자들이 뭔가 해 줄 것 같아요.”

“그래. 이 지경인데도 집중을 못할 리가 없지. 타선은 걱정하지 말고 지금까지 하던 대로 자신 있게 던지고 와. 가서 제대로 보여주게.”

“걱정 마십시오.”

지혁의 단호하면서도 자신감 넘치는 대답에 윌리엄스 감독은 오히려 당황했다.

이 투수는 상황을 위에서 내려다보기라도 하는 것일까?

타자들의 분위기가 묘하게 바뀐 것도, 또 자신이 도발을 당했는데도 전혀 동요가 없는 것도. 이상한 느낌이었다.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이런 경험이 숱하게 많다는 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대처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 그래서 뭔가 한 마디를 더 하려던 것을 그만두었다.

*

딱!

“파울!”

선두타자로 나선 라이언 브렛은 벌써 일곱 개째 파울을 냈다. 풀카운트까지 끌고 간 이후에도 네 개를 더 커트해냈다. 지혁의 예상대로 집중력이 살아나 있다는 증거였다. 나쁜 공을 끝까지 보면서 마지막에 살짝 걷어내고, 몸쪽으로 붙는 공에는 힘을 뺀 짧은 스윙으로 파울을 만들어낸다.

그렇게 투수를 물고 늘어진 결과는 아주 좋았다. 이를 악물고 끈질기게 커트해 내던 브렛은 13구까지 가는 승부 끝에 기어이 볼넷을 골라 출루했다. 마운드에 선 마이클 리가 벌써부터 짜증을 내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나이스! 라이언!”

몽고메리의 더그아웃에서 환호와 휘파람이 터져나왔다. 선두타자가 할 수 있는 최고의 결과.

2번타자 테일러 모터도 방망이를 짧게 쥐고 타석에 들어섰다. 초구에 아주 먹음직스러운 싱커가 그를 유인했지만 모터는 그 공을 참아냈다. 그 뒤로 모터도 브렛과 같은 전략을 취했다. 욕심내지 않는 작고 짧은 스윙으로 싱커를 걷어내고, 또 걷어내는 전략.

“Fuck!”

모터에게도 아홉 개의 공을 던진 마이클 리가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모터를 결국 1루수 땅볼로 잡아내긴 했지만 브렛은 2루에 살아 들어간 것이다.

마이클 리는 전형적인 싱커볼러였다. 싱커를 포심 대용으로 사용하는 형태다. 싱커의 비율이 70%를 넘어갈 정도로 의존도가 큰 투수였다. 싱커의 무브먼트 자체가 까다로운 스타일이었다. 루 카슨이 손가락으로 장난치는 법을 가르친 게 확실해 보였다.

하지만 정작 루 카슨이 저지른 일 때문에 몽고메리 선수들의 집중력이 하늘을 찌르고 있다.

3번타자 카살리도 7구까지 물고 늘어지더니 기어이 1-2루 간을 뚫는 안타를 쳤다. 2루주자 브렛은 넉넉히 여유 있는 상황에서도 홈에 슬라이딩을 해 들어오며 흙먼지를 일으켰다.

기분 좋은 선취점.

지혁은 흙먼지 자욱한 홈플레이트 너머로 베이베어스 더그아웃을 바라봤다. 루 카슨의 표정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지혁은 그가 인상을 잔뜩 쓰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거 참 쌤통이다. 개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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