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 스위치 온.
1회초는 길었다. 브렛, 모터, 카살리가 29구를 던지게 했다. 이후 들어선 싸이처, 쉐퍼, 세고비아도 15구를 더 끌어냈다. 베이베어스의 선발 마이클 리는 1회에만 50개 가까운 공을 던지고서야 이닝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타격감이 좋지 않을 때 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 투구수를 늘리면서 물고 늘어지는 일. 몽고메리의 타자들은 그 일을 해냈다. 그 와중에도 브렛이 낸 점수를 제외한 추가점을 얻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긴 했지만 여전히 타격감이 좋지는 않았던 결과였다.
“문. 가서 제대로 보여줘! 싱커를 어떻게 던져야 하는지.”
세고비아가 아웃되고 마운드로 향하기 위해 준비하는 지혁에게 누군가가 외쳤다. 지혁은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역겨운 담배냄새 나는 얼굴에서 웃음기 쫙 빼 주고 올게.”
더그아웃의 계단을 타고 경기장에 발을 딛는다. 마운드로 터벅터벅 걸어 올라가는 길에 관중석 끝에서부터 하나씩 시선을 끌어내렸다. 이내 마운드에 닫는 순간 지혁의 시선은 피처 플레이트에 닿았다. 작게 솟아오른 마운드 위에 올라오자 모든 것이 내려다보이는 기분이다. 동시에 스위치가 켜졌다.
발을 굴러 흙을 몇 번 파내면서 베이베어스 쪽 벤치를 쳐다봤다. 구석진 곳에서 벽에 기대 서 있는 카슨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옆자리에는 마이클 리가 수건을 눌러쓰고 앉아 짜증을 내고 있었다.
“누가 누구한테 뭘 가르쳐? 또라이 새끼가 미쳐가지고.”
마운드 위에서 중얼거렸다. 이 작은 원형의 언덕은 오롯이 투수만의 공간이다.
높다고는 할 수 없지만, 또 결코 낮다고도 할 수 없는 곳. 드넓은 야구장 중에서 가장 높은 곳에 우뚝 서게 만드는 곳.
마운드에만 올라오면 전투력이 끓어오르는 것을 느낀다. 침착하고 냉정한 녀석들도 이곳에 올라오면 호승심이 끓어오르기 마련이다.
지혁도 마찬가지였다. 마운드에 올라오지 않은 지혁과 피쳐 플레이트를 밟고 있는 지혁은 스스로 생각해도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버리니까. 이미 온 몸에 돌고 있는 피가 뜨거워질대로 뜨거워진 기분이었다. 오늘은 카슨에게 제대로 한 방 먹여야겠다는 마음이 큰 탓인지 평소보다 훨씬 더 달아올랐다.
“때려눕힌다. 박살낸다. 후우.”
끊임없이 자기 암시를 걸었다. 포수 장비를 찬 카살리가 자리에 앉고 가벼운 연습 투구로 어깨를 점검했다.
뻐엉!
낮게 깔리는 공이 대포알같이 뻗어나간다. 카살리도 만족스러운 듯 존에 빨려든 공을 쥐고 잠깐 멈추어 있는다. 지혁은 그 여운을 감상했다. 오늘 불펜에서 던진 모든 공보다 훨씬 더 좋았다. 실밥을 때릴 때 남은 손끝의 아릿함이 짜릿하게 온 몸으로 퍼진다. 그리고 베이베어스의 첫 타자가 타석에 들어섰다.
*
모바일 베이베어스의 첫 타자 마이크 프리맨. 빠른 발을 자랑하는 녀석이었다. 전형적인 내보내면 곤란한 스타일의 선수. 지혁의 초구는 좌타자인 프리맨의 바깥쪽 낮은 쪽으로 빨려 들어가는 패스트볼이었다.
탁!
프리맨은 초구부터 방망이를 냈다. 배트 끝에 빗맞은 공이 3루에 닿기 전에 파울 라인 바깥쪽으로 굴렀다.
‘초구부터 돌려?’
카슨의 조언이 있었던 것일까? 지혁은 그동안 초구부터 스트라이크를 잡으러 적극적으로 들어가는 피칭을 해 왔다. 그 점을 노리고 나온 모양이었다. 바깥쪽에 제구가 잘 된 공이었지만 주저하지 않고 스윙을 낸 것을 보면.
카살리도 프리맨의 공격적인 접근 자세를 의식했는지 다음 공은 유인구를 골랐다. 떨어지는 싱커. 스트라이크 존 낮은 쪽을 파고 들어가다 마지막에 떨어뜨리는 공.
지혁은 고개를 끄덕이고 카살리가 요구한 코스 그대로 집어넣었다. 이번에도 제구가 꽤 만족스러웠고, 마지막 순간 변화하는 무브먼트도 좋았다.
“볼!”
하지만 프리맨의 방망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방망이를 낼 의지가 털끝만큼도 없는 사람처럼.
이어진 3구. 다시 한 번 존을 공략했다. 몸쪽에서 떨어지며 파고드는 싱커. 아슬아슬하게 존에 걸릴 법한 공을 프리맨이 커트해냈다. 방망이 안쪽에 맞은 공이 프리맨의 발목 보호대를 때렸다. 투 스트라이크에 몰아넣었다. 하지만 기분이 더러웠다.
‘이 새끼들 대체 뭐지?’
카운트를 잡기 위한 공에는 방망이를 내고, 방망이를 유인하기 위한 공에는 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머리싸움이다. 투수의 입장에서는 타자가 휘둘러주기를 원하며 던지는 공이 있고, 휘두르지 않았으면 하는 공이 있다. 타자의 입장에서는 스윙하기를 바라며 던지는 공보다는 스윙하지 않았으면 하는 공을 치는 것이 좋다.
카운트와는 상관없이, 이 ‘의도 싸움’에서는 프리맨이 이기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공 세 개만을 던졌을 뿐이다. 이 정도면 우연의 범위 안에 들어간다. 지혁은 허리를 굽혀 로진을 잔뜩 묻히고는 가루를 훅 불어 날렸다. 아직은 몰라. 더 던져봐야 해. 지혁은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애썼다.
4구. 바깥쪽으로 공 하나쯤 빠진 패스트볼. 프리맨은 서서 지켜봤다.
5구. 몸쪽으로 붙었지만 역시 공 반 개 정도 빠진 볼. 몸쪽으로 붙였지만 꿈쩍도 않는다.
풀카운트. 빠른 타자를 볼넷으로 출루시키는 것만큼은 절대로 피해야 할 선택지다. 설령 안타를 맞는 한이 있더라도, 존 안으로.
지혁과 카살리가 선택한 6구는 싱커였다. 그것도 거의 복판에 가깝게 꽂히는 공. 지혁이 손끝에서 공을 떠나보내는 순간 프리맨이 앞발을 살짝 들었다 내려놓는 것이 보였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딱!
프리맨이 떨어지는 공을 끝까지 보며 밀어 때렸다. 공이 배트에 맞는 순간부터 1루로 스타트를 끊었다. 맞는 순간 지혁은 인상을 구겼다.
‘씨발. 안타네.’
공의 방향이 좋지 않았다. 3-유간을 뚫는 코스인 것처럼 보였다.
“으랴아아!”
그 순간 유격수 헤이거가 날았다. 온 몸을 있는 힘껏 펼쳐서 흘러나가는 공을 글러브 끄트머리로 멈춰 세웠다. 튕기는 스프링처럼 몸을 일으킨 헤이거가 스텝도 밟지 않고 몸을 비틀며 1루로 공을 뿌렸다. 아슬아슬한 순간에 공이 싸이처의 1루 미트에 빨려들었다. 공이 빨려듦과 동시에 프리맨도 1루를 밟고 지나간다.
“아웃!”
1루심의 호쾌한 판정 소리에 지혁은 가슴이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몽고메리 더그아웃에서 환호가 터져나왔다. 지혁도 본능적으로 유격수 쪽으로 몸을 돌려 모자를 벗었다.
“땡큐! 헤이거!”
내야를 한 바퀴 돈 공을 다시 돌려주는 헤이거가 씰룩거리는 얼굴로 검지 하나를 폈다. 방금 전 플레이에 설레지 않겠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애써 웃음을 참고 있는 표정.
“원아웃이야! 수비 집중해!”
“오케이!”
‘새끼. 웃고 싶으면 웃지.’
마운드에 오른 지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간 타격이 좋지 않아 야수들의 집중력을 조금 걱정했었는데. 완전히 기우였다. 브렛은 타석에서, 또 헤이거는 멋진 수비로 자신들의 집중력을 확인시켜 줬다. 내야수들의 첫 플레이가 좋다는 것은 싱커볼러인 지혁에게는 아주 희소식이다.
이어진 베이베어스의 2번 타자, 저스틴 그린. 최근 네 경기 연속 안타를 치는 중이다. 지혁은 그린을 상대로도 초구에 스트라이크를 잡으러 들어갔다. 패스트볼이 높은 코스로 향했는데 제구가 조금 안 된 공이었다. 빠지는 공이었는데 그린이 스윙을 냈고, 뒷그물을 때리는 파울이 되었다.
‘이거 뭔가 있네. 분명히 뭔가 있어.’
빠지는 공이었는데도 스윙을 낸다? 그것도 풀 스윙을?
지혁이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끼며 2구를 뿌렸다. 몸쪽에 바짝 붙는 볼. 그린이 본능적으로 움찔거렸지만 스윙은 나오지 않았다. 3구. 떨어지는 볼. 역시 방망이는 멈춰 서 있다.
그리고 4구. 바깥쪽에 꽉 차게 떨어지는 싱커. 그린이 떨어지는 결대로 툭 밀어냈다. 툭 밀어낸 공 치고는 방망이 중앙에 제대로 맞아서 그런지 타구 스피드가 꽤나 빨랐다. 지혁은 본능적으로 소리쳤다.
“2루!”
공이 1-2루 간으로 흘렀다. 하지만 또 다시 내야를 넘어가지는 못했다. 이번엔 브렛이었다. 사선으로 이동하면서도 한두 발 뒤로 물러나며 공을 건져낸 브렛이 넘어진 상태에서 1루로 송구했다. 힘이 덜 들어간 송구였지만 싸이처가 발을 쭉 뻗어내며 공을 움켜쥐었다. 그린의 아쉬움 가득 담긴 욕지거리가 지혁에게 똑똑하게 들려왔다.
“나이스 수비!”
“환장하네, 내야!”
외야수들이 저 멀리서 환호하는 것이 마운드에까지 들려왔다. 브렛은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나서는 예의 그 무표정한 얼굴로 자리로 돌아왔다.
“고맙다.”
지혁의 인사에도 브렛은 그저 고개만 살짝 까딱할 뿐이다. 집중하고 있는 모습에 오히려 마음이 놓였다.
깊은 숨을 내쉬며 다시 작은 언덕에 올라선다. 쉽지 않았지만 어쨌든 1, 2번 타자를 처리했다. 3번인 데이빗 페랄타 앞에 주자를 내주지 않은 것이 참 다행이라고 여겨졌다. 기록만 놓고 보면 지금까지 가장 잘 치고 있는 타자다.
10경기를 치른 상황에서 타율이 .481. 그야말로 미친 타격감을 보여주고 있었다.
게다가 오늘 베이베어스의 타자들은 마치 지혁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는 것처럼 타격에 임하고 있다. 녀석들은 지혁이 어떤 공을 던질지 미리 알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차이가 나게 빠지는 공에도 스윙이 나오고, 존 안으로 들어가는 공에 꿈쩍않기도 하고.
만약 데이빗 페랄타도 그렇다면. 이번에는 정말 위험할지도 모른다.
길게 심호흡을 한 지혁이 투구판을 밟았다. 공이 든 왼손을 꼬리뼈 위에 올려두고 앞으로 허리를 굽혀 카살리의 싸인을 본다.
검지 하나. 패스트볼. 지혁은 고개를 저었다. 카살리가 다시 싸인을 보낸다.
검지와 새끼. 싱커. 지혁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 카살리의 손가락이 바빠졌다.
손가락 두 개. 타이밍을 빼앗는 커브. 지혁은 또 다시 고개를 저었다.
마침내 카살리가 엄지손가락 하나를 폈다. 지혁이 고개를 끄덕거리자 카살리도 미트를 팡팡 쳤다. 좌타자인 페랄타의 바깥쪽으로 한 발 빗겨 앉은 카살리가 스트라이크 존 경계선에 정확히 미트를 댔다.
글러브를 들어올리고, 왼손으로 공을 꺼냄과 동시에 오른쪽 어깨를 내뻗는다. 와인드업 타이밍에 맞춰 페랄타가 흔들던 방망이를 딱 멈추었다. 활처럼 잔뜩 당겨져 있던 지혁의 왼손이 어깨를 넘어가고, 팔꿈치가 귀 옆을 스치는 순간 손목을 세로로 비틀었다. 손에서 공이 빠져나가자 페랄타의 방망이도 출발하기 시작했다.
휘이익-
패스트볼 타이밍을 맞춰 스윙을 시작한 페랄타에게는 선택지에 없던 공의 변화가 일어났다. 중앙까지는 패스트볼처럼 날아오던 공이 바깥쪽으로 멀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부우웅!
방망이가 만들어낸 살벌한 바람 소리가 홈플레이트를 맴돌았다.
“스트라이크!”
구심의 선언과 함께. 슬라이더였다.
“뭐야?”
페랄타가 황당해하는 게 눈에 보였다. 지혁은 그제야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루 카슨이 지혁의 어떤 포인트를 잡아 줬는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슬라이더만큼은 녀석들의 고려 대상에 없었던 것이 확실했다.
지혁은 주저하지 않고 다음 공도 슬라이더로 골랐다. 대처할 시간조차 주지 않기 위해 인터벌도 거의 주지 않았다. 이번에는 존 낮은 곳에 걸쳐 들어가는 공이다. 슬라이더 타이밍을 잡지 못해 움찔거린 페랄타는 방망이를 내지도 못했다.
“스트라이크 투!”
페랄타의 머릿속이 복잡할 것이다. 일부러 배팅 장갑을 고치며 타석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페랄타는 분명히 당황하고 있다. 노련한 지혁이 그 조짐을 캐치하지 못할 리 만무했다. 카살리로부터 싸인을 받은 지혁은 당당한 모습으로 와인드업에 나섰다.
‘몸쪽에 붙인다!’
3구는 몸쪽을 파고 들어가는 공이다. 앞선 두 개의 슬라이더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페랄타의 방망이가 뒤늦게 출발했지만, 이미 지혁의 묵직한 패스트볼이 미트에 빨려들어간 뒤에야 스윙이 홈플레이트를 갈랐다.
“스트라이크, 배터 아웃!”
베이베어스의 최고 타자 중 한 명인 페랄타를 공 세 개로 삼진 처리한 지혁이 주먹을 불끈 쥐며 마운드에서 걸어 내려왔다. 자신감이 끓어오르는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