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전처리, 회귀하다-28화 (29/204)

28 - 제이크 램.

오늘의 몽고메리는 흐름을 제대로 타고 있었다. 그간 꽉 막힌 것처럼 터지지 않던 타선이 서서히 물꼬를 트기 시작했다. 좋은 수비를 선보인 헤이거가 선봉이었다.

2회초, 원 아웃 상황에서 타석에 들어선 헤이거는 마이클 리의 싱커를 잡아당겨 1루 베이스를 타고 흐르는 우월 3루타를 작렬시켰다. 그리고 9번 조이 리카드가 투수 키를 넘기는 중전 안타로 추가점을 뽑았다.

하지만 베이베어스는 확실히 강팀이었다. 야수들이 점수를 짜내고 있기는 했지만 마운드에서 타자를 상대해야 하는 지혁은 큰 부담을 받는 중이다. 누구 하나 쉬운 타자가 없었다. 카슨에게 제대로 보여줘야겠다는 의욕도 어깨에 힘이 들어가게 만들었다.

- 베이베어스, 5번 타자! 제이크 램!

2회말, 4번 가렛 웨버를 평범한 유격수 땅볼로 잡아낸 이후 행크 아론 스타디움이 들썩거렸다. 제이크 램이 타석에 성큼성큼 들어섰다. 겉보기에는 호리호리하고 길쭉한 선수지만, 저 속에 숨어 있는 파워가 어마어마하다는 것을 지혁은 알고 있었다.

좌타석에 들어선 램이 자세를 잡고 날카롭게 지혁을 바라봤다. 날카로운 눈매가 예사롭지 않았다.

‘슬라이더.’

지혁은 1회에 재미를 본 슬라이더를 선택했다. 조금 일찍 떨어지는 공을 끝까지 지켜보던 램이 방망이를 거뒀다. 원 볼. 2구는 패스트볼이었다. 하지만 바깥쪽으로 멀리 빠져나갔다. 간신히 공을 잡은 카살리가 어깨를 두어 번 털어줬다. 힘을 빼라는 뜻이다.

‘안 돼. 어중간하면 넘어가. 하, 세게 던져야 하는데.’

지혁은 다음 공으로 한 번도 던지지 않았던 커브를 선택했다. 한복판으로 몰리는 공이 들어갔지만 램은 그저 지켜봤다. 아무래도 공 하나는 무조건 지켜보려던 모양이었다.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조금 위험했으니까.

부웅! 부웅!

4구를 던지기 전, 제이크 램이 위협적으로 연습 스윙을 했다. 마운드에서도 바람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싱커 싸인을 보낸 카살리의 손가락 끝에서 이유 없는 불안함이 피어오른다.

원 스트라이크 투 볼. 무조건 스트라이크 카운트를 잡아야 하는 상황. 가장 위력적인 공인 싱커를 던져야만 하는 상황.

‘후... 쎄한데.’

공을 던지기 전부터 등골이 서늘한 게 불길했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공의 실밥을 때리는 그 순간에도 안 좋은 느낌이 가시질...

따악!

제이크 램이 몸쪽으로 붙인 싱커를 벼락 같이 휘둘렀다. 그야말로 번쩍! 하고 빛이 나는 것 같은 스윙이었다. 공을 두 조각으로 쪼개버릴 것 같은 타구음이 들리는 순간 모두가 직감했다. 몸쪽 공을 받쳐 놓고 잡아당긴 램의 타구는 이렇다 할 포물선도 그리지 않고 라인드라이브로 외야에 쳐박혔다.

“퉤.”

지혁은 땅바닥에 침을 뱉었다. 제구가 안 된 공도 아니었다. 마운드 위에서 투수의 직감이라는 게 이렇게 무섭다. 램이 복귀 경기 첫 타석에서 홈런을 때려내고 베이스를 도는 모습을 씁쓸히 바라봤다.

‘그래. 넌 얼른 메이저 가라. 나도 여기서 딱 일 년 구르고 따라갈란다.’

괴물 같은 라인드라이브 홈런. 이래서 한 방이 있는 타자들은 무섭다. 녀석들은 잘 던진 공도 파워만으로 담장 밖까지 날려 버릴 수 있다.

아직까지 지혁의 싱커는 구위만으로 그 힘을 이겨낼 정도는 아니었던 것이다. 지혁이 당장 구위를 끌어올려야 하는 이유를 제이크 램이 보여준 셈이다.

2회말 지혁이 홈런을 맞았지만 몽고메리의 타자들도 똑같이 되갚아줬다. 3회초 공격에서 카메론 싸이처가 마이클 리의 싱커를 퍼올려 좌측 담장을 훌쩍 넘긴 것이다. 4회초에는 조이 리카드도 홈런 하나를 추가했다.

타자들이 모처럼 분전하는 동안 마운드의 지혁은 꾸역꾸역 마운드에서 버텨냈다. 베이베어스의 타자들은 끈질기게 지혁을 물고 늘어졌다. 여전히 패스트볼과 싱커를 미리 알고 친다는 느낌과 상대해야 했다. 이 사실은 이닝을 거듭하며 마운드 위에서 공을 던지는 지혁과 홈 플레이트에서 공을 받는 카살리 모두 인지하게 되었다.

1회에 가졌던 의문은 서서히 확신으로 바뀌어 갔다. 베이베어스 타자들이 무엇을 보고 분석했는지는 아직 모르지만, 지혁이 던지기 전부터 패스트볼과 싱커를 어느 정도 구분하고 있었다.

지혁은 시의적절하게 슬라이더를 구사하며 무언가를 짚어낸 베이베어스 타자들을 공략해 나갔다. 물론 이건 미봉책에 불과했다. 하지만 당장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슬라이더뿐이다. 타자들이 슬라이더를 던질 때 혼란스러워 하는 것이 확실하다.

그 동안의 두 경기에서 극단적인 투 피치 투수였던 지혁이 슬라이더를 30% 가까운 비율로 끌어올렸다. 3회에 주자 두 명을 둔 상태에서 슬라이더로 헛스윙 삼진을 끌어냈고, 4회에도 2아웃 3루의 위기에서 슬라이더를 던져 중견수 플라이로 이닝을 막아냈다.

“문. 이번 이닝까지만 잘 막아 봐. 투구수도 꽤 되고, 불펜도 준비하고 있어. 더 부담 가질 필요 없어. 이번 이닝까지야.”

5회말 마운드에 오르기 직전 리히텐슈타인 코치가 지혁을 다독였다. 오늘은 확실히 쉽지 않은 경기다. 지난 두 경기와는 다르게 생각한대로 풀리지 않는다. 이미 땀을 많이 흘린 지혁은 진짜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마운드로 향했다.

상대는 베이베어스의 클린업 트리오. 대기 타석에 있던 페랄타에게 루 카슨이 다가가 정신없이 뭔가를 말하고 있다. 페랄타도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타석에 들어온다.

“카슨 이 새끼가 또 무슨 수작을 부렸으려나...”

지혁은 초구를 페랄타의 몸쪽에 바짝 가져다 붙였다. 페랄타는 팀의 에이스 격인 타자면서도 허리를 비틀어 맞고라도 나가겠다는 의지를 내보였다. 기세 싸움에서 지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첫 타석에서 삼구삼진을 당했던 기억을 마음에 담아 두고 있는 것 같다.

‘어차피 이번 이닝이 마지막이다.’

지혁은 있는 힘을 다 쥐어짜내 공을 던졌다. 3구째 던진 한복판에 높은 코스에 꽂히는 패스트볼은 93마일이 찍혔다. 지혁이 낼 수 있는 거의 최고 구속이었다. 생각보다 빠른 공에 페랄타는 헛스윙을 돌렸다.

4구. 카살리의 슬라이더 싸인을 무시한 지혁은 싱커를 선택했다. 어차피 3점의 리드를 안고 있다. 한 방 맞는 건 어쩔 수 없다는 마음도 있었지만, 전력으로 던진 싱커로 페랄타의 스윙을 이겨내야겠다는 마음이 훨씬 더 컸다.

“으쌰!”

지혁의 손끝에서 떠난 싱커가 페랄타의 몸쪽으로 급격하게 떨어져 내렸다. 페랄타도 이를 악문 스윙을 돌렸지만 방망이 손잡이 쪽에 맞았다.

콰지직. 방망이가 처참하게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1루수 싸이처가 한 발 앞으로 다가와서 공을 잡아내고 직접 베이스를 밟았다.

이어진 4번 가렛 웨버는 바깥쪽을 파고 들어가는 패스트볼로 루킹 삼진. 다시 한 번 93마일 패스트볼이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타석에는 다시 제이크 램이 들어선다.

‘마지막 타자가 제이크 램이면 괜찮아. 저 새끼 한 번 제대로 잡고 내려가면 되겠다.’

지혁은 손에 송진 가루를 잔뜩 묻히고는 제이크 램을 쏘아봤다. 마운드 위에서 보낸 오랜 시간동안 깨달은 게 하나 있다. 한 방 맞은 녀석한테 도망가는 건 그 경기는 물론이고 그 다음 경기에까지 영향을 준다는 것. 지금 램에게서 도망가면 다음에 그를 만났을 때 이보다 더 심한 압박에 시달려야 한다.

흐읍. 깊게 숨을 한 번 들이마시고는 초구를 존 안에 때려박았다. 투심 같은 싱커가 춤을 추면서 바깥쪽에 꽂혔다. 피해갈 생각이 전혀 없는 지혁은 2구도 같은 코스에 같은 싱커를 던졌다. 마지막 공이라고 생각하고 힘껏 던지는 공들이 강렬하게 미트에 파고들었다.

“스트라이크!”

배트를 내다가 만 램이 약간은 허탈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심판을 한 번 바라본다. 하지만 심판은 단호한 모습으로 고개를 저었다. 마운드 위에 선 지혁은 땀을 주룩주룩 흘리면서도 아우라를 뿜어내고 있다. 램은 픽, 하고 옅은 웃음을 흘렸다.

원바운드 되는 패스트볼 하나를 참아낸 램은 본능적으로 이번 공에 승부를 들어온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지혁도 마찬가지였다. 램이 이번 공에 반드시 방망이를 낼 것이라고 느끼고 있었다.

카살리는 머리가 터질 판이었다. 어떤 공으로 어떻게 승부해야할지를 치열하게 고민했다. 하지만 지혁은 번번이 고개를 저었다.

‘싱커. 정면에서 한 번 붙어보자.’

도망치는 공은 안 된다. 지혁은 그렇게 되뇌이며 와인드업에 들어갔다. 두 손으로 방망이를 움켜쥔 램의 손아귀에도 힘이 잔뜩 들어갔다.

‘싱커다!’

램은 싱커가 들어온다는 것을 알아챘다. 지혁의 손에서 공이 떠나는 순간 공이 중앙으로 출발했다. 몸쪽으로 파고들 것이라는 뜻이다. 오른팔을 몸통에 바짝 붙이고 허리를 강하게 돌렸다. 역회전이 걸린 공이 안쪽으로 꺾여 들어오는 순간, 램이 힘껏 돌린 방망이에 지혁의 공이 정확하게 맞았다.

따아악!

묵직한 타구음이 울림과 동시에 경기장에 모인 모든 이들의 시선이 우측 담장 쪽을 향했다. 지혁도 고개를 돌려 하얀 공이 까만 밤하늘을 가로질러 날아가는 것을 지켜봤다.

높은 포물선을 그린 공이 서서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1루 베이스를 밟기 직전, 제이크 램이 속도를 늦췄다. 워닝 트랙까지 달려간 우익수 테일러 모터가 펜스 바로 앞쪽에서 글러브로 공을 움켜쥐는 순간이었다.

지혁은 온 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손가락 끝이 살짝 떨려왔다. 남아있는 모든 힘을 다해서 마지막 공을 던진 것이다. 램을 힘으로 이겨낸 마지막 싱커는 오늘 던진 최고의 공이었다.

*

“뭐라고? 당신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브래디 윌리엄스 감독과 리히텐슈타인 코치는 경기가 끝난 후 베이베어스의 라커룸을 찾았다. 무섭도록 화가 난 표정의 두 사람은 베이베어스의 감독 앤디 그레이를 찾아가 따졌다.

그레이 감독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루 카슨에게 역정을 냈다. 코칭스태프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매니저의 표정은 갈수록 썩어들어갔다.

“이딴 식의 도발은 용납할 수 없지. 당장 기자를 부를 거요.”

윌리엄스 감독은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카슨의 심통 가득한 표정에 당황스러움이 읽혔다. 선수들 간의 어설픈 도발은 애교로 봐줄 수 있다.

하지만 코치가 선발투수에게 가서 직접적인 도발을 한 것은 자칫 팀의 위상과도 연결될 수 있다. 기삿거리를 던져주면 눈 돌아간 하이에나 떼처럼 물어뜯기 시작하는 게 기자들이다. 게다가 애리조나는 기자들을 보수적으로 상대하기로 유명한 팀이다. 자연히 기자들은 애리조나를 싫어했고.

일이 커지면 자리를 장담할 수 없다고 느낀 카슨은 개인적인 악감 때문에 섣불리 일을 저지른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잠깐 따, 따로 얘기를 좀...”

카슨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윌리엄스 감독의 팔을 잡아끌었다. 베이베어스 선수들이 웅성거리며 더그아웃을 기웃거렸다. 카슨은 빽 소리치며 선수들을 내보내고 난 뒤 윌리엄스 감독과 리히텐슈타인 코치를 향해 애절한 눈빛으로 매달렸다.

“죄송합니다. 일이 이렇게 흐를 줄은 몰랐습니다. 그냥, 그, 뭐라고 해야 할까... 지금 기자를 부르시면 전 잘릴 수도 있습니다. 아시잖습니까, 이 바닥 좁은 거. 한 번만 너그럽게 넘어가 주십시오...”

“이유가 뭐요?”

“에? 에... 그러니까.”

“내 선수한테 와서 그딴 수준 낮은 도발을 하고 간 이유가 뭐냐니까? 기자 불러?”

“아뇨, 아뇨. 아닙니다... 윈터미팅 때 나, 나를 깠어요! 문지혁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투수가, 가, 감히 나를...”

“뭐?”

리히텐슈타인이 눈을 부라렸다. 그의 옷에 짙게 배어 있는 담배냄새보다도 카슨의 이 찌질한 모습이 훨씬 더 역겨웠다.

“감독님. 이딴 머저리 같은 새끼 때문에 골치 썩지 말고 기자 부르시죠. 다시는 이런 일 못하게 해야 합니다.”

“아무래도 그러는 게 낫겠군.”

“잠깐, 잠깐만요!”

카슨이 전화번호를 누르려던 윌리엄스 감독에게 애처롭게 매달렸다.

“어떻게 문의 패스트볼과 싱커를 구분했지?”

리히텐슈타인이 목소리를 최대한 낮게 깐 채 물음을 던졌다. 우락부락한 리히텐슈타인이 주먹까지 꽉 쥔 채 말하자 마치 저승사자의 마지막 물음 같이 들렸다.

카슨은 단번에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윌리엄스 감독이 통화 버튼을 누르고 다이얼이 가는 소리가 들리자, 얼굴이 벌개진 카슨이 그제야 대답했다.

“유, 유니폼! 싱커 싸인을 받고 와인드업에 들어가기 직전에, 싱커에만 왼쪽 팔 유니폼이 흔들립니다.”

“확실해?”

“당연합니다. 비디오 확인해 보세요. 내가 얼마나 연구해서 알아낸 건데...”

윌리엄스 감독은 신호가 가는 다이얼을 종료하지 않았다. 카슨은 갈수록 눈이 시뻘겋게 충혈되어서는 발악에 가까운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아, 트레이시? 나 비스킷츠 감독 브래디 윌리엄스야.”

- 네, 감독님. 어쩐 일이세요?

“더블 A 투수 지혁-문. 지금까지 던진 모든 투구폼 다 교차 편집으로 찍어내 줘. 단순히 투구폼만 뽑는 게 아니고 포수와 싸인을 주고받는 순간부터 공이 포수 미트에 들어갈 때까지 모든 영상으로 다.”

- 그럴게요. 근데 무슨 일인데요?

“안 좋은 버릇이 있나 확인하려고.”

- 언제까지 해 드리면 되죠?

“빠르면 빠를수록 좋네. 그리고 당장 확인할 수 있나? 저번 경기, 싱커를 던질 때 다섯 개만 확인하면 돼. 왼팔 유니폼이 흔들리는지 아닌지.”

- 문제없죠. 잠시만요.

윌리엄스가 전화를 건 상대는 기자가 아니라 탬파베이 레이스의 영상분석팀 팀장 트레이시 스캇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카슨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눈물을 쏟기 직전이었다.

- 감독님? 듣고 계세요?

“그래. 어떤가?”

- 아주 조금이긴 한데, 흔들리긴 흔들려요. 패스트볼 때는 흔들림이 없고, 싱커일 때만 흔들림이 있어요. 이건 좀 곤란하네요.

“알겠네. 자료 뽑아서 보내주게.”

- 네. 내일 중으로 보내드릴게요.

전화를 끊은 윌리엄스는 리히텐슈타인 코치에게 눈짓을 하며 더그아웃을 빠져나왔다. 리히텐슈타인 코치는 감정이 잔뜩 들어간 손으로 등을 몇 번 치고 윌리엄스를 따라나왔다. 카슨은 그제야 긴 한숨을 내쉬었다.

“여보세요? 프레디? 혹시 오늘 인터뷰 했소? 아직 라커룸이라고? 내가 금방 가지. 나한테 아주 재미있는 얘기가 있어. 하하하. 그럼. 자네가 아주 좋아할 내용이라네.”

운동장을 가로지르고 있는 윌리엄스가 기자에게 전화를 걸고 있는 것도 모른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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