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전처리, 회귀하다-29화 (30/204)

29 - 미세한 흔들림.

“바로 여기에요.”

“흐음...”

원정 라커룸 한 구석에 트레이시 스캇과 지혁이 노트북을 들고 나란히 앉았다. 트레이시 스캇은 며칠은 감지 않은 게 분명한 머리를 긁적이며 영상을 교차로 틀어댔다. 지금까지 지혁이 등판한 세 경기에서 던진 패스트볼과 싱커의 투구폼을 하나씩 잘라서 편집한 영상이었다.

“아주 살짝 흔들리긴 하는데. 확실히 싱커를 던지기 직전에는 왼팔이 움직이기는 해요. 이걸 찾아내다니... 아마 나보고 하라고 했으면 눈알이 빠졌을 걸요.”

“저도 흔들리는지 몰랐으니까요. 저 정도 흔들리는 걸 타석에서는 대체 어떻게 봤지?”

“타석에 들어서서 아무 생각도 안 하고 문의 왼팔만 보고 있다면 알아챌 수는 있죠.”

트레이시는 능숙하게 영상을 바꿨다. 베이베어스 전에서 슬라이더를 던질 때의 모습이 스크린에 흘러나왔다.

“자. 재밌는 건 이거예요. 슬라이더. 처음으로 슬라이더를 던졌던 1회. 페랄타 타석 초구. 유니폼을 잘 봐요. 안 흔들리죠? 페랄타는 무조건 패스트볼이라고 생각했어요. 지금도 보면 패스트볼 타이밍에 맞춰서 배트가 나오죠.”

“하지만 슬라이더였다...”

“그렇죠. 이 표정 보여요? 나도 보고 놀라서 일부러 한 번 잡아봤어요. 엄청 황당해하는 표정이죠.”

“지난 두 경기 동안 한 번도 안 던졌으니까요.”

“바로 다음 공이에요. 2구. 이것도 슬라이더.”

스크린 속 지혁이 와인드업하기 직전. 왼팔이 살짝 흔들리는 것이 명확히 잡혔다.

“이번엔 흔들리네요?”

“네. 슬라이더를 던질 때는 흔들렸다가 흔들리지 않았다가 해요. 다른 생각 없이 유니폼만 보고 있던 타자들이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하하.”

운이 좋았다. 그 말 밖에는 할 수가 없다.

신에게서 싱커의 재능을 받은 이후, 최대한 지혁의 투구폼으로 싱커를 던지는 데에만 초점을 맞춰 왔었다. 그 과정에서 일종의 버릇이 생겼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유니폼만 주의 깊게 관찰하지 않고는 찾아낼 수 없는 정도였기에 지혁 스스로도, 그리고 코치들도 미처 눈치 채지 못했다.

“어쨌든, 문. 이건 빨리 고치는 게 좋겠어요.”

“그렇네요. 그런데 평소에 아무런 위화감도 없었는데 왜 이런 동작이 생긴 걸까요?”

“난 그냥 영상분석팀 사람이에요. 그 이상은 몰라요. 코치님께 물어 봐요.”

“하아. 네. 자료 편집하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내가 돈 벌어 먹고 살 수 있는 유일한 일인걸요. 하아암. 난 이제 좀 자야겠어요. 며칠을 못 잤더니 여기서 한 발자국도 못 움직이겠네요.”

트레이시는 그대로 지혁의 라커에 기대 순식간에 잠들어버렸다. 잠든 트레이시를 남겨 두고 라커룸 바깥으로 나온 지혁은 곧장 더그아웃으로 향했다.

“어땠나?”

“확실히 안 좋은 버릇이 있긴 하던데요. 고쳐야 합니다.”

“그래. 어쨌든 오늘은 더그아웃에 있을 필요 없네. 제대로 쉬지도 못 했으니까. 시리즈 마지막 날이니 트레이시와 함께 몽고메리로 돌아가도 좋아. 푹 쉬는 김에 집에서 제대로 쉬라는 감독님 지시야.”  리히텐슈타인 코치는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지만 지혁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저도 팀원인데 그럴 수는 없죠. 끝까지 보고 같이 이동하겠습니다.”

“... 그래. 그렇게 해. 감독님께는 내가 얘기하지. 하지만 오늘 공을 던지는 건 안 돼. 혹시라도 폼 때문에 몇 개라도 던져보려고 했다간 내 손으로 트레이시의 차에 태워 보낼 줄 알아.”

“하하. 네. 감사합니다.”

은근히 글러브를 챙겨 쥐려던 지혁이 머쓱하게 웃었다. 더그아웃에서 벗어나 불펜으로 향할 때까지 리히텐슈타인 코치는 지혁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

며칠 뒤. 지혁은 집으로 선수들 몇 명을 초대했다. 휴식일을 맞아 탬파베이 레이스의 경기를 같이 보기로 했다. 제이크 헤이거와 윌리 아르고, 조이 리카드, 그리고 딜런 플로로가 지혁의 집에 쳐들어왔다.

“짜잔! 맥주랑 피자. 내가 큰 돈 썼다.”

“와. 무슨 집이 이렇게 커?”

“그러게. 너 부자냐? 혼자 사는데 방이 두 개나 비네. 여자 숨겨뒀어?”

“헛소리 좀 그만해라. 진짜 넌 언제 정신 차릴래?”

몽고메리로 넘어온 이후 한 번도 시끄러웠던 적 없었던 지혁의 집이 순식간에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지혁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지만 뭐, 이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 이제 막 선수들과 친해지고 있는 시점인데 이 정도는.

“근데 이렇게 큰 집이 뭐 이리 텅텅 비었냐?”

“그래. 뭐라도 좀 가져다 둬라. 아무 것도 없네.”

“어차피 잠만 자는 곳이잖아. 하루 중 반나절은 경기장에 있는데 무슨...”

“그래도, 임마. 이게 뭐야? 빈 창고에 들어온 것 같잖아.”

“제이크. 너희 집도 마찬가지잖아. TV 하나에 냉장고 하나. 그게 다면서 누가 누구한테 그런 소리를 해?”

지혁은 텔레비전 앞에 재빨리 맥주와 피자를 세팅하고는 집 안을 탐험하고 있는 네 사람을 불러앉혔다. 그냥 뒀다가는 몇 시간이고 지들끼리 잘들 놀 녀석들이다.

“경기 시작한다. 빨리 와!”

탬파베이 레이스와 미네소타 트윈스의 경기가 막 시작되는 참이다. 지혁과 네 선수는 나란히 TV 앞에 모여 앉았다.

[ 홈 팀 탬파베이 레이스의 선발 투수입니다. 맷 무어. 올해 출발이 좋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나온 경기에서 2패, 7.23의 평균자책점입니다. ]

[ 제일 큰 문제는 패스트볼 구속이에요. 작년까지만 해도 최소 95마일 정도는 기록해 줬었는데요. 이번 시즌에는 최고 구속도 95마일이 안 나옵니다. ]

[ 이렇게 큰 폭으로 구속이 떨어진 이유가 뭘까요? ]

[ 글쎄요.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만, 확실한 건 지금 무어의 부진은 패스트볼의 구속 하락에서 기인한다는 점입니다. ]

“스프링캠프 때는 97마일도 나왔었는데.”

“그러게. 왜 갑자기 구속이 저렇게 줄었지?”

“흠...”

리카드를 제외한 네 명은 메이저리그 스프링캠프에서 맷 무어의 그 죽여주는 구위를 직접 눈으로 봤었다. 그렇기에 마운드에서 92마일 정도의 구속으로 쩔쩔매고 있는 무어의 모습이 좀처럼 이해가 가지 않았다.

[ 선두타자 브라이언 도지어가 좌측에 떨어지는 안타를 만들어냅니다! 과감하게 1루를 돌아 2루까지! ]

[ 지금도 패스트볼이었어요. 90마일짜리로군요. 전혀 무어답지 않은 피칭입니다. ]

“하. 패스트볼이 왜 저러지, 진짜.”

“쉽지 않겠는데. 어? 뭐야? 왜 저래?”

플로로가 의문 섞인 표정을 지었다. 캐스터도 비슷한 소리를 냈다.

[ 어- 무어가 더그아웃에 신호를 보냅니다. 첫 타자만에 힉키 투수코치가 올라옵니다. ]

[ 어디가 안 좋은가요? ]

[ 부상이라면 급격하게 떨어진 패스트볼 구속이 이해가 됩니다. 황급하게 달려나옵니다. 힉키 투수코치와 트레이너들이 마운드로 나옵니다. ]

TV 속 맷 무어는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트레이너들과 몇 마디를 나누었다. 같은 야구 선수들은 알 수 있었다. 좋지 않은 상황이라는 것을. 곧 힉키 코치가 교체 싸인을 냈다. 카메라에 잡히는 무어는 분노와 체념이 반쯤 섞인 표정으로 마운드를 내려오고 있다.

“보통 부상은 아닌가 본데.”

플로로가 심각한 목소리를 냈다. 지혁은 문득 뒤통수를 세게 맞은 느낌을 받았다. 전생의 맷 무어를 기억해낸 것이다. 저건 인대 부상이었다. 토미 존 서저리를 반드시 필요로 하는. 그간 자신의 앞가림을 하느라 떠올리지 못했던 무어의 부상이 이제 기억나 버렸다.

“팔꿈치...인 것 같은데?”

자기도 모르게 말을 내뱉던 지혁은 급하게 말을 바꿨다. 다들 뭔가 아는 게 있냐는 눈으로 지혁을 돌아보았기 때문이다.

“그냥. 구속이 떨어지는 건 보통 팔꿈치 문제니까. 그렇지, 딜런?”

“그건 그래. 그나저나 팔꿈치면...”

“TJS.”

“로스터가 한 번 제대로 요동치겠네.”

“투수들은 정신 똑바로 차려야겠다. 우리 팀에게는 안 좋은 소식이지만...”

헤이거가 지혁과 플로로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이었다.

“너희한테는 기회일지도 모르잖아.”

“시끄러! 부정 타!”

리카드가 끼어들어 말을 끊었다. 지혁과 플로로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난감한 눈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프라이스에 이은 팀의 차세대 에이스이자 메이저리그 로스터를 확고부동하게 차지하고 있던 맷 무어의 이탈. 많아야 12명에게만 주어지는 메이저리그 투수 로스터는 그야말로 바늘구멍이다. 그리고 지금 그 바늘구멍에 한 자리가 난 것이다.

*

맷 무어의 부상. 처음엔 단순히 미세한 흔들림일 거라고 기대했던 프리드먼에게 비보가 날아들었다.

토미 존 서저리가 필요합니다. 반드시.

주치의 닥터 로즈베리가 볼펜으로 꾹꾹 눌러 쓴 소견서에서 단호함이 묻어나왔다. 결국 무어의 부상은 탬파베이 조직에 속한 모든 사람들에게 거대한 진동을 끼치는 하나의 지진으로 번졌다.

탬파베이 레이스의 수장인 프리드먼의 얼굴에도 그늘이 졌다. 시즌을 시작하기도 전에 3선발이었던 제레미 헬릭슨이 부상으로 이탈했고, 이제는 2선발인 무어까지 장기 DL에 이름을 올린 상황. 프리드먼 단장은 데이비드 프라이스 ? 알렉스 콥 ? 크리스 아처 ? 제이크 오도리찌라는 로테이션에 한 명을 추가해야만 했다.

“세자르 라모스.”

“스윙맨으로 기회야 줄 수 있겠지. 장기적인 선발감은 아니야. 제구도, 스터프도. 다음?”

“에릭 베다드.”

“안 돼. 시행착오는 초반 한 달이면 족해. 더 이상 메이저 레벨에서 통할 수 있는 공이 아니야. 다음.”

“마이크 몽고메리.”

“트리플 A에서 몇 경기는 괜찮았지만 아직은 시기상조야. 마이크... 안 돼. 다음!”

“네이트 칸스.”

“일러. 경험이 모자라. 택도 없지. 기복도 너무 심해.”

프리드먼은 선택의 기로에서 꺼질 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옆에 선 비서 케이트가 손에 쥔 종이를 내려놓았다.

“단장님. 현재 가용 가능한 선수들은 이게 다입니다.”

“그래... 웨이버 공시된 놈들 중에 주워볼 만한 선수는 없겠지?”

“네. 아직 시즌 초반이라서 웨이버로 나온 선수 자체가 적습니다.”

“FA들은?”

“힘듭니다. 에릭 베다드...”

“그래. 에릭보다 좋은 투수가 남아있을 리가 없지. 그 에릭은 더 이상 기회를 줄 수 없고. 생각할 시간이 좀 필요해. 수고했어, 케이트.”

*

- 프리드먼이 자기 사무실에 틀어박혔어. From. 케이트 윈슬렛.

도미니카에 날아온 지 한 달 정도가 되어간다. 그의 하얗던 얼굴에도 조금은 구릿빛이 돌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패트릭은 핸드폰 액정에 뜬 문자 메시지 내용을 보며 모처럼 옅은 미소를 띠었다. 프리드먼은 힘든 결정을 할 때면 혼자 사무실에 몇 날 며칠 틀어박히는 버릇이 있었다. 시즌을 이제 막 꾸려나가야 하는 입장에서 머리 꽤나 아픈 것이 분명했다.

- 오케이. 언제나 고마워. - From. 패트릭 에이버리.

문자를 보내자마자 곧장 답장이 왔다. 옅은 미소를 짓던 패트릭의 표정이 이번엔 씁쓸하게 변했다.

- 고맙긴. 자긴 언제 와? 벌써 못 본지 한 달이나 되어 가는데. 보고 싶어, 허니♡케이트라는 이 여자는 제대로, 아주 제대로 착각하고 있었다. 지혁의 입단 과정에서 수없이 레이스의 프런트 오피스를 찾았다.

그 과정에서 자주 눈이 마주쳤을 뿐이다. 대기하고 있는 시간 동안 그냥 있으면 어색하니 한 번 웃어 주었을 뿐이다. 그리고 프리드먼에게 줄 커피가 식어가자 그저 아까워서 건넸던 것뿐이다.

‘대체 왜 내가 자기를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영화 속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생긴 사람이 웃으며 커피를 건넨다는 게 어떤 신호로 받아들여졌는지 패트릭은 실감하지 못했다.

하지만 케이트와 친해져서 나쁠 건 없었다. 프리드먼의 일정, 프리드먼의 행동, 프리드먼의 생각. 모든 것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케이트였으니까. 케이트는 매우 프로페셔널한 비서였지만, 거부할 수 없는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간혹 이성의 끈을 놓아버리기도 한다. 지금의 케이트가 딱 그런 상태였다.

‘어떻게 됐든 지금 이 끈을 놓을 수는 없지.’

패트릭은 잠시 고민하다 핸드폰을 들어 답장을 보냈다.

- 아직은 잘 모르겠어. 하지만 한 번 가야 할 것 같아. 도착해서 연락할게.

물론 패트릭은 몰랐다. 답을 보내야 할지 주저하던 몇 분 정도가, 저 멀리 떨어진 세인트 피터스버그에서 핸드폰을 들고 두근거리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던 케이트에게는 애타게 답을 바라던 바로 그 타이밍이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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