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전처리, 회귀하다-30화 (31/204)

30 - 승격과 강등.

몽고메리 비스킷츠의 선수단에는 긴장감이 맴돌았다. 무어의 부상 이후 팀을 찾아오는 구단 관계자들이 부쩍 는 탓이다. 트리플 A 팀인 더램 불스 관계자들과 메이저리그 팀 관계자들이 쉬지 않고 감독실을 드나들었다. 그 때마다 선수들 사이에는 묘한 흥분이 내려앉았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싱글 A 팀인 샬럿 스톤크랩스의 직원들이 몽고메리를 찾을 때에는 다들 마른침을 삼키며 말을 잃었다. 샬럿 쪽에서 사람이 올 때마다 마음이 편한 건 오직 지혁 한 명 뿐이었다.

“넌 왜 이렇게 편해 보이냐?”

“뭐가?”

“싱글 A로 떨어질지도 모르잖아.”

다크 서클이 거의 광대뼈까지 내려온 샬럿의 직원들이 우루루 빠져나가는 것을 가리킨 헤이거가 물었다. 더블 A 수준의 변화구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헤이거는 분명 조바심이 날 법 했다.

“난 아직 괜찮잖아. 성적도 나쁘지 않고.”

“저번 경기에서 거하게 털렸잖아.”

“그 전에 세 경기 잘 던진 건 생각 안하고?”

“짜식... 이거 완전 천하태평이네.”

지혁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헤이거의 말처럼, 버밍햄과 치른 네 번째 등판에서는 한 경기 제대로 말아먹었다. 무엇보다 싱커의 버릇을 잡는 게 생각보다 어려웠다. 던지는 곳, 던지는 공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의식하면서 마운드에 선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주 작은 미세한 변화를 없애기 위한 노력은 생각보다 훨씬 더 큰 집중을 요했다. 마운드 위에서 그 쪽에 정신이 팔리니 공의 구위와 제구가 동시에 망가져 버렸다.

3.2이닝 6실점. 투구수 91개. 전형적으로 망친 경기였다.

하지만 프리드먼의 약속은 여전히 유효했다. 정말 처절하게 망하지 않고서야 웬만해서는 지혁의 자리는 보장될 것이다. 매일 같이 찾아오는 승격과 강등에 대한 설렘과 공포, 불안에서 한결 자유롭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버티니 마이너리그 생활도 나름 할 만 했다.

“문! 불펜에 지금 제이크 있나?”

“헤이거 말씀하시는 건가요?”

“아니! 불펜에 그 놈이 왜 있어? 제이크 톰슨 있냐고.”

저 쪽 멀리서 리히텐슈타인 코치가 큰 소리로 지혁에게 물었다.

“아까 불펜피칭 하고 있었어요. 지금 있을 겁니다.”

“내가 잠깐 본다고 말 좀 전해 줘. 라커룸으로 오라고 해.”

“네.”

한 손에 서류철을 잔뜩 든 리히텐슈타인 코치가 성큼성큼 더그아웃 안으로 사라졌다.

“톰슨인가 보다. 아마 올라가겠지?”

“그렇겠지. 싱글 A로 떨어질 성적은 아니잖아.”

“확실히 공도 빠르고, 더블 A에도 오래 있었고. 차례가 오긴 했지. 더램에 있는 코치들은 불펜 취향의 투수들을 선발로 잘 바꾸거든.”

헤이거가 마치 들으라는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평소의 헤이거처럼 생각 없이 나오는 대로 뱉는 말이 아닌 느낌이었다. 지혁은 자기도 모르게 코웃음을 치며 물었다.

“넌 갑자기 그런 걸 어디서 들었어? 과외라도 다니냐?”

“응.”

“뭐?”

“과외는 아니어도. 내가 A를 주면 나한테 B를 주는 사람은 있지.”

“그게 무슨 소리야?”

“마이너리그 전문 기자 한 명이랑 내가 좀 친하거든. 그 사람이 기자가 되기 전부터. 가끔 밥이나 한 번 먹으면서 인터뷰 비슷하게 해 주고 전체적인 정보를 얻는 거지.”

헤이거는 목소리를 잔뜩 낮추며 은근히 물었다.

“소개 한 번 시켜줄까?”

“누굴? 그 기자를?”

“그래. 너도 한 명쯤 알고 있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그 사람 플로리다 쪽 태생이라서 우리 팀에 빠삭하다니까. 완전 디테일해.”

“뭐... 나쁘진 않겠지. 알겠어. 한 번 만나 보자.”

*

지혁은 불펜에 들어가 톰슨을 라커룸으로 보내고 자신이 그 마운드에 섰다. 불펜 포수를 자리에 앉히고, 천천히 와인드업한 이후 싱커를 뿌린다.

나쁘지 않은 무브먼트. 나쁘지 않은 제구. 지금 당장은 볼의 움직임이 중요하지는 않았다. 지혁은 투수 인스트럭터에게 고개를 돌렸다.

“방금 팔 움직였나요?”

“응.”

“와~ 진짜 미치겠네. 방금 전에도 안 움직이려고 해 봤는데.”

“성급해하지 마. 의식하면서도 투구에 영향을 주면 안 돼. 이건 단번에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 몸에 저절로 익어야 되는 거니까 시간이 필요해.”

하필이면 싱커를 던질 때에만 두드러지는 팔뚝의 미세한 변화를 잡아내는 연습을 반복하고 있었다. 카슨에게 버릇을 발각당한 뒤 지혁은 며칠째 이 연습에만 매달리고 있었다. 투수 인스트럭터의 말대로, 분명히 이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평소의 투구폼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아야 한다. 구위와 제구에도 신경써야 한다. 온전히 집중해야 할 것들을 놔두고, 팔이 흔들리지 않는지도 점검해야 한다. 누가 와서 팔을 딱 잡아줬으면 싶을 정도였다. 어째서 싱커를 던질 때만 이 놈의 팔이 미세하게 흔들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계속해서 던져보는 수밖에 없어. 당분간은 무조건 의식하고 던져. 싱커를 던질 때 팔이 정확하게 멈춰있을 수 있도록 만들고, 그걸 몸에 배게 만들어야 해.”

투수 인스트럭터는 단호하게 말했다. 지혁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정공법은 그게 맞다. 쉬운 길은 아니지만, 또 매우 오랜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일단 지금의 상황을 타개하려면 인스트럭터의 말대로 해야만 한다.

“계속 부탁드립니다. 팔만 지켜봐 주세요.”

지혁은 계속 던졌다. 당분간은 이 방법 뿐이었다.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다. 노력은 지혁이 가장 잘 하는 일이니까. 믿어야 한다.

*

“고생했네. 오늘 피칭은 여기까지야.”

“... 네.”

“아쉽겠지만 어쩔 수 없지. 잘 했어. 저번보다는 훨씬 나아졌어.”

브래디 윌리엄스가 직접 마운드를 방문했다. 지난 경기에서의 6실점 난조를 생각해보면 오늘의 경기는 확실히 그보다는 괜찮았다.

펜서콜라를 다시 만난 경기, 5이닝 3실점. 하지만 타선이 받쳐주지 못한 패전의 위기. 6회에 올라와서 첫 타자를 상대했지만 제구가 빗나가며 볼넷을 내주었고, 윌리엄스 감독이 올라왔다. 투구수도 방금의 볼넷으로 딱 100개를 채웠다.

아쉬움이 짙게 남았지만 어쩔 수 없다. 지혁은 윌리엄스 감독에게 공을 건네고 마운드를 내려왔다.

‘공들이 너무 애매했어.’

여전한 답보 상태였다. 준비 동작에서 팔이 흔들리는 것을 고려하다가 오히려 몰리는 공들이 많아지는 것. 아주 조금씩 좋아지고 있었지만 당장 로테이션을 돌아야 하는 지혁의 입장에서는 마운드에 오를 때마다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것이 아니다. 난간에 마중 나와 있는 동료들과 간단하게 하이파이브를 하며 글러브를 벗었다.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음료를 벌컥벌컥 들이마신다. 차가운 이온 음료가 단번에 몸 속으로 들어오면서 머리가 띵했다. 마운드 위에서 뜨겁게 달아올랐던 몸과 머리가 모두 적응하지 못해 아우성치는 것 같았다.

선수들은 보통 그런 투수들에게 접근하지 않는다.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 종족이라는 걸 다들 알고 있다. 몽고메리의 선수들도 마찬가지였다. 패전을 눈앞에 둔 지혁에게 접근하는 선수가 없었다. 한 사람만 빼고는.

“고생했어. 오랜만이다.”

지혁은 낯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유니폼을 입지 않은 루크 메일리가 지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루크?”

“오늘 올라왔어. 다시 콜업이야.”

“이렇게 빨리?”

“왜? 내가 온 게 불편해?”

“아니, 그건 아니야. 반갑다. 다시 만나서.”

“카살리가 내일 즈음 트리플 A로 올라갈 거야. 메이저 팀 포수 한 명이 장기 DL에 올라갔어. 그래서 내가 다시 올라오게 됐고. 운이 좋았지.”

메일리는 쑥스러운 듯이 웃었다. 그가 싱글 A로 내려가던 날의 그 쓸쓸한 뒷모습을 기억하고 있던 지혁도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메일리는 지혁과 같은 음료수를 마시며 물었다. 마치 중요한 말을 하려는 것처럼 진중해진 표정으로.

“잠깐 나랑 얘기 좀 할까?”

“당연하지. 얘기해.”

메일리는 지혁의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여기서 지금 이런 말을 하기는 좀 그렇지만. 고맙다는 얘기를 하고 싶어서.”

“뭐가?”

“내가 싱글 A로 내려갈 때 같이 있어줬던 거.”

이제 막 전쟁터 같던 마운드에서 내려왔다는 것도 잊을 만큼 낯간지러운 말이었지만, 메일리의 표정과 말투가 너무 진지해서 농담으로 넘길 수도 없었다. 덩치랑 외모는 전형적인 미련 곰탱이처럼 생겨가지고는 성격도 빼다 박은 녀석이다.

“... 그래. 뭐, 그 때는 그냥 그러고 싶었어.”

“마이너리그에서는 다들 자기 앞길 신경 쓰기도 바빠서 남들 챙기기는 어렵잖아. 나도 그랬고. 그런데 넌 나를 신경 써 줬어. 막상 샬럿으로 돌아갈 때가 되니까 생각이 많이 나더라. 고마웠다.”

손발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지만 지혁은 애써 웃었다.

“얘기 들었어. 투구할 때 안 좋은 버릇이 있어서 고치고 있다며?”

“응.”

“내가 도와줄게. 실제로 던지지 않아도 돼. 플레이트에 앉아만 있어 줄게. 혼자 쉐도우 피칭하면서는 잘 알 수 없으니까.”

지루하고 반복적인 훈련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지혁의 파트너를 자처한 메일리에게서 진심이 느껴졌다. 지혁은 메일리와 간단하게 주먹을 맞댔다. 오늘의 투구는 만족스럽지 않았지만 기분이 훨씬 나아졌다. 물론 손발이 오그라드는 건 사양이지만.

*

이튿날 몽고메리의 로스터에 변화가 있었다. 커트 카살리와 제이크 톰슨이 트리플 A로 올라갔다.

“메이저리그에서 보자.”

“축하해, 제이크.”

누군가를 올려보낼 때마다 선수들은 진심 어린 축하를 보내곤 한다. 다신 보지 말자며. 다시 볼 거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다시는 더블 A로 내려오지 말고 악착같이 달라붙어서 결국 꿈의 무대로 올라가라는 인사를 건넨다.

카살리와 톰슨이 커다란 가방을 매고 버스에 올라타는 것을 보고 나서야 선수들은 자기 자리를 찾아 갔다. 모두들 끊임없이 되뇌이고 있다.

‘메이저리그에서 보자.’

저들에게 건넨 인사는 본인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이기도 하다. 저들처럼 언젠가 트리플 A로, 또 메이저리그로 향하고야 말겠다는 의지의 표현인 셈이다.

반면 내려가는 선수들도 있다. 알레한드로 세고비아는 시즌 최악의 스타트를 했다. 탬파베이에서 매우 드물게 수비력이 약했던 그는, 방망이로 가능성을 보여주지 못하면 자리잡기 힘든 선수였다. 그는 더블 A로 처음 승격된 올 해 떨어지는 변화구에 전혀 대처하지 못했다.

개막한지 한 달이 지난 상황에서 타율이 .161. 그는 다시 샬럿으로 돌아가야 했다. 지혁과 몇몇 선수들만이 쓸쓸하게 떠나는 세고비아를 위로했다.

한 번 요란한 변동이 있은 뒤의 연습 분위기는 놀랍도록 차가워진다. 누군가는 위를 향한 의욕을 불태우고 있고, 또 누군가는 아래로 떨어질까봐 전전긍긍해 하고 있다. 하지만 야구는 계속된다. 언제나 같은 자리에 같은 모습으로 존재하는 리버워크 스타디움에서.

더블 A를 거쳐 가는 곳이라고 여기는 선수들도, 더블 A를 본인의 한계라고 절감하고 있는 선수들도. 오늘도 야구를 해야 한다.

“자, 다시 목소리 내면서 하자! 마이 볼!”

투수와 포수, 내야수들이 함께 하는 내야 상황 훈련. 지혁은 일부러 목소리를 높였다. 과거 수도 없이 승격과 강등을 마주했던 지혁은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가장 잘 아는 선수다.

지금은 오직 눈앞의 야구공에만 집중해야 한다. 지혁뿐 아니라 팀원들 모두가 그래야 한다. 그게 하루가 멀다 하고 승격과 강등이 덮쳐오는 마이너리그에서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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