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 이상신호.
5월에 들어섰다.
탬파베이 레이스의 스타트는 매우 좋지 않았다. 헬릭슨과 무어의 부상으로 선발 로테이션이 꼬인 것은 물론이고, 부동의 에이스인 데이비드 프라이스마저 컨디션 난조에 시달렸다. 탬파베이는 애초에 타력이 아닌 투수력으로 승부를 보는 팀. 그런 팀의 마운드가 흔들린다는 것은 짙은 적신호가 켜진 것이나 다름없다.
“다음 질문 받도록 하죠. 존?”
“시즌이 시작한지도 두 달이 다 되어갑니다. 아메리칸리그 동부지구에서 5할 승률을 기록하지 못하고 있는 유일한 팀인데요. 프리드먼 단장님, 반등의 여지가 있다고 보십니까?”
“이런, 존. 아직 반등이라는 말을 하기엔 너무 이르지 않나요?”
“볼티모어가 선두, 그 밑으로 5할 승률의 뉴욕 양키스, 보스턴 레드삭스, 토론토 블루제이스가 있습니다. 지금 탬파베이는 공동 2위 그룹과도 벌써 3경기나 차이가 나는데요.”
“3경기밖에 차이가 안 난다고 해도 무방하죠. 아직 그런 말씀을 드리기는 이릅니다.”
프리드먼은 언론을 대할 때 항상 웃는 얼굴로 말하기로 유명한 사람이다. 하지만 최근의 그는 쉽게 웃지 못하고 있었다. 모든 일이 전부 꽉 막혀 있다. 마음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 끈덕지게 달라붙는 기자들에게 비즈니스적인 미소를 짓는 일도 힘에 부칠 정도인 것이다.
“데이비드 프라이스의 트레이드 시기를 저울질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에 대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하...”
프리드먼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기자들의 이리떼 같은 눈빛이 그의 입만을 지켜보고 있다.
“노코멘트 하죠.”
“올해 안에 트레이드가 확실시 되고 있습니다. 그렇게 기사를 쓸 예정이구요. 괜찮겠습니까?”
“아니요. 그건 안 됩니다.”
“그럼 한 말씀 해 주시죠!”
“괜찮다면 잠시만 쉬었다 하죠. 제가 급한 전화를 좀 받아야 해서. 잠시만요.”
프리드먼은 기자회견장 옆에 난 작은 문으로 빠져나왔다. 회견장 안의 후끈한 열기가 순식간에 가시며 찬바람이 머릿속으로 밀려들었다.
케이트가 곧장 프리드먼을 따라나왔다. 그녀는 늘 하던 대로 아무것도 묻지 않고 담배를 한 개비 꺼냈다.
“땡큐, 케이트.”
힘없는 목소리로 담배를 받아든 프리드먼이 벽에 기대 불을 붙인다. 문 하나 너머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기자들의 표정이 하나하나 떠오른다.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많은 질문들. 기삿거리를 찾아내기 위해,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 침을 질질 흘리며 헐떡이고 있는 기자들. 성적이 좋다면 아무렇지도 않을 저 표정들이 지금은 거대한 압박으로 다가온다.
메이저리그 단장에게 이런 압박과 부담은 일상이다. 지금보다 성적이 더 안 좋을 때도 있었다. 프리드먼의 방식이 틀렸다고 주장하는 수도 없는 사람들과 맨몸으로 맞서 싸워야 하던 때도 있었다.
그 때도 프리드먼은 어떻게든 위기를 헤쳐 넘겨 왔다. 누구도 주목하지 않던 숫자들에 집착하다시피 매달렸고, 남들이 주목하지 않은 선수들을 데려다 쏠쏠하게 써먹었다. 마운드와 수비를 우선시하는 정책으로 유망주들을 키워냈고, 그 유망주들을 성장시켜 트레이드해서 더 좋은 유망주를 받아왔다.
그렇기에 지금의 탬파베이는 오롯이 프리드먼의 팀이었다. 그의 생각대로 움직였고, 그가 이끄는 대로 길을 걸었다. 만년 꼴지 팀이던 탬파베이는 언제라도 대권에 도전할 수 있는 팀으로 탈바꿈했다. 앤드류 프리드먼은 그렇게 메이저리그에서도 손꼽히는 천재 단장이 되었다.
하지만 올해는 그 어느 때보다 힘들었다. 고질적인 문제였던 홈 구장의 연고지 이전 문제, 리빌딩과 컨텐딩 중에서 외줄타기를 하고 있는 팀 상황, 역대급 패키지를 얻어낼 수 있을 것이라는 호들갑이 떠들썩한 프라이스의 거취... 그리고 프리드먼과 탬파베이의 계약까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지금껏 맨정신으로 버틴 게 용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단장님. 회견장을 너무 오래 비워두시면 곤란합니다.”
“후우. 나도 알아, 케이트.”
잔뜩 타들어간 담배를 비벼 껐다. 프리드먼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단장으로 부임한 이후 가장 힘겨운 봄이 이제 막 지나가고 있었다.
*
삐리리- 삐리리-
“네~ 나갑니다.”
소파에 드러누워 야구를 보고 있던 지혁이 문을 열었다. 반가운 얼굴이 서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어서 와요. 잘 지냈습니까?”
“뭐, 그냥 그랬죠. 도미니카는 너무 더워서.”
살짝 탔지만 여전히 꽃미모를 발산하는 패트릭이 맥주를 흔들며 들어왔다.
“이건 집들이 선물.”
“꼴랑 맥주가 다입니까?”
“이 집이 내 선물이었다는 거 잊었습니까?”
“선물이라니. 그건 내기였잖아요.”
“흠, 흠.”
“어쨌든 앉아요. 오랜만에 봤는데 세워둘 순 없지.”
패트릭은 자리에 앉자마자 버릇처럼 노트북을 꺼내고 핸드폰을 뒤적였다.
“몸은 좀 어떻습니까?”
“나야 괜찮죠.”
“아픈 데는 없고?”
“깔끔해요. 그나저나 당신은 그러다가 어디 탈나는 거 아닙니까? 쉬긴 했어요? 그러다 죽어요.”
“내 신경 쓸 시간에 싱커나 어떻게 해요. 문제 있다면서.”
하하.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 징글징글한 사람.
“고치고 있어요. 뭐, 거의 다 고쳤다고 해야 되나. 이제는 팔이 안 흔들려요. 여전히 신경 쓰면서 던지고 있어서 구위나 제구가 완벽히 좋아지지는 않았지만. 점차 좋아질 거예요.”
“다행이군요.”
치익. 치이익.
지혁이 거품이 끓어오르는 맥주 한 캔을 패트릭에게 건네며 물었다.
“페르난도 멘데스하고는 좀 친해졌습니까?”
“네.”
“그래서요?”
“그 다음은 아직 작업중이에요. 그 친구 사촌이 에이전트라서. 쉽게 붙을 수가 없어요.”
패트릭은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트위터를 정신없이 살폈다. 그가 팔로우하는 수많은 기자들의 계정에서 초 단위로 새로운 정보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저걸 다 볼 수는 있는 건가?’
볼 때마다 신기한 능력이다. 마우스를 쥔 손과 핸드폰을 쥔 손을 동시에 움직이는 일. 그러면서도 입으로는 다른 소리까지 할 수 있다. 뇌가 동시에 다른 일을 하는 것 마냥. 잠시 감탄하고 있던 지혁에게 패트릭이 말을 꺼냈다.
“멘데스가 당신 칭찬을 꽤 하더군요. 인상 깊었다던데.”
“그래요? 정말입니까?”
“언제 메이저리그에 올라가느냐, 싱커는 꽤 좋았는데, 뭐 그런 말들 하더군요. 내가 데려가려는 팀 마이너리그에 당신이 있다고 했더니 흥미로워하기도 했고.”
지혁은 페르난도 멘데스를 떠올렸다. 도미니카 산 후안에서 만났던 멘데스는 확실히 지혁에게 친근하게 굴었다. 그의 무자비한 2루 태그도 머릿속에서 재생된다. 전생의 그는 홈플레이트를 지배하는 왕이었다.
“걔는 꼭 잡아야 해요, 패트릭.”
“나도 그러고 싶습니다.”
“장난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로. 걔가 설령 우리 팀으로 못 온다고 해도 무조건 붙잡아요. 메이저리그에서 제일가는 포수가 될 거니까.”
“아직 그 정도 공격력은 아닌데요.”
“터져요.”
“어떻게 압니까?”
“무조건 터져요. 말했었지 않나요? 내가 감이 좋다고.”
패트릭은 마침내 핸드폰에서 눈을 떼고 지혁을 올려다보았다.
“그 감 때문에 내가 방 두 개 딸린 집 얻어낸 거잖아요. 내 감 믿어요.”
“아직 한 번입니다. 우연이잖아요.”
“하하... 어떻게 하면 믿을래요?”
“뭘 해도, 난 다른 사람의 감은 안 믿어요.”
“하여간 고집은 진짜. 여튼 꼭 붙잡아요. 어마어마한 선수가 될 거니까.”
패트릭은 다시 시선을 노트북 화면으로 돌렸다. 그 때 패트릭의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액정에 뜬 이름을 보고 패트릭이 흠칫거렸다. 잠깐 눈치를 보던 패트릭은 가벼운 한숨을 쉬고 전화를 받았다.
“네. 패트릭입니다.”
수화기 속 너머로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지혁의 입꼬리에 미소가 걸렸다.
‘오호라, 여자? 제대로 걸렸다. 한 번 제대로 놀려먹어야지. 흐흐.’
반대로 패트릭의 표정은 굳어가고 있다. 통화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표정이 점점 안 좋아졌다.
패트릭은 거의 말을 하지 않고 주로 듣고 있는 쪽이었지만, 낮은 침음을 흘리거나 들고 있던 볼펜의 꼭지를 질겅질겅 씹는 폼이 좋지 않은 전화인 것은 분명해 보였다. 한참을 그러고 있던 패트릭이 전화를 끊으려는지 인사를 건넸다.
“고마워, 케이트. 내가 다시 연락할게.”
전화를 끊으려던 패트릭이 주춤거렸다. 누가 봐도 명백히 지혁의 눈치를 살피는 모양이었다. 한참을 핸드폰 속 목소리를 듣고만 있던 패트릭이 마침내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알겠어. 나도 보고 싶어.”
“우하하핫!”
패트릭의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지혁은 처음 보았다. 눈물 나게 웃긴 장면을 지혁은 참아내지 못했다.
*
패트릭은 당분간 지혁의 집에 머물기로 했다. 지혁의 등판도 한 차례 지켜보기로 했고, 또 나름대로 바쁜 일이 있는 모양이었다. 새벽부터 나가서 이튿날 돌아오는 일이 허다했다. 다른 지역으로 며칠간 훌쩍 떠나기도 했다.
케이트라는 여자와의 전화통화 이후 뭔가 바쁜 일이 생긴 게 확실했다. 아직 지혁에게 무슨 일인지 정확하게 얘기하지는 않았지만, 걸리는 일이 생긴 게 분명하다.
그러는 동안 5월의 절반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지혁과 메일리는 거의 매일 붙어있다시피 하며 쉐도우 피칭을 반복했다.
그렇게 될 때까지 하면, 결국 된다.
팔을 움직이지 않아야 한다는 의식이 마운드 위에서 마침내 무의식화하기 시작했다. 흔들지 않아야 한다는 의식을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패스트볼을 던질 때도. 슬라이더를 던질 때도. 그리고 싱커를 던질 때도. 지혁의 유니폼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게 되었다.
5월 16일. 시애틀의 더블 A 구단인 잭슨 제너럴스와의 경기에서 지혁은 원래의 모습을 완벽하게 되찾았다.
뻐엉!
“스트라이크! 배터 아웃!”
팔뚝을 타고 흘러내리는 땀방울이 하나도 거슬리지 않았다. 싱커가 제대로 춤을 춘다. 홈 플레이트 앞까지 다가가서 급격하게 꺾이면서 가라앉는다. 타자들이 있는 힘껏 돌린 방망이는 허공을 가를 뿐이다.
“굿!”
마지막 공을 미트에 받자마자 상대 벤치 쪽으로 휙 던져버리고 걸어온 메일리가 미트를 내민다. 지혁도 글러브로 미트를 툭 쳐 주며 화답했다.
“버릇 사라졌지?”
“어. 날 그렇게 앉혀 놨으니 이 정도는 해야지.”
“하하.”
싱커를 던질 때 지혁에게 안 좋은 버릇이 있다는 것을 파악하고 나온 상대 타자들은 타석에서 당황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같은 폼에서 나오는 패스트볼과 싱커는 공이 변화하기 전까지는 분간해내는 게 불가능에 가깝다.
쉐도우 피칭을 반복하는 동안 두 공을 던질 때의 폼이 완벽하게 같아진 덕도 있었다. 폼이 일정해지고 공을 놓는 지점이 완벽하게 형성되자 공의 구위도 올라갔다.
볼이 끝까지 회전하며 살아 들어가는 탓에 타자들의 방망이도 훨씬 많이 부러졌다. 먹힌 땅볼이 많이 나오기 시작했고, 몽고메리의 내야수들은 깔끔하고 안정적인 수비로 지혁을 뒷받침한다. 카슨이 발견한 지혁의 나쁜 버릇을 고치는 과정에서 오히려 공이 성장했다.
신도 지혁을 칭찬했다.
“훨씬 좋아졌군. 이제 브랜든 웹의 공하고 얼추 비슷해졌어.”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요. 신님께서 언제 그렇게 말해줄지 기다리고 있었는데.”
“흐흐흐. 자네의 노력은 정말이지 날 즐겁게 만든다네. 아주 기대 이상이야. 싱커의 재능을 받은 게 지난 9월이었으니 반 년 만에 여기까지 왔군.”
신은 아주 즐거워 보였다.
가장 노력했던 선수였기에 기회를 받았고 재능을 받았다. 그리고 그 노력의 대가를 이번 생에서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싱커의 구위는 갈수록 메이저리그 레벨에 가까워지고 있다. 한 번 실패한 생을 살면서 노하우를 익힌 지혁은 필요한 능력을 개발하기 위해 딱 필요한 노력을 쏟아붓고 있다.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중이다. 신은 본인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적어도 지금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