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 샘 호킨스.
“오늘은 어디로 갑니까?”
“디트로이트.”
“얼마나 있다가 와요?”
“모릅니다.”
정신없이 짐을 꾸리는 패트릭을 바라보며 지혁은 쯧, 하고 혀를 찼다. 에이전트는 참 피곤한 직업이다. 짧은 시간에 수십 곳을 오가는 사람들이다.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아니지. 패트릭이 피곤한 사람인가?’
문득 전생의 에이전트들을 떠올렸다. 그들과 가까운 관계는 아니었지만, 이 정도로 바빠 보이지는 않았었다. 옷을 입으면서도 한 손에 든 서류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는 패트릭이 지독한 사람이다. 어쩌면 일을 사서 만드는 사람일지도 모르고.
“아, 패트릭.”
“왜요?”
“내 팀메이트가 기자 한 명을 소개시켜 주겠다고 했거든요. 인터뷰 괜찮죠?”
“네. 사고칠 거만 아니면.”
“사고칠 일이 뭐가 있겠어요? 그냥 한 번 만나보라길래 나가는 건데, 기자니까 뭐 인터뷰 하자고 하겠죠.”
“상관없어요. 쓸데없는 소리만 하지 마세요.”
“그러니까 그 쓸데없는 소리가 대체 뭡니까?”
양모 니트 속에 머리를 쑤셔 넣은 패트릭이 삐쳐 올라간 머리를 휙휙 털어냈다.
“탬파베이 레이스 선발 로테이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 삐걱거리고 있는 팀의 전망을 어떻게 보느냐. 메이저리그 콜업 후보로 거론되는 걸 알고 있느냐. 기타 등등. 특히 메이저리그 팀 이야기에는 애매하면 무조건 노코멘트 해야 합니다. 그 기자가 무슨 말을 어떻게 바꿔서 쓸지는 아무도 몰라요.”
“하하. 그건 당연하죠. 나만 믿어요.”
지혁이 자신있는 모습으로 웃어넘기자, 오히려 패트릭의 표정이 안 좋아졌다.
“잠깐. 믿으라고 했습니까? 인터뷰 많이 해 봤어요?”
“아아.”
지혁은 순간 당황했다. 내가 굴러먹은 짬밥이 20년이 넘어! 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패트릭과 같이 사는 몇 주 정도 나름대로 정겨운 마음을 갖게 되어 방심한 탓이다. 지혁이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으며 답했다.
“내가 고등학교 때는 또 한국에서 최대어 소리 들었던 놈이라서요. 기자들이랑 인터뷰는 엄청나게 해 봤죠. 물론... 미국 와서는 거의 못 해봤지만.”
“아무 것도 모를 때잖아요.”
“뭐... 그건 그렇죠.”
“프로 선수로써 인터뷰 한 경험 없죠?”
패트릭이 날카로운 눈빛을 빛냈다.
“네, 뭐... 아! 메이저리그 스프링캠프 때. 그 때 지나가는 말로 한 번 인터뷰 했었어요. 한국에서 온 특파원하고.”
“하. 어쨌든 조심해요. 기자들이란 속을 알 수 없는 사람들이니까. 웬만해서는 내가 같이 나가겠는데 이번 일은 워낙 급해서.”
“그래요. 걱정할 필요 없어요. 그런데 이번엔 무슨 일로 가는 겁니까?”
“무슨 일이긴. 당신이랑 관련된 일이니까 가죠. 자세한 건 좀 윤곽이 나오면 알려줄게요. 시간이... 벌써 두 시네. 나 갑니다.”
패트릭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갔다. 지혁은 그제야 놀란 마음을 가라앉혔다.
“와. 내가 생각해도 기가 막힌 임기응변이었다. 큰일 날 뻔 했네.”
패트릭은 눈치가 빠르다. 게다가 속도 알 수 없다. 일반 사람들의 생각이라면 지혁이 회귀했다는 사실은 상상조차 하지 못하겠지만, 패트릭이라면 뭔가 이상하다는 낌새를 알아챌지도 모른다. 혹시 모르니까.
“조금 더 조심해야겠네. 어리버리타는 연기라도 해야 되나.”
*
“여보세요? 어디냐?”
“나 구장 근처야. 가고 있어. 넌?”
“나는 도착했어. 에이브런의 브런치 하우스. 맞지?”
“어. 들어가 있어. 같이 가는 중이니까.”
“그래.”
먼저 약속 장소에 도착한 지혁은 세련된 분위기의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창문 옆 한 자리를 차지하고 핸드폰을 뒤적였다. 오랜만에 몽고메리 비스킷츠 구단 홈페이지에 들어가 관련 기사들을 찬찬히 훑었다.
“흐음...”
몽고메리의 분위기가 조금 좋지 않은 탓에, 비관적이거나 냉소적인 내용을 담은 기사들이 꽤 많이 보였다. 특히 투수진에 대한 비판이 눈에 띄었다.
차례차례 절차를 밟고 있다가 더블 A에서 벽에 가로막힌 1선발 빅터 마테오는 여전히 정체되어 있고, 작년 싱글 A의 1선발이었던 딜런 플로로는 적응에 실패했다. 토미 존 서저리를 받고 복귀한 그레이슨 가빈은 나아졌다고 볼 수는 없는 성적이다. 5선발로 테스트를 받고 있는 자레드 모르텐센은 간신히 버텨내는 수준.
“이런 와중에 주목할 만한 투수는 이번 시즌 새로 합류한 한국인 좌완 문지혁이다. 시즌 첫 경기에서 7.1이닝 2피안타 무실점을 기록하며 좋은 시작을 한 그는 로테이션을 꾸준히 지키는 유일한 투수다. 7경기에 선발 등판해 3승 3패, 3.14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고 있다.”
자신의 이름이 담긴 기사를 소리내어 읽은 지혁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억지로 참아내려고 했지만 새어나오는 미소는 감출 수 없다.
“눈에 띄는 점은 문지혁의 그라운드볼 유도 능력이다. 패스트볼과 싱커의 투 피치를 이용해 빗맞은 타구를 만들어내는 능력이 눈에 띈다. 문지혁은 올 시즌 남부리그 투수들 중 가장 높은 그라운드볼 비율을 기록하고 있다.”
흐흐. 마침 커피를 가져다주러 온 직원이 이상한 눈빛으로 지혁을 흘겨봤다. 혼자서 핸드폰을 바라보며 실실 웃고 있는 거대한 덩치의 남자는 충분히 이상하게 보일 법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지혁은 다른 기사들을 읽어나갔다.
그러던 중 브런치 가게의 문이 열리고 두 사람이 들어왔다.
“문! 나 왔다. 안 늦었지?”
“아, 제이크.”
헤이거가 지혁의 맞은편에 털썩 앉았고, 헤이거의 뒤를 따라 안경을 낀 푸른 눈의 남자가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반갑습니다. FOX 스포츠에서 에디터로 일하고 있는 샘 호킨스입니다.”
“네. 저도 반갑습니다. 문지혁입니다.”
“제가 이 친구에게 꽤 오래 로비했거든요. 한 번 만나게 해 달라고. 드디어 인터뷰할 수 있게 됐네요. 하하.”
샘 호킨스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명함 하나를 내밀었다. 현재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스포츠 뉴스 플랫폼 중 하나인 FOX의 로고가 박힌 명함이 반짝거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헤이거에게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플로리다 쪽에서 유명하시다면서요?”
“하하. 유명하긴요. 그냥 에디터일 뿐인데.”
“그래도 탬파베이랑 마이애미 쪽에서는 알아주는 기자님이야. 이 사람 SNS 팔로우하는 사람이 몇 명인 줄 알아? 삼만이야, 삼만. 미쳤지?”
“입에 발린 칭찬 그만해, 제이크. 하하. 쪽팔리잖아.”
호킨스는 최소한 겉으로 보기에는 유쾌한 사람이었다. 나란히 식사를 하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지혁과 헤이거 속에 퍽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마치 처음부터 잘 알고 있던 사람처럼 능숙하게 대화에 참여했다.
‘역시 기자인 건가.’
식사를 다 마친 지혁은 호킨스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SNS를 켜 호킨스의 이름을 검색했다.
@fox_samhawkins.
팔로잉 807. 팔로워 33.2K.
수없이 많은 기자들과 야구 선수들의 계정이 우루루 떠올랐다. 호킨스에게 질문을 던지는 팬들의 멘션들이 끊임없이 올라오고 있다. 확실히 영향력이 꽤 있는 기자인 모양이었다.
“이 사람하고 좋은 관계를 맺어두면 나쁜 일은 없어.”
헤이거가 접시에 마지막으로 남은 음식들을 싹싹 긁어먹으며 말했다.
“좋으면 좋았지. 절대 나쁠 일은 없어. FOX 쪽 사람들 중에서도 꽤 인지도가 있는 사람이라서. 호킨스가 괜찮은 평가를 내리면 전문가들이나 팬들이나 주목하기 시작해.”
“확실히 그래 보인다. 근데 이 사람은 왜 나를 만나고 싶어했대?”
“나도 몰라. 그건 안 물어봤거든. 그냥 잘하고 있으니까 그런 거 아닐까?”
헤이거는 말을 돌리지 않는 녀석이다. 호킨스가 자리에 돌아와 앉자마자 직접적으로 그에게 물었다.
“그런데 샘. 왜 문을 그렇게 만나고 싶다고 했던 거죠?”
“몽고메리 비스킷츠에 뜬금없는 에이스가 나타났으니까. 그것도 아주 탬파베이스러운 투수가. 그라운드볼 유도가 좋고, 적극적으로 존을 공략하고. 구위는 떨어지지만 대신 마운드 위에서 공격적으로 압박하는 투수.”
호킨스는 품 속에서 녹음기를 꺼냈다.
“메이저리그 스프링캠프에 초대할만큼 임팩트 있던 선수가 지금까지 어디에 숨어있었을까? 이 선수가 갑자기 어디서 튀어나왔을까? 데이토나 컵스에서도 그저 그랬었는데. 앤드류 프리드먼은 이 선수의 어디를 보고 잡아왔을까? 숨겨져 있던 동양인 투수의 장점을 어떻게 찾아냈을까? 궁금했어.”
“하, 하하. 칭찬을 참 잘하시네요.”
“사실이잖아요. 그래서 꼭 한 번 만나고 싶었습니다. 난 궁금한 건 못 참는 성격이라서요.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을 듣고 싶어요.”
녹음기에 빨간 불이 들어왔다. 호킨스는 눈동자를 빛냈다.
“오프 더 레코드를 원하실 때는 미리 말씀하세요. 자, 준비됐나요?”
“네.”
“오호. 마이너리그에서 뛰는 선수들 중 아주 일부를 제외하고는 다들 인터뷰 때 굉장히 떨곤 하는데. 문 선수는 그렇지도 않은가봐요?”
“아아. 아니에요. 저도 떨려요. 겉으로 티를 안 내는 거죠. 하하.”
“기자를 앞에 두고 잘 웃는 선수도 많지 않아요. 오늘 아주 재밌을 것 같네요.” 호킨스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동시에 그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지혁은 문득, 먹잇감을 눈앞에 둔 포식자가 입맛을 다시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럼 시작하죠. 싱커는 어디서 배웠습니까?”
“네?”
“시카고 컵스와 계약해서 마이너리그로 넘어온 이후 단 1구도 던지지 않았던 공이죠? 싱커. 혹시나 해서 찾아봤지만 투심 패스트볼 계열의 공도 던진 적이 없었어요. 한국에서 고등학생일 때도 그랬더군요?”
“한국 시절까지 찾아보셨나요?”
“일도 아니죠. 지금 몽고메리에서 호투를 이어가고 있는 데에는 싱커가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 전까지는 던져본 경험도 없던 공이 최고의 무기가 되었어요. 어떤 드라마가 숨어 있는 겁니까?”
맹수 같았다. 샘 호킨스의 질문은 으르렁거리는 맹수의 이빨처럼 날카롭게 들어왔다. 지혁은 재빨리 머리를 굴리며 대답했다.
“데이토나 시절부터 혼자 연습하던 공이었어요. 그런데 그 때는 실전에서 쓸 법한 공은 아니었어요. 제가 구위로 타자들을 이겨낼 수 없다고 생각해서 뭔가 전환점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고만 있었죠.”
“그리고요?”
“뭔가 다른 공이 필요했고, 싱커를 연습했을 뿐입니다. 그게 다에요.”
“아니죠, 문. 내가 원하는 건 ‘어떻게’ 싱커가 그렇게 좋아졌냐는 겁니다. 싱커를 던지기 시작한 계기는 말을 안 해줘도 알 수 있는 일이죠.”
호킨스는 진실을 원하고 있다. 지혁은 결코 얘기해줄 수 없는 스토리를. 짧은 순간에 마운드 위에 서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이 인터뷰는 일종의 승부였다.
“그립을 바꿨어요. 그 전까지 던지던 싱커는 어깨너머로 배운 정도였거든요. 그립도 바꾸고 팔 각도도 바꾸고. 투구폼도 싱커에 맞춰서 바꾼 거예요. 작년 시즌이 끝나고 난 뒤에는 오직 싱커만 던졌습니다. 바꾸고 나니 확실히 좋아지더라구요.”
“혼자서 방법을 찾아낸 건가요? 그립을 가르쳐 준 사람이라거나, 코치들의 디렉션을 받았다거나 하는 일 없이?”
“네. 사실 방출당할 걸 미리 알고 있었거든요. 누구한테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어요.”
“흔한 일은 아니군요. 23살의 투수가 혼자 투구폼을 바꾸고, 혼자 새로운 공을 연습하고.”
“그런가요? 하하.”
지혁은 일부러 어리버리하게 웃었다. 어쩌면 오늘 패트릭에게 실수했던 경험이 여기서 도움이 되는 걸지도 모른다.
“휘유. 쉽지 않네요. 정말 미스테리해요. 내가 이 바닥에서 벌써 10년이 넘게 일하고 있지만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에요.”
“저도 가끔 그렇다고 느낄 정도니까요. 누구라도 다 그렇게 생각하겠죠.”
“푸우.”
호킨스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러세요?”
“아니. 이상해서요. 인터뷰 경험도 별로 없는 한국에서 온 낯선 투수가 눈앞에 있는데. 영어도 능숙하고, 인터뷰도 엄청나게 노련하고. 베테랑 중의 베테랑들하고 만났을 때의 느낌이 자꾸 들어요. 정말 이상하네요.”
호킨스가 혀를 한 번 낼름거렸다. 입술을 한 바퀴 훑은 호킨스의 표정이 미묘했다. 그의 안경 너머 속에는 미지의 정체를 마주한 이의 긴장과 설렘이 모두 존재했다.
“이건 공식적인 질문은 아니에요, 문.”
“네. 하세요.”
“정체가 뭐죠?”
속으로는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얼굴에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만 씌여 있었다. 지혁은 스스로가 타고난 연기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답했다.
“몽고메리 비스킷츠의 선발 투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