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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전처리, 회귀하다-33화 (34/204)

33 - 미스테리 피쳐.

호킨스와의 인터뷰를 하고 난 이틀 뒤, 지혁은 모바일 베이베어스와의 홈경기에 선발 등판을 준비하고 있었다.

여느 때와 똑같이 시합 세 시간 전에 구장에 들어왔고 일찌감치 런닝을 마쳤다. 짙은 스포츠 고글을 덮어쓰고 그라운드에 등을 대고 누워 몸을 풀어준다. 스트레칭은 누구보다 꼼꼼하게. 온 몸 어디에도 놀라는 근육이 없도록 정성껏 몸을 당겼다가 풀어주었다가를 반복한다.

이제는 지혁의 완전한 파트너가 된 메일리도 어느 새 옆에 누워 다리를 있는 힘껏 끌어당기고 있다.

“루크. 요새 베이베어스 녀석들 타격 컨디션 괜찮지?”

“걔네는 항상 괜찮아. 이번 시즌 내내 그랬어.”

메일리는 방금 전까지도 비디오실에 쳐박혀 있다가 나온 것이 분명했다. 뭐 그렇게 타격감이 좋냐고 툴툴대면서도 베이베어스 타자들의 성적을 줄줄 읊었다.

“제이크 램이 대폭발하고 있어. 타율 3할7푼에 홈런 7개. 시즌을 늦게 시작했는데도 이 정도 성적이면 진짜 어마어마하지. 완전 미친놈이라니까.”

“하긴. 걔 파워를 감당할 투수는 많지 않지.”

“요새 베이베어스는 램을 3번에다 두고 페랄타를 4번으로 써. 램이 앞에서 미친 듯이 치니까 페랄타도 효과를 보고 있어. 램이랑 승부를 피하고 페랄타랑 붙거든.”

“흠. 페랄타도 골치 아프고.”

“그러니까 오늘은 절대로 중심타선 앞에 주자를 내보내면 안 돼. 한 방에 훅 갈지도 몰라.”

“읏차.”

상체와 하체를 비트는 스트레칭을 하며 메일리 쪽으로 몸을 틀었다. 허리와 옆구리가 끈끈하게 당겨지는 게 왜인지 기분이 좋다. 지혁은 스트레칭 때부터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메일리가 퍽 든든하게 느껴졌다.

“걔네가 컨디션이 좋으면 뭐 어때.”

“어떻긴 뭐가 어때? 조심해야지.”

“걱정 붙들어 매라. 오늘 내 컨디션이 더 좋으니까.”

“그래~ 그래~.”

메일리는 뚱한 표정으로 농담처럼 흘려들었지만 지혁은 진심이었다.

오늘은 이상하게 몸이 가뿐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부터 그랬다. 어깨부터 손가락 끝까지 걸리는 데 하나 없이 쾌적한 상태 그 자체였다. 전생에서도 이런 날은 아주 드물었다. 하지만 온 몸으로 느껴지는 이 기분은 확실하게 알고 있다. 베스트 컨디션이라고 말하는 신호라는 것을.

*

“문!”

“아. 기자님? 여긴 어쩐 일로...”

샘 호킨스. 리버워크 스타디움의 한편에 등을 기대고 브래디 윌리엄스 감독과 이야기를 나누던 그가 지혁을 발견하고 불렀다.

“어쩐 일이라뇨? 나 기자에요. 기자가 경기 보러 온 게 특별한 일은 아니잖아요. 하하하.”

“샘. 이 친구하고 구면인가?”

“네. 이틀 전에 인터뷰를 하나 했어요.”

“그래? 기사 올라왔어? 아직 못 본 것 같은데.”

“그래요, 기자님. 기사는 언제 올라와요?”

“아아. 에디팅은 다 끝났고. 데스크에서 검토하고 있어요. 아마 곧 올라올 겁니다.”

샘 호킨스는 윌리엄스 감독과 한참 동안 웃으며 얘기를 나눴다.

둘이 이야기를 하게 놔 두고 라커룸으로 들어온 지혁은 흐르는 땀을 훔쳐내며 머릿속으로 이미지를 그렸다. 타석에는 제이크 램. 지혁에게 이번 시즌 첫 번째 피홈런을 안겨주었던 녀석. 몸쪽으로 꽉 붙인 패스트볼을 번개 같은 스윙으로 잡아당겼던 타구가 재생된다.

“스윙 스피드에는 자신 있다 이거지? 몸 쪽으로 어떻게 붙여도 받쳐 놓고 때리겠다...”

상상 속의 제이크 램을 상대로 지혁이 던질 수 있는 모든 공을 던져봤다. 한복판에서 원바운드될 정도로 떨어지는 싱커. 바깥쪽으로 빠져나갈 듯하다가 안쪽으로 살짝 말려들어오는 고속 싱커. 무릎 쪽으로 파고 들어가다가 마지막에 휘어지며 떨어지는 슬라이더도.

상상 속에서의 제이크 램은 그 어떤 공을 던져도 죄다 걷어냈다. 워낙에 팔다리가 길어서 멀리 도망가는 공도 툭툭 밀어낸다. 그렇게 던질 수 있는 공들이 다 커트당하면 남은 선택지는 하나. 몸쪽에 붙이는 빠른 공.

딱!

머릿속에서의 상상인데도 첫 홈런을 맞았을 때의 타구음이 귀청을 때리는 것 같다. 마운드 위의 지혁은 고개를 돌려 날아가는 공을 쫓고 있다. 그리고 공은 천천히 떨어지며 외야수의 글러브 속에 사뿐하게 내려앉았다.

“그래. 구위로 이겨내면 되지.”

오늘의 컨디션이라면 램의 파워도 이겨낼 수 있다. 상상 속에서 램을 잡아낸 지혁은 글러브를 챙겨 들고 일어섰다. 불펜에서 몇 개 정도 공을 던지며 구위를 체크할 차례다. 이미지 속의 공을 현실로 옮겨올 것이다.

*

뻐어엉!

“굿 볼.”

리히텐슈타인 코치가 턱을 긁었다. 저 퉁명스러운 말이 긍정적인 뜻이라는 걸 알고 있는 지혁이 빙긋 웃었다.

“코치님. 오늘 컨디션 죽이네요.”

“그래. 이 정도면 괜찮네. 괜히 힘 빼지 말고 다섯 개만 더 던져.”

“네.”

한복판을 향하던 싱커가 좌타자 몸쪽으로 낮게 휘어든다. 바깥쪽 스트라이크 존 경계선으로 박힐 듯 날아들던 슬라이더는 마지막 순간에 바깥으로 휘어나간다. 심지어 오늘은 체인지업과 커브도 제대로 말을 들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패스트볼. 좌타자의 몸쪽에 꽉 찬 볼을 노리고 있는 힘껏 공을 뿌린다. 손끝에서 공이 발사되는 순간부터, 마치 공에 잔상이 남는 것처럼 궤적이 그려졌다. 미트 속에 박힌 공이 회전을 이기지 못하고 몇 바퀴 돌아가는 게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와우!”

불펜 바깥에서 철창 사이로 공을 지켜보던 호킨스가 박수를 보냈다. 마운드에서 내려와 불펜 문을 열고 나오자 호킨스가 진심으로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오늘 공 장난 아닌데요?”

“컨디션이 좋네요. 하하.”

“기대할게요. 베이베어스가 워낙 강팀인데, 오늘 공 보니 재밌는 경기가 될 것 같네요.”

“하하.”

지혁이 글러브를 벗고 손가락에서 뚝뚝 소리를 내며 대답했다.

“저도 기대되네요. 제대로 붙어봐야죠.”

“하.”

안경을 치켜 올린 호킨스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볼 때마다 놀랍네요. 인터뷰할 때는 굉장히 차분하고 노련해 보였는데. 유니폼을 입으니까 또 다른 사람이 되는군요?”

“그런가요?”

“네. 그때는 장난처럼 웃어넘겼지만 반 정도는 진심이었거든요. 이 사람 대체 정체가 뭘까? 오늘은 새로운 면을 발견하게 된 것 같아서... 재미있네요.”

“칭찬 고맙습니다. 그럼 저는 이제 마인드 컨트롤하러, 이만.”

“잠시만요!”

지혁을 잡아세운 호킨스가 품 속에서 태블릿 PC를 꺼내들었다.

“기사 올라왔어요. 보고 가시죠.”

전생에서도 선수 문지혁을 단독으로 다룬 기사는 없었다. 그래서 호킨스의 이번 기사는 특별했다. 오롯이 지혁의 이야기로만 쓰여진 기사일 터다. 하지만 오늘은 이미 스위치가 켜진 상태였다. 지혁은 호킨스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말했다.

“경기 끝나고 보겠습니다. 베이베어스 녀석들 제대로 때려 부숴야 하거든요. 조금도 흔들리고 싶지 않아서요.”

지혁은 몰랐지만, 비장함까지 느껴질 정도의 박력이었다. 호킨스는 다시 한 번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요. 선발투수니까. 준비 잘 해요.”

“네. 고맙습니다. 그럼.”

더그아웃으로 들어가는 지혁의 뒷모습에서 알 수 없는 위압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호킨스는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태블릿 PC를 켜고 항상 접속해 있는 SNS를 띄워냈다. 그리고 지금의 이 설레는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새로운 멘션을 올렸다. 이제 막 FOX 스포츠에 올라온 기사를 링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fox_samhawkins

- 몽고메리, 리버워크 스타디움. 오늘. ‘미스테리 피쳐’ 등판. #몽고메리vs모바일 #문지혁 #미스테리피쳐 - 기사 링크 ; ‘미스테리 피쳐’, 문지혁. 몽고메리의 새로운 기대주로 떠오르다.

*

베이베어스의 1번 타자 션 자미에슨이 타석에 들어섰다. 투구판을 툭툭 치면서 스파이크에 박힌 흙을 털어내고, 신중하게 메일리의 싸인을 받았다.

검지와 새끼. 고개를 끄덕인 지혁은 와인드업 자세에 들어갔다. 글러브 속에 두 손을 모았다가 팔을 들어 몸을 뒤트는 순간, 팔을 회전시키고 실밥을 때려내는 순간까지도 지혁은 제구와 구위에만 집중했다.

“스트라이크!”

자미에슨의 몸쪽으로 향하던 공이 마지막에 스트라이크 존 안쪽으로 휘어 들어갔다. 미트에 묵직하게 꽂히는 소리가 유독 크게 울려퍼졌다. 자미에슨이 슬쩍 인상을 쓰는 것이 마운드 위에서 생생히 보였다.

‘팔 보고는 못 치겠지, 이제?’

반면 마운드 위에 선 지혁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렸다. 베이베어스는 지혁의 버릇을 알아낸 첫 번째 팀이었다. 하지만 오늘의 지혁은 그 때의 버릇을 완전히 고친 채였다. 게다가 컨디션도 최고인 상황. 두려울 것 하나 없이 적극적으로 존을 공략하면 된다.

부웅!

우타자의 바깥쪽 존에 걸쳐 들어가는 것처럼 보이다가 마지막에 바깥으로 흘러나가는 싱커에 자미에슨이 헛방망이를 돌린다. 첫 타자를 삼진으로 처리하자 내야수들이 하나 같이 나이스 볼이라며 목소리를 높인다.

두 번째 타자인 제르손 몬티야는 제법 끈기 있게 물고 늘어졌다. 작지만 단단한 체구의 몬티야는 몸쪽으로 박히는 패스트볼도 걷어냈고, 바깥쪽으로 흐르는 싱커는 참아냈다.

하지만 번번이 배트가 늦었다. 방망이가 밀리는 것이 마운드에서도 똑똑히 보였다. 결코 빠르다고는 볼 수 없는 지혁의 구속임에도 그랬다. 오늘 지혁의 공에 걸리는 회전은 유달리 좋았고 마지막까지 살아있기 때문이었다.

탁!

몬티야가 6구만에 간신히 내야로 굴린 볼은 완전히 빗맞으며 지혁의 앞으로 데구르르 굴러왔다. 몬티야는 1루의 반절도 가지 못한 상태에서 아웃되었다.

“오케이. 주자 없고. 투 아웃이고.”

지혁은 중얼거리며 타석에 들어서는 길쭉한 체구의 좌타자를 노려보았다. 제이크 램.

“제대로 붙자고. 제대로.”

제이크 램이 배터 박스에 들어서자 광활했던 홈 플레이트가 꽉 찬 느낌이 든다. 이미지 속에서의 램은 어느 곳으로 던져도 그 긴 팔을 이용해 여지없이 때려냈다. 그래도 그건 어디까지나 이미지. 스스로의 공을 믿어야 한다.

싱커 싸인을 한 번 거부했다. 힘 대 힘으로 붙으려면 일단 패스트볼이다. 패스트볼 타이밍에 램의 배트를 맞춰놓아야 한다. 그래야 다음 공들이 살아날 수 있다. 지혁은 좌타자인 램에게서 가장 먼 곳에 패스트볼을 박아넣었다.

딱!

램은 자신만만한 스윙을 초구부터 돌렸다. 하지만 방망이 끝에 맞은 공은 3루 측 관중석으로 향했다.

“오케이, 나이스 볼!”

메일리는 심판에게 공을 받아 던져주면서 외쳤다. 하지만 섬뜩한 감정도 동시에 들었다. 지혁이 오늘 던지는 패스트볼은 평소와 다르게 홈플레이트까지 들어와서도 구속이 떨어지지 않았다. 컨디션이 더 좋을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할 때에나 던질 수 있는 공인 셈. 하지만 램은 그 공에도 반응하고 있다.

“역시 메이저리그 감이야. 쉽지 않아.”

마운드에서 집중력을 잃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중얼거리고 있는 지혁도 램의 반응을 알아챘다. 두근거렸다. 강타자를 마주할 때의 공포와 설렘이 동시에 지혁을 적셨다.

제 2구. 초구 패스트볼을 던진 지점보다 볼 한 개 정도 빠지는 공. 램은 방망이를 내려다가 멈췄다.

공 두 개를 바깥쪽으로 보여준 이후에 지혁은 몸쪽으로 파고들었다. 몸쪽에서 품 안으로 달려드는 싱커가 아슬아슬한 지점에서 미트로 들어갔다. 램은 엉덩이를 뒤로 쭉 빼는 동작으로 심판을 현혹시켰지만, 오늘의 구심은 정확하게 존을 재고 있었다.

“스트라이크! 투!”

구심의 호쾌한 콜에 관중들이 박수를 보냈다. 마운드에 선 지혁에게서는 분명한 아우라가 펼쳐지고 있었다. 오늘의 지혁은 말릴 수 없다.

따악!

카운트가 몰린 램은 공격적으로 존을 노리고 들어온 지혁의 싱커에 방망이를 돌렸다. 하지만 끝까지 살아서 꿈틀거리는 싱커를 정확하게 때려내지는 못했다. 타구음은 꽤 묵직하게 울렸지만 방망이는 공을 완전히 당겨내지 못했다.

지혁의 옆을 살짝 스친 공을 헤이거가 막아세웠고, 1루에 공이 도착한 이후에야 램이 베이스를 밟았다. 삼자범퇴. 강호 베이베어스를 상대로 한 지혁의 질주가 이제 막 시작되었다.

“오.”

호킨스는 태블릿에 쉬지 않고 올라오는 멘션들을 바라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그가 주목한 ‘미스테리 피쳐’에 대한 호의적인 반응들이 SNS를 꽉 채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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