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 미스테리 피쳐(3).
탁!
방망이 끝에 맞은 공이 홈플레이트를 때리고 메일리의 뒤편으로 빠져나간다. 지혁은 쓴웃음을 흘렸다.
‘하. 이걸 걷어내?’
제이크 램은 벌써 여섯 개째 공을 커트해내고 있었다. 이번 타석 램에게만 아홉 개의 공을 던졌다.
카운트 투 스트라이크 투 볼에서 던진 방금 전 공은 스트라이크 존 가장 낮은 곳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들어가는 싱커였다. 하지만 무릎을 잔뜩 굽혀가면서까지 따라붙은 램이 끝끝내 방망이 끝으로 공을 걷어냈다. 거의 미트에 들어가기 직전이었는데도.
램의 집중력도 만만치 않다.
후우. 숨을 고른 지혁은 신중하게 싸인을 골랐다. 여러 개의 싸인을 그냥 보내고 슬라이더에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패스트볼과 싱커에는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 왔다. 하나쯤 다른 공으로 타이밍을 흔들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몰리면 안 돼. 낮게.’
램과 만나는 세 번째 타석, 열 번째 공.
한 타자에게 열 개나 되는 공을 던지는 것 자체로도 집중력을 유지하기 힘든 판에 상대가 리그에서 손꼽히는 타자인 제이크 램이었으니 심력 소모가 대단했다.
슬라이더가 손끝에서 빠져나가는 순간 위험한 느낌이 온몸을 자극했다. 본능적인 공포감이었다. 손목을 비트는 힘이 평소보다 조금 약했다.
타석에 선 제이크 램이 오른발을 살짝 비틀었다가 내려놓는 동작이 유독 두드러지게 보였다. 램의 방망이가 천둥처럼 휘둘러져 나온다. 강하게 휘어지며 떨어져야 할 슬라이더가 존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따아악!
어마어마한 타구음이다. 지혁은 눈을 질끈 감았다. 관중석도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내야수들은 다리를 박아 넣은 자리에서 꼼짝도 않았고, 외야수들도 공을 따라가지 않았다. 제이크 램은 서서히 달리며 1루에 도착하기 직전에 서서히 속도를 늦췄다.
“파울!”
파울이라고?
여지없는 홈런이라고 생각하고 눈을 감고 있던 지혁이 살짝 눈을 떴다. 1루심은 분명히 두 손을 번쩍 들고 있었다. 관중석에 있던 몽고메리의 팬들이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쥐면서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게 보였다. 1루에서 다시 배터 박스로 돌아가는 제이크 램이 자신의 손을 바라보며 낮게 욕설을 내뱉고 있었다.
“아, 하느님. 감사합니다.”
타이밍이 아주 조금 빨랐던 모양이었다. 담장을 훌쩍 넘어간 공이긴 했지만, 마지막에 폴대 바깥으로 휘어나갔다. 지혁은 변함이 없는 전광판을 바라보며 연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반면 제이크 램은 온 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마운드 위의 저 투수가 이번 경기 중에 딱 한 번 던진 실투였다. 놓쳐서는 안 되는 공을 놓쳤다. 그리고 그 순간 백 퍼센트 확신했다. 이번 경기에서는 저 투수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다시 타석에 들어선 램에게서 두 가지 모습이 겹쳐 보였다. 지혁의 귀에는 여전히 그 공포스러운 타구음이 맴돌고 있었지만, 실투를 놓친 램은 어딘가 힘이 빠져 보이는 모습이다. 지혁은 다시 천천히 팔을 끌어올렸다.
“끄야하!”
남아 있는 힘을 모두 쥐어짜냈다. 무릎 높이로 파고 들어가는 패스트볼이 몸쪽으로 꽉 붙어 들어갔다. 램은 출발하던 방망이를 완전히 뻗지 못하고 살짝 멈추었다. 방금 전의 아쉬운 타구로 팽팽한 집중력을 먼저 잃은 쪽은 램이었던 것이다.
메일리의 미트에 강력한 패스트볼이 빨려 들어간 순간, 구심이 오늘 경기에서 가장 다이나믹한 동작으로 스트라이크 콜을 외쳤다.
“스트라이크! 배터 아웃!”
예에에쓰!
관중석에서 엄청난 환호성과 휘파람 소리가 터져나왔다. 오랜 시간 엄청난 승부를 벌인 두 선수 모두 맥이 탁 풀리는 것을 느끼며 각자의 더그아웃으로 터덜터덜 돌아갔다. 승자는 지혁이었다.
*
“힘이 남았나? 어때?”
“아... 조금 힘들긴 하네요.”
“97개야. 더 던질 수 있겠어?”
브래디 윌리엄스 감독이 직접 지혁에게 다가왔다. 지혁은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윌리엄스 감독은 작은 딜레마에 처해 있다. 방금 전 제이크 램과의 승부는 지켜보는 사람의 진땀까지도 쏙 빼는 것이었다. 아주 위험해 보였지만 동시에 아주 훌륭한 결과를 낳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지난 이닝부터 여섯 타자를 연속으로 삼진 처리했다. 더 중요한 것. 지혁은 지금까지 7이닝 노히트를 기록 중이다. 노히트 노런이라는 대기록에 남은 아웃카운트가 단 여섯 개 뿐이라는 뜻이다.
1대0의 살얼음판 리드. 이제 막 있는 힘을 다 쏟아부은 승부를 하고 지쳐버린 투수. 게다가 다음 이닝은 4번부터 시작해야 한다. 팀의 승리를 위해서는 바꾸는 게 맞다.
하지만, 노히트 노런. 투수의 인생에서 단 한 번이라도 기록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의 대기록. 그 기록을 감독의 판단으로 그만두게 할 수 있을 것인가?
윌리엄스 감독은 지혁의 옆을 한참 서성거리다가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리히텐슈타인 코치는 윌리엄스 감독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불펜에 준비되어 있는 선수들을 읊었다.
“자네 생각은 어때?”
윌리엄스는 노히트 노런이라는 기록 때문에 아무도 접근하지 않아 혼자 덩그러니 앉아 있는 지혁 쪽을 흘깃거리며 물었다. 리히텐슈타인 코치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바꾸는 게 좋아 보입니다.”
“으음.”
“기록은 다음에도 세울 수 있습니다. 오늘 놓친 승리는 다시 오지 않죠.”
“노히트 노런이야. 다음에도 세울 수 있다고?”
“뭐,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잠시 적막이 흐르자 리히텐슈타인이 덧붙였다.
“문이 처음 팀에 합류한 날을 생각해보세요. 이 정도까지 던질 수 있는 투수라고 생각한 사람이 있었습니까? 아니었죠. 싱커의 구위가 점점 더 올라오고 있고, 제구력도 갈수록 좋아지고 있어요. 시즌을 거듭하면서 써드 피치의 중요성도 알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게 두 달 조금 넘는 시간동안 이루어진 일입니다, 감독님.”
그렇지. 무섭게 성장하고 있지.
윌리엄스는 속으로 주억거렸다. 마침 베이베어스의 선발 쉬겔도 두 타자를 잡아낸 뒤 교체되어서 시간이 조금 있었다. 더그아웃 한 편에서 우두커니 앉아 있는 지혁을 어떻게 해야 할까. 윌리엄스는 끊임없이 생각했다.
*
7회말이 진행되는 동안 지혁은 아무 말도 듣지 못했다. 헤이거가 바뀐 투수의 초구를 때려 2루타를 만들었지만, 오늘의 3번인 제프 맘은 헛스윙 삼진으로 물러났다. 베이베어스의 야수들이 더그아웃으로 달려가는 시점이 되어서야 리히텐슈타인 코치가 다가왔다.
“가. 하는 데 까지 해 봐.”
리히텐슈타인 코치는 앉아 있던 지혁의 등을 탁탁 두드렸다. 지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일으켰다. 마운드로, 다시 한 번. 언제나 기분 좋은 지시다.
“노히트가 깨지면 교체할 거야. 한 점밖에 차이가 안 나니까 최대한 신중하게 던져.”
더그아웃을 빠져나가는 지혁의 뒤로 리히텐슈타인 코치의 마지막 당부가 들려왔다. 상대는 중심타선. 4번 데이빗 페랄타. 5번 가렛 베버. 6번 더스틴 마틴. 현재 투구수는 97개. 보통 경기가 중반으로 접어들고 나면 언제나 마지막 이닝이라고 생각하고 마운드에 올랐었다. 지금도 다르지 않다.
‘평소와 다르지 않아. 다르지 않아. 다르지 않아.’
속으로 계속해서 되뇌며 스스로를 세뇌시킨다. 노히트 노런이라는 기록을 의식하면 안 된다. 눈앞의 타자에만 집중해야 한다. 더그아웃에서 마운드까지, 그 짧은 순간에 수백 번도 더 스스로를 다잡았다. 마운드에 올라 흙을 고르면서도, 연습 투구를 하면서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설레는 이미지들을 헤집어냈다.
데이빗 페랄타가 타석에 들어섰다. 시즌 타율은 3할2푼8리. 제이크 램이 미쳐 날뛰고 있던 베이베어스의 타선의 또 다른 다이너마이트 역할을 하고 있었다. 애리조나가 언제 그를 불러올려도 이상하지 않은 선수로 평가받고 있다.
그런 페랄타도 지혁을 상대로는 좋지 못했다. 방망이가 부러지기도 했고, 외야로 공을 보내지도 못했다.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났을 것이다.
“후우... 미트만. 미트만 보자.”
메일리가 한 쪽 무릎을 땅에 대고 다른 한 쪽의 무릎을 세운 자세로 페랄타의 몸쪽에 바짝 달라붙었다. 좌완 투수가 좌타자를 공략하기 위한 필수적인 공을 요구하는 것이다.
“볼!”
90마일짜리 패스트볼이 몸쪽 낮은 코스로 들어오는 것을 페랄타는 미동도 않고 지켜보았다. 반 개 정도 빠진 공에 구심이 볼 판정을 내렸다.
메일리는 이번엔 바깥쪽 스트라이크 존에 가 앉았다. 커다란 덩치로 홈플레이트 가장자리에 정확하게 자리잡은 폼이 든든해 보인다. 지혁은 메일리의 몸통 한복판만 보고 던지면 되었다.
2구. 페랄타에게 가장 먼 코스를 스치고 들어가는 패스트볼. 이번엔 구심이 오른팔을 들어올려 스트라이크 콜을 외쳤다.
‘아슬아슬했어. 카운트가 몰렸으면 힘들었을 거야.’
지혁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3구를 준비했다. 두 개의 공을 지켜보며 한 번도 스윙을 내지 않은 페랄타다. 이제는 슬슬 휘두를 타이밍이다.
메일리도 그것을 알고 있는 듯 싱커 싸인을 냈다. 맞춰서 내야 안으로 굴리자는 뜻. 지금까지 계속 해 왔던 것처럼, 평소와 전혀 다르지 않은 투구로 승부하자는 뜻이다.
점점 더 두근거려오는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며 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와인드업을 하면서 싱커의 궤적을 미리 상상했다. 그리고 그 궤적을 따라 공을 뿌렸다.
세게 던지려는 의욕이 조금 강해서인지 싱커가 중앙 쪽으로 살짝 몰렸다. 공에서 손을 떼는 순간 아차 싶을 정도였다. 예상했던 대로 페랄타의 방망이도 힘차게 휘둘러져 나왔다.
딱!
페랄타도 나름대로 지혁의 상대법을 연구한 듯 들어 올려치는 스윙을 구사했다. 마지막에 떨어지는 공을 힘으로 들어올리려는 것이다. 하지만 스윙이 조금 퍼져나왔다. 방망이 윗부분에 맞은 공이 애매하게 떠올랐다. 그리고 공이 떠오르는 순간 모두의 시선이 유격수에게로 향했다.
“잡아!”
공이 떠오른 짧은 시간 동안 관중석에서 터져나오는 외침이 똑똑히 들렸다. 헤이거가 뒤로 돌아 뛰고 있었고, 좌익수 모터가 전력으로 질주해 내려오는 모습도 눈에 들어온다. 대수비로 중견수에 들어간 아르고도 공만 보고 달려오고 있다.
그 세 명 사이로 공이 떨어지고 있었다. 야속하게 떨어지는 공은 제 속도로 움직이는데, 공을 향해 달려드는 야수들의 모습은 슬로우 모션처럼 보였다. 공이 아르고의 머리보다도 아래로 내려왔다. 헤이거의 허리보다도 아래까지 떨어졌다.
‘끝인가?’
체념하려던 그 순간. 헤이거가 아크로바틱한 동작으로 몸을 던졌다. 순간적으로 무서운 적막이 찾아왔다.
몸을 던진 헤이거의 글러브 포켓 끝에 공이 걸렸다. 공을 제대로 붙잡지는 못했어도 땅에 떨어지는 것만은 막아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헤이거의 몸이 땅에 쳐박히는 반동 때문에, 포켓에서 공이 튀어나왔다.
아주 미세하게 떠오른 공을 향해 아르고가 맨손을 내밀었다.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는 자세에서도 간신히 팔을 내뻗은 아르고의 손가락 끝에 공이 닿았다.
작고 단단한 야구공이 아르고의 손가락 위에서 스케이트를 타는 것처럼 보였다. 찰나의 순간이지만 모든 것이 생생하게 눈에 담겼다. 그리고.
아르고의 긴 손가락 위를 몇 번 스쳐 지나간 공이 녹색 잔디 위로 툭 떨어졌다. 구르지도 않고 그 자리에 멈춰선 하얀 공이 잔디를 깔아누른 순간. 아슬아슬한 장면을 바라보던 모든 사람들의 입에서 한탄 섞인 한숨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아.”
지혁도 두 무릎에 손을 얹고 허리를 숙였다. 온 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 버렸다. 이것이 야구다. 최선을 다한 투구, 최선을 다한 타격, 최선을 다한 수비의 결과물.
*
꽤 오랫동안 안타를 의미하는 전광판 ‘H’ 위치에 1자가 기록되지 않았다. 기록관들도 방금의 타구를 고민하고 있는 것 같았다. 혹시라도 실책을 줄 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정도로 아까운 타구였다.
하지만 곧 숫자가 바뀌었다. 7이닝 동안 점수, 안타, 실책 칸에 나란히 새겨져 있던 0 세 개. 그 중 가운데 것이 1로 바뀌었다. 관중들이 아쉬움의 장탄식과 기록원을 향한 야유를 동시에 쏟아냈다.
그리고 브래디 윌리엄스 감독이 직접 마운드로 올라왔다. 지혁의 눈앞까지 다가온 윌리엄스 감독은 어느 때보다도 환하게 웃었다.
“오늘 자넨 최고였어.”
지혁은 희미하게 웃었다. 모자를 벗고 땀을 닦았다. 글러브 속에 넣어두었던, 오늘 경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안타를 맞았던 공을 윌리엄스 감독에게 건넸다.
“고생했어. 자네가 자랑스러워. 동료들에게 뒤를 맡기고 푹 쉬게.”
“... 네.”
마운드에 모인 야수들이 하나같이 글러브를 내밀어 지혁과 하이파이브를 했다. 정말 멋진 피칭이었다는 덕담을 뒤로 하고 마운드를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오늘, 아니 이번 시즌을 통틀어 가장 큰 환호성이 지혁의 위로 쏟아져 내렸다.
“미스테리 피쳐. 눈앞에서 노히트를 놓치다.”
호킨스는 기사 제목을 정했다. 설령 베이베어스가 경기를 뒤집는다고 해도 기사 제목은 바꾸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리곤 마이너리그에서는 보기 드문 커튼콜을 하기 위해 잠시 더그아웃 바깥으로 나온 지혁의 모습을 재빨리 사진으로 남겼다. 아마 이 사진이 오늘의 헤드라인을 장식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