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전처리, 회귀하다-36화 (37/204)

36 - 안개 속 그 놈.

- ‘미스테리 피쳐’. 눈앞에서 노히트를 놓치다.

- 31st, May, 2014. FOX SPORTS, 에디터, 샘 호킨스.

몽고메리 비스킷츠의 ‘미스테리 피쳐’ 문지혁(24)이 모바일 베이베어스와 치른 더블 A 남부리그 경기에서 아쉽게 노히트를 놓쳤다. 리버워크 스타디움에서 열린 비스킷츠와 베이베어스의 시리즈 첫 경기에 선발 등판한 문지혁은 7이닝 동안 노히트를 기록하며 기대감을 자아냈다. 하지만 97개의 공을 던진 이후 8회에도 등판한 문지혁은 베이베어스의 4번타자 데이빗 페랄타에게 좌중간에 떨어지는 텍사스 안타를 허용하며 아쉽게 대기록을 놓쳤다.

문지혁의 뒤를 이어 등판한 산티아고 가리도가 8회를 마무리하고 맷 로리스가 9회를 막아낸 비스킷츠는 강호 베이베어스를 상대로 1대0 승리를 거두었다. 문지혁은 7이닝 동안 몸에 맞는 공 하나만을 내주며 삼진을 무려 11개를 잡아내는 역투를 펼쳤다. 특히 6회와 7회에는 여섯 타자를 모두 삼진으로 잡아내기도 했다. 어제의 승리로 시즌 5승째를 수확한 문지혁은...

... (하략)

*

마이너리그 홈페이지에는 호킨스의 기사가 대문짝만하게 걸렸다. 그 뒤로도 여러 지역지 기사들이 링크되어 있었다. 기사 제목에는 하나같이 ‘노히트’, 혹은 ‘미스테리’ 같은 단어들이 들어갔다. 모든 기사의 연관 기사로 호킨스의 단독 인터뷰가 연결되어 있다. 지혁만을 다룬 유일한 기사이니 당연했다.

“덕분에 조회수 폭발하고 있어요. 아하하.”

이튿날에도 구장에 출근한 호킨스는 뒷머리를 긁으며 웃었다. 그는 지혁에게 자신의 태블릿을 슬쩍 보여주며 수도 없이 올라온 질문 멘션들을 말했다.

“제이크 램을 상대할 때 어떤 생각이 들었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이 엄청 많아요.”

“어떤 생각이요? 뭐, 그냥. 무조건 잡고 싶다는 마음밖에 없었죠.”

“어마어마한 파울 타구가 있었잖아요. 그 때는?”

“아찔했죠. 실투였어서... 무조건 넘어간 줄 알았어요. 운이 좋았습니다.”

“그럼 페랄타의 타구가 안타가 되었을 때의 심정은?”

지혁은 불펜에서 피칭을 마치고 내려오는 가빈과 주먹을 맞대는 하이파이브를 해 주면서 대답했다.

“심정이라... 글쎄요. 아, 끝났구나?”

“그게 다인가요?”

“너무 힘들어서... 하하. 딱히 무슨 생각을 했다기보다는 좀 아쉬운 정도였어요. 헤이거나 아르고한테 고맙기도 했고. 힘든 타구를 보내서요.”

“와우. 그건 또 색다른 발상이네요.”

“힘이 남아 있었다면 내야 팝업 정도가 되었겠죠. 힘이 빠졌으니 공이 외야까지 밀려간 거고. 맞는 순간에는 그 생각 밖에 없었어요. 내가 힘이 모자라서, 끝났구나.”

호킨스는 흥미롭다는 듯 지혁의 말을 수첩에 옮겨적었다.

“기사에 써도 되죠?”

“당연하죠. 그런데 요 며칠 사이에 제 기사만 너무 쓰는 거 아니에요?”

“난 한 번 꽂히면 뒤가 없거든요. 하하.”

자신만만하게 웃는 호킨스에게서 처음 만난 날 느꼈던 맹수의 모습이 살짝 드러났다. 그럴 일은 절대 없겠지만, 수억 분의 일의 확률을 뚫어내고 신의 존재를 꿰뚫어 볼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난다면 아마 호킨스가 주인공이 될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섬뜩한 느낌이 들었지만 웃는 표정을 유지하며 고맙다고 대답할 뿐이다.

*

6월이 되었다. 미국 야구계에서 가장 큰 행사 중 하나인 신인 드래프트가 있는 달. 특히 유망주에 크게 의존해야만 하는 스몰마켓 팀들에게는 일 년 중 가장 중요한 달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탬파베이 레이스가 바로 그런 팀이고.

드래프트가 코앞으로 다가왔고, 구장을 들락날락하는 프런트 직원들의 표정은 날이 갈수록 퀭해지고 있었다. 마이너리그 담당자인 체임 블룸은 눈이 시뻘개져서는 영화 속 좀비처럼 걸어다녔고, 케이트는 패트릭에게 문자 메시지 하나 못 보낼 정도로 일에 시달렸다.

세인트 피터스버그의 탬파베이 레이스의 프런트 오피스가 있는 건물은 새벽까지 환하게 불이 켜져 있다. 2주 전부터 전 직원이 비상근무 체제다.

물론 구단 직원들만 바쁜 것이 아니었다. 기자들도 눈에 불을 켜고 일했다. 아마추어 리그 전문 기자들의 심도 깊은 분석 기사들과 각 구단의 팜 시스템과 현황, 유망주들의 가치를 매기는 기사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져 나왔다. 호킨스뿐 아니라 이름 있는 기자들이 전부 마이너리그에 집중하는 시기인 셈이다.

“단장님. 오늘 나온 자료들 사무실에 올려뒀습니다.”

“땡큐. 아, 그리고 케이트. 체임 좀 불러줘. 닥터 로즈베리도.”

“지금 당장 부를까요?”

“식사하러 갔나? 빠르면 빠를수록 좋아.”

“바로 알아보겠습니다.”

프리드먼은 케이트에게 지시를 내리고 사무실에 들어왔다. 테이블 위에는 오늘 검토해야 할 서류 뭉치가 수북하다. 단언컨대 그가 단장에 취임한 이래로 가장 많은 문의 자료들이 들어와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탬파베이가 이번에 팔아야 할 매물이 다른 누구도 아닌 데이비드 프라이스다.

사이영 상 수상자이자 리그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좌완투수. 어느 누구를 가져다 대도 리그에서 그보다 낫다 단언할 수 있는 선수는 없다. 이런 선수를 탐내지 않는 구단은 단 한 팀도 없다. 하다못해 같은 스몰마켓 팀인 오클랜드 어슬래틱스나 캔자스시티 로얄스까지 서류를 보냈다.

“뭐야, 이건? 프라이스를 탐내면서 이딴 패키지를 들고 오다니 대체...”

가장 위에 있던 보스턴 레드삭스의 서류를 한 손에 구겨버린 프리드먼은 한숨을 내쉬었다. 결코 쉽지 않은 딜이 될 것이다. 아마 구단 역사상 가장 힘든 딜이 될지도 모른다. 팀의 리더였던 제임스 쉴즈를 트레이드한 게 아직 1년도 안 됐다.

프라이스를 잔류시키길 원하는 팬들의 불만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전미에서 손꼽히는 유망주를 포함한 슈퍼 패키지여야만 한다. 그리고 악마 같은 단장들은 그걸 들어줄 리 없고.

서류들을 잔뜩 들고, 의자를 뒤로 최대로 눕혀 놓고 발을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프리드먼은 그 자세로 몇 십 분 동안이나 다른 구단의 자료들을 정독했다. 만년필 뚜껑을 입에 물고 빼곡히 적힌 선수들의 이름을 지워나가면서.

똑똑.

“단장님. 체임 블룸입니다.”

“들어와.”

사흘 정도 잠을 못 잔 것처럼 보이는 블룸이 떡진 머리로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들어왔다. 닥터 로즈베리도 블룸의 뒤를 따라 들어왔다.

“보자고 하셨다면서요?”

“아. 닥터 로즈베리.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서 불렀습니다. 이거. 아니지. 이것들. 각오는 돼 있나요?”

“아, 하느님.”

로즈베리가 엄살을 부리며 소파에 앉자 프리드먼이 품에 든 서류를 테이블에 흩어놓았다.

“그럼 한 번 지옥으로 들어가볼까? 아, 잠깐만.”

수북한 서류들 사이에서 클립으로 고정된 한 뭉텅이의 자료를 발견한 프리드먼이 그것을 집어내었다.

“5월 리뷰가 벌써 나왔나?”

“그거 아직 안 보셨습니까?”

“응. BA 녀석들이 이번엔 일을 좀 빠릿빠릿하게 했는걸? 2일밖에 안 됐는데 우리 팀 자료가 벌써 나왔어?”

“네. 이번에 아주 닦달을 했거든요. 그런데 그거 아주 재밌더라구요. 들어오기 전에 잠깐 봤는데 잠이 확 깨던데요.”

“농담이지? 지금 자네 눈은 당장 자게 해달라고 말하고 있는데.”

픽 웃은 프리드먼은 표지에 큼지막히 적혀 있는 제목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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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스볼아메리카(BA)가 작년 말에 선정한 팀별 유망주 50명의 현황을 월간 보고서 형식으로 평가, 확인하는 자료다. 물론 이 자료는 철저한 대외비다. 어마어마한 돈을 내고 사전에 요청한 구단에게만 제공하는 자료. BA 전문가들의 의식 변화를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BA가 마음을 달리 먹게 되면 시장이 요동친다.

베이스볼아메리카는 매 년, 매 달마다 메이저리그 30개 팀의 유망주들을 평가하고 줄세우기를 한다. 팀별로, 포지션별로, 또 메이저리그 전체를 기준으로 하기도 한다. 전미 top 100에 들어가는 유망주들은 그 가치가 어마어마하다. 즉, BA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은 유망주를 많이 가지고 있는 팀일수록 트레이드 시장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갖는 것이다.

각 팀이 유망주를 어떻게 평가하느냐는 팀마다 다르지만, BA 전문가들의 시선은 여러 가지 의미로 영향력을 가진다. 구단의 자체 평가는 구단 자체적으로만 통용되는 자료이고, BA의 평가는 대외적으로 이용하기 위한 것이다.

예를 들면 트레이드라던가, 아니면 언론 플레이라던가. 일반 대중들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치고 가장 신뢰받고 있는 자료가 바로 베이스볼아메리카가 배포한 것이기 때문이다.

“난 이것부터 한 번 볼게. 레드삭스에서 온 건 볼 가치도 없으니까 다저스에서 온 것부터 점검하고 있어.”

“하아아암. 알겠습니다.”

프리드먼은 BA 자료의 첫 장을 넘겼다.

작년 기준으로 팀 내 최고의 유망주, 테일러 게리어리. 토미 존 서저리를 받고 재활중. 기록을 표시해야 할 란에는 아무것도 기입되어 있지 않다.

두 번째 장. 이형진. 주루와 수비에서는 부상 이전의 폼을 찾았지만 타격이 매우 침체되어 있음. 발전 가능성이 낮아 보임. 프리드먼은 한숨을 내쉬었다.

BA 유망주 평가 3위. 제이크 오도리찌. 시즌 개막부터 메이저리그 팀에서 데뷔한 이후 딱 예상되던 만큼의 루키 시즌을 보내는 중. 여전히 메이저리그 레벨에 적응하는 데 고생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테이션의 한 자리를 차지할 정도까지는 된다.

4위, 엔니 로메로. 변화구가 갈수록 좋아지고 있지만 기복이 매우 심한 편. 트리플 A에서의 성적이 이 정도라면 아마 메이저리그 레벨로 올라가도 선발은 무리일 터다. LOOGY(좌완 원포인트 불펜) 정도는 되려나.

그리고 5위. 앤드류 톨레스...

“어?”

작년 BA가 평가한 탬파베이의 팜 내 5위 유망주는 싱글 A의 중견수 앤드류 톨레스였다. 20-80 스케일에서 70점을 받은 스피드와 그를 바탕으로 한 수비, 갭 히터로 발전할 수 있는 타격.

눈 감고도 톨레스의 보고서를 외울 수 있던 프리드먼의 눈에는 전혀 다른 선수의 굳은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비쳤다.

이름 : 지혁, 문.

생년월일 : 22, 05. 1990.

BATS : 좌투좌타.

소속 : AA, 몽고메리 비스킷츠.

포지션 : Starting Pitcher.

구종가치 : 패스트볼 ? 45/50. 싱커 ? 55/판단보류. 슬라이더 ? 40/45. 체인지업 ? 40/40. 커브 ? 30/35.

특이사항 : 싱커를 던지기 시작한 지 1년도 안 됨. 가장 높은 피치밸류의 공이긴 하지만 풀 타임 시즌을 소화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판단할 수 없음. 투수로써의 아이큐가 매우 높은 것으로 보임. 마운드 위에서의 경기 운영이 노련하고, 승부하는 타이밍과 도망가는 타이밍을 구분하는 능력이 놀라울 정도로 뛰어남. 구종가치에 비해 더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는 유형의 투수.

“왜 얘가 여기 있어?”

“재밌죠? 재밌어하실 줄 알았어요.”

“체임. 이거 제대로 온 거 맞지? 그 BA가 얘를 5위로 줬단 말이야?”

“네. 확실합니다. 저도 다시 확인했었거든요.”

프리드먼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구단 내 자체적인 평가 자료에서는 이미 10위권 안팎으로 올려놓고 있었지만, BA가 이렇게 평가한 건 의미가 다르다.

BA는 매우 보수적인 집단이었기 때문이다. BA의 전문가들은 자신들이 한 번 내린 결정을 잘 바꾸지 않기로 유명했다. 자신들이 옳다는 절대적인 자신감도 가지고 있다. BA 유망주 랭킹의 변동은 그만큼 흔한 일이 아니었다. 1년 단위로 발표하는 자료에서야 변화를 조금 찾아볼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지혁은 몽고메리에 합류한 지 두 달 만에 팀 내 5위까지 수직상승한 것이다.

“체임. 혹시 문이 컵스에 있을 때 팀 내 top 30에 든 적 있었어?”

“아뇨. 없었습니다.”

“하. 이거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돼?”

“어떻게 받아들이긴요. 로또 당첨이죠.”

BA가 최근 들어 선수들의 툴보다는 퍼포먼스를 기준으로 순위를 매기는 쪽으로 변화하고 있기는 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급진적인 변화를 보인 적은 없었다. 이번 시즌에 더블 A에 합류한 투수를 단숨에 팀 내 5위로 두다니. 아무리 경기 내용이 훌륭했다고 하더라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숨겨져 있던 특별함이 서서히 고개를 드는 모양이야.”

프리드먼은 알 듯 말 듯한 얼굴로 되뇌었다. 마운드에 서 있는 지혁은 아직도 많은 것을 숨기고 있는 투수였다. 어디서 온 것인지 알 수 없는 노련함. 게임에 대한 베테랑 같은 접근 방식. 마음을 다잡는 방법.

게다가 마운드에 서 있지 않은 지혁도 당최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묘하게 뿜어내는 여유로운 기질. 그의 옆에 서 있는 패트릭 에이버리. 안개가 잔뜩 낀 하늘 아래에서 모습을 숨기고 있는 것 같은 아우라.

정체를 알 수 없는 미스테리한 선수가 서서히 알을 깨고 나오고 있었다. 샘 호킨스의 인터뷰, BA의 주목. 이것들은 그 신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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