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 헝거 게임(2).
“스트라이크! 배터 아웃!”
구심이 온 몸을 뒤트는 것 같은 역동적인 콜로 삼진을 외쳤다. 마운드에 선 제레미 헬릭슨은 여유로운 분위기를 온 몸으로 뿜어내며 마운드를 내려왔다. 6이닝 동안 2피안타 1실점. 그 동안 잡아낸 삼진이 무려 12개였다.
“베스트 컨디션이네.”
“사실 아직 그 정도는 아니에요.”
“이렇게 던져 놓고 그게 아니라고? 핏덩이일 때가 엊그제 같은데, 많이 건방져졌어?”
리히텐슈타인 코치는 껄껄 웃었다. 헬릭슨은 멋쩍게 웃으며 어깨에 수건을 둘렀다. 투구수 제한 80개를 뒀는데도 불구하고 12개의 삼진을 잡아낸 피칭은 그야말로 환상적이었다. 펜서콜라의 타자들을 가지고 놀았다고 해도 무방한 수준이었다.
91마일에서 93마일 정도의 속도를 가진 패스트볼과 80마일대 초중반의 체인지업, 카운트를 잡는 용도로 쓰는 커브와 커터를 핀 포인트에 제구하며 타자들을 농락했다. 하지만 지혁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건 헬릭슨의 다음 말이었다.
“하이 패스트볼이 유독 잘 먹히더라구요. 어제 문이 싱커를 잘 써준 덕분이죠. 어제는 움직이면서 가라앉는 공만 주구장창 보다가 높은 공을 봤으니까 방망이가 못 따라오는 게 당연해요.”
“그래. 그게 건방진 네놈 특징이니까. 이제 완전히 살아난 것 같아서 다행이다. 다신 내려올 생각하지 마.”
리히텐슈타인 코치가 헬릭슨의 머리를 툭툭 쳐 주며 인자하게 웃었다. 지혁은 가만히 난간에 기대어 헬릭슨의 투구를 떠올렸다. 확실히, 구속이나 구위만 놓고 보면 더블 A 타자들이 결코 못 칠 수준은 아니었다. 지혁과 매우 비슷하다.
그러나 헬릭슨은 메이저리그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지능적인 투수다. 어제 7이닝동안 병살타 3개를 포함해서 수많은 땅볼을 만들어 낸 지혁의 피칭을 제대로 이용한 투구를 펼쳤다.
‘타자의 반응. 타자의 생각. 타자의 상황. 타자의 컨디션. 그걸 다 파악하고 이용하는 피칭이었어.’
좋지 않은 구위로도 살아남는 길을 헬릭슨은 알고 있었다. 어찌 보면 지혁의 상위호환인 셈이다. 전생에 헬릭슨처럼 던졌었다면 패전처리보다는 한 걸음 나아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지혁은 뒤에 앉아서 여유롭게 땀을 훔치고 있는 헬릭슨을 돌아보았다. 올 시즌 메이저리그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헝거 게임을 한다면, 결국 가장 마지막에 꺾어야 할 투수가 바로 저 녀석이다.
“왜? 할 말 있어?”
“아, 아니야.”
“그래. 난 먼저 라커로 좀 갈게. 팔에 마사지 좀 받아야 해서.”
헬릭슨은 장비를 챙기고는 라커룸으로 사라졌다. 지혁은 끊임없이 헬릭슨의 투구를 되돌려 재생했다.
넘어서기 위해서는 알아야지.
헬릭슨의 투구에서 배워야 할 것들만 배울 것이다.
*
“문. 오늘 끝나고 잠깐 시간 비워.”
“네. 미팅인가요?”
“그래. 체임 블룸이야.”
“그 사람 오랜만이네. 알겠습니다.”
그 날 경기가 끝나고 지혁은 호출을 받았다. 시즌 초중반까지는 그래도 꽤 자주 만났었는데, 5월 중순 들어서는 잠잠했었다. 패트릭은 그 시기에 마이너리그 담당 직원을 만나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단언했었다. 드래프트 시즌에는 워낙 바쁘니까.
“오랜만입니다. 문.”
지혁을 만나자마자 블룸은 그 말을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신인 드래프트 시즌이라 너무 바빴다고. 고등학교, 대학교를 직접 돌아다니고 수많은 관계자들을 만나고, 29개 구단의 직원들과 눈치싸움을 하느라 진이 다 빠졌었다며 너스레를 떤다.
블룸의 비서가 들어와서 시원한 커피 두 잔을 건네자 블룸이 꿀꺽꿀꺽 들이마셨다. 무슨 커피를 저렇게 마신담.
“더블 A에는 완벽하게 적응한 것 같은데. 느낌이 어때요?”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많이 편해졌어요.”
“어제 경기가 10승째였더군요. 선물이라도 하나 준비할 걸 그랬네요. 축하합니다.”
“마이너리그 10승이 뭐 의미가 있나요. 메이저도 아니고.”
그 말에 블룸이 활짝 웃었다.
“그렇죠. 선수들은 그렇게 생각할 수 있어요. 나는 선수들이 그렇게 생각해주기를 바라고 있기도 하고. 하지만 우리처럼 야구로 비즈니스를 하는 사람들한테 숫자는 매우 큰 의미가 있습니다.”
야구로 비즈니스를 한다. 그 묘한 뉘앙스에 살짝 표정이 굳은 것을 본 것인지 블룸이 황급히 덧붙였다.
“야구적으로도 큰 의미가 있죠, 물론. 두 자리 승수는 그 레벨에서 상위권이라는 걸 증명하는 지표입니다. 또 다음 레벨로 올라가기 위해 충분한 능력을 갖췄다는 걸 의미하기도 하구요. 음, 그러니까. 우리 프런트 사람들이 평가하는 나름의 기준이라고 할까요.”
“괜찮습니다. 프런트의 입장도 이해합니다.”
“하하. 미안합니다. 내가 아직 말이 좀 서툴러서요. 앤드류처럼 되려면 엄청 노력해야 하는데. 이게 참 쉽지 않네요. 흠흠. 어쨌든.”
블룸은 목을 가다듬으며 지혁의 눈치를 살짝 살피더니 말을 꺼냈다.
“이제 메이저리그 팀은 곧 올스타 브레이크에 들어갑니다. 마이너리그는 후반기로 접어들었고... 두 달 정도 남았죠. 그리고 당신은 이미 10승을 거뒀습니다. 이제 슬슬 다음 레벨에 도전할 때가 됐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어떻습니까?”
“벌써 말입니까?”
지혁은 깜짝 놀랐다. 설마 메이저리그 데뷔를 벌써? 전생에서는 서른이 되어서야 그 꿈의 마운드에 올라섰었다. 신을 만났다고는 하지만 1년도 보내기 전에 메이저리그 콜업을 받을 것이라고 쉽게 상상하지 못했었다.
“메이저리그를 기대하고 있군요?”
블룸이 음흉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당연하죠. 모든 선수들의 꿈이니까요.”
“자세한 설명을 드리기는 좀 곤란하지만, 40인 로스터에서 전반기도 끝나기 전에 한 자리를 비우는 건 생각보다 어렵습니다. 후반기가 되고 확장 로스터 기간이 되면 또 모르지만요. 우리는 당신을 트리플 A의 더램 불스로 올릴 예정이에요.”
“아. 트리플 A.”
“물론 난 당신이 지금 메이저리그에 올라가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 팀에서 이 절차는 필수예요. 어쩔 수 없는.”
“네.”
스스로도 모르게 김빠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메이저리그에서 더블 A와 트리플 A를 나누는 경계는 많이 희석되었다. 그것도 꽤 오래 되었다. 더블 A에서 인상적인 기록을 남기면 곧장 메이저로 데뷔하는 게 흔한 일이다.
베이베어스의 제이크 램과 데이빗 페랄타가 그 대표적인 선수들이다. 미시시피, 펜서콜라, 버밍햄, 헌츠빌... 마이너리그에서 상대했던 많은 팀의 선수들이 없어져서 알아보면 메이저리그 콜업이 된 경우가 허다했다.
그래서 지혁은 블룸이 말을 꺼냈을 때 메이저리그 콜업이 된 건 아닌지 내심 기대했던 것이다.
“더램 불스에 대해 잘 압니까?”
“아뇨. 잘 모릅니다.”
“우리 팀은 더블 A에서 곧장 메이저리그에 데뷔시키는 경우가 거의 없어요. 근 몇 년간은 아예 없었고. 정말 제대로 기대하고 있는 선수들도 루키리그부터 한 시즌씩 차근차근 경험하게 하죠. 이 방침의 핵심이 되는 곳이 더램 불스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렇죠?”
“좋은 질문이에요. 자, 루키리그, 싱글 A, 더블 A에 있는 유망주들에게 우리가 기대하는 건 선수들의 툴을 발전시키는 겁니다. 프로 선수로서 뛰기 위한 기본적인 능력들을 최대한 끌어올리는 걸 바라고 있죠. 동료들의 예를 들어 볼까요? 라이언 브렛은 괜찮은 타격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수비가 좀 불안했습니다. 하지만 싱글 A와 더블 A에서 풀타임 시즌을 치르면서 수비가 점점 좋아지고 있어요. 윌리 아르고는 어떻습니까? 엄청난 스피드를 살리는 연습을 하고 있는 거죠. 주루플레이와 수비에서 경험을 쌓아 주는 겁니다.”
흐응. 그래서 더램 불스는 무슨 의미냐고? 지혁의 표정만 보고 생각을 읽은 블룸은 또 다시 입에 모터를 달았다.
“더램 불스는 말 그대로 경쟁의 장입니다. 더램의 선수들은요, 본인이 가지고 있는 툴은 거의 다 개화시킨 선수들입니다. 하지만 메이저리그 로스터의 숫자는 정해져 있어요. 모든 선수들이 전부 메이저리그에 데뷔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 헝거 게임.”
“그 영화 보셨어요? 딱 내 스타일이었는데. 어쨌든 그 표현은 꽤 정확하네요. 더램 불스의 동료들은 동료인 동시에 경쟁자입니다. 결국엔 그 선수들을 이겨내야만 메이저리그로 올라갈 수 있는 겁니다.”
블룸은 자리에서 일어나 큰 서류철을 하나 가져왔다. 그 안에는 더램 불스의 시즌 내용이 빼곡이 정리된 서류들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06시즌, 07시즌, 08시즌, 09시즌, 11시즌. 트리플 A 인터내셔널 리그 남부지구 우승. 작년에도 압도적인 우승. 더램 불스는 강합니다. 우리는 더램이 강한 이유 중에 하나가 선수들 간의 치열한 경쟁이라고 믿고 있어요. 다른 팀이라면 진작 메이저리그 데뷔를 했어도 이상할 게 없는 선수들이 잔뜩 모인 팀인데, 그 선수들끼리 눈에 불을 켜고 야구를 하게 되니까요.”
블룸은 살짝 눈치를 보더니 덧붙였다.
“물론 다른 팀들과 트리플 A에 대한 접근 방식이 다르기도 하지만요. 하하. 거짓말을 할 수는 없으니까.”
“언제 올라가는 겁니까?”
“오늘이 14일이죠? 더램의 경기는 17일에 있어요. 내일은 하루 쉬면서 짐을 챙기고 16일에 더램으로 합류하면 됩니다.”
“으음.”
지혁은 크게 심호흡을 했다.
“헝거 게임. 알겠습니다. 제가 최후의 승리자가 되려면 그 무대로 직접 들어가야죠.”
“좋습니다. 이동 절차는 마련해 놓겠습니다. 16일 아침 비행기를 잡아둘게요.”
“네.”
“기대하고 있습니다. 문.”
블룸은 큰 손을 내밀었다. 악수를 하며 지혁이 대답했다.
“보여드리죠.”
*
“블룸 그 양반은 왜 내 일을 뺏어가는 거야?”
리버워크 스타디움 감독실. 브래디 윌리엄스 감독이 툴툴거렸다.
“이건 원래 감독의 일이라고. 자네 표정은 어떨지 궁금했는데. 메이저리그 콜업이라고 속이려고 했었거든.”
“하하하. 감독님도.”
“정말이야. 뭔가 자네는, 무슨 일이 닥쳐도 담담할 것 같아서. 설마 메이저리그 콜업이 된다는데도 그럴까 싶어서 확인해보려고 했는데. 블룸이 다 망쳐 놨구만.”
윌리엄스 감독도 악수로 지혁을 배웅해 주었다. 헤이거와 플로로를 비롯한 선수들도 하나같이 나와서 부러움과 질투가 섞인 모습으로 지혁을 한 대 씩 쳤다. 감정이 살짝 실린 주먹들로 어깻죽지를 툭툭 치는 게 살짝 아프면서도 또 고마웠다.
“다신 내려오지 마라. 내가 올라갈 거니까.”
파트너였던 루크 메일리는 지혁을 한 번 안아주었다.
“다들 고마워. 메이저도 아니고 트리플 A로 가는데.”
“그래 맞아. 우리가 너무 오버했어. 이제 빨리 꺼져버려.”
“밀려서 내려오기만 해 봐. 반 죽일 거니까.”
선수들 한 명 한 명과 일일이 주먹을 맞대고 있자니 새삼 실감이 났다. 더램 불스에 대한 얘기는 듣기만 했었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치열한 경쟁이 기다리는 곳이라고 했다. 몽고메리 비스킷츠처럼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아닐 터. 이런 느낌은 어쩌면 더 이상 받지 못할지도 모른다.
“잘 가라.”
“브렛. 너도 꼭 올라와라.”
“...”
브렛은 끝까지 시크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마지막까지 쉽게 정을 줄 수 없는 녀석이라고 생각하던 찰나에 브렛이 입을 열었다.
“너는 유독 그라운드볼을 잘 만들어서. 네 뒤에서 수비하는 게 재밌었다. 도움도 많이 됐고.”
“뭐라고?”
“올라가서 고생해라.”
브렛은 자기 할 말만 하고 나서 휙 돌아서 구장으로 나가버렸다. 브렛의 뒷모습이 이렇게 가깝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지혁은 몽고메리에 온 이후 가장 환한 미소로 손을 흔들어주고는 라커를 빠져나왔다.
몽고메리 공항으로 향하는 구단 버스를 타려던 찰나에 지혁을 멈춰세운 사람이 있었다. 리히텐슈타인 코치였다.
“어이. 문.”
“코치님.”
“너는 애송이 같지가 않았어. 내가 그동안 봐 왔던 어린놈들이랑 같은 부류가 아니었어. 그래서 본능적으로 좀 더 퉁명스럽게 대했던 것 같다.”
“괜찮습니다. 다 압니다.”
“지금도 봐. 네가 알긴 뭘 알아? 참 나.”
헛웃음을 터뜨린 리히텐슈타인이 두 팔을 벌렸다. 잠시 얼떨떨해 하던 지혁도 가볍게 웃으며 리히텐슈타인 코치에게 안겼다.
“더램에 있는 녀석들을 다 때려눕히고, 네가 메이저로 올라가라.”
“네. 코치님.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래. 다신 몽고메리에서 보지 말자. 부상도 당하지 마. 리햅 경기도 오지마. 그냥 시즌 끝나고 만나서 맥주나 한 잔 하자고.”
“예. 알겠습니다.”
“그래. 가서 잘 해.”
“감사했습니다.”
리히텐슈타인 코치에게 허리를 굽혀 꾸벅 인사를 하고 버스에 올랐다. 리버워크 스타디움이 차창 밖으로 지나쳐가는 것을 바라보며 벅차는 설렘과 긴장이 동시에 몰려왔다.
그리고 다섯 시간 뒤. 지혁이 더램 불스 애슬래틱 파크에서 들은 첫 마디는 그 설렘과 긴장들을 폭발시켰다.
“웰컴 투 헬, 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