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 닐 알렌.
닐 알렌.
2007년, 그러니까 프리드먼의 시대가 시작된 이후부터 탬파베이에 몸을 담고 있는 투수코치. 트리플 A 팀인 더램 불스에서만 6년 넘는 시간을 보내며 무수히 많은 선수들을 키워냈다. 메이저리그 레벨에서도 충분히 경쟁력 있는 코치인 그가 더램 불스에 남은 것은 탬파베이와 프리드먼의 독특한 철학 때문이었다.
“투수들이 경기 경험을 쌓거나 개인적인 능력을 성장시키는 곳은 하위 리그. 메이저리그에 올라가기 위해 경쟁하는 곳은 트리플 A. 우리 팀의 모든 선수들은 결국 트리플 A를 거쳐서 메이저리그로 올릴 겁니다. 즉, 당신은 우리가 데리고 있는 모든 투수들을 다 관리하게 될 겁니다.”
메이저리그 팀에 있지 않아도, 팀의 모든 투수를 관리할 수 있다. 하위 리그에 있을 때처럼 미처 다 피우지 못한 선수들의 재능을 극한까지 끌어올리는 일도 재미있었지만, 메이저리그 데뷔를 눈앞에 둔 선수들을 관리하는 일이 더 체질에 맞다고 느끼던 터였다. 프리드먼의 확신에 찬 발언과 그 발언을 유지하고 있는 기조는 알렌의 마음에 꼭 들었다.
탬파베이가 데빌레이스 시절이던 암흑기를 버텨냈던 투수, 스캇 카즈미어. 팀의 기둥이 되었던 제임스 쉴즈. 탬파베이 역사상 가장 위대한 투수, 데이비드 프라이스. 맷 가르자, 앤디 소낸스타인, 제프 니먼, 맷 무어, 알렉스 콥, 크리스 아처... 이 모든 투수들이 알렌의 지도 하에 있었다.
빛을 발하기 직전의 다이아몬드를 투명하게 닦아 놓는 일. 금이 간 곳이 있으면 살짝 손을 봐 깔끔하게 만들고, 얼룩이 져 있으면 깨끗하게 지워서 꿈의 무대로 보내는 일.
알렌은 이 과정을 사랑했다. 프리드먼의 정책은 알렌에게는 신의 선물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트리플 A에 계속 남았다.
*
더램으로 이동한 첫 날. 몬토요 감독이 ‘웰컴 투 헬’을 외친 그 날.
지혁은 더램 불스 애슬래틱 파크에 들어서자마자 깜짝 놀라 환호를 지를 뻔 했다. 그가 처음으로 만난 사람이 바로 닐 알렌 투수코치였던 것이다. 반가운 마음에 심장이 밖으로 뛰쳐나올 뻔 했다.
알렌은 전생에서 마이너리그를 전전할 때, 지혁이 미네소타 트윈스의 트리플 A에서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을 때 만났던 사람이다. 시즌 도중에 미네소타에 합류했던 알렌은 그 때만 해도 정석적인 폼을 유지하고 있던 지혁의 투구폼을 보자마자 혀를 쯧쯧 차며 독설을 쏟아냈었다.
“구위도, 제구도 모두 평범한데 폼까지 깔끔하네. 그 정도면 메이저리거들한테는 그냥 피칭 머신처럼 느껴질 거다.”
알렌이 돌아서기 직전 붙잡았던 게 천만다행이었다. 그리고 그 알렌이 지혁의 인생을 한 번 바꿔놓았고. 지금의 디셉션이 있는 폼을 만들어낸 것도, 손가락으로 장난을 치는 법을 가르친 것도 모두 알렌이다. 패전처리로라도 메이저리그 마운드에 설 수 있었던 건 오로지 알렌의 덕분이었다.
그런 알렌을 여기서 다시 만나다니. 운명이 분명했다. 지혁은 가벼운 단체 훈련을 마치자마자 그늘진 구석에 기대 서 있는 알렌에게 달려갔다.
“코치님. 잘 부탁드립니다.”
“응? 아, 그래. 이름이 뭐지?”
“문지혁입니다.”
“문. 문... 아, 그 싱커?”
“네. 맞습니다.”
“그래. 반가워. 열심히 해 봐.”
꽤 사교적인 친구로구만, 하고 돌아서려던 찰나 지혁이 알렌을 붙잡아 세웠다.
“코치님. 저 공 한 번만 봐 주세요.”
세상 진지한 표정으로 자신을 붙잡아 세운 지혁을 보면서 알렌은 묘한 익숙함을 느꼈다. 어디선가 느껴본 적 있는 것 같은 감정이었다. 알렌의 눈동자에 의문이 담겼다. 언제였더라? 누구였지?
“그래. 던져 봐.”
어깨를 가볍게 당기면서 불펜 마운드에 선 지혁의 모습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누군가가 자꾸 아른거렸다. 지혁이 투구에 들어가자 묘한 익숙함이 더욱더 고개를 들었다. 와인드업에 들어가는 동작부터, 글러브의 움직임, 하체의 중심 이동, 뻗어나가는 왼팔과 공을 쥐어챌 때의 팔꿈치 모습까지.
단언컨대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투구였고, 한 번도 만난 적 없던 선수다. 그런데 왜 자꾸 이 문지혁이라는 투수의 폼이 익숙하게 느껴지는 것일까?
“어떤가요?”
“꽤 괜찮은걸.”
“네? 그럴 리가 없는데. 이상하네.”
“뭐가 이상하단 소리지?”
“완벽한 투구폼과 공은 어디에도 없다. 누구라도 언제든 더 성장할 수 있다. 코치님이 입에 달고 사시는 말이잖아요.”
알렌은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어떻게 알았지? 우리 만난 적 없을텐데.”
“라라한테 들었어요.”
지혁은 어리숙하게 뒷머리를 긁으며 웃었다. 그래도 이번에는 다분히 의도하고 한 말이었기에 당황하지 않았다. 알렌과 동고동락했던 이전 생에서의 나날들을 말할 수는 없지만 알렌과 단번에 친해지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꽉 잡아야 했다. 알렌은 워낙 능력 있는 코치라서, 헝거 게임에 나선 선수들이 가만두지 않을 게 분명하니까.
“... 그래. 그렇지.”
“어떻게 바꾸면 더 좋을까요?”
“폼을 바꾸겠다고? 시즌 중에?”
“아니요. 싱커 말입니다. 뭔가 좀 바꿀 수 있는 여지가 있을까요?”
“왜지? 싱커로 재미를 많이 봤다고 들었는데. 괜찮은 공에 손을 대는 건 위험할 수도 있어.”
알렌은 날카롭게 물었다. 하지만 지혁은 생각할 찰나도 갖지 않고 곧장 대답했다.
“더 성장하고 싶으니까요.”
이상하다. 이상해도 너무 이상하다. 탬파베이에 온 이후 오랜 시간 ‘관리자’에 가까운 투수코치로 지내오면서 가슴 깊숙한 곳 한편에서는 듣고 싶었던 바로 그 대답을,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내뱉는 이 투수가.
“좋아. 싱커 한 번 던져봐.”
알렌은 무수히 많은 투수들을 만났다. 그렇지만 제 페이스대로 자신을 쥐락펴락하는 투수는 정말 오랜만에 봤다. 마지막은... 아마 데이비드 프라이스였지. 알렌은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는 진지한 눈빛으로 마운드를 응시했다.
지혁의 싱커가 날카롭게 미트에 파고든다. 지혁의 오른편에서 투구를 바라보던 알렌이 지혁의 뒤쪽으로 이동했다.
‘꽤 마음에 드는 투구폼이야. 어깨로 디셉션을 만들고, 중심 이동도 폭발적이고.’ 이번엔 1루 쪽에서 지혁의 폼을 바라봤다. 다리를 들어올리는 각도가 애매해서 주자들이 애를 먹을 만하다. 견제 동작이 매우 뛰어나지 않더라도, 이 정도면 폼만으로도 주자를 어느 정도 억제할 수 있을 것이다.
“잠깐.”
알렌은 굴러다니는 헬멧 하나를 주워 쓰고 타석에 들어섰다. 알렌의 코칭 방법을 전부 다 알고 있는 지혁은 군말하지 않고 미트를 향해 공을 던졌다. 몸쪽을 향해 전력으로 파고들다가 마지막 순간에 변화하는 싱커. 바깥쪽으로 휘어지는 움직임이 빠르고 예리했다.
“괜찮군. 무브먼트도 나쁘지 않고, 제구도 그렇고...”
싱커와 패스트볼, 체인지업, 슬라이더까지 모든 구종을 지켜본 이후 알렌은 좌타석으로 이동했다.
“다시. 똑같은 레퍼토리로 던져 봐.”
고개를 끄덕거린 지혁의 얼굴에는 이미 미소가 그득히 걸려 있었다. 알렌은 분명히 답을 내놓을 것이다. 저번 생애의 그 별 볼일 없던 마이너리거 문지혁을 메이저리그 마운드까지 억지로 끌어다 놓은 장본인이 지금 타석에서 지혁의 공을 보고 있다. 게다가 지금의 지혁은 싱커를 던진다. 그것도 브랜든 웹의 싱커를.
“흐으음.”
모든 공을 다 던지고 배터 박스 쪽으로 내려온 지혁이 물었다. 아니, 요구했다.
“더 나아지려면 뭘 바꿔야 하죠, 코치님?”
순간 알렌은 알 수 없이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오늘 하루는 정말 낯선 일들의 연속이다.
“싱커가 날카롭게 움직이긴 하는데... 음. 힘이 좀 부족한 느낌이군. 메이저리그에서 던지려면 파워를 더 끌어올려야 되겠어.”
“좋습니다. 어떻게 바꾸면 될지 알려주세요.”
제이크 램에게 허용했던 피홈런. 그보다 먼저, 스프링캠프에서 로마인에게 허용했던 투런 홈런. 확실히 메이저리그에 있는 타자들의 파워는 다르다. 지혁은 알렌이 내놓을 답을 기다리며 곧장 되물었다.
오늘 처음 본 낯선 한국인 투수가, 마치 모든 것을 다 의지하는 듯이 공의 교정을 요구하는 상황. 이 익숙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알렌은 그의 조련사로써의 능력을 여지없이 발휘할 것이다. 지혁은 그만큼 알렌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있었다.
“내가 자네의 공을 본 게 오늘 처음이라서. 며칠 정도 분석을 좀 해 본 뒤에 방법을 찾아보도록 하자.”
“알겠습니다. 두근거리네요.”
두근거리는 건 지혁만이 아니다. 알렌도 갑자기 눈앞에 뚝 떨어진 것 같은 이 투수가 어떻게 성장할지, 몹시 두근거렸다.
*
“여보세요?”
- 나야. 거긴 좀 어때. 살 만 하냐?
“응. 그래도 여긴 플로리다보다는 조금 덜 더워서.”
- 컨디션은 어떻고?
“괜찮아.”
- 너 이 새끼 목소리에 왜 이렇게 힘이 없어?
“방금까지 개인훈련 했거든. 피곤해서 그래.”
전화기 너머 속 티미는 오랜만에 전화해서는 거친 언어로 자신의 반가움을 풀어냈다. 지혁도 티미가 반가웠다. 데이토나에서 같이 먹고 살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샬럿에서의 스프링캠프와 몽고메리를 거쳐 지금은 더램에 와 있다. 빠른 시간에 여러 곳을 오간 터에 티미를 못 본지 한참인 것이다.
- 더램 쪽 방송은 여기서는 안 나오더라. 그래도 몽고메리 경기는 가끔 해 줬는데.
“아예 안 해 줘?”
- 어. 쥐꼬리만한 지역방송 이거 해지하든가 해야지, 어휴.
“아쉽네. 첫 경기 이겼는데.”
- 내용은 괜찮았고?
“당연하지. 완전히 씹어먹었지.”
- 지랄은 하나도 안 변했구나.
더램 불스에 합류한 후 첫 경기 등판은 그위넷 브레이브스와의 경기였다. 쿨레이 필드 원정경기에서 지혁은 6이닝을 소화하며 1실점했다. 바뀐 환경에 적응하느라 경기 초반 투구수가 조금 많았지만, 그뿐이었다.
그위넷의 타선은 미시시피 선수들보다 뛰어나다고 말하기는 힘들었다. 물론 메이저 경험이 풍부한 선수들이 섞여 있었지만 지혁의 싱커를 처음 보는 타자들이 쉽게 맞춰내지 못했다.
“첫 등판이어서 조금 불안한 것도 있긴 있었는데. 차차 적응하면 괜찮아질 거야.”
- 나야 뭐 잘 모르니까. 어쨌든 잘 해라. 밥 굶지 말고.
“하하. 그래. 너도 고생해라. 가게에 사람은 좀 많아졌냐?”
- 간신히 먹고 살만 하지 뭐.
오랜만에 티미와 소소한 얘기들을 나누려던 찰나, 저 쪽 문을 열고 닐 알렌 투수코치가 들어오는 게 보였다.
“티미. 그만 끊자. 다시 운동하러 가야 돼.”
- 오냐. 잘 해라.
“그래. 너도. 끊는다.”
지혁은 핸드폰을 크로스백에 던져버리고는 알렌에게 다가갔다.
“코치님. 어떻게 바꿀까요?”
“참 나. 너도 참 이상한 놈이다. 그 싱커로 승리한 게 딱 이틀밖에 안 됐는데.”
“하하. 던져볼까요?”
“일단 마운드에 올라가 봐.”
지혁은 알렌을 보채며 불펜 마운드에 섰다. 불펜 포수 하나가 와서 홈 플레이트에 앉았다. 어깨를 몇 번 털어낸 지혁은 글러브를 들어올렸다. 간단한 불펜 피칭이니까 어깨에 힘을 쭉 빼고, 하지만 날카로움을 유지하면서. 지혁의 손끝에서 떠난 공이 예리한 송곳처럼 바깥쪽 존을 찔렀다.
뻐엉!
“확실히 괜찮긴 한데...”
알렌 코치가 손에 든 미니 스피드건을 보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지금은 어땠어요? 괜찮았죠?”
“나쁘진 않았어. 내가 볼 땐 굳이 바꾸지 않아도 충분해.”
“하지만 바꾸면 더 좋아지긴 하겠죠?”
지혁은 싱커 몇 개를 더 던졌다. 알렌은 인상적이었던 지혁과의 첫 만남 이후, 도미니카 윈터리그에서 지혁이 던졌던 공부터 바로 직전 경기 그위넷 전에서의 공까지를 다 돌려보았다.
그 때와 비교하면 분명히 무브먼트가 훨씬 더 좋아져 있었다. 꺾이며 가라앉는 각도가 예리해졌고, 공이 변화하는 타이밍도 홈플레이트와 더 가까워졌다. 그러면서도 제구도 어느 정도 일정하게 유지되고 있고.
‘이 정도만 해도 엄청난 성장속도인데.’
“더 좋아질 수 있죠?”
마운드에 서 있는 문지혁이라는 투수는 그보다 훨씬 위를 보고 있는 것만 같다. 끊임없이 성장해야겠다는 강렬한 의지가 흘러다니는 투수다. 알렌은 정말 오랜만에 피가 끓는 것을 느꼈다. 트리플 A의 관리자였던 지난 7년 동안 별로 느낀 적 없었던 강렬한 욕구가 눈을 들었다. 데이비드 프라이스를 하루 종일 붙잡고 조련해냈던 그 때처럼.
“당연하지. 싱커 그립 한 번 잡아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