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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전처리, 회귀하다-40화 (41/204)

40 - 더램 불스의 방식.

“공을 끝까지 더 눌러야지!”

지혁은 알렌의 불호령을 들으며 땀을 훔쳤다. 알렌은 확실히 지혁을 인상 깊게 본 것 같았다. 지혁을 꽤 적극적으로 가르쳤다. 특히 알렌은 지혁이 피칭할 때마다 이렇게 공을 채는 순간만 유심히 지켜보고 있다.

“검지에 힘을 더 줘!”

한 구 한 구 던질 때마다 알렌은 끊임없이 소리쳤다. 그리고 지혁은 알렌의 이 지독한 훈련 방식을 좋아했다. 미국에 넘어와서 던진 이래로 지혁을 가장 극적으로 성장시킨 방식이었으니까 당연한 일이다.

“제구를 잡는답시고 힘을 조절해서는 안 돼. 있는 힘을 다 짜내서 던지는 걸 기본으로 하고, 거기서 제구를 잡는 거야. 너는 다른 공들은 비슷하게 되는데 왜 싱커만 그게 안 되냐?”

“그러게요.”

사실 지혁은 답을 알고 있다. 말할 수 없을 뿐이다. 싱커의 그립을 누구에게 배운 게 아니기 때문이다. 솔기를 빗겨 잡는 방식도, 공을 뿌리는 순간 중지로는 공을 누르면서 검지로는 공을 미끄러트리는 방식도. 지혁이 쇼케이스할 때 처음 던졌던 그 상태 그대로였다.

아마 브랜든 웹이 이런 방식으로 공을 던졌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던지는 방식에 위화감이 전혀 없었다.

“대체 누구한테 배웠길래 이렇게 괴상망측하게 던지는 거야, 대체?”

지혁이 싱커를 던지는 방식을 처음 들은 알렌은 단번에 인상을 팍 찌푸렸다. 웹의 싱커 그립이 모르긴 몰라도 아주 독특했던 모양이었다.

알렌은 지혁에게 그립을 잡게 하고는 손가락에 어떻게 힘을 주어야 하는지 설명했다. 억지로 그립을 바꾸지는 않았다. 다만 공에 가하는 힘에 차이를 줬을 뿐이다.

‘일단 해 본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알렌이니까. 해 보고 안 되면 다시 웹의 그립대로 던지면 돼.’

처음 알렌의 설명을 들었을 때에는 불안했다. 지혁이 신에게서 받은 재능은 브랜든 웹의 싱커였다. 만약 던지는 법을 바꿔버린다면, 그래도 이 공은 웹의 싱커일까? 하지만 곧 신과 처음 만났던 때를 기억해냈다.

“내가 줄 수 있는 건 재능이지. 펠릭스가 그 재능에 노력을 곁들인 결과물을 주는 건 아니라네. 노력의 정도에 따라서 펠릭스의 체인지업보다 더 뛰어난 공을 던질 수도 있겠지.”

브랜든 웹의 싱커를 성장시켜서 원래 웹이 던지는 것보다 더 좋은 공을 던질 수도 있다는 뜻이다.

지혁은 마음을 편하게 먹기로 했다. 3년을 바쳐 얻어낸 재능이 어디 가지는 않으니까. 변화를 시도했다가 실패하면 돌아오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기왕 변화를 시도할 거라면 생판 모르는 코치나 선수의 조언을 얻는 것보다는 알렌에게 도움을 받는 편이 낫다.

그런 마음으로 던진 첫 공은 짜릿했다. 중지와 검지로 모두 실밥을 때리면서 던진 싱커. 지금까지 지혁이 던져 온 싱커와 비교해서 훨씬 더 빠르고 많은 회전이 걸리며 날아갔다. 물론 밸런스가 맞지 않기는 했다. 한 번에 완벽한 공을 던질 수는 없으니까.

“다시. 두 손가락에 균형을 잘 맞춰서.”

홈플레이트 한참 앞에서 원바운드 된 공을 옆으로 밀어내며 알렌이 외쳤다. 지혁은 그 순간 알 수 있었다. 지옥의 트레이닝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그리웠던 알렌의 지옥 훈련 시간이다.

*

새로운 싱커가 손에 익을 때까지 당분간은 경기에서 싱커를 쓰지 않기로 했다. 지금까지의 싱커가 충분히 경쟁력 있는 공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지혁과 알렌 모두 이견이 없었지만, 두 사람은 새로운 도전을 택했다. 한 번 발을 들여놨으면 어떻게든 해 본다. 알렌의 지도 철학이기도 했고, 전생에 알렌에게 배웠던 지혁의 방식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헝거 게임의 경쟁에서 한 발이라도 물러나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지혁은 한때는 메이저리그 무대에서도 던졌던 경험을 바탕으로 어떻게든 풀어나갈 수 있다고 여겼다. 구위가 떨어진다면 제구로. 제구마저 안 된다면 볼 배합으로. 타이밍을 빼앗는 능력으로. 첫 경기였던 그위넷 전에서도 그런 피칭이 통했기 때문에 확신할 수 있었다.

물론 평소의 경기보다는 애를 좀 먹기는 했다. 싱커를 던지기 시작한 이후로, 싱커가 지혁의 가장 큰 무기였다는 점은 확실한 사실이었으니까. 싱커는 카운트를 잡는 공인 동시에 승부구이기도 했고, 좋다고는 할 수 없는 다른 구종들을 살려주는 역할을 하는 공이었다. 지금까지 지혁이 좋은 피칭을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을 빼 놓고 나선 경기였으니 부담스러운 게 당연했다.

따악!

몸쪽에 박아 넣은 패스트볼을 타석에 선 제임스 맥캔이 벼락 같이 돌렸다.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의 메이저리그 포수인 그는 리햅 경기를 위해 톨리도 머드헨스에 내려와 있는 상태였다.

배트에 맞는 순간 총알처럼 날아간 공이 외야수들 사이에 한 번 튀기며 펜스까지 굴렀다. 2루 주자는 여유 있게 홈에 걸어 들어왔고, 1루에 있던 주자도 총알 같이 3루를 돌아섰다. 백업 플레이를 위해 포수 뒤쪽으로 내려온 지혁의 눈앞에서 슬라이딩을 하며 홈플레이트를 쓸고 지나간다.

3회까지는 실점하지 않고 잘 버텼는데. 하지만 타선이 한 바퀴 돌고 난 이후에는 조금씩 정타를 맞기 시작했고, 결국 메이저리거 맥캔에게 한 방을 허용한 것이다. 애써 표정을 지우며 마운드로 돌아온 지혁에게 유격수 자리에 있던 형진이 슬쩍 다가왔다.

“야, 지혁아. 그냥 무조건 유격수 쪽으로 날려. 내가 다 잡는다.”

형진이 큰 손으로 지혁의 등을 툭 쳤다. 형진은 든든한 수비수다. 수비만큼은 메이저리그에서도 충분히 통하고 남는다는 평가를 진작부터 들어왔다.

“하나라도 놓치기만 해 봐. 실책 하나 할 때마다 나한테 밥 한 번씩 사야 돼. 알겠냐?”

“야, 나 돈 없어!”

“임마. 실책 안 하면 되잖아?”

“하~ 그런 거 걸면 부담스러운데. 너는 뭐 해줄 건데?”

“그럼 네가 진짜 호수비 할 때마다 내가 밥 한 번씩 살게. 어때?”

“그래? 그건 괜찮지. 한 번 해 볼까?”

형진은 허리를 살짝 돌리며 웃었다. 그리고는 자리로 돌아가 글러브를 툭툭 치며 내야수들의 자리를 조정했다. 그 모습이 퍽 든든했다. 고등학교 시절 4대 유격수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수비력을 자랑했던 그 때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 같았다.

“하긴. 그 때도 내야 넘기기가 그렇게 어려웠었지.”

싱커를 던지지 않고 있어서 내야 땅볼 유도가 평소만큼 되고 있지는 않았지만. 굴리면 잡아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다시 되새겼다.

그리고 맞이한 톨리도의 6번 타자 타일러 콜린스. 옆으로 서서 2루 베이스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맥캔을 한 번 째려봤다.

‘다음에 만나면 넌 무조건 잡는다.’

눈빛으로 기세를 전달하려고 애쓴 뒤에야 홈플레이트를 향해 몸을 이동시켰다.

초구, 패스트볼. 좌타자인 콜린스의 바깥쪽 가장 먼 곳에 빨려들었다. 원 스트라이크.

오늘 톨리도의 타자들은 대체적으로 초구를 지켜보고 있다. 아마 싱커를 계속해서 던지지 않을 것인지 확인하고 싶은 모양이다.

2구는 바깥쪽으로 가다 존 바깥으로 흘러나가는 슬라이더. 콜린스는 무릎이 따라 나오면서 무너졌지만 스윙을 참아냈다. 3구째는 다시 초구와 비슷한 코스에 패스트볼을 던졌지만 이번엔 한 개 정도 빠지는 볼이 되었다. 4구째 커브도 존을 통과하는 것 같았지만 포구 위치가 낮게 잡혔던 탓에 심판이 볼을 선언했다.

마운드 위에 선 지혁은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았다. 물론 속으로는 짜증을 잔뜩 내고 있었지만. 3구와 4구 모두 아깝게 빠져나갔다. 볼 카운트도 몰렸다. 이미 2실점한 상태에서 주자는 2루에 있는데, 스트라이크를 던지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 상황은 갈수록 안 좋아지고 있다.

하지만 그럴수록 티를 내면 안 된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행동해야 한다. 마운드 위에서의 작은 동작 하나하나가, 호흡 하나하나를 상대편 전원이 주목하고 있으니까. 흔들린다고 표를 냈다간 더욱 발톱을 세우고 덤벼든다. 마운드에서 드러나는 모습을 관리하는 방법만큼은, 지난 생에서 오랜 시간 경험을 쌓아온 그대로다.

“흐으읍!”

이를 꽉 깨물고 던진 5구가 스트라이크 존 낮은 쪽을 파고들었다. 콜린스도 분명한 배팅 카운트에서 과감하게 스윙을 냈다. 패스트볼처럼 들어오던 공이 마지막에 급격하게 속도가 떨어졌다. 그러면서 존 낮은 쪽에서 서서히 가라앉는다. 체인지업.

방망이에서 멀어지다가 끝에 맞은 공이 낮은 탄도를 그리며 땅에 깔리듯이 뻗어나갔다.

그리고 방망이에 공이 맞는 순간에 형진이 반응했다. 자세를 잔뜩 낮췄던 형진은 몸을 더욱 낮추며 2루 쪽으로 이동했고, 배를 땅에 대면서 날아오는 공을 그대로 움켜쥐었다.

“나이스!”

그러나 감탄할 틈도 없었다. 형진은 땅에 누운 그 상태로 몸을 던져 공을 쥔 글러브를 베이스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간발의 차로 제임스 맥캔의 스파이크가 베이스를 덮쳤다.

“아웃!”

2루심이 주자 맥캔을 한 번 가리키더니 주먹을 가볍게 흔들어 보였다. 라인드라이브 타구에 이은 더블 플레이. 더램 불스 애슬래틱 파크에 쏟아지는 환호성을 들으며 지혁은 형진과 글러브를 툭 맞댔다.

“밥 사라?”

형진이 더그아웃으로 달려가면서 익살맞게 웃었다.

*

지혁이 5이닝을 던졌고, 이어 등판한 에니 로메로가 1.1이닝을 막았다. 덕 매티스가 7회와 8회를 책임졌다. 여기까지는 괜찮은 경기였다. 지혁이 실점한 2점을 빼고는 한 점도 허용하지 않았으니까. 타선은 조금 부진했지만 제레미 무어의 쓰리런 홈런 한 방으로 리드를 갖고 있는 상태였다.

그런 경기가 9회에 뒤집어졌다. 트리플 A에서 시즌 1.74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고 있던 리펜하우저가 끝내기 투런 홈런을 허용한 것이다.

야구에서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그걸 안다고 해서 분위기가 쳐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다 어떤 극적으로 나쁜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알지만, 머리로 이해하는 것을 몸과 감정도 이해하지는 않는 것처럼.

더그아웃은 고요한 분위기였다. 평소라면 웃고 떠들고, 음악과 MTV의 뮤직비디오를 잔뜩 틀어놓았을 라커룸이 조용했다. 지금까지 8연승을 달리던 더램 불스의 분위기와는 전혀 딴판이었다.

“내일 하루는 오전 훈련은 쉰다. 하루 쉬면서 다시 한 번 재정비들 하도록 해. 자, 해산.”

몬토요 감독은 피곤한 얼굴로 공지를 하고는 라커룸을 빠져나갔다. 순간 몽고메리에서 있었던 비슷한 분위기가 떠오른 지혁은 라커룸 안 분위기를 슬쩍 살폈다. 다들 덤덤히 자기 짐을 챙기고 있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는 분위기, 조금 위험한가?

“지혁아!”

큰 가방을 들쳐 맨 형진이 다가와 지혁을 불렀다.

“아오, 깜짝아. 왜?”

“왜라고? 왜? 왜라고 했어?”

“그래. 왜?”

“밥 사야지, 임마! 내가 너 살렸잖아. 그거 빠졌으면 꼼짝없었어, 너.”

형진은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지혁은 살짝 눈치를 보며 크로스백을 오른쪽 어깨에 걸었다.

“그래, 뭐. 일단 나가자.”

서로 각자의 일에만 집중하고 있는 조용한 라커를 빠져나와서야 지혁은 형진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분위기 애매한데 거기서 왜 웃고 그러냐 넌? 내가 그렇게 밥 안 살 것 같든?”

“분위기? 분위기가 왜?”

“역전패했잖아.”

그 말에 형진이 오히려 혀를 찼다.

“야. 야구 하루 이틀 하냐? 이길 때도 있고 질 때도 있는 거지.”

“끝내기 맞았잖아, 임마. 그냥 진 것도 아니고.”

“뭐래? 우리가 야구하면서 끝내기 한두 번 맞아봤어? 시답잖은 소리를 하고 그래.”

좁은 통로를 앞장서서 걷던 형진이 뒤를 돌아봤다.

“더램은 좀 독특해. 다른 팀 트리플 A도 이런지는 잘 모르겠는데, 여튼. 몽고메리는 다들 으쌰으쌰하면서 야구만 잘 하면 된다는 분위기니까 너는 좀 낯설겠지만 여긴 아니야. 더램의 코치들은 야구장에 출근하는 순간부터 퇴근하는 순간까지 전부 다 평가해. 안 보는 척 하면서 다 보고 있어. 중요한건 야구를 할 때보다, 야구를 안 할 때야.”

“그게 무슨 말인데?”

야구선수를 평가하는데 야구를 안 할 때가 더 중요하다니. 지혁의 눈동자에 담긴 의문을 읽은 형진이 곧장 대답했다.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되냐... 음. 일관성? 평정심? 사회성? 이런 것들을 많이 보더라고. 이길 때든 질 때든 본인만의 페이스를 유지할 수 있는가를 보는 거지. 결과에 흔들리지 않고 다음 경기에서도 똑같이 자기 플레이를 할 수 있는지. 라커룸 안에서의 분위기에 따라 야구장에서의 플레이가 달라지지는 않는지. 동료들하고는 친하게 잘 지내는지. 뭐 이런 것들.”

형진은 날을 잡은 것처럼 보였다.

“밥 비싼 걸로 사라. 더램 코치들이 어떻게 평가하는지 알려줄게. 특급 비밀이야, 새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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