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 친구.
“이번 원정 시리즈 선발 로테이션은 콜로메, 문, 켈리. 이 순서로 간다. 다들 준비 잘 하고. 내일 오후 2시에 경기장 앞에서 버스 탄다. 질문?”
몬토요 감독이 마지막으로 박수를 짝 치자 선수들이 일제히 라커를 빠져나갔다. 지혁도 형진과 함께 크로스백을 매고 더램의 애슬래틱 파크 바깥으로 걸어나왔다.
먹구름이 잔뜩 끼고 비가 계속 내리는 날이었다. 우천취소로 일찍 퇴근하게 된 것은 좋았지만 힘껏 찌푸린 하늘이 괜히 기분을 울적하게 만들었다.
“야, 넌 오늘 뭐 할거냐?”
“아. 마침 여유도 생기고 해서 데이토나에 한 번 다녀올 거야.”
“지금? 갑자기 왜?”
“음... 그냥. 친구를 좀 만나기로 했거든.”
“비행기는 잡아 놨고?”
“어.”
“무슨 친구를 만나러 데이토나까지 가냐?”
“그냥. 일이 좀 있어.”
지혁은 밥이나 같이 먹자는 형진을 보내고 집에 들어왔다. 여름용 양복 한 벌을 챙기고는 잠시도 앉아있지 않고 곧장 공항으로 향해 비행기를 탔다.
날씨 때문에 내심 걱정했지만, 비행기가 못 뜰 정도는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세 시간 뒤 올랜도 국제공항에 내린 지혁은 긴 우산을 펴 쓰고서 잠시 걸었다. 우산과 길바닥을 때리는 빗소리가 쓸쓸했다.
*
“티미. 나 왔다.”
가게 현관에 달려 있는 낡은 종이 딸랑거렸다. 비가 내리는 탓에 가게에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테이블에 기대 턱을 괴고 TV 속 뮤직비디오를 보고 있던 티미가 지혁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왔냐.”
“오늘 완전 파리 날리네?”
“하. 어쩌겠냐. 비 쏟아지는데 누가 밥 먹으러 밖에 나와?”
그 놈의 노란 앞치마를 매고 있는 티미가 지혁을 한 번 안아주며 말했다.
“좀 할 만하냐?”
“응. 요새 야구가 재밌다.”
평소 같았으면 또 툴툴거리며 욕이나 한 번 했을 티미지만, 오늘은 그저 한번 픽 웃고 말았다.
“하필이면 비가 많이 내리네.”
“그래도 비가 오니까 이렇게 얼굴 한 번 보고 얼마나 좋냐?”
“너 방 뺐지? 오늘은 가게 문 일찍 닫을 거니까 내 집에 가서 좀 쉬고 있어.”
“그래. 몇 시쯤 닫냐? 내가 시간 맞춰서 다시 올게. 술이나 한 잔 하자.”
“내일 모레 등판이라고 안 했냐?”
“그냥 맥주 한 잔 정도는 괜찮아.”
티미는 고개를 끄덕이며 앞치마 주머니를 뒤져 열쇠를 꺼냈다.
“자. 가서 쉬고 있어라. 내가 연락할게.”
“그래. 난 조금 자야겠다. 비행기 안에서 못 잤더니 피곤하네.”
일 년도 되지 않았지만 이 가게가 아련하게 느껴졌다. 구석 한 편에 티미가 몰아 놓은 벤치프레스와 아령들. 튜빙용 고무줄과 줄넘기도. 한번씩 쓰다듬어 본 뒤에 지혁은 티미의 집으로 향했다. 혼자 조금 쉬고 싶었다.
*
“하아. 오랜만이네.”
티미의 집. 가구 몇 개가 바뀐 것 말고는 그대로였다. 몇 군데 찢어진 소파도, 냉장고 속 냄새도, 서랍 한 쪽에 가지런히 모여 있는 지혁의 선수 카드도. 데이토나 컵스 유니폼을 입고 있는 지혁이 나와 있는 카드는 워낙에 수량이 적어 한정판에 가까웠다. 수요가 없었으니 당연했다.
그 구하기 어렵다는 카드를 여전히 한쪽에 잘 모셔놓고는, 나중에 메이저리그에서도 손꼽히는 슈퍼스타가 되면 경매에 부치겠다고 농담 따먹기를 했던 게 떠올랐다.
그런 농담을 할 때만 해도 위로 올라가기가 너무 힘들어보이는, 기약 없는 마이너리거였었지.
그래도 지금은 트리플 A까지 올라와 있다. 이제 메이저리그 5선발 자리를 놓고 경쟁하고 있는 상황이고.
“많~이 나아졌다. 인생 폈지, 폈어.”
혼자 중얼거리며 집 구경을 한번 하고 티미의 침실에 들어갔다. 입고 온 옷을 아무렇게나 벗어버리고 침대에 누우려는데 머리맡 서랍장 위에 검은 봉지 하나와 쪽지 비슷한 게 보였다. 티미 것인가, 하고 넘어가려다가 봉지 안을 슬쩍 열어보았다.
“이 새끼...”
울컥하는 감정이 살짝 밀려올라왔다. 어디서 구했는지 몰라도 익숙한 초록색 병이었다. 소주. 눈물이 나오려는 걸 억지로 참았다. 지금의 티미는 아마 4년 전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지혁의 입장에서는 18년 전의 일이 떠올랐다.
*
“지혁아. 할머니께서 돌아가셨어.”
한국에서 전화가 걸려왔을 때부터 가슴께가 쓰리는 느낌이 든다 싶었는데. 한국에 있던 에이전시 대표의 말을 듣는 순간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쿵 내려앉는 것뿐이었다.
이제 막 미국에 넘어와서 영어도 간신히 입을 떼는 수준이었다. 동료들과도 어색하고, 새로운 땅의 낯선 문화도 잘 적응되지 않을 때. 그렇게 갑자기, 지혁은 유일한 가족을 잃었다.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 날아가서 장례를 치르는 순간까지도 눈물이 나지 않았다. 미치도록 슬픈데 눈물이 나오지 않아서 더없이 괴로웠다. 가슴을 쥐어뜯고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다 던져버리고 싶었는데, 이상하게 눈물만 나오지 않았다. 할머니를 납골당에 모시고 모두가 돌아가고 난 뒤의 새벽에. 고등학교 야구부 감독님까지 끝내 집으로 돌아가신 이후에야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펑펑 쏟아냈다.
미국에 돌아와서도 꽤 한참을 집중하지 못했던 것 같다. 야구에 집중하면서 개인적인 슬픔을 달래고 치유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한 나이가 아니었다. 고작 스물이었으니까.
미국에 넘어와서 유일하게 사귄 친구였던 티미만이 지혁의 옆에 있어주었다. 원체 위로에 서툰 녀석이라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지혁의 옆을 맴돌기만 했지만, 오히려 지혁에게는 그게 가장 큰 위로가 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슬픔은 옅어졌고, 티미는 늘 그런 방식으로 지혁을 달래 왔다. 그냥 옆에 있는 것으로. 애써 따뜻한 말을 찾거나 재롱을 부리거나 말도 안 되는 농담으로 지혁을 웃게 하려 들지 않았다. 이후로 찾아왔던 할머니의 기일 때마다, 지혁은 그냥 한국의 소주를 구해 한 병을 비워내고 잠들곤 했다.
티미는 그걸 마음에 담아뒀던 모양이었다. 소주를 미리 사 놓고, 굳이 지혁을 혼자 집으로 보내 마음을 달래게 했다. 지금 서랍장에 놓인 소주처럼. 안 보이는 곳에서 지혁과 함께해 주는 것. 그게 티미의 방법이었다.
*
“야. 밥 먹으러 와라.”
“그래. 손님은 다 받았냐?”
“어. 방금 마지막 테이블 빠졌다. 이제 더 안 받아. 스테이크 구워 놓을 테니까 천천히 와.”
“알았어. 간다.”
그리고 티미의 가게에서 같이 소주를 마셨다. 소주에 스테이크라. 정말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지만 또 나름대로 어울리기도 했다. 18년 전의 아득했던 기억부터 하나씩 떠오르다가 사라졌다가를 반복하는 새벽이었다. 18년 내내 그랬던 것처럼 여전히 티미가 지혁의 곁에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큰 위로가 되었다.
“내일 모레 등판이라고?”
“어. 인터넷 중계로라도 그냥 틀어 놔.”
“휴, 인터넷도 좀 비싸야지.”
“더램에 돈이라도 걸어 볼래?”
“미쳤냐? 친구한테 도박을 하라고 권하는 거냐, 지금?”
“야. 그냥 복권이지 그게. 그게 무슨 도박이야?”
“됐어. 정상적으로 돈 벌어 먹고 살기도 힘든데. 거기다가 돈 날리면 니가 메꿔줄 거냐?”
“하. 됐다, 됐어.”
쓴 소주가 속을 달랬다. 이번 생에서는 어떻게든 꼭 성공해서, 티미 가게도 크게 넓혀 주고, 괜찮은 장비도 사다 주고, 나중에는 실력 있는 쉐프도 고용할 만큼 키워 주고...
“개소리하지 마. 내 가게는 내가 알아서 해.”
“도와준대도 지랄이네.”
“아, 필요 없다니까?”
“왜. 나도 어떻게든 널 좀 도와주면 좋잖아.”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야구나 잘 해. 나중에 일일 자원봉사? 이런 걸로 카메라 달고 와서 서빙이나 하든가. 니가 뭔데 내 가게를 넓히네 마네 하냐?”
크으. 놀랍게도 티미는 소주를 한국인처럼 마셨다. 소주를 마시면 원래 다 저런 리액션이 나오는 건지 매번 궁금했다.
“내 스타일대로 살 거야. 나도 네 스타일에 간섭 안 하잖아. 그냥 내 스타일대로 살게 놔 둬. 알겠냐?”
티미의 방법대로. 이제 18년이나 된 할머니의 기일을 이렇게 미국에서 마음으로나마 챙기는 것처럼.
푸우우. 입술을 한 번 부르르 털어낸 지혁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다 자신만의 스타일이 있는 법이다. 선을 넘으면서까지 티미를 챙기는 건 또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일이겠지.
“빨리 메이저리그 가서 선수들이나 몇 명 데리고 와. SNS에 올리면 홍보 효과 좀 받겠지. 기왕이면 롱고리아로 데려와.”
“흐흐흐. 미친놈.”
자정이 다 되어 갈 때 까지. 지혁과 티미는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었다. 서로를 위로해줄 수 있는 방식대로.
*
“가서 잘 해라.”
“어. 내일 모레 경기 꼭 봐라.”
“인터넷 상황 봐서. 아마 요금 폭탄일텐데.”
“끝까지 지랄은... 야, 내 경기 틀어놔서 나온 요금 그거 내가 내준다. 아오, 드러워서 진짜.”
“빨랑 가. 비행기 시간 늦네 마네 쇼하지 말고.”
티미는 지혁의 등을 떠밀었다. 가게 입구에 달린 낡은 종의 딸랑거리는 소리가, 왜인지 지혁의 마음을 꽉 잡아주는 것 같았다. 오랜만에 들른 티미의 가게에서 잠깐이라도 마음에 평안을 찾았다. 다시 더램에 돌아가면, 야구에만 집중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하며 다시 더램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집에 돌아오니 이번엔 패트릭이 쪽지를 남겼다. 디트로이트로 간다는 내용이었다. 도미니카까지 갔다가 돌아온 게 바로 어제인데.
“에휴. 뭐 얼굴 보는 게 이리 힘드냐.”
지혁은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는 창밖을 바라보며 짐을 챙겼다. 이제는 다시 야구를 할 시간이다. 평소처럼 연습하고, 경기하고. 야구장에서 최선을 다하는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
“오랜만이야, 다렉.”
“패트릭.”
패트릭은 디트로이트 시내에 위치한 거대한 빌딩 입구에서 한 사람을 만났다. 패트릭의 오랜... 친구라고 표현하기는 뭐하고, 또 동업자라고 표현하기도 약간 뭐한. 묘한 관계에 있는 에이전트였다.
“여기까지 직접 올 줄은 몰랐어. 데리고 있는 친구 중에 트레이드 되는 녀석이라도 있나?”
“아니.”
패트릭은 선글라스를 한 번 치켜올렸다. 까맣게 보이는 다렉의 얼굴에 당혹감이 드러나기를 기대하면서.
“트레이드 되는 건 내 선수가 아냐. 자네 선수지.”
“흐-응?”
다렉이 이상한 소리를 냈다.
“드류 스마일리 말이야.”
“뭐?”
“이제부터 아주 버라이어티한 일이 벌어질 거야.”
“이상한 소리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성격은 여전히 그대로야? 심술은 어디 안 가는군.”
“특급 비밀이거든. 여기서는 말하기 좀 그래.”
패트릭이 입꼬리를 씨익 말아올렸다. 다렉은 한참을 패트릭의 선글라스만 바라보다가 회전문 안으로 패트릭을 인도했다.
“천하의 패트릭 에이버리가 심술을 부린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내가 살짝 잊고 있었어. 네놈이 이 전쟁터를 뜬지 하도 오래 돼서 말이야.”
“이제라도 내 스타일을 떠올렸으니 됐지. 들어가자고.”
그리고 30분 뒤. 에이전트 다렉 브라우네커의 표정에 당혹감이 가득 어렸다.
“데이브 돔브로스키가 프라이스를? 그 양반 미쳤어?”
패트릭이 대답했다.
“내가 뭐랬어. 버라이어티 할 거라고 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