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 보이지 않는 손.
7월 31일. 오후 1시. 세인트 피터스버그, 탬파베이 레이스 프런트 오피스.
“케이트! 3번으로 돌려줘. 지금 당장!”
“네, 단장님. 바로 통화 가능합니다.”
프리드먼은 웬만해서는 감정을 밖으로 잘 드러내지 않았다. 그의 가장 가까운 측근인 케이트와, 그의 후계자라고 할 수 있는 체임 블룸 정도를 제외하고는 프리드먼이 크게 기뻐하거나 격노한 모습을 본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오전부터 전 직원 비상체제가 걸린 탬파베이의 프런트 오피스에는 숨막힐 듯한 냉기가 흘러다녔다. 식사도 패스트푸드를 배달시켜 대충 집어먹은 직원들은 마른침만 삼키고 있었다.
“아니, 잭! 이건 정말 매너가 아니죠. 그렇게 갑자기 입장을 바꾸면 곤란합니다. 이건 정말 아니에요!”
닫혀 있는 단장실 안쪽에서 프리드먼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리는 것이 밖에서도 들릴 정도였다. 그만큼 프리드먼의 목소리가 컸다. 케이트를 비롯한 모든 직원들이 단장실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저 전화 이후로 또 어떤 폭풍이 들이닥칠까.
프리드먼은 쥬렌식이 갑자기 입장을 선회한 것을 쉽게 납득하지 못했다. 그 누구보다도 강렬하게 프라이스를 원하던 사람이었다. 아마 프리드먼이 이번 시즌 만났던 그 누구보다도 더.
스카우팅 디렉터로 자신의 커리어를 시작했던 쥬렌식은 프라이스를 거의 사랑하다시피 하는 단장이었다. 그래서 모든 관계자들이 부정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프리드먼과 직접 만나 논의를 진행시켰던 것이다.
“제 3자가 낀 거야. 분명히.”
터져버릴 것 같은 이성의 끈을 애써 매듭지으며 현상을 살폈다. 시애틀이 갑자기 발을 뺀 것은 다른 누군가가 이 판의 물밑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소리밖에 되지 않는다. 프리드먼은 단장실의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케이트!”
“네, 단장님.”
“피츠버그에서 움직이고 있나 알아봐. 글래스노우 패키지.”
“알겠습니다. 또 필요하신 것은 없으십니까?”
“오클랜드! 빌리 그 양반이 에디슨 러셀을 들이댔을 수도 있어. 시애틀하고 연결하고 있을지도 몰라.”
케이트가 순식간에 일을 나눴다. 대기하고 있던 직원들이 전부 전화기를 집어들었다. 트레이드 마감일. 소리 없는 전쟁이 끝나기까지 11시간밖에 남지 않았다.
*
두 시간이 정신없이 지났다. 직원들 중 누구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시애틀이 왜 갑자기 입장을 철회했는지. 그리고 프라이스를 얻기 위한 딜에 개입한 보이지 않는 누군가는 어디 있는 것인지. 이것을 알아내기 위해서 모두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노트북과 전화기만 붙잡고 있었다.
케이트는 중대한 결심을 했다. 구단 내의 이런 초특급 비밀을 대외로 유출시킬 수는 없지만, 그 비밀을 지켜줄 수 있으면서도 정보를 가져다 줄 수 있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혼자 화장실에 들어간 케이트는 핸드폰을 꺼내 메시지를 보냈다.
- 시애틀 쪽에서 일이 틀어졌어. 혹시 어느 구단에서 움직이고 있는지 알아?
같은 시간. 패트릭은 두 사람을 만나고 있었다. 카페에서 커피를 시켜 놓고 여유롭게 담소를 나누던 패트릭이 탁자 위에서 진동하는 핸드폰을 뒤집었다. 케이트가 보낸 메시지 때문에 미소가 걸렸다.
- 한 번 알아볼게. 짐작 가는 팀은 있어?
- 피츠버그, 오클랜드. 아마도?
케이트는 핸드폰만 바라보고 있었던지 몇 초도 안 되어 곧장 답장을 보냈다.
“레이스 쪽도 굉장히 바빠졌나 봅니다.”
패트릭이 낮게 말했다. 그러자 호리호리한 인상에 콧수염을 기른 남자가 날카롭게 대답했다.
“우리 쪽이 먼저 접근하면 됩니까?”
“아뇨. 프리드먼이라면 반드시 찾아낼 겁니다. 곧 연락이 올 거예요.”
“허허.”
선글라스를 낀 백발의 남성은 속을 내보이지 않고 그저 너털웃음을 지었다. 초조함을 가리기 위한 웃음이라는 것을 패트릭은 금방 알아챘다.
“걱정 마세요, 데이브. 아직 시장이 닫히기 전까지 9시간이나 남았습니다.”
“급작스러운 전개. 나는 이런 전개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네.”
“설명은 충분히 드렸습니다.”
“상대는 앤드류 프리드먼이네.”
패트릭은 페르난도 멘데스라는 카드를 자기가 쥐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끝끝내 말하지 않았다. 탬파베이가 허리띠를 꽉 졸라매고 아끼면, 프라이스에게 잔여 연봉을 한 해 정도 더 지급할 수 있다는 사실도.
그 돈을 아껴 페르난도 멘데스에게 쏟아 부으려는 프리드먼의 계획은 이 세상에서 오직 패트릭만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게 이 판에서 패트릭이 실세처럼 활약할 수 있는 가장 결정적인 비밀이다.
“다렉? 자네한테 온 연락은 없나?”
백발의 사내가 이번엔 콧수염에게 물었다.
“한 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30분. 30분 안에 연락이 올 겁니다.”
패트릭이 핸드폰을 집어 들려는 콧수염을 말렸다. 가벼운 한숨을 내쉰 콧수염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시계만 쳐다봤다. 얼음을 띄운 아메리카노의 색이 조금씩 옅어졌고, 그 동안 세 사람은 나란히 테이블에 엎어 놓은 핸드폰이 울리기만을 기다렸다.
*
“단장님, 찾았습니다!”
“어디야?”
프런트 오피스에서 2시간을 꼬박 전화기만 붙잡고 있던 직원 하나가 얼마 없는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달려왔다.
“디트로이트입니다. 데이브 돔브로스키 단장이 직접 프라이스 쪽에게 접근했다고 합니다.”
“뭐야? 디트로이트?”
프리드먼의 인상이 구겨졌다. 최소한 지금까지 거론되던 하이 실링의 유망주 자체가 거의 없는 팀. 프리드먼의 절대적인 플랜 A는 초특급 유망주를 받고 프라이스를 내주는 것이다. 당장 올해는 아니더라도 1년에서 3년 사이에 메이저리그에 데뷔시킬 수 있는, 또 성적을 장담할 수 있는 그런 확실한 유망주. 하지만 지금의 디트로이트에는 그런 선수가 거의 없다.
“벌랜더, 슈어져, 산체스, 포셀로를 데리고 있으면서 프라이스까지? 돔브로스키 이 양반 돌아버린 거 아냐?” 직원 중 누군가가 허탈하게 내뱉었다. 이미 벌랜더와 슈어져라는 사이영 상 수상자를 두 명이나 보유하고 있는 선발진에 또 하나의 사이영 상 수상자인 프라이스까지 탐을 내다니. 디트로이트는 단언컨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팀이었다.
“당장 디트로이트 쪽 유망주 뒤져. 툴 좋은 루키 쪽에서 하나. 기왕이면 내야수로. 그리고 내야 백업으로 당장 쓸 수 있는 선수 하나. 그리고 투수, 벌랜더랑 슈어져는 빼고. 아니발 산체스 올해 연봉이 얼마지?”
프리드먼은 순식간에 지시를 내렸다. 머리가 팽팽 돌아가고 있었다.
*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백발을 쓸어올리며 타는 속을 달래고 있던 데이브 돔브로스키 단장이 곧장 전화를 받았다.
“레이스에서 연락이겠지?”
두 번째 핸드폰도 울렸다. 콧수염을 기른 사내, 다렉 브라우네커가 자신의 전화를 집어 들고는 발신자를 확인했다. 동시에 볼펜의 뚜껑을 열었다.
“전화 받았습니다. 에이전트 다렉 브라우네커입니다.”
다렉은 패트릭을 바라보며 냅킨에 세 글자를 적었다. TBR. 패트릭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프리드먼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눈에 보이는 듯했다.
그리고 패트릭의 전화기도 몸을 떨었다. 케이트가 메시지를 보냈다.
- WTF! 디트로이트래. 그 쪽 내야수 중에 추천해 줄만한 사람 누구 없어?
- 디트로이트? 돔브로스키 단장이 정신이 나갔나 보네. 그 쪽은 괜찮은 내야수가 없는데...
급하게 답장을 보낸 패트릭은 이번엔 다른 메시지 하나를 띄워냈다. 시애틀 매리너스의 담당 기자인 그렉 존스. 시애틀이 원하는 선수는 중견수 커버가 가능한 우타 외야수라는 것이다.
“단장님. 시애틀에 보낼 카드로는 오스틴 잭슨 정도면 될 것 같은데. 어떠십니까? 프리드먼과 딜을 하시면 유망주를 뺏길 가능성이 큰데. 아시다시피 그 사람은 남들은 못 보는 걸 잘 보는 사람이잖아요.”
“오스틴 잭슨...”
“프라이스 패키지에 드류 스마일리, 오스틴 잭슨, 유망주 하나 정도면 엄청난 선방입니다.”
“그래. 그건 자네 말이 맞네. 내 알아보지.”
세 사람이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리에서 파하기 전에 패트릭이 확인하려는 듯 마지막 말을 꺼냈다.
“여러분.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제가 여기 있는 건 꼭 비밀로 좀 해 주십시오.”
“프라이스가 우리 팀에 합류했을 때의 얘기네. 자칫하다가 시애틀과도, 탬파베이와도 관계가 안 좋아질 수 있어. 난 도박을 했고, 프라이스가 합류하지 않는다면 얘기는 달라질 게야.”
“문 닫히기 전에 무조건 될 겁니다.”
“나는 아직도 자네를 완전히 신뢰하지는 않아. 다만 내가 믿는 다렉이 보증했으니 이야기를 듣고 있는 거지.”
“걱정하지 마세요, 단장님. 이 친구 머리 돌아가는 건 웬만한 구단 직원들보다 훨씬 낫습니다.”
다렉이 공손하게 말했다. 돔브로스키는 그저 고개만 까닥였다. 세 사람은 카페 문을 열고 나왔다. 그리고는 동시에 다른 방향으로 흩어졌다. 짙은 선글라스를 낀 돔브로스키는 디트로이트의 프런트 오피스로. 콧수염을 쓰다듬는 다렉 브라우네커는 드류 스마일리의 자료를 탬파베이로 보내기 위해 자기 사무실로. 그리고 패트릭은 근처에 잡아놓은 호텔로. 패트릭은 호텔로 향하며 핸드폰을 꺼내 지혁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 오늘 경기 잘 해요. 행운을 빕니다.
*
7월 31일, 오후 4시 30분. 샬럿에 위치한 BB&T 볼파크.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트리플 A 팀인 샬럿 나이츠와 더램 불스의 더블헤더가 치러지는 중이다. 더블헤더의 첫 경기가 끝난 BB&T 파크는 잠시 휴식 시간에 들어섰다. 첫 경기를 내준 더램의 선수들은 착 가라앉은 분위기로 2경기를 준비하고 있다.
오전에 열린 1경기에 선발로 나섰던 더램의 알렉스 콜로메는 경기를 완전 망쳐버렸다. 최고 구속 100마일까지 기록한 패스트볼이 스트라이크 존 바깥을 들쭉날쭉하게 찔러댄 탓이었다. 잡아낸 아웃카운트는 단 4개. 그 동안 던진 공이 66개였다.
덕분에 또 다른 선발 자원인 마이크 몽고메리가 급하게 등판했다. 하지만 몽고메리의 투구도 좋지 않았다. 2이닝을 처리하는 동안 투구수 52개. 공격적으로 승부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휘둘렸다.
“오늘은 어떻게 할 거야? 싱커.”
“아. 던져야지.”
“뉴 버전으로?”
“응.”
더블헤더 두 번째 경기, 선발로 등판할 지혁의 파트너인 알리 솔리스가 물었다. 지혁은 오늘부터는 싱커를 실전에서 시험할 작정이었다. 완벽하다고 말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 제구가 잡혀가고 있었다.
“공이 날뛰는 건 곤란해.”
알렌이 다가와서 낮게 말했다. 앞선 1경기, 콜로메와 몽고메리가 모두 제구에서 큰 실패를 맛봤다. 지혁조차 투구수가 많아지면 불펜을 운용하기 힘들다.
“최대한 노력해 보겠습니다.”
알렌은 가벼운 한숨을 한 번 쉬며 불펜으로 발을 돌렸다. 싱커를 알렌의 스타일로 발전시킨 게 2주가 채 안 된다. 불완전한 공을 가지고 실전에 나가는 게 마뜩찮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지혁은 조금이라도 빨리 실전에서 던져보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었다. 불펜에서 아무리 던져 봤자, 실전에서만 느낄 수 있는 극한의 감정까지 경험할 수는 없으니까.
‘던지고. 맞아보고. 또 잡아보고. 그렇게 해야 어떤 상태인지 알 수 있어.’
지혁은 땀을 닦으며 잠시 라커룸으로 내려왔다. 라커 안에서 깜빡이는 핸드폰을 발견한 지혁은 패트릭의 문자를 확인했다.
- 웬일로 이런 문자를? 무슨 일 있습니까?
- 오늘부터가 중요합니다. 나는 내 할 일을 다 했어요. 이제 문이 제대로 보여줄 차례입니다.
“뭐라는 거야?”
문자를 보고 어리둥절해 있는 와중에, 라커룸으로 몬토요 감독과 네이트 칸스가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핸드폰을 라커 안에 다시 던져넣은 지혁이 글러브를 집어들었다. 몬토요 감독이 물었다.
“문. 급한 일 있나?”
“아뇨. 잠깐 글러브 손질하러 내려왔습니다.”
“그럼 자리 좀 비워 주게.”
“네. 알겠습니다.”
지혁은 낯익으면서도 또 묘한 기류를 읽어냈다. 라커룸 밖으로 나오면서 문을 닫기 직전에, 몬토요 감독이 심각한 얼굴로 무언가를 말하는 것을 보았다.
‘칸스... 칸스. 오늘은 7월 31일. 설마 이적인가?’
심상찮은 기색이 분명했다. 그 대상이 메이저리그에 데뷔할 준비가 된 네이트 칸스라면 더더욱 그럴 법 했다. 설마 패트릭이 할 일을 다 했다는 게 이거였나?
“문! 거기서 뭐 해? 빨리 올라와!”
솔리스가 프로텍터를 찬 채 더그아웃 계단에 서 있던 지혁을 불렀다.
“싱커 던질 거라며? 불펜에서 딱 열 개만 던져 보자고.”
“아, 오케이.”
지혁은 고개를 도리질치며 잡생각을 떨쳐냈다. 오늘의 투구에 집중한다. 다시 스위치를 킬 시간이었다.